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진은 어깨 수술 후 자신의 야구관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말한다. 가장 큰 변화가 데이터 분석을 통한 상대팀 타자 연구. 등판 전날에는 허니컷 코치 앞에서 자신이 분석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도 갖는다고.(사진=다저스 포토블로그)>
LA 다저스 입단 후 시작된 7년 동안의 메이저리그 생활은 다양한 변화를 안겨줬습니다. 그중 어깨 수술은 제 야구 인생의 터닝 포인트로 작용했습니다. 이듬해 팔꿈치 수술을 받기도 했지만 메이저리그에서의 어깨 수술은 저한테도 모험이었고 도전이었습니다. 정형외과 전문의들조차 수술 후 이전의 기량을 보일 확률이 7% 밖에 안 된다고 입을 모았는데 선수인 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재활 프로그램을 충실히 소화하고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이전처럼 공을 던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간간히 휘몰아치는 ‘의심병’은 온전한 몸 상태로 돌아가려는 제 의지를 가로막는 걸림돌이었습니다.
불안감을 떨치고 재기에 대한 의지를 다지며 다시 마운드에 섰을 때 저는 변화를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술 전까지만 해도 저는 전력분석팀의 자료보다 제가 갖고 있는 ‘감’에 의존했습니다. 허니컷 코치님이 전달해주시는 내용도 참고만 할 뿐이었죠. 그러나 두 차례의 수술을 받고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다 보니 그 이상의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때부터 전력분석팀의 자료들을 파고들었습니다.
제가 데이터 자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허니컷 코치님도 그에 맞는 처방전을 내주셨습니다. 등판을 앞둔 전날 미팅할 때 상대 타자들에 대해 공부한 걸 발표해보라고 권유하셨으니까요. 저는 그 발표를 하기 위해 미리 상대 타자들 관련 영상과 자료들을 찾아가면서 연구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전력분석팀에서 만들어준 자료를 참고하는 데서 벗어나 제가 그 자료를 토대로 상대 타자들의 영상을 구단에 요청하고, 구단에서 찾아준 영상과 분석팀의 자료를 비교하며 나름의 플랜을 만드는 겁니다. 그렇게 작성한 내용을 토대로 경기 전날 허니컷 코치님 앞에서 발표를 하는 것이고요.
그 과정은 제게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타인이 만들어준 자료들을 머릿속에 담는 것과 자신이 직접 영상을 확인하고 데이터를 통해 상대 타자의 자료를 만들어서 경기에 풀어내는 것은 질적인 차이를 느끼게 해줬습니다. 무엇보다 코치님 앞에서 발표하는 시간이 정말 재미있습니다.
경기 전날에는 상대팀의 모든 타자들을 분석하고, 등판 당일에는 라인업에 오른 선수들을 대상으로 간략한 브리핑 시간을 갖습니다. 경기 전날의 분석이 또 중요한 이유는 대타 선수가 나왔을 때 당황하지 않게 됩니다. 당일 라인업에 오른 선수는 아니었지만 전날 전체 선수들을 분석했을 때 제 머릿속에 기억돼 있는 선수이기 때문이죠. 대타 선수가 나올 때마다 허니컷 코치님이 마운드를 방문하시는데 그때 꼭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현진, 어제 네가 설명했던 선수야. 알지?”라고.
등판 때는 허니컷 코치님, 포수와 세운 게임 플랜을 모두 암기하다시피해서 마운드에 오릅니다. 마치 5일에 한 번씩 중요한 시험을 치르기 위해 시험장에 들어서는 것처럼 말이죠. 가끔은 ‘내가 이렇게 암기를 잘했나?’ 싶을 때도 있습니다. 이닝 마치고 내려오면 항상 수첩을 꺼내 다음 이닝에 나올 타자들의 특징을 체크합니다. 그런 부분들이 투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코치님들과의 만남이 있었지만 상대팀 분석만큼은 허니컷 코치님이 1등입니다. 전력분석팀의 자료에다 코치님만의 데이터를 보태 투수에게 정확한 상대 타자 공략법을 알려주시는 부분은 존경스러울 정도입니다. 이전 잭 그레인키가 다저스에 있었을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릭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라고요.
어제(5월 31일) 뉴욕 메츠와의 홈경기에서 1회 선두타자인 아메드 로사리오를 상대로 초구 커브를, 2회 선두타자인 피트 알론소에게 초구 커브를 던진 것 등은 초구 패스트볼을 잘 치는 메츠 타자들의 특징을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허니컷 코치님의 조언도 한몫했던 것이고요.
올시즌 또 다른 변화가 있다면 우리 감독님이 제게 많은 신뢰를 보이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전에는 조금이라도 불안한 모습을 보이면 투수의 의지와 상관없이 교체를 단행하셨는데 최근에는 제 의사를 전적으로 믿어주십니다. 선발 투수는 기본적으로 투구수가 100개에서 110개 정도는 돼야 합니다. 그런 제 생각을 감독님이 존중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난 22일(한국시간), 신시내티 원정을 마치고 탬파베이로 이동한 다음날의 일입니다. 휴식일을 맞아 러셀 마틴이 일부 선수들을 탬파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오프시즌에 마틴과 가족들이 지내는 집이라고 하는데 저도 아내와 함께 마틴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정말 근사하더라고요. 해변에 위치한 전망 좋은 집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고 집과 연결돼 있는 바다에서 제트스키를 타는 등 선수들과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 사적인 시간들을 보내며 마틴과 더 가까워질 수 있었고 경기에서도 좋은 호흡을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5월은 저한테도 눈부신 한 달이었습니다. 신기할 정도로 좋은 흐름을 이어가고 있는데 이런 분위기가 시즌 마칠 때까지 계속 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등판 때마다 수첩을 꺼내 다음 이닝을 준비하는 류현진. 많은 시간을 들여 자료 분석하는 시간을 갖는 부분이 마운드에 설 때 더 큰 자신감을 갖게 한다고 말한다. 다저스 전력 분석팀의 자료, 최고의 투수 코치가 건네는 데이터, 그리고 선수가 직접 연구하고 분석한 내용이 더해져 지금의 류현진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사진=다저스 포토 블로그)>
*이 일기는 류현진 선수의 구술을 정리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