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일간의 사투
뜻밖의 일이었다. 내가 경상북도 경산에서 코로나19 예방 백신 제1호 접종자가 되었다. 최초 접종자라고 언론에서 인터뷰를 하고 다큐멘터리도 찍어갔다. 나의 일상이 지역 일간지 이곳저곳에 보도되었다. 나는 노인요양시설에서 간호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코로나 초창기에 널리 알려진 지역, 대구시와 청도군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경산의 작은 요양시설이다. 이곳에서는 어르신 78명을 50여 명의 직원이 돌보고 있다. 지난해 겨울, 온 나라가 느닷없는 감염병에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전 대학병원에서 근무할 때는 의료 인력과 장비가 충분하여 신종플루, 메르스, 사스 등 감염병이 닥쳐왔을 때도 이렇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이곳 시설에서는 의료인이 나 혼자뿐이다. 불안에 떨면서도 직원들에게 감염예방 교육을 하고, 입소 어르신들에게도 예방 수칙을 지키며 돌보고 있었다. 2월 말경, 시에서 우리 시설에 코로나 확진자와 밀접 접촉한 직원이 있으니 검사를 받으라는 연락이 왔다. 그것은 큰 파장을 예고했다. 아니나 다를까 직원이 확진자 판정을 받았다. 그 직원과 접촉한 직원과 어르신들도 검사 결과 다수가 양성으로 나왔다. 우리 요양원은 전국 최초로 코로나 집단감염 시설이 되었다. 요양원은 즉각 폐쇄되었다. 모든 문이 잠기고 건물 전체가 황색 테이프로 둘러쳐졌다. 코호트 격리가 시작된 것이다. 노인요양시설은 일상생활이 어려운 어르신들이 머무는 곳이다. 스스로 물 한 모금, 밥 한술 뜨지 못하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대소변도 도움 없이는 처리하지 못한다. 면역상태 또한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낮다. 그곳이 하루아침에 외부와 차단된 것이다. 코호트 격리 첫날, 나는 요양원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공공기관에서 나온 직원들은 강하게 제지했지만, 시설 안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는 도리어 그분들을 설득했다. 간호사라는 사명감에 덴탈 마스크 한 장에 나를 맡기고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내가 먼저 사지에 뛰어들어 직원들에게 출근해 달라고 설득을 했다. 물론 나도 코로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오로지 보건소와 긴밀한 협조를 유지하며 전달되는 규정과 지침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나의 설득에 위험을 무릅쓰고 직원들이 동참했다. 방호복과 고글, N95 마스크를 처음 착용한 직원들의 피로감은 점점 커져 갔다. 어르신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평소 보지 못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 자체를 보고 두려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밀접 접촉한 어르신 중에 세 명의 확진자가 또 발생하여 수차례의 전수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때마다 확진자가 생겼다. 확진자가 되어도 입원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다. 정부에서도 이렇게 확산되리라는 예측을 못하여 병상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요양원 내에서 확진자와 비확진자가 함께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날 전신 목욕을 시켰던 어르신이 다음날 확진자가 되어도 나는 꿋꿋하게 업무에 집중했다. 생활실을 조정하여 확진자들을 격리시키는 방법을 강구했다. 층을 나누어 격리하고 거실에는 격벽을 설치했다. 확진자가 발생할 때마다 코호트격리 기간은 자동으로 14일씩 늘어만 갔다. 밀접 접촉한 직원들은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근무하는 직원이 달랑 몇 명 남지 않은 한계상황에 도달했다. 대체 인력을 구하기 위해 높은 임금을 제시하여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고, 혹여 나온다 해도 이삼일 근무하고는 나가버렸다. 방호복을 착용하고 근무하는 일은 상상 이외로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자가격리가 끝난 일부 직원들이 업무에 복귀하였으나 상황은 역부족이었다. 대형병원들이 입원실을 마련하여 코로나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하였다. 국공립 병원들도 차차 병상을 확보하여 코로나 확진자가 입원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확진된 직원과 어르신들은 모두 병원과 치료시설로 이송되었다. 직원 8명과 어르신 17명이었다. 생활치료 시설들이 개설되어 무증상 확진자인 직원들도 차례대로 이송되었다. 상태가 위급한 직원이 국립의료원으로 이송되어 인공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다는 소식에 절망하였고, 입원 중인 어르신의 사망 소식에 울음바다가 되었다. 요양원에 남은 어르신들을 직접 돌보는 일부터 간호부장 업무를 소홀히 할 수 없어서 나는 24시간이 모자랐다. 근무하고 있는 요양보호사들을 격려하고 힘든 마음도 감싸주어야 했다. 매일 수도 없이 보내오는 공문서와 지침을 확인한 후, 일일이 답을 보내고 직원들에게 전달했다. 직원들이 어르신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대단했다. 잠시 쉬다가도 식사 시간이 되면 벌떡 일어나 수발을 들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나는지 놀라웠다. 우리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란 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힘들수록 더 협조적이고 서로를 격려하며 단단해져 갔다. 며칠 후면 코호트 격리가 해제되리란 희망에 서로를 의지하여 이 전쟁이 어서 끝나기를 바라며 버텼다. 시설 내의 상황이 수그러들면서 코호트격리가 해제가 예상되자, 어르신들과 직원들의 전수검사가 시행되었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심장이 타는 듯했다. 늦은 밤, 청천벽력 같은 검사 결과를 전해 받았다. 코호트격리가 14일 연장된다는 것이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보이지 않는 적과 더욱더 힘든 전쟁을 치르라는 통보였다. 절망으로 직원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몸과 마음이 한줌 기운도 없이 소진되었다. 아,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고 느껴졌다. 공교롭게도 어느 나라 노인요양원에서 백여 명이 사망하였다는 보도가 위기감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 외롭고 무서웠지만 견뎌야만 했다. 직원들과 어르신들을 지켜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또 서로의 눈빛으로 다짐했다. 두 시간도 아니고 24시간 방호복을 입고 최일선에서 어르신들을 돌봐야 하는 우리에게는 오로지 소명감이 힘이었다. 다만 국가적으로 관심이 집중되어 여러 면에서 신속하게 지원을 받는 대형병원들의 소식을 접하게 되면 소외된 기분이 들어 서러움이 복받치기도 했다. 우리 요양원은 자원봉사자도 한 명 없었다. 인력과 물품도 부족하여 마스크 한 장, 장갑 한 켤레도 아껴야 했다. 간식이나 도시락을 주문할 때도 코로나 감염시설이라고 매번 거절당했다. 가족이나 지인들이 택배를 부탁해도 배달하기 어렵다는 대답이 돌아왔고, 배달을 온다 해도 도로변에 물건을 두고 도망치듯 달아났다. 직원이나 어르신이 병이 나서 아파도 진료를 받을 수가 없었다. 우리 요양원은 점점 전염병 환자들이 모여 있는 절해고도가 되어 갔다. 지친 몸을 이끌다가 풀썩 의자에 주저앉으면 그 자리가 쪽잠자리가 되었다. 갇혀서 죽는 꿈을 꾸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디에도 도움을 호소하기 힘들었다. 드러나는 일이 아니라도 빛나는 일이 아닐지라도 나의 직분이기에 최선을 다해 코로나와의 전쟁에 맞서는 수밖에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지 않은가. 벚꽃이 흩날리는 지난해 4월, 드디어 코호트격리 해제를 위한 전수검사가 시행되었다. 하루 뒤면 결과가 나온다. 코호트격리가 해제되기를 기다리는 내내 서러움이 복받쳤다. 38일간의 사투가 헛되지 않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그토록 간절할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세상은 봄 햇살로 눈부셨다. 방호복을 벗고 서로 부둥켜안았다. 눈물이 쏟아졌지만,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비록 외진 지역의 요양원이었지만 우리 용사들이 38일간의 전쟁을 끝내고 당당하게 퇴근하는 모습에 가슴이 벅찼다. 일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요양원은 최초의 코로나 집단감염 시설이라는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전쟁 같은 시간을 견뎌내고 안정을 찾았다. 초여름의 푸른 나뭇잎이 싱그럽다. 직원들과 어르신이 정원에 나와서 산책을 한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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