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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옥] 사람아 무엇을 버렸느냐,...법정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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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동의 길상사(吉祥寺)는
법정 스님에 대한 존경으로 탄생한 절이랍니다.
한때 서울의 대표적 요정 중 하나였던
대원각 소유주 고(故) 김영한(1999년 타계)씨는
1996년 법정 스님에게
당시 시가(時價)로 1000억원대를 호가하던
7000여평의 땅과 40여동의 건물을 조건 없이 시주했습니다.
김영한 보살은 1980년대 후반부터
"대원각을 사찰로 만들고 싶다"며
10년 가까이 스님을 설득했고,
1997년 길상사가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절에 자신을 위한 방을 마련하지 않았고,
봄·가을 법회와 동·하안거 결제·해제 때만 길상사를 찾아
대중들과 만난 후 바로 떠나곤 했다네요.
아래 내용은 2008년 1월에 저의 블로그에
'그사람을 사랑한 이유 '라는 제목으로 올렸던 글입니다.
법정 스님에게 길상사를 시주한
고(故) 김영한(1999년 타계)보살과 백석 시인의
애절한 사랑에 관한 것을 정리한 글입니다.
요즘,
길상사란 절이 세간에 오르내리길래
오래전에 쓴 글을 덧붙여 봅니다.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 이 생 진-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백석(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김영한(金英韓)이라고
한데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 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천억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 사람 생각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 그게 무슨 소용있어 '
기자는 또 한번 어리둥절했다
-다시 태어나신다면?
' 어디서? 한국에서?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서 문학 할거야'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했다
사랑을 간직하는데 '시밖에 없다'는 말에
시 쓰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위의 글은 이생진 시인이 쓴 글입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부끄럽게도 2004년 겨울입니다.
2004학년도 수능에서
언어영역 17번 문제를 두고 논란이 일자
수능시험 10년만에
처음으로 복수정답을 인정했었습니다.
해당 문제는 백석의 시 ‘고향’과
그리스신화 ‘미노토르의 미궁’ 지문을
비교하는 문제였던걸로 기억 납니다.
그 당시 국문과를 지망하던 큰아이가 수능생이었기에
언론의 보도를 관심있게 지켜본 기억이 납니다.
그 복수 정답 인정 때문이었는지
아이(지수)는 무난히 원하던 대학에 들어 갔었구요.
백석??
그런 시인이 있었나??
백석 시인을 그때 처음으로 접하고
그의 시를 인터넷을 뒤져서 찾아 읽으며 음미해 봤습니다.
시 보다도
저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사실은
짧고도 길었던
어떤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 였습니다.
어쨌던,
이토록 멋진 시인을....
시 읽기 좋아하고 시를 써 보겠다고
습작도 꽤 많이 해 본 저로서는
40대 중반을 향하는 시기에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사실.
그것은 나는 아직
작은 사람에 불과 했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는 위대하다는 표현으로
충분이 형용될 수 있는 시인이고 남자였습니다.
그의 멋진 작품만큼이나
그의 인생 또한 평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가슴 아픈 치욕의 역사가
그를 괴롭히기도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좋은 작품을 탄생토록
그의 문학영역을 담금질 하게 하여
지금 우리가 더 많은 좋은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그가 사랑하고 간절해 했던 여인들이 있었기에
그 사랑이 시에 남아
현재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군상들에게
그 느낌 하나 하나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배우와 가수 등의
연예인들에게 열광하는 우리시대 젊은이들.
그들은 백석이라는 남자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까...
이전의 나처럼 ....
무수한 시인들 중 한사람이라는
인식이 전부인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그의 시가 세상에,
대한민국에 남아있는 한
언젠가 그들은 백석이라는 시인에게 ,그리고 남자에게
열광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밑의 글들은 인터넷에서 퍼온글도 있음을 알립니다.
"내 탓입니다.
미스터 백은 자식도 낳고 결혼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총각이 기생과 결혼하면
남자 집안이 망하던 세월이라
그래서 나는 당신 첩, 소실이나 될래요-했지요.
거기서 실망한거야.
"사랑을 버려도 괜찮아? 말 다한 사람이군"하면서 떠났어요"
"50년 만에 담배를 끊었는데
니코틴보다 더 그리운 사람이 그 사람이지요"
"종교에서는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살아 있다는데 난 영혼을 안 믿어요.
꿈에 그 사람 늙은 모습은 안 나오고 60년 전 인생이 나와요.
38선이 터지면 기어서라도 가서 산소를 찾을 거예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백석이 그의 연인 자야(子夜)를 위해 지은 시이다.
그녀의 본명은 김영한,
그러나 본명보다는 조선권번의 기생 진향(眞香)으로,
정치 뒷마당이라는 성북동의 요정 대원각을
법정에게 시주하여
길상사(吉祥寺)라는 사찰을 세우게 한 여인으로 유명하며,
그보다는 백석의 연인 자야(子夜)로 더욱 알려지게 된다.
자야는 술과 웃음을 파는 하급 기생이 아닌
황진이와 같이 가무와 시문을 익힌 예인이었다.
문학에 뜻이 있었던 그녀는
『삼천리』지에 수필을 발표하여
문단에 이름을 알리기도 한다.
그즈음, 조선어학회 회원인
해관 신윤국 선생의 후원으로 일본유학을 떠난다.
그녀는 타국에서 주경야독 하던 중
신윤국 선생이 투옥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자야는 곧바로 귀국하여
은사의 옥바라지를 위해 함흥에 오게 되는데,
바로 이곳에서 백석과의 운명적인 사랑을 맺는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늘 긴장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백석의 집에선
기생출신 여인과의 동거를 못 마땅히 여긴 것이다.
부모의 강권으로 백석은 세 번이나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혼례를 치른 신부의 손도 잡지 않은 채 도망쳐서
태연하게 자야의 곁으로 돌아왔다.
자야는 그런 백석이 안쓰러워
마음에도 없는 이별을 고하곤 했다 한다.
어느 날 백석은 경성 청진동에 은거하던 자야를 찾아
시 한 편을 전하게 되는데
그 시가 바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였다.
문학에 소질을 보인 자야가 '삼천리'에 발표했던
'눈 오는 날'을 시화한 백석의 사랑 고백이었다
백석은 이 봉건적 관습으로부터
도피하여 만주로 가자고 하지만
어떤 뜻에선지 자야는 이를 거절한다.
백석(白石)은 만주에 들어
시 백 편을 써오리라 다짐하곤 홀홀 떠난다.
자야는 그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태연하게 다시 나타날 것으로 믿었으나
그는 영영 돌아올 수가 없었다.
38선이 그어지고 전쟁이 터진 것이다.
믿고 싶지 않았던 이별이 분명해져서야
자야는 그의 시를 읽으며 통곡하다 혼절했다 한다.
백석은 재북(在北) 작가가 되었고,
철책 이남의 자야는 망부석이 되었다.
팔순을 바라보는 자야가 오랜 기다림의 얘기를
(내 사랑 백석) 이라는 책으로 출간한 무렵(1995년),
백석(白石)은 북녘 어느 산골에서 운명하였다.
삼 년 남짓의 동거,
그 사랑의 설레임을 가슴에 안은 채,
일평생을 해바라기처럼 살아온 자야였다.
'어느 때 그 사람이 가장 생각나더냐?'는 기자의 질문에
'사랑을 생각하는데 때가 따로 있느냐?'는 말로,
그 설은 물음에 은근한 핀잔을 주었다.
백석 시인의 시 몇편을 감상해 보십시오.
시 밑에다 감히 토를 달았습니다.
바다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는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늘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섦기만 하구려
내게 만약 예쁜 딸이 있었다면
이 시를 읽어 주면서
이런 얘기를 꼭 전해주고 싶습니다.
"이 시를 모르는 남자하고는 사귀지 마라”
뭐... 이렇게 말입니다.
대중가요의 간질간질한 사랑노래의 노랫말보단
훨씬 더 사랑스럽고 간절하지 아니한가요?
내 곁엔 언제나
당신의 존재가...
크고 작은 움직임 모두
그대의 체취가...
이 세상 그 무엇이 아름답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어느 누구 내게 알려주오.
그대의 그 존재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어느 누구 말해주고 싶소.
1980년대 중반 백석이 70대 중반일 무렵 촬영한 가족사진.
백석 옆이 부인 이윤희씨, 뒤는 둘째아들(중축씨)과 막내딸.
나 취했노라
- 노리다께 가스오則武三雄에게
나 취했노라
나 오래된 스코틀랜드의 술에 취했노라
나 슬픔에 취했노라
나 행복해진다는 생각에 또한 불행해진다는 생각에 취했노라
나 이 밤의 허무한 인생에 취했노라
백석의 지기지우 일본인 노리다께 가스오....
‘뛰어난 시인 백석, 무명의 나’ 라고 말하며
자신을 깎아 내리면서까지 백석을 높이 평가하였답니다.
그런 그에게 보내는 시는
백석이 실제로 취한 채로 시를 썼는지 어쨌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것을 본 가스오는 이 시에 취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술에 취한 채 친구에게 시를 보내고 그 시에 취하는 친구.
생각만 해도 멋진 일이 아닌가요?
오직 부족하고 무지한 나 같은 경우는 이렇게 보냈을 텐데 말입니다.
-친구야 짬뽕국물에 소주 한잔 더 하자.
비가 온다 아이가...
적경( 寂境 )
신살구들 잘도 먹드니 눈오는 아침
나어린 아내는 첫아들을 낳았다
인가(人家) 멀은 산중에
까치는 배나무에서 ?는다
컴컴한 부엌에서는 늙은 홀아비의 시아부지가 미역국을 끓인다
그 마을의 외따른 집에서도 산국을 끓인다
언젠가...
내가 아빠가 되던날 어떤 생각이 들었었을까.
이미 까마득히 지난 일이라 머릿속이 하얗지만..
어느 배우의 말처럼
“대~한민국” 이라고 외쳤을까.
그 풍경은 어떠했었을까.
까마득히 기억의 저편에
가물거리는 한줌의 기억은...
병원 로비의 어느 구석에서
수없이 줄 담배를 피워 댔었습니다.
(그땐 금연구역이 없었고,제가 끽연하던 시절...)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