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7월 1일 금요일 [(녹)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아모스 예언자는 빈곤한 이를 짓밟는 자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날이 올 것이라고 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세관에 있던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드시자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못마땅해한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다(복음).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고,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리 마태오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마태오는 가난한 백성들의 세금을 걷어 로마에 상납하며 부를 축적하는 공공연한 죄인이요 파렴치한인데도 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죄인들을 불러 함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나누십니다. 이런 모습을 바리사이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
악마의 또 다른 얼굴, 갑질 유명 버스 회사 회장이란 작자의 만행과 슈퍼 갑질로 서민들의 분노가 가시지 않는 하루였습니다. 회장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뼈 빠지게 일하는 버스 회사 직원들에 대한 상습적인 폭언과 폭력의 강도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분위기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해서는 안 될 큰 악행을 가족과도 같은 직원들에게 저질렀는지 분노로 제 가슴까지 떨릴 지경입니다. 회장의 무자비한 폭언과 폭력에 수많은 직원들이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으며 견디다 못해 회사를 그만둔 예가 다반사랍니다. 그런 회장이 받아가는 연봉 금액을 보고 나면 놀라서 가슴이 헉헉, 억억(億億!) 할 정도랍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결코 하지 말아야 할 갑질입니다. 이제는 사라져야할 저질 문화가 아직도 우리 사이에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 참으로 서글픈 현실입니다.
누군가의 갑질로 인해 무너져 내린 자존감과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더러운 갑질로 인한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는 평생 지속됩니다. 어떻게 한 인간 존재가 단지 돈이 많다는 이유로 윗사람이라는 이유로 하느님의 모상인 또 다른 한 인간 존재에게 그리도 큰 수치와 굴욕감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교회 안에서도 아직까지 슈퍼 갑질이 버젓이 저질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갑질을 유난히 혐오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아시면 화가 나서 크게 분개하실 일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갑질 퇴출 운동에 앞장서야겠습니다. 우리 역시 자신도 모르게 지금 이 순간 갑질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갑질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악마의 또 다른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 세상 어딜 가나 주변 사람들을 힘겹게 하는 존재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가난한 백성들에게 사악한 갑질을 하던 부류가 있었으니 세리들이었습니다. 그날도 세리 마태오는 세상 다 산 듯 한 흐릿한 눈빛으로 세관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그가 하루 종일 하던 일은 자기에게 할당된 일정 지역의 세금을 걷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세금은 얼마나 가지가 많던지 걷는 사람도 정신 못 차릴 정도였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어떻게 해서든 세금을 많이 부과하려고 기를 썼습니다. 제 때에 세금을 못내는 사람들에게는 날짜가 흐를수록 더 많은 금액이 부과되었습니다. 걷은 세금을 상부에 납부하는 과정에서 많은 돈을 빼돌렸습니다. 그 돈으로는 고리대금업까지 겸했습니다. 돈을 빌려주고 제때 못 갚는 사람들에게는 갖은 위협을 가하고 집문서며 땅문서를 강탈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조직폭력배나 하는 일들을 당시 세리들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세리 마태오의 집 안 깊숙이 숨겨둔 금고에는 차곡차곡 돈이 쌓여갔습니다. 그러나 돈이 싸여갈수록 마음은 더욱 허전해져 갔습니다. 힘없고 빽 없는 동족들 등쳐서 로마제국에 상납하고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하니 늘 우울했습니다. 그런 허탈함을 돈으로, 잡기로, 취미생활로 채워보려고 발버둥 쳐봤지만 그럴수록 그의 마음은 텅 비어만 갔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는 민족 반역자의 삶을 그저 하루하루 견뎌가던 어느 날, 그의 눈앞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났습니다. 도저히 구제불능 같았던 세리 마태오의 삶에도 자비하신 하느님의 손길이 펼쳐진 것입니다. 너무나 강렬한 태양빛 앞에 인간의 눈이 잠시 멀 듯이 너무나도 강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냉혈한 세리 마태오의 심장을 녹여버린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슈퍼 갑질에 맛을 들인 사람들,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이 얼마나 이 사회와 공동선에 해를 끼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는 분들, 그분들에게도 뜻밖의 손님처럼 예수님의 자비의 빛이 스며들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지금 저지르고 있는 악행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를 자각하기 바랍니다. 목소리 높여 외치는데 하루 빨리 회개하기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정체성 찾기
제가 이번 여름에 한국에 들어온 첫 번째 이유는 귀의 이명을 치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고백하는 것이지만 귀가 조금 들리지 않고 또 이명이 들리는 것은 외적인 핑계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구체적인 이유가 없었다면 공부 중간에 들어와 쉬게 해 달라는 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명이 계속 들리기 때문에 3개월을 낭비한 것 같지만 사실은 지금 매우 만족하여 참 잘 들어왔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들어오고 싶었던 가장 첫 번째 이유는 사제로서의 저의 정체성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신학생 때는 몰랐던 것이었는데 사제가 되고 다시 공부하러 나가니 한국에서 2년 동안 했던 사제로서의 삶이 너무 그리웠습니다.
저는 이런 감정이 사제로서 대접받고 인기 있었던 것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닌지 적지 않게 걱정하며 묵상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음을 느낍니다. 저는 다시금 사제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겼고 그렇게 힘을 얻었고 이제 돌아가 열심히 공부할 힘이 생긴 것 같습니다.
사제가 되어 2년 동안 행복했던 시절들을 돌아보면 사실은 매우 피곤했었습니다. 심지어 첫 본당에서 하루에 미사 다섯 대를 하다가 마지막엔 너무 기계적이 되어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라고 읽고 무심코 성작을 들어 올렸던 기억도 있습니다. 수면 시간도 부족하여 성당에 성체조배하려고 앉기만 하면 잠이 들기 일쑤였고 나중에는 병원에 링거를 맞으며 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습니다. 그렇게 너무 힘들어서 그 성당을 떠나기 한 달 전부터는 표정관리가 안 되어 항상 웃고 다녀 신자들을 섭섭하게 하였습니다. 결국 제가 떠나는 날 아무도 울지 않으셨습니다. 한 분이 우셨는데 딸이 이혼한다고 해서 우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힘든 2년을 보냈지만 유학을 나가서 이때가 그리워 6개월간은 책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고생했던 시절이 그립고 또 그것을 다시 느끼고 싶었을까요? 아마 제가 사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학 나가서,미사도 신자들과 하지 못하고 고해성사도 주지 못하고 강론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가 자주 던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사제라는 것을 느끼고 싶어서 들어온 것이고 지금도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말처럼 아무 하는 일 없지만 사람을 만나느라고 잠 잘 시간도 부족합니다. 그냥 만나는 것만이 아니라 고해성사도 주고 미사도 해 주고 강론과 강의, 상담을 해 줄 때도 있습니다.
3개월간 매일같이 바쁘게 살아서 주위 분들은 오히려 병을 고치러 화서 병을 얻어가겠다며 걱정하시지만 저 나름대로는 사제라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이번 휴가를 한국에서 보내게 된 것에 대해 크게 만족합니다.
사제라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역시 ‘신자들’을 만나야합니다. 사제는 신자들을 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병자들을 위한 사람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의사라 하더라도 환자들을 만나지 않고 골방에 혼자 있기만을 원한다거나 건강한 사람들만 만난다면 의사로서의 정체성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학생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큰 죄인이었던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들의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들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나무랍니다. 그러나 의사는 병든 이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근거를 들어 당신이 구원자로서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함을 설명해 주십니다. 사실 죄인들이 없다면 구원자가 무슨 의미를 지니겠습니까? 성자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과 함께 있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인간의 육체를 취하셨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사람의 정체성은 혼자가 아니라 관계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람이라는 정체성은 자신을 창조하신 하느님 앞에서가 아니면 찾을 수 없고, 남자라는 정체성을 여자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으며, 자녀가 없는 부모를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신자가 없는 사제도, 병자가 없는 의사도 없으며 죄인이 없는 구원자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대로라면 신앙인은 누구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까요? 바로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 신앙인임을 느끼고 싶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 속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선교는 선택이 아니라 신앙인의 본질적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저는 며칠 뒤에 신앙이 없는 대학 친구들과 함께 짧은 여행을 할 것입니다. 저도 한 사제를 떠나서 한 명의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사제로서의 제가 필요한 곳은 신자들 가운데이고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있어야 할 곳은 믿지 않는 사람들 속입니다.
혹시 우리들은 우리들과 같은 부류 안에만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습니까? 왕따 당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우리가 가장 먼저 다가가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의사가 병자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처럼, 돈이 가난하고 꼭 필요한 사람에게 가야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나’로서의 정체성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
7월1일(금) 음5/27 聖 아론, 聖女 에스테르 |
촛대에 기름을 붓는 아론 |
성 아론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결정적으로 하느님을 체험했던
출애급 사건과 이어지는 광야 여정 중 모세와 함께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레위 지파의 첫 번째 사제이다.
성서에서는 아론을 모세의 형제이며 공동 지도자이자,
이스라엘의 합법적인 사제 계급의 시조라고 하였다.
성 아론은 레위 지파의 후손으로 아므람과 요게벳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모세가 그의 동생이고(출애 6,20), 미리암은 그들의 누이였다(민수 26,59).
암미나답의 딸이며 나흐손의 누이인 엘리세바와 결혼한 뒤
나답, 아비후, 엘르아잘, 이다말을 자녀로 둔(출애 6,23)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구하려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모세와 함께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그의 나이 83세 때였다(출애 7,7).
그러나 그전에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언급은 성서 어디에도 없다.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위해 벌인 파라오와의 담판에서
그는 모세의 대변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 출애급 이후 광야 여정에서도 모세와 함께 공동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으며,
갈증과 배고픔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탄원을 듣고(출애 16,2)
그들에게 메추라기와 만나를 통해
하느님께서 보여 주실 자비의 구원을 선포하였다(출애 16,6).
시나이 산에 이르러 그는 야훼가 명한 대로(출애 29,4-9)
성대한 임직식을 통해 사제로 축성되는데(레위 8장),
그의 사제직은 여러 징표들을 통해 확인된다(민수 16장; 17,16-28).
또 바란 광야에서는 모세와 더불어 가나안 땅을 정찰하고 돌아온
정찰대를 맞았으며(민수 13,25-29),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징벌을 선포하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실행하기도 하였다(민수 14,26-38).
이처럼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을 대부분 함께하였던 아론은
에돔 땅 경계 부근의 호르 산에서 모세와 자신의 아들 엘르아잘이 지켜보는 가운데
므리바에서의 물 사건(민수 20,12) 때 하느님이 선언하였던 것처럼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선조들 곁으로 갔다(민수 20,22-29).
아론의 죽음에 관해서는 민수기 33장에서 보충되는데,
그가 죽은 날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 지 40년 되던 해 다섯째 달 초하룻날이었고,
그의 나이는 123세였다(민수 33,38-39).
이스라엘의 온 집안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30일 동안 울었다고 한다(민수 21,29).
* 자료집에서 발췌
모세의 형으로서 함께 이스라엘 민족을 에집트에서 구해낸 레위지파의 첫 사제 성 아론 님이시여
남북 분단과 양극화의 혼란으로 어려움을 겪는 저희 나라에 천상 기도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
성녀 에스테르(Esther) 왕비 |
구약성경 에스테르기에 등장하는 에스테르는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잡아 온 유다인 중 하나이다.
그녀는 벤야민 지파 출신 아비하일의 딸로
부모가 죽은 뒤 수사 성읍의 왕궁에서 봉직하는 삼촌 모르도카이의 양녀가 되었다.
에스테르는 모습이 아름답고 용모가 어여쁜 처녀였다.
당시는 인도에서 에티오피아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다스리던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의 통치 시대였다.
크세르크세스 임금이 신하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벌이는데 취흥이 돋자
와스티 왕비를 불렀다.
백성과 고관들에게 왕비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왕비는 임금의 분부를 거절하고 나오지 않았고,
이에 격분한 임금은 왕비를 폐위시켰다.
새로운 왕비를 찾던 임금은 에스테르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를 자신의 왕비로 삼았다.
에스테르는 삼촌의 명대로 자신의 출신에 대해서는 함구하였다.
당시 궁궐 대문에서 근무하고 있던 모르도카이는
우연히 임금의 내시 둘이 불만을 품고 임금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듣고
에스테르 왕비를 통해 임금에게 고하여 음모를 막았다.
그런데 하만이 재상이 되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모르도카이가 하만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지 않자
그의 출신이 밝혀지고 하만은 왕국 전역에 있는 유다인들을 모두 몰살하기 위해
임금에게 거금을 약속하며 허락을 받아냈다.
그래서 지정된 날에 유다인들을 모두 절멸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라는 임금의 서신이 제국 내에 발송되었다.
곳곳에서 유다인들이 단식하고, 울고 탄식하며 크게 통곡하고 있을 때
에스테르는 모르도카이의 말을 전해 듣고 목숨을 걸고 임금 앞에 나아가
이 불행을 되돌리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하만은 더욱 기세등등해서 모르도카이를 매달 말뚝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모르도카이는 역적모의를 신고하고도 아무런 포상을 받지 못한 이야기를 들은
임금으로부터 최고의 영예를 받고,
하만은 오히려 자기가 마련해 놓은 말뚝에 매달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한 번 작성한 임금의 칙령은 취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에스테르는 임금에게 청하여 반대 칙령을 내리게 하였다.
즉 유다인의 학살일로 정해진 그 날에 유다인들 스스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봉기해
그들에게 대적하는 무리들을 제압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도록 윤허를 받았다.
그리고 모르도카이와 에스테르의 결정에 따라 하만이 유다인들을 절멸시키기 위해
주사위, 아카디아어로 ‘푸르’를 던져 정한 이날을 해마다 ‘푸림절’로 경축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푸림절은 원수들로부터 평안을 되찾은 날이고,
근심이 기쁨으로, 애도가 경축으로 바뀐 날이 되었다.
유다인들은 이날을 기쁨의 날로 지내면서
서로 음식을 나누고 가난한 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축제로 지내게 되었다.
그 후 모르도카이는 왕국의 제2인자가 되어
동족인 유다인들의 평화를 지키고 그들로부터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에스테르는 ‘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 자료집에서 발췌
민족을 죽음에서 구출한
유다인의 샛별 성녀 에스테르 님이시여 님을 기억하는 오늘 모든 여성 지도자들에게 천상 기도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