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 10,1-10; 마르 3,31-35
+ 찬미 예수님
오늘 눈이 많이 왔는데요, 길도 미끄럽고 날도 추운데 미사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1225년 경 이탈리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부모님은 성인이 어릴 때 몬테카시노의 베네딕도 수도회에 봉헌하셨고 여기서 고위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나폴리 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성인은, 새로 생긴 탁발 수도회인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기를 희망했습니다.
이 때문에 성인은 가족들에 의해 아퀴노의 성에 약 1년간 감금되기도 하였습니다. 성인은 이 기간 중에도 공부를 하셨다고 전해지는데요, 아마 오늘의 복음 말씀 즉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는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결국 토마스 성인은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여 위대한 학자로 성장하게 되는데요, 1274년, 오십이 채 안 된 나이에 선종하신 후, 49년 뒤인 1323년에 시성되셨고, 1567년에 교회 학자로 선포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성인을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라고 부릅니다.
토마스 성인의 위대한 점은, 신앙과 이성이 대립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대에 둘의 조화를 이루어내셨다는 점입니다. 토마스 성인은 신앙과 이성 둘 다 하느님의 선물임을 믿으셨고 그리스도교 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성인의 이러한 노력을 본받는다면,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과학 등 다른 학문과의 조화를 이루려 노력해야겠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시도를 하고 계신 훌륭한 신학자들도 많이 계십니다.
성인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하느님에 대한 최고의 지식이란,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사유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은 초월해 계시다’는 것을 아는, 그것뿐이다.”
성인은 아마도 돌아가시기 전에 하느님을 직접 체험하신 것 같습니다. 돌아가시기 1년 전인 1273년 12월 6일 미사를 봉헌하신 뒤 저술 작업을 중단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가 본 것에 비교해 볼 때, 내가 쓴 것이란 모두 한낱 조악한 위조품처럼 보일 뿐이다.”
오늘 제1독서에는 이와 비슷한 말씀이 나오는데요, ‘율법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따른, 황소와 염소의 피도 죄를 씻어주지 못한다고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제1독서는 전합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을 취하셔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몸은 고통을 겪을 수 있고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통과 죽음으로 새로운 제사를 봉헌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을 봉헌하심으로써, 주님 봉헌 안에서 인간에게 깊은 상처를 준 자만심과 반항, 불신앙은 치유됩니다. 예수님께서 바치신 희생 제사는 ‘몸 바치심’이 상징하는, 하느님 뜻을 따르는 ‘순명’이라는 제사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시편 40장의 말씀을 두 차례나 인용합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이 말씀은,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의 예고에 대해 하셨던 대답과 비슷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오신 성모님과 사촌 형제들을 환대하시기는커녕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라고 말씀하신 후,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은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금세 알아차리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맺어지는 새로운 관계는,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결속인 가족의 유대도 뛰어넘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처럼 ‘하느님의 뜻’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밤에 눈이 많이 왔는데, 오늘 아침 일찍 몇몇 형제자매님이 오셔서 눈을 함께 치워주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받으실 보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제가 성함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함께 눈을 쓸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 뜻을 따른다는 것을 너무 거창한 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 성당에 오는 형제자매들이 미끄러질까봐 걱정돼서 눈을 치우는 마음, 다른 사람을 염려해주는 마음, 이것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닐까?’
위험이 될 수 있는 것은 치워주고, 도와주려는 마음, 옳은 일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려는 마음 말입니다.
미카서 6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카 6,8)
물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희생을 감수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반대와 박해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 희생을 감수하는 마음이 우리를 예수님의 형제자매로 더욱 묶어주는 지도 모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2025년 1월 28일 아침, 눈 내리는 노은동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