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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이라는 것은, “어떠한 용기가 그 무엇으로 가득찬 현상”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그것이 조금이라도 과하면, 그 용기에서 흘러넘칠 수 있습니다. 이를 테면, 물 컵에 물이 가득찬 현상으로 여기에, 물을 조금이라도 더 부으면 흘러넘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이라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찼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면서, 자기에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인격의 통치하심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궤변입니다. 예전에 어떤 교주가 예배당으로 들어올 때, 예배당 방송실에서, “여러분 지금, 성령님이 우리 예배당 안으로 들어오고 계십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교주 안에 성령께서 계시기에, 교주가 예배당 안으로 들어온 것이 곧, 성령께서 예배당 안으로 들어오신 것과 같다는 겁니다. 모 교단의 주일 오전 예배 시간에 담임 목사님이 예배당으로 들어올 때 행해진 상황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궤변에 많이 설득당합니다. 본문 10절을 보시면,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고, 성도의 신앙과 생활이 예수님 안에서 근본을 찾는 말씀으로, 이것은, 성도로서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을 밝히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활을 찾게 합니다. 또,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고 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위엄 그리고, 지배력과 권위가 모든 것을 통치하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주의 주인”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체성을 찾는 겁니다. 성도로서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가르침을 전파하고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겁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행복과 충만함은,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고, 성도의 공동체에 속함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의 초점을, 예수님의 정체와 사역이라는 교리 차원보다 성도의 삶에 두고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성숙의 과정입니다. 성도의 성숙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겁니다. 그러기에, 성도로서 살아가는 삶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성도로서의 삶을 사시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세상의 헛된 속임수를 경계해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철학”과 “헛된 속임수”는 같은 의미입니다. 곧, “헛된 속임수에 불과한 철학을 경계하라”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철학이 모두 헛된 속임수라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 사도 바울이 모든 철학은 다 헛된 속임수라고 말하는 걸까요?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의 철학은, 인간의 지적 활동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왜곡하는 성향을 가진 어떤 사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골로새에 들어온 “영지주의와 헬라 철학, 그리고, 범신론등”과 함께, 바울 서신 전체에서 언급되어지는, “율법주의, 천사 숭배, 금욕주의적 성향”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경계한 철학은, 과정이야 어떻든, 종교적인 열심을 표현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그 방법에 따라 더 신실하고 거룩한 인생을 사는 인간상을 제시한 논리를 말합니다. 이러한 논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무시하고, 더 경건한 방법을 제시하여 성도들을 미혹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신앙적 논리가 시청각적인 효과와 함께 사람들에게 접근할 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의 공로를 부정하는 것이면, 그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헛된 속임수”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는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의 성도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권면을 우리와 무관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성행하는 이단의 교리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들의 의지를 포함시킨 헛된 속임수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유혹당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일 4: 1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고 했습니다. 이어 본문 후반부에서 사도 바울은, 헛된 속임수와 관련하여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이는 헛된 속임수인 철학의 정체와 그 철학을 경계해야 할 이유를 말합니다. 바울은 곧 “세상의 초등 학문을 쫓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초등학문”은, “초보적 원리”를 말합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 항상 굳게 서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진리를 공격하는 세상의 논리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며, 사회적인 동의를 얻는다 해도, 그것은 결국 초등 학문을 쫓는 것이기에, 거기에 미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초등이냐 고등이냐의 기준은,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세상에서 아무리 고상해 보여도 초등한 것이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면 아무리 유치해 보여도 고상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진리이며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믿음과 가치관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설득력 있는 철학과 가치관이라도, 그것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와 별개의 것이라면, 헛된 속임수입니다. 산 꼭대기에서 방주를 제작했던 노아를 보면, 노아와 그의 가족들 외에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한 노아를 향해 미쳤다며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과연, 노아가 틀렸습니까? 우리는 그 결과를 알기에 부인하지 않지만, 당시의 노아라면, 우리도 노아와 같이,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 욕심으로, 자만심으로, 따를 수 있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마 8장에서, 예수님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라고 말한 서기관과 같습니다. 그를 향해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면서, 거절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욕심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에게도 사도 바울이 빌 3: 8에서 고백한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는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헛된 속임수를 경계하심으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한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2 - 13절을 보시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2절에서, 성도들은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도된 우리가 세례를 통해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 안에서 부활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구원은, “믿음의 산물”입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나사렛 예수를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구원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믿음이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첫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 있는 죄인들을 위한 죽음이며,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은, 성도들이 받게 될 부활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부활의 약속을 주는 겁니다. 이러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고,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그 대상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에게는 죄의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가진 믿음은, 자연적인 산물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통하여 성도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때문에 너무 감격스럽고, 자랑스럽고, 감사한 것입니다. 이어, 본문 13절을 보시면,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성도들의 상태를 “죽었던”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우리는 전혀 무감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 있는 비 기독교인들을 보시면,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도 그것에 감사하지도 않고, 그것이 어째, 하나님의 은혜냐고 반문할 겁니다. 이러한 우리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례를 통해, 영적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게 된 겁니다. 여러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의 은혜를 받았고, 믿음의 은혜를 받은 우리에게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앞에서 인용했지만, 사도 바울은 빌 3: 7 - 8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의”만을 자랑하였던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모르는 자연인들은, 세상에 있는 동안,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자유롭다며, 그것이 최고의 가치를 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일부 성도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무지한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거절하는 것으로, 결국, 영벌의 고통을 부르는 외침일 뿐입니다. 영원한 저주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 행복한 것입니까? 우리가 받고 누리는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일하심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우리 주변의 비 기독교인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조차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시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4 - 15절을 보시면,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권능임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 14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은, 우리의 죄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심으로 율법의 정죄를 무효화시켰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는 율법 전체를 완전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알게 해 주지만, 죄에서의 구원을 주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의 죄를 드러냄으로, 우리가 죄인임 지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주의자들은 구원을 위해 율법 준수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준수할 때만이, 완전히 의로워질 수 있고 완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로 인하여 전적으로 타락했기에,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율법 준수의 절대성을 그토록 주장하던 바리새인들 역시, 정작율법을 준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양 위선을 부리며,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게 했습니다. 여러분, 율법은 단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율법의 행위로는 의로워질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 그리스도에게로 달려가게 하는 몽학 선생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 얻도록 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즉,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누구든지 십자가로 나아오는 자는 죄를 용서하고 새롭게 거듭남을 입어 영생을 얻도록 하신 겁니다. 이것이, 영적부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8: 1 - 2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마련된 새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어령 교수는, 그의 저서 “신 한국인”에서, 바람을 감지하는 벌레에 대해 언급합니다. 벌레들은 바람의 언어를 읽는 더듬이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벌레는 땅 속에 있어야 하는 시간과 알을 깨고 나오는 시간을 알며, 노래할 때와 일할 때의 경계를 바람을 통해 분간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바람을 감지하는 벌레의 더듬이의 민감함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사상적인 흐름에 민감함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주변에 우리를 유혹하는 거짓 속임수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서 시급한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다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분별력입니다. 목회자들을 비롯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대치되거나 상이한 것을 분별할 줄 아는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 시대는 신앙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매우 혼탁한 시대입니다. 몇 일전 부천의 호텔에서 불났을 때, 어떤 이는 사람들이 창문 밖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며, 박수치며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또, 설빙 카페에서 설빙을 주문했는데, 자신의 실수로 테이크 아웃으로 주문해놓고, 매장에서 먹을 것인데, 테이크 아웃으로 나왔다며, 직원을 향해 그것을 던지고는 매장 밖으로 나갔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신앙적으로나, 인성적으로나 매우 혼탁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세상에 대한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진리의 핵심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권능임을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