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구 죽다 살았슈!”(대하19:1-7)
- 죽다 살아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2024.9.29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거의 죽다 살아난 경험이 있는가? 아마 대부분 크고 작은 유사한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질문이 꼭 나이의 문제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진짜 죽음 직전까지 가는 경험을 해본 사람도 있고, ‘내 인생 이제는 끝났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힘들었던 경험들도 다 이런 범주에 속한다. 이때 새로 주어진 시간들은 인생의 이모작의 시간들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은퇴 후의 삶, 죽을 것 같은 병에서 고침 받은 것(요즘은 독감만 걸려도 죽다 살아남), 인생의 방향을 깨달은 것, 귀농, 이민, 사고로 한 순간에 장애인이 되는 것, 사업실패 후에 다시 시작하는 것, 각종 시험에 실패한 후 다시 도전하는 것, 결혼과 이혼, 사별 등 수 없이 많다. 그리고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성도가 되는 것들도 다 죽다 살아서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것들이 이다.
학생들이 중간고사를 망쳤어도, 기말고사 때 좋은 성적을 내면 어느 정도 평균성적은 낼 수 있다. 중간고사 못 봤다고 기말고사까지 미리 포기할 필요는 없다. 1회에 홈런을 맞은 투수가 2회부터는 잘 던져서 승리투수가 되기도 한다. 야구는 9회 말까지 가는 동안 어느 횟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생도 그렇다. 인생의 중간고사를 좀 못 봤어도 기말고사는 잘 볼 수 있다. 인생의 총점은 모두 합산해서 계산하기 때문이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옛날에 실패했으니까 앞으로 실패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인생의 이모작을 잘하는 것이고, 기말고사를 잘 준비하는 것인가 라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오늘은 여호사밧왕의 경우를 함께 나누고 기도하고자 한다.
여호사밧왕은 유다에서 다윗의 길로 행했던 몇 안 되는 위대한 왕들 중의 하나이다(대하17:4). 특히 여호사밧왕 때 모압과 암몬 그리고 마온 사람들이 연합해서 치러 왔을 때, 찬양단을 앞세우고 나아가서 승리한 것으로 유명하다(대하20:20-23). 죽으면 죽으리라의 믿음이 아니면, 이렇게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여호사밧에게도 그 이전에 중대한 실수들이 있었다. 그것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사돈관계를 맺은 것이었다(대하18:1). 여호사밧은 우상숭배에 쪄들어 있던 아합왕과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를 며느리로 맞아들이면서, 일종의 정치적인 결혼동맹을 맺었었다. 이것이 여호사밧의 첫 번째 실수였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서 북쪽의 아합왕이 아람과 전쟁을 벌이려 할 때, 아합왕의 참전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 미가야를 통해서 전쟁에 나가지 말라는 말씀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무시하고 아합과 함께 전쟁터에 나갔다(대하18:28). 이것이 그의 두 번째 실수였다. 이 전쟁에서 아합왕은 죽고, 여호사밧왕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거의 죽다가 살아났다(대하18:31-34).
“31 병거의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이르되 이가 이스라엘 왕이라 하고 돌아서서 그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매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그들을 감동시키사 그를 떠나가게 하신지라 32 병거의 지휘관들이 그가 이스라엘 왕이 아님을 보고 추격을 그치고 돌아갔더라”(대하 18:31-32)
그 후 여호사밧이 패배자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때 선견자 예후가 강력하게 여호사밧의 못된 행동들을 강력하게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선언한다(대하19:1-2).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이르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대하 19:2)
그런데 바로 이 순간이 여호사밧 인생의 분깃점 이었다. 여호사밧은 그 전에는 선지가 미가야의 말을 무시하고, 전쟁터에 나갔다가 거의 죽다가 살아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시 믿음의 결단을 했다(대하19:3-9).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에 살더니 다시 나가서 브엘세바에서 부터 에브라임 산지까지 민간에 두루 다니며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고”(대하19:4)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다시(Again)”라는 말이다. 그는 선지자의 말을 듣고, 다시 첫 신앙을 회복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강력하게 성결운동을 펼쳤다. 그래서 그 이전에는 사람의 힘을 이용하려고 아합왕과 결혼동맹까지 맺었지만, 이제는 성가대를 앞세우고 나가서 승리하는 기적까지 경험하게 된다. 여호사밧은 야구경기로 치면, 초반에 이기다가, 중간에 패전의 위기에 몰렸다가, 후반에 다시 믿음의 첫사랑을 회복하면서 재역전에 성공했다. 이것이 죽다 살아난 사람이 살아야할 올바른 이모작의 모습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다. 우리들도 살다보면 내가 실수했던 안했던 상관없이, 죽다 살아나는 경우들을 만난다. 단지 진짜 숨이 끊어지다가 살아난 것만 죽다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문제들이 숨통을 조여 올 수가 있다. 내 인생은 이제 종쳤다는 두려움과 허무함과 서러움이 쓰나미처럼 내 생각 속에 밀려올 때도 있었다. 이 모든 것들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이 다 죽다 살아난 경험들이다. 아마 이런 종류의 경험들을 말해보라고 하면, 밤이 새도록 할 말이 많은 분들이 계실 것이다.
그렇다면 여호사밧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것이 인생의 이모작에 성공하고, 기말고사 준비를 잘하는 것이다. 여호사밧도 그랬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5)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여기서도 “다시는(Again)”이라는 말이 눈에 띤다. 정말 그렇다!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고 나를 살려주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이것이 죽다 살아난 사람이 새롭게 살아야할 제2의 인생의 방향이다.
우리들이 애창하는 찬양 중에 “나는 예배자 입니다”라는 찬양이 있다.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입니다. 내가 서 있는 곳 어디서나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내 영혼 거룩한 은혜를 향하여, 내 마음 완전한 하나님 향하여, 바로 이 시간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이 찬송은 부를 때마다 두 손이 저절로 하나님을 향해 내밀어진다. 이 찬양의 가사에서도 특히 “내가 서 있는 곳 어디서나”, “완전한 하나님 향하여” 그리고 “바로 이 시간”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깊이 다가온다. 여호사밧왕은 전쟁터에서도 그 시간에, 그곳에서 완전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성가대를 앞세웠다. 그랬더니 그곳에서 그 시간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다(대하20:22).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대하 20:2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들도 실수할 수도 있고, 신앙적인 슬럼프에 빠질 때도 있다. 때로 각종 형태의 죽음의 쓰나미들을 만나면서 죽다 살아난 경험을 할 때도 있다. 그런 속에서 죽다가 다시 살아났다면, 이제는 여호사밧처럼 다시(Again) 믿음의 첫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이 없이 살다가 죽을 뻔 했는데(죽다 살았는데), 또 다시 옛날 하나님이 없이(또는 없는 것처럼) 살았던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되지 않은가?
그러므로 인생의 이모작은 다시는 종의 멍애를 메지 말고,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을 위하야 살자 여호사밧처럼 “내가 서있는 곳 어디서나”(집, 교회, 바다, 자동차 안, 갯벌, 직장, 학교, 병실, 고난의 현장 등), “바로 이 시간”(기쁘나 슬프나)에 “완전한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하자.
이렇게 주님만 찬양하며 나간다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기적을 일으켜 주신다고 확신한다. 다 같이 일어서사 두 손을 들고, “나는 예배자입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주님께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