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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암재 위계철(魏啓哲,1840~1913) 자 치선(致善), 호 모암재(帽巖齋), 장흥 행원리 출생, 문집 <모암집>. ‘괴봉 위대용, 취수헌 위천회’를 잇는 후손,
부친은 ‘행계(杏溪) 위장’. 동생 ‘위계충’은 무과 출신. 그 시절 ‘관료부패, 신분모순, 외세유입, 척사동학’ 등 사회적 갈등으로 점철됐던
조선 후기를 보냈다. 2) 모암재의 '독곡청풍(獨谷淸風)' 그가 남긴 ‘장흥府(邑) 8경’중에 ‘제3경 獨谷淸風’은 그 관점이 꽤 심장(深長)하다. 나머지 7景이야 ‘사자(獅子)귀운, 억불(億佛)모종, 석대(石臺)총죽, 신흥(新興)모종, 예강(汭江)어화, 감호(鑑湖)재월, 연곡(淵谷)취연’ 등 그간에 익숙한 장흥풍경들이다. 그러나 ‘獨谷’에 있어 다른 사람들이 말한 ‘獨谷漁火’ 대신에 그는 ‘獨谷淸風’을 내세웠다. 獨谷의 본령을 은사(隱士) 내력과 절의 淸風으로 직시한 데에 ‘모암재’의 가치관과 식견이 드러난다. 장흥 獨谷은 ‘송호(松湖) 강변, 추강조대, 독곡조대, 청은정, 독실포, 독취정’ 일대로, 장흥 은자(隱者)의 풍영지소라 할 수 있다. (‘독취정’은 모암재가 타계한 후, 1933년에 들어섰다) 그는 ‘사인정, 용호정, 부춘정’ 차운詩도 남겼기에 장흥 향곡(鄕曲) 사정을 잘 알고 있었을 것. 제3경, 독곡청풍(獨谷淸風), 모암재 위계철 爽氣淸明百世香 청명한 절의와 기상은 백세향(百世香)이고 獨谷은 ‘독실(犢失)浦’의 ‘독실’과 같은 말로, “독(石,돌)이 많은 계곡(실)”을 한자어 독곡(獨谷)으로 받은 것이다. 그 ‘獨谷’에는‘獨谷 정명세(1550~1592)’가 있었다. 1570년 진사, 1576년 문과급제자로 해미현감을 역임했고, 임란 진주성 싸움에서 42세로 의롭게 순사하였는데, ‘獨谷조대(釣臺)’ 사연을 남겼다. ‘오류(五柳)’는 중국 남조의 은사(隱士) ‘도연명(365~427)’이고, ‘사명객(四明客)’은 당나라 은거詩客 ‘하지장(659~743)’이다. 獨谷에 있는 ‘대석(坮石, 傳石)’으로는 ‘추강 남효온(1454~1492)’의 <조대記> 현장 秋江조대와 ‘독곡 정명세’의 獨谷조대 등이다. ‘釣臺 유허碑’가 있었다. 남효온은 ‘윤구, 이침(李琛)’등 그 무렵 유배객 은거객과 어울렸다. 그 부근 ‘감호(鑑湖)’에는 장흥선비 ‘송담 전유추(1594~1674)’가 은거하였다. 부근 송호(松湖) ‘청은정(淸隱亭)’에는 ‘광주이씨 이만원(1671~1733)’이 은거하였다. 詩 말미에 나온 ‘산양(山陽)’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은거 소요처, 중국 하내현 山陽을 끌어온 것.(여기 山陽을 두고 ‘보성 땅 산양’으로 옮길 수는 없다. 문맥적이든 지리적이든 무관하다.) ‘모암재 위계철’ 선생은 그런 獨谷에 얽힌 절의와 은거풍광을 ‘獨谷淸風’으로 내세우고 싶었으리라. 그 역시 내내 淸風의 꿈을 꾸었을지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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