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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거룩한 주의 날 주님의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과 가정 일터 가운데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우리 앞뒤 좌우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 나눕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힘들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 있겠지만 그중에 공감되는 것이 있다면 기다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빨리빨리를 요구하는 우리의 삶의 패턴 속에서 기다림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마음을 참 불편하게 할 때가 많다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의 삶을 한번 실제로 생각해 보십시오. 엘리베이터가 조금만 늦게 내려와도 누르고 또 누르고 또 누릅니다. 그 세 번 누른다고 빨리 오지 않거든요.
그런데 왜 이렇게 안 내려오는 거야 이게 우리의 모습이죠. 여러분 우리 모두 핸드폰을 잘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어르신들도 이제는 유튜브 카톡 이런 것들은 자유롭게 합니다. 어떤 분들은 틱톡도 하시고 막 다양하게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나라 핸드폰이 엄청나게 빠르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죠?
그러다 보니까 뭔가 속도가 좀 나오지 않거나 좀 버벅거린다 생각하면 막 가슴을 치는 거 왜 이렇게 안 되는 거냐 그러면서 우리가 불평 불만을 쏟아놓기도 하죠. 특별히 우리는 또 음식에 민감한 사람들이잖아요. 종식을 시켜놓고 안 오니까 또 전화를 하는 거 왜 안 오냐고 그러면 중식 사장님은 똑같은 말하죠.
출발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패턴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뿐만 아닙니다. 카페에 가서 차 한 잔을 시켜놓고 커피 시켜놓고 속으로 되뇌이잖아요.
빨리 좀 주세요. 빨리 좀 해 주세요.
아닌 것 같은 표정들을 하시는데 대부분 그럴 거예요. 여러분 우리나라가 얼마나 대단한가 하면 전날 밤에 배송을 요청을 하면 새벽에 도착하는 나라 아닙니까?
나는 생각해 봅니다. 이런 나라가 과연 몇 개국이나 있을까 파악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거의 없지 않을까 전날 저녁에 주문을 했는데 새벽에 도착한다. 그러니까 여러분 택배가 하루만 늦어도 속이 타는 거예요.
아니 전날 저녁에 시켜도 다음 날 오는 건데 왜 오늘은 이렇게 안 오는 거냐라면서 우리는 답답해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빨리빨리에 굉장히 익숙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는 뿌리 깊은 문화이면서도 생존의 본능이 담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전쟁을 겪고 가난을 극복하면서 산업화를 압축적으로 정말 빠르게 진행해 온 나라 아니겠어요 그러다 보니까 빨리 해야 산다라는 것이 몸으로 체득된 것이죠. 우리 어른들이 그렇게 살아왔어요. 뭔가 빨리 해야 이것들이 이루어지고 뭔가 결과를 볼 수 있다라는 것을 산업화를 겪으면서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빨리빨리라는 단어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상징 임과 동시에 일상의 기본값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늦으면 왜 이렇게 빨리 안 하냐 여기저기서 아우성 나오는 것이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빠르게 움직이고 즉각적인 결과를 기대하는 시대 가운데 우리는 삽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기다림이라는 것은 왠지 모르게 무능력해 보일 수도 있고요. 손해를 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기다림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직전 시간은 대부분 기다림이라는 것이 있었고 그 기다림이 채워졌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죠.
여러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을 해 주셨잖아요.
아들을 주시겠다고 그 약속을 받고 몇 년 만에 아들을 낳았습니까?
한두 해가 아닙니다. 10년 20년이 아니죠. 25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적은 시간이 아니죠. 하나님께서 분명히 아들을 주시겠다 약속을 했는데 하도 안 주시니까 어떻게 했어요? 이스마엘을 낳은 것 아니겠어요?
요셉은 자신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이 이루어지기까지 오랜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17세에 애굽으로 팔려가서 종살이를 하죠. 거기에서 옥살이를 하면서 무려 13년의 기다림 끝에 30세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총리가 되었던 것이죠.
다윗도 하나님께서 일찍이 기름 부어주셨어요. 그의 나이 15세 정도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자라 이야기하시면서 기름 부으신 것이죠.
그런데 왕위로 직위하는 나라가 나이가 몇 세였습니까?
30세였다는 거예요. 이처럼 다윗도 기름 부음을 받고 약 15년가량을 거의 방랑자로 살아야 했던 것이죠. 그리고 오늘 본문 가운데 제자들 역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기다리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물론 그 기다림 속에 우리가 느끼기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그러한 상황을 생각하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 시간은 결코 정지된 시간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 시간은 이미 하나님께서 일하기로 작정하셨고 일을 시작한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기다림의 장면을 아주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요. KTX를 타면 대구에서 서울까지 2시간도 채 걸리지 않게 도착하는 매우 빠른 속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속도가 모든 것이 능력이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며 멈출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 능력 있는 사람, 강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기다림의 신앙을 함께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믿음은 기다림으로 증명이 된다는 거예요. 따라 합시다.
기다림으로 믿음을 증명하자.
다시 한 번요.
기다림으로 믿음을 증명하자.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손에 못자국, 옆구리의 탕자국을 보기도 하고 만지기도 했죠. 심지어 우리 주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와서 만나주셨고 자꾸 안 되니까 이제 갈릴리 호숫가까지 가서 맛있는 음식을 차려주면서 회복의 시간을 갖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제 양을 먹이라 그러면서 나를 따르라 그렇게 요청했던 것을 우리는 지난주까지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순간 오늘 본문 위쪽에 보면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던 것이죠.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아마 제자들 마음 가운데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그래 주님이 승천하셨으니 이제야말로 이제 나갈 준비가 되었으니 우리 사역을 위해서 전진하자 그런 마음이 그들의 마음 가운데 아마 생겨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 선교 여행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가르치거나 병 고치는 사역도 아직 뛰어들지 않았던 것이죠. 이처럼 그들은 곧바로 행동으로 움직이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기다렸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 이들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뭔지도 알고 나아가서 복음을 전해야 되는 사명도 알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당장 사역의 현장에 뛰어들지 않고 기다려야 했을까요?
분명한 이유가 있겠죠. 그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즉 이들의 기다림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던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24장 49절을 통해서 먼저 이렇게 말씀을 해 주셨어요.
우리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누가복음 24장 49절 말씀이 안 뜨니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성에 머물러 있어라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예수님께서 이 성에 머물러라. 언제까지 능력이 입혀질 때까지.
그리고 사도행전 1장 4절 오늘 본문인데 우리 성경책을 한번 보시면서 같이 읽어보실까요? 1장 4절 같이 읽어봅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이처럼 이들의 기다림은요. 순종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시간. 순종은 무엇입니까?
믿음의 시간이죠. 믿음으로 증명하는 시간이 그들에게 있었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순도는 하나님이 명령하셨을 때에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 바로 거기에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기다림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시는 거예요. 권 목사가 믿음이 얼마나 있는가를 하나님이 확인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순종하고 있는가를 보신다는 거예요.
그러면 권 목사만 그렇게 보시겠어요?
아니요. 믿음의 사람들 모두를 그렇게 보시는 거예요.
말씀이 주어졌을 때 얼마나 순종하는가?
그게 믿음의 척도라는 것이죠. 출애굽기 14장에 보시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앞에는 홍해가 막혀 있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옵니다. 그들이 친친고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어떻게 했을까요?
원망합니다. 차라리 우리가 그곳에서 죽었으면 나을 뻔했다라면서 모세에게 원망을 합니다.
그때 모세가 했던 말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봐라.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죠. 결국 이들은 순종함으로 여호와께서 행하신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반면 사울 왕은 블레셋과의 전투를 목전에 두고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제사를 드립니다.
사무엘이 와서 제사를 드려줘야 되는데 7일이 되어도 오지 않습니다. 백성들은 흩어집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은 점점 몰려옵니다. 그가 보기에 야 더 이상 안 되겠다는 마음을 먹고 제사를 드리게 되었죠.
그로 인해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망령 때에 행했다고 책망하면서 왕의 자리 그 자리에 내려오는 결정적인 요인이 그것이 됨을 성경은 기록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때로 앞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따라 머물러 서서 잠잠하게 기다리는 것 그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65편 1절 2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며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할렐루야 잠잠히 주님을 바라보는 그 시간 가운데 구원의 은총이 임하는 것이고, 잠잠히 바라보는 그때에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주님의 나라를 향해서 전진해 나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엘리아의 갈멜산 전투를 떠올리면 대부분의 사람들이요. 850대 1로 싸웠던, 그래서 바울과 아세라 선지자를 영적 전쟁에서 승리했던 것을 가장 많이 기억할 것입니다.
불이 내려지는 그 놀라운 사건 얼마나 대단합니까?
얼마나 영적으로 능력이 있었으면 그 기도의 사람 이라는 이름을 얻고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그 놀라운 큰 역사를 이루었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엘리아의 진짜 위대함은 그다음 장면에 기록되고 있다는 거예요. 갈매일산에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기적을 체험한 후 그러면 영적인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또 다양한 것들을 할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용기가 있을 것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그때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비가 올 때까지 무릎을 꿇고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다리는 거예요. 사관에게 가서 봐라.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서 봐라.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섯 번째 동안 아무것도 없었죠.
그런데 일곱 번째 되었을 때 구름 조금 보이는 그것 여러분 엘리야는 기다림의 시간을 시작했고 비가 올 때까지 그 믿음의 시간을 보냈던 것이죠. 하늘을 보는 훈련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오르자 그는 하나님의 응담임을 알고 그제서야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불이 떨어질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름이 없을 때에도 아직 아무 소식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 거기에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그 기다림의 자리는 바로 믿음을 증명하는 자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은 내 눈에 보이지가 않아요 라고 말하는 분이 있을 거예요. 내가 기도했는데 아직까지 응답이 없던데요. 그렇게 말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 말씀에 순종해서 예루살렘에 머무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새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눈에 보이지 않고 잠깐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다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기다리는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때가 찬 시각, 그 기다림의 결과는 내 눈에 보여지고 내 입술을 통해서 간증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 그들의 기다림 가운데는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고 오늘 14절에는 기록해 줍니다. 14절 말씀 같이 읽어보십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여러분 기다림의 자리는 하나님의 일을 준비하는 자리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뜻이 임할 공간을 만드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준비는 언제나 기도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제자들을 비롯한 120명의 성도들이 예루살렘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냥 기다린 게 아니라 뭐 하며 기다렸어요? 기도하며 기다렸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이들의 기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보니까 이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죠.
마음을 같이하다는 것은 격렬하게 한 목소리로 한 열정으로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어요. 즉 모인 자들이 모두 한마음 한 뜻이 되어서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 일치가 있었다는 거예요. 각각 다른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동일한 마음 가지고 영적인 동일한 동질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다는 것이죠.
여러분 그 다락방에는 우리가 알듯이 약 120명의 문도가 있었습니다. 13 14절에 보니까 그 안에는 11 제자가 있었고 여자들이 있었고 또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한 예수님의 형제들이 포함돼 있었어요.
그렇게 모여 있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앉아 있다 보면 무슨 얘기를 하겠어요?
과거에 좋았던 이야기, 좋지 않았던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을 할 법하잖아요. 그렇죠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는데 그리고 나서 딱 모이는 거 아니야 그러면 우리가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에 대해서 너무 몰랐다. 그것부터 시작해서 베드로가 세번 부인했던 부끄러움, 로마가 주님을 못 믿겠다고 나에게 보여달라고 했던 그 이야기들 이런 것들이 사뭇사뭇 놀라울 법하지 않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모여 그저 마음을 같이 해서 기도했다고만 기록해 주고 있다는 거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공동체 회복의 징조이며 동시에 성령 임재의 전조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음 주일을 우리는 성령 강림 주일로 지킵니다. 우리도 이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같이 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녀의 마음, 미움의 마음도 있을 수 있고, 지기의 마음, 질투의 마음, 상한 마음이 우리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내려놓고 그저 한마음 한 뜻으로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 일치가 우리 신앙 공동체 가운데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이것이 그들의 기도의 특징이 두 번째 특징은 무엇입니까?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는 거예요. 오로지 여러분 지속적이며 헌신적으로 매달렸다는 거예요. 오로지라는 단어 안에 그러니까 이들이 모여서 다른 것 하다가 틈 생길 때 기도한 것이 아니라 전 인격을 다해서 기도에 매진했다는 것이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약속이 이루어지는 그때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더불어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 내가 준비되게 해 주십시오. 그러한 준비된 그릇이 되기 위해서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는 우리의 기다림을 능력으로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찬양했잖아요. 보라 역전되게 처음 시작이 어떻게 됐어요?
너 기도를 멈추지 마라.
기도를 멈추지 마라가 역전되리라가 이게 그 찬양의 핵심이고 다예요. 여러분 기도를 멈추지 않고 우리가 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의 시간들을 통해서 놀라운 능력으로 바꾸는 힘의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할 때에 적극적으로 기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 인생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 심리상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잖아요. 그런데 그 기다림의 시간이 있는데 기도하지 않으면 마음 가운데 불안이 생깁니다. 이게 우리 인간이에요. 반면 기도하는 기다림은요. 우리의 마음 가운데 소망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담대함을 갖게 한다는 그래서 기도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실제 지금 상황 여러분 말씀에 순종하여 모여 기도하고 있지만 이들에게 아직 성령이 임하지 않았어요. 말씀을 들었지만 아직 그들에게 능력이 부어지지 않은 상태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음으로 기도했고 믿음의 기도는 성령 강림의 놀라운 통로가 되었던 것이죠.
여러분 이 장면은 앞서 언급했던 엘리야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릴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엘리야에게 비를 주겠다 약속해 주셨어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주시겠다 약속하시고 기도했을 때 불이 내렸어요. 그러면 비를 내려주겠다고 약속하면 비가 오겠습니까? 안 오겠습니까?
마땅히 오겠다고 믿겠죠. 그러면 굳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엘리아 입장에서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응답되어집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것은 이 응답의 때까지 엘리야가 그냥 기다리지 않았다. 말씀의 확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릎 사이에 머리를 울어 하나님 앞에 응답되는 그 시간까지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약속이 안 이루어질까 봐가 아닙니다.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걸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그 기다림 속에서 그냥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영적 교제함을 통해서 그 하나님께 간구하고 간구하면서 그때를 기다렸던 것이죠.
이처럼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알고도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약속이 성취되는 그 순간까지 영적인 준비, 그의 태도가 변하지 않고 일관성 있었다는 거예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다 보면 처음에 막 뜨겁게 기도합니다. 하루 지나면 약간 식어요. 또 하루 지나보세요. 그러면 그 기도가 점점 축소가 됩니다. 그리고 되겠지 이러고 마는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지금 기다리는 것 그것이 무엇입니까?
기다리는 것이 있다면 기도로 채우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세 번째 그들의 기다림은 연합으로 더욱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신앙은 각개 전투가 아니었습니다. 더불어라는 이 표현 속에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죠. 이처럼 공동체가 더불어 기도할 때 성령의 역사는 더 놀라운 능력 강력하게 임한다는 거예요. 당시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잖아요. 만약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기 때문에 이제 됐다고 각자 자기의 길로 흩어져서 각자 도생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그들은 그 과정 속에서 또 한 번의 좌절, 의심, 두려움 이런 것들이 그들에게 임했을 법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시간을 갖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함께하도록 그 자리를 만들어 주신 것이죠. 그들은 부활의 기쁨도 함께했습니다. 승천의 경의로움도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기다리는 가운데 함께 믿음의 기도를 올려드렸던 것이죠.
여러분 신앙은 언제나 공동체 안에서 함께 갈 때에 더 단단해지는 거예요. 나 혼자 잘할 수 있다고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러나 여러분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이 더해지고 더해질 때 그때 힘을 발휘하고 폭발적인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어떻게 장작 하나하고 10개하고 비교가 되겠어요?
폭발물이 어떻게 하나하고 10개하고 비교가 되겠어요?
아무래도 하나보다는 10개가 훨씬 능력이 더 세겠죠. 그리고 결국 그들에게는 성령이 임하였는데 약속한 시간 그들이 모였던 장소에 임했던 것이죠.
여러분 그 장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다락방이라는 물리적 공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사실 그것은 함께하는 공동체적 장소였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즉 개인 기도가 아니라 함께 기도하는 자리 흩어진 사람이 아니라 모여 있던 자리 마음을 나누어서 뿔뿔이 흩어진 것이 아니라 마음이 모여져 있는 그 자리에 성령께서 그 공동체 가운데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우시는 방식도 동일했습니다. 공동체였죠.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특별히 멋지게 영웅을 만들자 그렇게 세우지 않은 것이죠. 12명의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먹었습니다. 함께 잠을 잤습니다. 함께 사역을 했던 것이죠. 그리고 성령 강림 이후의 제자들 역시 공동체로 함 함께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 4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을 기록하고 있죠. 우리 2장 46절 한번 읽어보실까요?
그들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라 그것이 공동체의 힘 능력이에요. 물론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요. 공동체로 함께한다는 것이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어요. 그런 경우들이 없네요. 나 혼자 그냥 신앙생활 잘하면 좋을 텐데 아마 이걸로 해야 되니까 이것도 불편하고 저것도 귀찮고 이런 것들이 생겨날 수도 있는 것이죠.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인 자들의 생각이 다 다르잖아요. 그럴 수밖에 없죠. 또 일 처리하는 속도도 다 다릅니다. 우리의 믿음의 색깔도 조금씩 다 달라요. 그러다 보니까 거기에서 오는 불협화음들이 분명히 있을 수밖에 없어요. 나 혼자보다는 함께하는 것이 사실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 공동체 안에는 여러분 이 과정을 통해서 연단되고 깎아짐을 통해서 또한 채우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언은 이런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우리 잠언 27장 17절인데 띄워지면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안 띄워지나요? 잠언 2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합니다.
철과 철이 맞부딪히면 철과 철이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날카로워서 서로 아프겠어요?
그런데 그것이 날카롭게 한다면 더불어서 전도서 4장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죠.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으면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이니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물을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그래서 옆에서 누군가가 잡아주는 것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죠. 말씀처럼 함께 힘을 모아 서로를 도우며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모세의 시대를 잠깐 떠올려보십시오. 모세가 신의산에 올라갔어요. 그 가운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백성들이요. 모세가 내려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뭘 만들었어요?
금송아지를 만들었어요. 기다리지 못하니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 시대를 보십시오. 백성들이 함께 금식하며 회개할 때 공동체 전체가 회복되어졌고 무너졌던 성벽을 세웠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꼭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은요. 개인의 경건으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신앙의 지속은 공동체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에게 한번 질문을 하셔야 돼요. 나는 신은이라는 공동체에서 함께 기도할 사람이 있는가 나의 기다림을 함께 지지해 줄 사람이 있는가 매우 중요한 것이죠. 우리 주님이 교회를 그냥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바로 기다림을 지탱해 주는 울타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목장 예배라는 것이 있고 중부 기도 모임이라는 것이 있고 새벽 기도, 금요 기도의 시간들이 있는 거예요. 이러한 모임 시간이 바로 현대의 마가 다락방과 같은 것이죠.
성령은 혼자 있는 사람에게 임하기도 합니다만 극히 드물다. 함께 있을 때 공동체 가운데 큰 역사로 나 그래서 여러분 흩어지지 마시고 모이기에 힘쓰는 은혜가 우리 시는 공동체 가운데 임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히브리서 10장 24절 25절에 말씀하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그리하자 말세가 되면 될수록 더 안 모입니다. 거기에 발맞춰서 사는 것이 사실 편해요. 그러나 겉면드립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 신앙을 더 굳건히 세우기 위해서 그 시대에 발맞춰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발맞추어서 마지막 때에 모이기를 힘쓰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마지막 때는 여러분 사단이 공동체를 해체시키려고 다양한 방법을 씁니다. 그중에 하나가 아마 핸드폰일 거예요. 아주 혼자 있어도 만족하고 살아요. 그것은 사탄의 전략입니다. 여러분 마지막 때에 은혜의 자리, 성장의 자리, 이 공동체가 귀함을 다시 한 번 묵상하셨으면 좋겠고, 우리 신앙 공동체가 그러한 힘을 발휘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결론입니다. 사랑한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 여전히 기다려야 할 순간들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을 때 기도의 응답이 더디게 온다라고 느껴질 때, 하나님 왜 이렇게 늦습니까 하는 생각이 들 때 그때가 왜 없겠어요?
그러나 여러분 그 시간은 하나님이 지연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가장 정확하고 확실한 때에 역사하시기 위해서 준비하는 시간인 것이죠. 그리고 기도할 때 혼자가 아님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찬양이 있잖아요. 누군가 너를 위해 기도하는 여러분 그 찬양 속에서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는 것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이왕이면 쌍방 합의 하에 기도도 하고 기도도 받는 은혜가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그게 아름다운 공동체 아니겠어요?
나도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고 누군가도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그 놀라운 힘과 능력. 여러분 그럴 때에 성령은 놀랍게 역사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다림, 하나님께서 이미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기까지 기다림의 자리, 기도의 자리 그 자리를 소망하면서 사는 그래서 한번 고백해 보실까요?
우리 따라 합시다.
기다림으로 믿음을 증명하자.
기도로 기다림을 채우자.
함께 기도하자.
여러분 다음 주는 성령 강림 주일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을 통해서 강단에서 여러분에게 강력하게 권면을 드립니다. 새벽 예배를 구별하십시오. 새벽에 주님 앞에 나아가서 예배하는 시간 그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있을 때에 나의 하루가 복된 하루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머무는 자리를 구별하십시오. 그래서 하루를 시작할 때 그냥 하지 마시고 한 구절의 말씀이라도 펼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공동체와 함께 예배하는 자리에 동참하십시오. 우리에게 허락하신 수요 예배 그녀에 대해 여러분 상황이 안 된다. 말씀하지 마시고 물론 직장 시간하고 겹치면 어렵겠죠.
그러나 여러분 내가 TV 앞에 앉아 있으면서 수요 예배를 거르고 있다면 내 마음에 부담이 생기셔야 돼요. 그래서 내가 공동체 가운데 예배 가운데 가야겠다라는 마음이 있어야 되는 것이죠.
여러분 하루 중에 기다림의 자리를 구별하셔서 주님과 영적 교제하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자리에 능력으로 인지하는 큰 은총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