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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 탄생의 기적
(마2:1-12)
예수의 탄생은 몇 가지 기적을 안고 찾아왔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아니 예언 이상의 기적을 안고 있습니다. 혹자는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것이 어떻게 기적이 될 수 있느냐, 그것도 기적 중의 기적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래야 합니다. 왜냐하면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출생한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그리고 심도 있게 보아야 합니다. 이 문제를 바르게 풀기 위해서는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낳은 실제적 상황, 2000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과 나사렛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면 이 기적은 알 수 없으며, 체험할 수 없습니다.
베들레헴 탄생의 기사는 마태보다는 누가가 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마태복음에 베들레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 기적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누가의 기록을 보아야 합니다.
1)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맏아들을 낳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이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누가복음 2:1-7)
우리는 흔히들 예수를 ‘나사렛 예수’라고도 부릅니다. 그 이유는 예수가 나사렛 출신으로서 나사렛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붙여진 하나의 예명(藝名)입니다. 예수가 분명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지만 베들레헴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베들레헴에서 성장하지 않아서 입니다. 더구나 예수를 나사렛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가 나사렛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눅2:4).
성탄을 준비한 사람들에서 살펴본 것처럼,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 사람으로서 결혼을 약속한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사람에게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렸습니다. 두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라는 반응을 즉각적으로 보였으며(눅1:34), 요셉은 정혼을 파기하고 조용히 끝내 버리려고 하였습니다(마1:19). 마리아 수태 사실은 두 사람 모두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마리아가 이러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은 진실입니까? 마리아는 과연 남자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까?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사이가 아닙니까? 유대 결혼법에 의하면 결혼이 아닌 정혼 후에라도 남자가 먼저 죽으면 여자는 과부가 됩니다. 약혼은 결혼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사내를 알지 못한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마리아의 충격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요셉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마리아와의 약혼을 파혼하려고 결심하지 않았습니까? “가만히 끊고자 하여”라는 말은 의로운 사람 요셉이 천사의 말을 수납하지 않고 거부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마1:19). 요셉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으면 이런 결심까지 했겠습니까?
천사는 충격을 받은 두 사람에게 계속 집요하게 설득을 하였습니다. 마침내 마리아는 친족 엘리사벳의 잉태 사건으로 설복을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 엄청난 충격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감사의 찬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눅1:46-55). 요셉은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이해함으로써 설복을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 엄청난 충격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마리아를 집으로 데리고 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마1:24).
이제 두 사람은 결혼까지 하여 부부로서 한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들 부부는 황홀한 신혼의 행복을 느끼지 못하며 살았습니다. 마리아는 날로 배가 불러와서 여간 불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 역시 성령으로 잉태한 부인 마리아의 성결함 때문에 동침하지 못한 나름대로의 고통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들 부부는 불행한 신혼 생활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 즉 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들의 고통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러한 고통은 세상이 주는 고통과 상당히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통을 소망의 열매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고난과 소망의 원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을 받으면 반드시 소망이 온 다는 것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려면 고난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일을 해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만들기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자기포기’를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자신과 상관없이 임신한 약혼자를 집으로 데리고 오는 것은 자기포기를 전제로 한 결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뿐입니까? 결혼 초기부터 정욕을 억제했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理性)을 초월하여야 만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까? 이들 부부는 인간적으로는 불행한 신혼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자기포기를 선언한 것입니다. 어쩌면 요셉과 마리아는 장차 앞으로 나타날 ‘고난과 소망의 원리’를 사도 바울보다도 훨씬(약 40년 전) 먼저 바라본 것입니다. 이들 부부는 현재의 불편함과 고통은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실상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것을 요구하시며 바라보고 계십니다.
아이는 보편적으로 엄마 뱃속에서 10개월 만에 나옵니다. 일자로 계산하면 280일 정도 양수(羊水)안에 있다가 출산하게 됩니다.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는 어느덧 230여 일이 지났습니다. 그렇다면 50일 정도 지나면 해산(解産)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살면서 출산 준비를 하며 해산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수태는 250일 지나 30일 정도 있으면 출산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여전히 나사렛에서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출산 준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제 260일 지나고 20일만 있으면 해산하게 됩니다. 미가 선지자의 예언대로라면 마리아는 지금 나사렛에 있어서는 안 되며 베들레헴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베들레헴으로 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마리아는 베들레헴으로 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출산 일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오히려 나사렛에서 출산 준비에 바빠야 했습니다.
당시 누군가가 마리아가 메시아를 수태한 것을 알고 있었다면 얼마나 마음이 조마조마 하며, 속이 탔겠습니까? 왜냐하면 메시야는 반드시 베들레헴에서 탄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여전히 나사렛에 머물면서 출산 준비만 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배는 점점 태산(泰山) 같이 불러왔을 것이며, 잉태한 지 270일이 지나 해산날이 이제 10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메시야가 베들레헴이 아닌 나사렛에서 태어날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혹자는 예수는 나사렛 사람이기 때문에 나사렛에서 태어나도 무방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럴 수 없습니다. 메시야는 반드시 베들레헴에서 출생해야 합니다. 다른 곳에서 태어나면 메시야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할지라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지 아니하면 메시야가 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마리아의 상황을 염려하면서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초능력을 발휘하여 베들레헴으로 옮겨 놓을 것이니 괜한 걱정하지 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은 하나님의 소관(所關)이지 인간들이 할 일이 아니라면서 오히려 믿음이 없다고 야단을 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생각을 계속한다면 그런 사람은 베들레헴의 기적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베들레헴의 기적을 체험하려면 2000년 전 나사렛으로 가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메시야를 잉태하였다고 하여 모든 것을 초능력적인 시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수태는 273일이 지나고 약 일주일 정도 남았습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여전히 나사렛에 머물러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메시야를 베들레헴이 아닌 나사렛에서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야를 잉태하여 해산할 날이 약 7일 정도 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마리아는 베들레헴으로 갈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계속 나사렛에 머물러 있습니다.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미가 선지자의 예언은 일단 접어두고, 성령으로 잉태한 메시야를 출산해야 한다는 마리아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메시야는 베들레헴이 아닌 나사렛에서 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고로 당시 세상 사람들은 메시야를 나사렛에서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들이 그 당시에 벌어졌을까요? 우리는 당시 상황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하면 베들레헴 부근에 있는 목자들이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에 있는 목자들이 경배를 해야 합니다. 나사렛과 베들레헴은 상당한 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방 박사들의 대 혼란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 왕궁을 방문하면 서기관들에게 분명 유대인의 왕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정보를 듣고 베들레헴으로 출발할 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야를 잉태한 마리아는 나사렛에 있으며, 그곳에서 해산의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일은 당시 실제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결코 가상이 아니었습니다.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염두에 두면 심각한 문제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해산을 7일 정도 앞둔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제 출산 준비도 마침표를 찍고 해산의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이런 마리아의 상황과 모습을 바라보지 않고서는(베들레헴의 탄생의 기적은 아니라도), 메시야 탄생에 관한 것을 진지하게 알지 못합니다.
어느 날 갈릴리 지방에 있는 작은 촌 동네 나사렛에 무슨 일이 있는 듯, 동네 사람들이 모여 들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밖으로 나가 보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을 그토록 소란스럽게 했던 것은 로마 황제의 칙령(勅令)을 알리는 벽보(壁報)였습니다. 황제의 칙령은 다름 아닌 호구제도의 시행령이었습니다.
호구제도는 로마는 물론 로마에 예속된 모든 나라와 민족이 해당되었습니다. 당시 정치적으로 로마의 속국이었던 유대 나라는 이 칙령대로 호구를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호구는 조상들이 살았던 고향에 가서 반드시 해야 하며, 어느 누구도 빠짐없이 해야 합니다. 어떠한 어려움과 상황도 예외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황제의 칙령은 정치의 봉으로써 권력을 상징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역으로 말하면, 황제의 칙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죽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죽고 싶으면 황제의 칙령을 거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로마 황제의 칙령은 요셉에게 상당한 고민거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만삭이 되어 해산할 날이 며칠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므로 베들레헴까지 가서 호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부인이 만삭이 된 상태여서 거동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며 이로 인하여 적잖은 불편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산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여행 중에 길바닥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상황이 올 수 있었기 때문에 요셉에게 보통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요셉은 로마 간부에게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설명하며 호구를 나중에 하면 안 되겠느냐고 건의와 더불어 사정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간부의 답변은 사정은 딱하지만 안 된다고 한 마디로 거절을 했기 때문에 요셉은 어쩔 수 없이 부인 마리아를 데리고 그것도 만삭된 몸으로 베들레헴 여행길에 올랐을 것입니다. 이 여행이야 말로 메시야를 베들레헴에서 탄생하게 하는 기적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어른 걸음으로 3-4일 정도 걸립니다. 만삭이 된 마리아는 최소한 5-6일 정도는 잡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만삭이 된 마리아에게는 결코 짧은 여행, 쉬운 여행은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부자가 아니어서 교통수단도 이용하지 못하고 도보로 여행을 해야만 했습니다. 베들레헴으로 여행길에 오른 이웃들은 마리아를 보면서 측은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보게 젊은이들 고향이 어디요. 네 우리 고향은 베들레헴입니다. 어어 베들레헴이면 다윗의 고향이 아닌가? 앞으로 몇 날을 더 갈지 모르겠구만, 부인이 만삭이 되어 무척 힘들어 보이네.” 지나가는 사람들이 측은하여 한마디씩 했을 것입니다. 지금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까지 힘든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며칠이 걸렸는지 모르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아무 일 없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아마 길바닥에서 진통이 오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혹시 오는 길에 해산의 진통이라도 오면 길에서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사히 베들레헴까지 도착했으니 요셉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감사의 기쁨이 가시기 전에 옆에 있는 마리아에게 해산의 진통이 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부분은 본문의 자세한 주해가 필요합니다. 어떤 이들은 누가복음 2:6절에 나타나 있는 ‘때’는 요셉 일행이 베들레헴에 이미 도착하여 어느 정도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가의 증언을 통해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도착하자마자 해산(解産)의 진통을 했는지 아니면 며칠이 지난 후에 해산의 진통이 왔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의 증언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봅시다(눅2:5-7)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6절은 해산의 시기로 오히려 후자를 지지하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거기 있을 그 때’라는 말은 베들레헴에 도착한 시점보다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것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마리아는 베들레헴에 도착한 지 며칠을 지체한 후 해산한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 있을 그때에’라는 말은 분명 ‘어느 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문자적인 해석만을 해서는 안 될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머물러 있다가 마리아의 진통이 오기 시작했다면, 우리의 의문은 그 며칠은 베들레헴 어디 있었으며, 해산하는 그 시각에 왜 사관을 찾아 다녔으며, 말구유를 찾았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6절은 오히려 전자를 지지해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베들레헴에 몇 일간 체류했다면, 다른 곳을 찾아다닐 필요 없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 해산을 하면 되었습니다.
여기 ‘사관에 있을 곳이 없었습니다.’는 것은 요셉이 긴박하게 사관을 찾아다닌 흔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거기 있을 그때에’라는 말은 베들레헴에 도착한 그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마리아는 베들레헴에 도착하자마자 해산의 진통이 온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마리아의 출산을 돕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한 마리아에게 해산의 진통이 오기 시작하자, 요셉은 ‘올 것이 왔구나’ 하면서 약간은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대처를 했습니다. 요셉의 흔적은 누가에 의해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2:7). 요셉이 이곳저곳을 찾아다닌 것을 말합니다.
사관이 없다는 말은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요셉과 마리아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늦게 베들레헴에 도착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마리아는 만삭된 몸이었기 때문에 빨리 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온 손님들이 이미 객실을 다 차지했기 때문에 빈 방이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요셉의 침착성에 대한 흔적입니다. 마리아의 진통이 오자 길에서 아이를 낳게 할 수 없어 요셉은 사관이라도 들어가려고 안간힘을 다 하였으나, 객실이 이미 다 차 있었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은 다른 곳이라도 마련해보려고 찾아 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허사였습니다.
요셉은 힘이 빠져 기진맥진하고 있을 때 어느 집 주인이 “젊은이 사정이 급하고 딱하군, 우리도 손님들이 와서 빈 방은 없지만 마침 마구간이 비어 있는데 그것이라도 사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다시 힘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인 마리아를 마구간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요셉은 길거리에서 해산의 진통을 하고 있는 부인 마리아를 사관으로 데려 가지 못하고 마구간으로 데리고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만이라도 다행이었을 것입니다.
이리하여, 메시야는 초라하게 베들레헴 어느 마구간에서 역사적으로 탄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백방으로 노력하였지만 결국 해산의 진통을 하고 있는 마리아를 마구간으로 데리고 가서 아이를 낳게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겸손한 메시야를 탄생시키기 위하여 요셉이 의도적으로 마구간을 선택했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부인 마리아가 초라한 곳에서 분만하지 않도록 노력한 요셉의 흔적이 누가에 의해 증명되고 있으며, 오히려 요셉은 초라한 마구간보다는 더 좋은 환경에서 분만하도록 사관을 찾아 다녔습니다. 누가의 증언은 바로 이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메시야가 탄생할 곳을 화려한 여관이나 집보다는 초라한 마구간을 선택하셨습니다. 당시 최고의 문화와 경제 그리고 정치적 도시인 예루살렘을 예비한 것이 아니라 아주 보잘 것 없는 작은 마을 베들레헴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메시야 탄생에 있어서 겸손을 상징할 수 있는 ‘마구간’은 요셉이 준비하거나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예비하시고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역사적으로 탄생한 것은 미가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당시 마리아는 외부적으로는 호구하기 위해 베들렘으로 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섭리에서는 메시야를 베들레헴에 탄생시키기 위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선지자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 아니라 기적적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아니 기적 중의 기적이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미가 선지자의 예언대로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혹은 얼마나 당당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까?
하나님은 초능력적인 방법으로 마리아를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옮기지 않으셨습니다. 나사렛 사람이라고 나사렛에서 태어나도록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평범한 생활 속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마리아가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도저히 갈 수 없는 상황에서 또는 가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마리아의 삶 속에서 돌발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돌발적인 상황은 다름 아닌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호구하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를 이용하신 것입니다. 하필이면 해산날 7일 정도를 앞두고 칙령을 내렸을까요? 혹자는 우연의 일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기적적인 역사가 당시에 일어난 것입니다. 로마 황제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칙령을 내린 것은 결코 아닙니다. 황제는 하나님의 섭리와 관계없이 정치적 결단에 의해 선포하였습니다. 황제의 칙령은 마리아를 나사렛으로부터 베들레헴까지 옮겨 놓았습니다. 황제의 칙령이 아니었다면 메시야는 나사렛에서 탄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누차 언급하였듯이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메시야를 출산하려고 모든 준비를 마치고 해산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시급함을 아시고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도저히 움직이지 아니하면 안 될 당시 로마 황제인 아구스도의 칙령으로 이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그야말로 죽으려고 맘을 먹었다면, 아니 동반 자살을 결심했다면 나사렛을 떠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반드시 나사렛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가야 합니다. 황제의 칙령은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시골 나사렛에서 살고 있는 요셉과 마리아의 생명쯤은 파리 목숨보다 하찮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조상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서 호구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황제의 칙령이 요셉과 마리아 부부를 나사렛으로부터 베들레헴까지 옮기게 한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이루신 기적입니다. 저는 이것을 기적 중의 기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으로 일찍이 가서 메시야 출생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 당연한 처사인데, 왜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계속 나사렛에 머물러 있으면서 출산 준비를 하고 있었을까?”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메시야 수태 사실을 계시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수태고지를 천사들이 처음으로 알리려고 할 때, 세상 사람들은 모른다 하더라도 이들 부부만은 떠들썩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대사로 부름 받았던 천사들은 두 진영을 오가며, 성령의 역사로, 구약 선지자들의 글로, 하나님의 능치 못할 말씀으로, 엘리사벳을 통한 시청각으로 설득과 설득을 거듭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더 깊은 질문 속으로 빠져 들어가야 합니다. 이들은 순수한 유대인으로서 구약의 메시야 사상, 즉 메시야가 탄생할 베들레헴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황제의 칙령이 아니래도 여유 있게 베들레헴으로 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해산날이 가까이와도 여전히 나사렛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 부부의 행동은 하나님의 섭리를 거슬리는 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역사를 매사 초능력적으로 이루지 않으십니다. 다시 말해서 요셉과 마리아 부부를 기계적으로 이용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는 메시야를 잉태하였고, 천사의 계시를 통해 메시야 수태고지를 받았지만 해산의 문제는 이들 부부의 몫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에서 출산준비를 차근차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평범한 유대인의 가정을 이루며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메시야 탄생은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이러한 오묘한 면이 있음을 성경을 통해서, 혹은 교회 역사나 성도 각 자의 삶을 통해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매사를 초능력적으로 역사한다면 우리는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구원파에서 주장한 것처럼 회개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자동적으로 해결해 주시며, 인간은 죄를 지고 가만히 있어도 십자가는 자동적으로 죄를 도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구 제도에 대한 정치적 결실로 보아서도 안 됩니다. 그렇다고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계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행하지 못한 무능으로 돌려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는 반드시 초능력적인 역사나 신비스런 방법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마리아 수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메시야의 출산은 마리아와 더불어 요셉이 책임져야 할 몫이었습니다. 여기 몫이란 요셉 부부가 삶 속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이것을 영적 의미로 해석하여 당연한 것으로 본다면,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황제의 칙령 이전에 계시에 따라 베들레헴으로 벌써 떠나야 했으며, 거기서 출산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메시야는 최소한 구유 탄생이라는 초라한 모습은 벗을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아기 예수의 베들레헴의 탄생을 초능력적인 사건으로나 영적인 의미로만 부여하지 않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평범한 삶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기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탄생했다는 것은 예언 이상의 기적인 것입니다. 성탄은 이런 기적을 안고 이 세상에 찾아온 것입니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성탄을 맞이해야 합니다. 연례행사처럼 의식이나 제도나 겉치레에 치중해서는 안 됩니다. 성탄의 기적들을 음미하면서 성탄을 준비하고 성탄의 축제와 경배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성탄의 축제는 그 의미마저도 상실되어가고 있습니다. 80년대만 해도 새벽송이 성행했습니다. 새벽송의 가장 큰 의미는 찾아가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가정을 새벽에 찾아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찬송을 불러주며, 경배하자는 의미로 ‘메리크리스마스’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축복을 함께 나누는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은 새벽을 찾아가는 새벽송 마저도 귀찮게 여겨 중단해 버렸습니다. 물론 새벽송을 해야 만이 찾아가는 성탄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찾아가는 성탄이 전무하여 새벽송 마저도 중단된 것을 아쉬워하며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양이라도 찾아가는 성탄을 맞이해야 합니다. 새벽에 찾아가든 저녁에 찾아가든 교회에서 찾아가든 개인이 찾아가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찾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평소에는 물론 성탄절마저도 찾아가는 발걸음이 드물어졌습니다. 이것은 아쉬움이 아니라 안타까움입니다. 아니 슬픈 현실입니다. 성탄의 축제는 있으나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찾아가지 않는 성탄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고 계실까? 이 세상에 직접적으로 찾아오셨던 예수님은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대하고 계실까? 그리고 지금 오셔서 우리의 마음속에 임재하신 성령님은 어떤 탄식을 하고 계실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는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물음에 묵상을 하며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성삼위 하나님은 찾아가는 성탄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켜보고 계십니다. 언제 찾아갈 것인가? 어디를 찾아갈 것인가?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가? 어떻게 찾아갈 것인가? 이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몫입니다.
이런 진정한 성탄을 모르고 성탄을 부정하는 무리들까지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더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착실하게 출산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나사렛이 아닌 베들레헴에서 출산을 했습니다.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것이 기적 중에 기적이라는 사실이 이제 이해가 가십니까? 그렇다면 성탄의 설교가 달라져야 합니다. 성탄의 메시지가 신선해 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 곧 죄인을 찾아와 성탄이 되었듯이 우리도 이웃을 찾아가는 것이 성탄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성탄은 교회 안에서 자축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겸손하게 마구간에 태어나시고 찾아 오신 예수님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찾아가는 성탄은 열 번 백 번을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도 예년처럼 올해에도 찾아가는 성탄이 될 것입니다.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한 손에는 성탄을 기쁨 소식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빵을 들고 찾아갈 것입니다.
묵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