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탄 2
경북 청송의 골짜기를 따라 굽이굽이 들어가다 보면, 현실의 색채가 잠시 숨을 죽이고 비현실적인 설국(雪國)의 풍경이 발을 멈추게 하는 곳이 있다. 길안천 상류에 펼쳐진 백석탄(白石灘). '하얀 돌이 반짝이는 여울'이라는 그 이름처럼, 이곳은 마치 거대한 빙하가 산산조각 나 강물 위에 떠내려오다 그대로 굳어버린 듯한 기묘하고도 눈부신 풍경을 선사한다.
처음 백석탄을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시선을 빼앗는 것은 돌들의 색깔이다. 일반적인 계곡의 거뭇한 바위들과 달리, 이곳의 바위들은 눈이 시릴 정도로 희고 깨끗하다. 지질학적으로는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퇴적암층이라 하지만, 그 딱딱한 학술적 용어는 눈앞의 경이로움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바위의 표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물살이 오랜 세월 동안 핥고 지나간 자국들이 선명하다. 움푹 파인 구멍들, 이른바 **포트홀(Pothole, 돌개구멍)**은 강물 속에 섞인 모래와 자갈이 소용돌이치며 수만 년 동안 바위를 깎아낸 흔적이다. 그것은 물이 바위에게 남긴 깊은 입맞춤이자,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겨낸 승리의 기록이다.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바위가 액체처럼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누워 있는 모습은, 우주의 시간이 인간의 찰나와는 다른 차원으로 흐르고 있음을 웅변한다.
백석탄의 매력은 그 정적인 백색과 동적인 물줄기의 대비에 있다. 계곡을 흐르는 물은 바위의 흰빛을 받아 더욱 맑고 푸르게 빛나고, 바위 틈새마다 뿌리를 내린 이끼와 강변의 나무들은 계절마다 다른 색을 덧입힌다. 가을이면 주변의 단풍이 흰 바위 위로 떨어져 마치 하얀 도화지에 붉은 물감을 흩뿌린 듯한 장관을 연출한다. 이곳의 바위들은 죽어있는 무기물이 아니다. 낮에는 태양 빛을 머금어 눈부시게 반짝이고, 밤에는 달빛을 반사하며 스스로 빛을 내는 듯한 영롱함을 간직하고 있다. 강물 소리는 그 바위들의 숨소리처럼 들리고, 바위 위에 앉아 있으면 지구가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유기체라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진다.
백석탄 앞에 서면 마음속에 쌓였던 소란스러운 상념들이 씻겨 내려간다. 수만 년의 세월을 견디며 자신을 깎아내어 저토록 아름다운 곡선을 완성한 바위를 보며, 정작 짧은 생을 사는 우리는 무엇을 그토록 움켜쥐려 했는지 자문하게 된다. 깎여나간 자리에 맑은 물이 고이고, 그 고인 물속에서 작은 생명들이 살아간다. 비워냄으로써 비로소 타자를 품을 수 있게 된 바위의 모습은 오만한 인간의 마음을 겸허하게 만든다. 백석탄은 단순히 구경하는 관광지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보는 거대한 거울과도 같다.
강물은 오늘도 쉼 없이 흐르며 백석탄의 몸을 만지고 지나간다. 100년 뒤에도, 혹은 1000년 뒤에도 이곳은 여전히 하얗게 빛나며 흐르는 물줄기를 받아내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잠시 머물다 가는 이 공간에서, 백석탄은 변하지 않는 가치란 무엇인가를 묵묵히 보여주고 있다. 일상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를 때, 혹은 세상의 소음이 너무 시끄러워 귀를 막고 싶을 때, 청송의 이 하얀 여울을 떠올린다. 그곳에는 여전히 물살이 빚어내는 정교한 조각품들이 태양 아래 빛나고 있을 것이며, 인간의 언어로는 다 담을 수 없는 태고의 신비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백석탄은 우리에게 말한다. 깎이고 씻기는 고통마저도 시간이 흐르면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