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틀담의 곱추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틀담의 곱추' 가 있는데, 그것은, 프랑스 파리 노틀담 성당에서 살고 있는 곱추의 이야기입니다.
파리 시민들은 노틀담 성당에 살고 있는 그 곱추를 마치 벌레 보듯이 피합니다. 그는 누구도 가까이 가기 힘든 더러운 외모를 하고 있었습니다. 파리 시민들은 그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와 달랐습니다.
노틀담의 곱추는 성당의 누구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더러운 얼굴에서는 항상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파리의 사람들이 그를 더럽다고 외면을 해도 그는 늘 웃고 있었습니다.
파리시민들은 그의 그런 미소를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노틀담 성당의 기둥에는 그리스어로, '예넹케' 라는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말의 뜻은 우리말로 굳이 해석하자면,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아니 그 보다도 더한 긍적적인 언어입니다. 즉, 자기의 어떠한 삶이라도 전부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운명을 받아들인다.
고통의 운명을 해결한다.
고통은 해결은 받아들이는데서 시작된다.
노틀담의 곱추는 자신의 불우한 환경을 그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겁니다.
삶이란, 그런 겁니다. 받아 들인다는 것, 산을 오르면서의 한걸음 한걸음의 고통을 음미하면서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는 것.
'예냉케'라는 의미는 불교에서의 '해탈'의 의미와도 통하는 말 같습니다.
“묵호 어판장 리어카꾼들 중에 외팔이가 한 분 계시다. 나이는, 대충 칠순은 넘으신 거 같고, 키가 작고 까마잡잡하다. 오른쪽 팔 손목 위에서 절단이 되었고, 절단 부위를 항상 거침없이 내놓고 다니신다.
외팔이 그 분은 아마, 묵호항에서 제일 유쾌하고 시원시원 할 것이다. 가끔 사소한 일 때문에 큰 소리가 오가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는 묵호항 누구와도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 그의 잠자리도 불분명한 것으로 보아 주거지도 일정치 않는 모양이다.”
인문학이라는 말을, 아마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고찰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면, 아마 위의 두 사람, 묵호어판장의 외팔이와 노틀담 성당의 곱추의 살아가는 방식이야말로 인문학적 삶이 될 것입니다.
지식인들의 입에 발린 인문학 이론 보다도 그들의 삶의 방식에서 우리는 인문학의 진정한 의미와 삶의 방식을 배울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노자에 보면
"道可道, 非常道"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道가 무엇이라고 이미 말해버린다면, 그것은 이미 常道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道와 常道의 차이점은 道는 철학적 인문학적 의미의 道이고, 常道는 현실의 삶에서의 道, 즉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식자들의, 혹은 철학자들의 道에 대한 이론과 의미는 이미 道의 옳바른 인식에서 벗어낫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삶이란 道란 묵묵히 고통을 받아 들이며 살아가는 민초들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道는 못나고 힘들고 약하고 불쌍한 곳에 있을 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태어나 자신만의 삶의 방식대로 살다가 죽는다. 그 과정은 신체적인 조건과 기능, 장기 역할의 노후로 인한 生老病死일 수도 있고, 또한 예상치 못하고 갑작스러운 사고에 의해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필연적으로 인간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운명적 존재라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는 지위고하, 빈부격차, 남녀노소, 신분의 귀천과는 전혀 상관없이 평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닥쳐오는 절대적인 운명이다. 다만, 언제 어느 순간에 찾아올지 모르는, 라나(k. Rahner)의 말처럼
“어두운 운명이요, 밤에 찾아오는 도둑”
이라고 했듯이 어찌 보면, 인간이라는 생물체의 탄생 이후에 죽음에 대한 사유는 생명과 함께 가장 오래된 예술적 철학적 사유가 아닌가 한다.
서양은 죽음을 불멸로 극복하려 한다면 동양적 사유는 죽음을 자연스러운 변화로 받아들인다.
어떻게 수용하든지 동양적, 즉 장자의 입장에 선다.
장자는 죽음을 자연스러운 변화로 받아들인다. 기가 변해서 생명이 되고 죽음 또한 기가 변화하는 모습의 하나일 뿐이다.
삶과 죽음의 본질을 깨달으면서 계절의 변화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죽음을 바라본다.
장자가 바라보는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은 생사를 벗어나 바라보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을 벗어나 끝과 시작이 없는, 즉 생사를 잊는다는 것이다.
생사를 하나라고 생각한 이유는 모든 것에 순응하고 흐름에 따른다는 삶의 자세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https://cafe.daum.net/gumjinhang/jMdc/5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