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3부 일통 천하 (203)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22장 여불위(呂不韋)의 몰락 (5)
당나귀의 음경이 노애의 음경으로 둔갑해 함양성 거리에 내걸린 그 시각, 노애(嫪毐)는 왕궁에 들어가 내시 교육을 받고 있었다.
며칠 후 그는 근무처를 배정받았다.
- 노애, 감천궁(甘泉宮)으로 가 태후를 모셔라.
감천궁은 조태후의 처소다.
그 날 밤이었다.
조태후(趙太后)는 노애를 자신의 침실로 불러들여 그의 힘과 기교를 시험해보았다.
노애(嫪毐)는 자신의 운명과 관계되는 일이라 평생 터특한 재주를 다 부렸다.
조태후(趙太后)는 수차례나 까무러쳤다.
그녀는 대만족이었다.
'세상에는 인물도 많구나. 여불위(呂不韋)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그보다 몇배나 뛰어난 사람이 있었을 줄이야.'
이때부터 조태후(趙太后)는 여불위를 일절 찾지 않았다.
여불위로서는 호랑이 굴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조태후(趙太后)는 새삼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새로운 생을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날마다 노애(嫪毐)를 불러들여 쾌락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는 사이,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졌다.
조태후(趙太后)가 태기를 느낀 것이었다.
설마 하는 사이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조태후(趙太后)는 당황했다.
아무리 왕의 어머니라고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낳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겁을 먹은 조태후는 꾀병을 앓기 시작했다.
아들 진왕 정(政)이 문병을 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청했다.
"내가 점을 쳐보니 거처를 옮겨야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더이다. 효성이 깊은 왕은 이 어미를 위해 옹성(雍城)에다 내 거처를 마련해주시오."
진왕 정(政)은 조태후의 청을 승낙했다.
며칠 후 조태후(趙太后)는 함양성을 떠나 옹성으로 향했다.
그녀를 따라간 수행원 중에 노애(嫪毐)가 끼어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없다.
옹성(雍城)은 함양으로 천도하기 전의 지난날의 진(秦)나라 도성이다.
왕궁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이 궁을 짓지 않아도 되었다.
옹성으로 들어간 조태후는 지난날의 궁을 대정궁(大鄭宮)이라 이름짓고 노애와 함께 아무 거리낌 없이 부부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조태후(趙太后)도, 노애(嫪毐)도 신나는 세상이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2년여 간을 생활했다.
아들 둘을 낳기도 했다.
조태후(趙太后)는 그 두 아들을 밀실에 감춰주고 궁녀들로 하여금 기르게 했다.
노애에게는 이렇게 속삭였다.
"지금의 왕이 죽거든 저 아이 중 하나를 왕위에 올리자."
그러나 노애(嫪毐)는 아들의 일보다는 자신의 일이 더 절실했다.
"다른 내관 놈들이 나를 무척 홀대합니다. 저에게도 벼슬을 내려주십시오."
그 날로 조태후(趙太后)는 함양으로 사람을 보내 진왕 정(政)에게 청했다.
- 노애(嫪毐)가 나를 잘 모시고 있으니 그에게 관직과 토지를 하사하면 어미로서 바랄 나위가 없겠소.
진왕 정(政)은 어머니 조태후를 지극히 섬기는 편이었다.
여불위와 의논하여 노애에게 관직과 식읍을 내려주었다.
- 노애를 장신후(長信侯)에 봉하고 산양(山陽) 땅을 내리노라.
하루아침에 노애(嫪毐)는 내시에서 고관대작의 신분이 되어 왕이 부럽지 않은 생활을 영위했다.
이때의 상황을 <사기(史記)>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매사 노애(嫪毐)에 의해 결정되었고, 가신은 수천 명에 달했으며, 벼슬을 얻기 위해 노애의 빈객(賓客)이 된 자가 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쯤이면 여불위의 권세를 능가하는 정도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음란한 남녀가 언제까지 이런 복을 누릴 것인가.
마침내 그들에게도 불행이 찾아왔다.
BC 238년(진왕 정 9년)이었다.
초나라에서 춘신군 황헐(黃歇)이 이원에 의해 피살된 바로 그 해다.
이때 진왕 정(政)의 나이는 22세였지만 아직 관례(冠禮)를 올리지 않고 있었다.
관례는 일종의 성년식으로 20세에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왕의 경우는 15세에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늦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마도 2년 전에 진왕 정의 아버지인 진장양왕(秦莊襄王)의 생모 하태후(夏太后)가 죽었기 때문에 그 상을 치르느라 미루어진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 해 4월에 진왕 정(政)은 관례식을 올렷다.
선조의 사당이 있는 옹성(雍城)으로 나가 예식을 거행했다.
관례식을 마치고 비로소 허리에 칼을 찼다.
허리에 칼을 찬 것은 왕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잔치가 옹성 왕궁에서 베풀어졌다.
잔치는 닷새동안 계속되었다.
모두들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고, 놀이를 즐겼다.
조태후의 정부이자 장신후에 오른 노애(嫪毐)도 그 잔치 분위기에 젖었다.
그는 도박을 좋아했으므로 조용한 방을 차지하고 앉아 돈 따먹기에 여념이 없었다.
잔치가 시작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그 날도 노애(嫪毐)는 중대부 안설(顔洩) 등과 함께 육박(六博) 놀음에 빠져 있었다.
육박은 일종의 주사위 놀이.
그런데 운이 좋지 않았음인지 연달아 노애(嫪毐)는 돈을 잃었다.
노애는 홧김에 술을 마구 마셔댔고, 안설(顔洩)은 안설대로 이겼다 하여 연신 술잔을 기울였다.
서로 취한 중에 노애(嫪毐)가 또 돈을 잃었다.
그는 약이 올라 판을 뒤집으며 말했다.
"이번 판은 무효다. 다시 하자."
안설(顔洩)이 그에 수긍할 리 없었다.
"그런 법은 없소."
그러자 별안간 노애(嫪毐)가 안설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이놈, 네가 감히 나의 명을 거역하려는 것이냐?"
동시에 손을 들어 중대부 안설(顔洩)의 뺨을 세차게 후려갈겼다.
안설도 화가 나서 노애의 관 끈을 낚아채 끊어버렸다.
노애(嫪毐)가 두눈을 부라렸다.
"이놈이 정말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모양이로구나. 내가 누군 줄 알고 함부로 손찌검을 하는 것이냐! 내가 진왕의 아버지뻘 되는 사람이거늘 감히 나의 몸에 손을 대? 너는 이제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다!"
노애(嫪毐)는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흉악한 표정이 되었다.
비로소 정신을 차린 중대부 안설(顔洩)은 더럭 겁이 났다.
몸을 돌려 재빨리 방 밖으로 달아났다.
정신없이 뜰을 달리는 중에 안설(顔洩)은 마침 조태후의 처소를 다녀오는 진왕 정(政)의 행차와 마주쳤다.
안설은 대뜸 땅바닥에 엎드려 울면서 청했다.
"신을 살려주십시오. 장신후 노애(嫪毐)가 저를 죽이려 합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진왕 정(政)이 물었다.
"노애(嫪毐)가 무엇 때문에 너를 죽이려 한다는 것이냐? 자세히 고하라."
"........................."
안설(顔洩)이 쭈뼛쭈뼛거리자 진왕 정이 눈치채고 명했다.
"이 자를 기년궁으로 끌고 가라."
기년궁(蘄年宮)은 옹성 왕궁 중 하나로 풍년을 기원한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
이때의 진왕 정(政)의 거처이기도 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