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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지 비유에 나타난 가룟 유다
마가복음 14:17~21
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세상에 꿈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든 나름 크고 작고는 있을지언정 이렇게 저렇게 살고 싶은 목표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 기대를 지니고 살다가 이것이 허상으로 끝날 때 다가오는 허탈감을 누구나 겪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유한한 능력을 지닌 인간에게는 앞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빗나가 실망하는 모습이 성경에는 아주 많이 등장합니다.
사 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극상품, 즉 최고의 포도나무를 심고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더니 이게 웬 말입니까? 형편없는 들 포도를 맺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는 그분의 뜻대로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함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한 인간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주셨지만 이를 짓밟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모습과 사람에게 기대했다가 그것이 물거품이 되면서 부르짖는 탄성이 많은 부분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징계하셨다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모습을 보이면 다시 안아 주시고 축복하여 주시는 모습을 여러 곳에서 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반응하는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느끼고 반응할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시간이 흐르더라도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예수님을 배반하는 가룟 유다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
‘가룟’이란 말은 유다가 태어난 고향 이름입니다. 그리고 ‘유다’라는 말은 ‘찬양’이라는 뜻을 가진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의 뜻이 너무 좋으므로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유다라는 이름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배신하고 스승을 팔아먹은 유다를 가리켜서는 ‘가룟 유다’ ‘예수를 파는 자 될 유다’라는 말이 수식어로 따라다닙니다.
그런 유다를 제자로 부르셨지만, 또한 그가 배반할 것을 예수님은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고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를 풀 수 있는 열쇠는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된 가라지 비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밭에 좋은 씨를 뿌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싹이 나왔는데 가라지가 보이는 것입니다. 마 13:27,29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고 하십니다.
추수 때까지 가라지가 함께 자랐습니다. 추수 때에 가라지만 보면 헛수고를 한 듯한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거름을 주었는데 이 가라지가 영양분을 빼앗아 갔을 것으로 생각하면 억울한 마음도 들 것입니다.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가라지 비유를 통하여 유다를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랑의 인내를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의 한 작은 다락방에서 가지셨던 최후의 만찬에 관한 기사입니다. 유대인들은 일 년에 한 번 애굽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 절기를 지켰습니다. 누룩 넣지 않는 떡과 붉은빛 포도주를 준비합니다. 누룩 넣지 않는 떡은 순수성을, 붉은빛 포도주는 피를 상징합니다. 고기는 어린양을 잡아 준비하고, 나물은 「카
로세드」라 부르는 쓴 나물을 준비합니다. 그들이 쓴 나물을 먹는 것은 애굽에서 지낸 고통스러운 날들을 상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할렐」이라는 시편을 노래합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수백만 명씩 예루살렘으로 모여 유월절 절기를 지켰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유월절 전통을 생각하시며 떡과 포도주로 유월절 식탁을 마련하게 하셨고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막14: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에 베드로와 예루살렘 성내로 보내셔서 유월절 음식을 함께 나눌 객실을 준비하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물 한 동이 가지고 가는 남자를 만났고. 그를 따라가서 한 집에 들어가서 집주인을 만났습니다. 집주인은 그들에게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유월절 준비가 끝나자, 베다니로 되돌아 왔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날이 저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데리시고, 유월절 음식이 준비된 예루살렘 성내의 다락방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요 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하시면서 제자 중 하나는 자기를 배반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막 14:18에서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 결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고 말입니다.
가라지 비유에서 밭에 좋은 씨를 뿌렸지만, 가라지가 보였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 가리지를 제거하지 않고 ‘가만 두라’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을 보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자기를 배반할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유월절 음식을 함께 나누면서 그에게도 구원의 은혜가 임하기를 원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차별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의미하는 유월절 음식을 먹으며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두 번째는 자기를 돌아보아 겸손함을 깨우치시기 위함입니다.
막 14: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제자들의 반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막 14: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저마다 ‘나는 아니지요?’하고 물었습니다. 이 ‘나는 아니지요?’라는 물음에는 다분히 제자들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자기들의 속성에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이 자리에서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라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다 주를 버릴찌라도’라는 표현은 영어는 'stumble', 즉 흔들리다, 발에 걸리다 라는 뜻으로 나옵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의 말은 ‘나는 결코 주님으로 인해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베드로 이런 자부심 넘치는 고백이 있기 직전, 예수님께서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따른다는 것은 의지적인 결단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나의 연약함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룟 유다처럼 배반하지 않으리라는 착각도 하지 마십시오! 좋은 씨와 더불어 가라지도 함께 자라고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쉬지 않고 가라지의 영향을 받아 예수님에게서 떠날 수 있음을 명심하고 늘 깨어 기도하며 주님을 철저하게 의지하는 믿음을 가져야 함을 예수님께서 교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최고의 비극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넘길 자가 누구인지 궁금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막 14: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자신을 넘길 자에 대한 사람을 콕 찍어 말씀하지 않으시고 암시적으로만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식탁에는 양념을 담는 그릇이 놓여 있었습니다. <카로셋>이라고 불리는 양념은 여러 과일과 견과류를 으깨어 식초에 버무린 것이었습니다.
이는 애굽에서 벽돌을 만들 때 사용했던 진흙을 상징했습니다.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 떡과 쓴 나물을 양념에 적셔 먹었습니다. 양념 그릇은 두세 사람이 공유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었다는 것은 예수님 바로 곁에 앉았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애틋한 정을 보이시면서, 그가 돌이키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오래 기다리시며 사랑하셨던 마음을 저버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세도 전연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막14: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시41:9에 기록된 말씀 곧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하신 대로, 예수님과 함께 먹으며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에 의하여 팔리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어떻게 됩니까?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룟 유다에게는 화가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못에 던져졌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영혼을 은 삼십에 판 셈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이것처럼 비극적인 표현이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나지 아니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표현에는 무섭고 떨리는 영원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3장 말씀을 보면, 그는 바로 이 시점에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습니다.
가라지 비유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종들을 시켜 좋은 씨를 뿌렸지만, 그 가운데 가라지도 자라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 가라지에 대하여 밤중에 원수가 와서 그 밭에 가라지씨도 덧뿌렸다고 하였습니다. “이 가라지를 뽑아 버릴까요?”라는 종들의 제안에 주인은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게 될까 염려된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었다가, 추수 때에 추수꾼들에게 가라지를 먼저 거두어 불사르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밭에는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열두 제자틈에 가라지 같은 역할을 하는 가룟 유다가 있으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고 따르기 위한 교훈을 알려주며 믿음에 굳건하게 설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까지 마음에 품고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넓을 사랑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라지는 불사르는데 내어 줄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심판의 때를 벗어나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통하여 내 삶이 풍성하게 결실을 이뤄야 합니다.
어떤 곡식이든지 결실기에 이르면 그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가라지 역시 어느 정도 생장기까지는 자기의 실체를 감출 수 있을지 모르나 결실기에 이르면 필연코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뭉개버렸고 마귀의 미혹에 빠져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의 흐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지 못하고 믿음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이것을 무서운 비극의 문으로 들어가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끌까지 인내하시며 기다리시는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주께로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