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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21일(부활 후 일곱 번째 주일)
출애굽기 3:1~12
삶터영성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제가 최근에 들었던 명언 중에 이런 명언이 있습니다. “돈을 버는 것 기술이고, 잘 쓰는 것 예술이다!” 이 말이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전에 필리핀이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 부부가 부정 축재한 재산이 무려 100억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11조 3,2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결국 마르코스 대통령 부부는 필리핀 국민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서, 하와이로 서둘러 도망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부부는 미군 수송기 두 대에 다이아몬드와 금괴, 헌금, 옷과 귀금속 등을 가득 실어 갔다고 합니다.
마르코스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 여사는 의복과 장신구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35벌의 밍크코트, 1,200벌의 드레스, 1,500개의 핸드백, 검은 브래지어 500여 장, 구두가 무려 3,000켤레였다고 합니다. 과연 이 많은 물건이 그녀에게 꼭 필요했을까요?
“행복은 욕망 분의 소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욕망이 크면 클수록 행복감을 느끼는 행복 지수는 낮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인간의 욕망이 작아질수록 행복 지수는 올라갑니다. 우리나라 국민도 과거에 비해 이렇게 경제가 좋아졌는데도 행복 지수가 낮은 이유는 물질에 대한 욕망이 크기 때문입니다.
-출처: 신만교, 「순례자 영성」 (서울: 토비아, 2020), 65-66.
제가 언젠가 시내에 나가서 식사할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등 뒤에서 여성 두 명의 대화 소리가 저에게 들렸습니다.
대화의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아마도 두 분 모두 미용업계에서 근무하시는 분들 같았습니다. 파마를 어떻게 해야 하느니, 염색약이 몇 호부터 몇 호까지가 있는데 요즘 일하는 아가씨들이 그것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는 둥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그런데 두 분의 대화가 무르익어 가면서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세요. “예전에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에게 직업은 자아실현의 한 방법이라고 배웠는데, 요즘 같은 시대에 직업을 통해서 자아를 실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 그저 하루하루 벌어 먹고살기도 바쁜 시대에 직업을 통해 자아를 실현한다는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냐?”
제가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분 말이 현실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인데, 무척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실 요즘처럼 고되고 바쁜 시대에, 직업을 통해서 자신의 자아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자신이 다니던 직장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직장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몇 년 전, 제가 국민일보 기사를 보니까, 국내 500여 기업을 조사했더니 중소기업에 다니는 분들의 최근 1년간 평균 이직률이 18.0%였다고 합니다. 이런 수치는 대기업(10.9%)에 다니는 분들의 약 2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왜 중소기업에 다니시는 분들의 이직율이 높은지를 살펴봤더니, '연봉 불만족'(26.4%)이 가장 많았고, 그다음으로 '업무 불만족'(18.0%), '기업문화 부적응'(9.8%), '동료와 불화'(6.3%) 등이 그 뒤를 따랐다고 합니다.
반면 대기업 직원들은 '업무 불만족'(30.8%)이 1위, 그다음이 '복리후생 불만족'(7.7%) 그리고 3위가 '타사의 스카우트 제의'(7.7%)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어요.
정리하면, 중소기업에 다니시는 분들은 주로 연봉이 적어서 이직한다고 대답했고, 대기업에 다니시는 분들은 연봉 보다는 그 외적인 요소들 예를 들어, 업무 불만족 같은 이유로 이직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일과 소명에 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읽었던 출애굽기 3장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1절에 보면,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1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자기 양이 아니라 자기장인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모세는 도망자였습니다. 그는 40세까지 애굽의 왕자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히브리 사람을 괴롭히던 한 애굽 사람을 쳐 죽인 죄로 그는 지난 40년간을 미디안 광야에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가 다행히 십보라 라고 하는 사랑스러운 여인을 만나 아들을 낳았지만, 그는 벌써 80세의 노인이 되었고, 그는 장인 이드로의 양이나 치는 별 볼 일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꿈과 비전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고, 그나마 양 치는 일은 그의 삶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었습니다.
자! 이런 모세의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과연 이런 늙은 양치기에게 꿈이니, 비전이니, 자아실현이니 이런 단어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시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어느 날, 모세가 양들을 몰고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모세는 우연히 한 떨기나무를 보았습니다. 그 떨기나무는 불이 붙고 있었으나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모세는 그 나무를 향해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그때 모세에게 하나님의 큰 음성이 들렸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모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고,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던 이름, 모세!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일터에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일터에서 그에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성경을 조금만 더 넘기다 보면, 비운의 여인 룻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서, 그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일터를 찾은 것이었습니다.
룻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터로 나가야만 했습니다. 그것도 반듯한 정식직원이 아니라, 하루하루 추수하는 곳에서 떨어진 곡식이나 줍는 허드렛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룻과 그 시어머니 나오미는 하찮게 여겨지는 그 일터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룻은 보아스라고 하는 남자를 일터에서 만나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일하던 마태를 부르셨고(마 9:9), 바다에서 그물 던지던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셨습니다(마 4:18). 이들은 모두 삶의 터전에서 자기 일에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직업과 일터에 관한 성경 적인 시각이 필요합니다. 일터는 단지 경제적인 수입을 얻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 축복의 현장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일하고 있는 일터가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의 일하고 있는 그 일터에서 여러분을 부르시고, 여러분을 축복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일터에서 부르신다는 이야기는 잘 어울리지 않는 말처럼 들립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를 기도하고 있는 성전에서 부르셨다거나, 혹은 내가 주님을 위해 영적인 사역을 감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고 한다면 그것이 더 어울리는 일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마치 양을 치는 일과 불타고 있는 떨기나무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장 영적인 일은 가장 현실적인 곳에서 일어납니다. 마치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영적인 의미가 가장 현실적인 빵과 포도주 안에서 들어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처한 삶의 현실이 어떤 곳인지를 알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터가 단지 생계의 수단이거나 혹은 나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장소임을 알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절).”
하나님은 모세가 선 곳이 거룩한 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곳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장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혹 여러분이 다니는 직장은 아주 사무적이거나 인간미가 떨어지는 곳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여러분의 소중한 시간과 재정을 회사 일에 사용할 수도 있고, 때로는 내키지 않지만 직장 동료나 상사에게 가식적인 충성심을 보여주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원활한 업무를 위해 적당히 둘러대서 일을 처리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맞지 않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우리가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이 사회는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성과를 요구하고, 그 성과를 통해 우리를 평가합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에 더욱 귀 기울여야 합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 너는 그곳에서도 나를 예배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길 원하십니다. 물론 여러분은 남들보다 좀 더 일찍 출근해서 기도로 하루를 열 수 있습니다. 밀리는 버스 안에서 성경을 읽으며 하루를 열 수도 있습니다. 이런 방법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아주 훌륭한 방법들입니다.
그러나 직장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이 그런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맡은 업무에서 최선을 다해 일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남들이 편법과 부정직한 방법을 사용하려고 할 때, 여러분은 그러한 방법을 거부하고 정직하게 일하는 자세를 보임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혹은 여러분이 다니는 회사가 정당한 이윤을 남기도록 하거나, 여러분이 거래하고 있는 거래처에 도움이 되도록 배려함으로써, 여러분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새로 입사하여 업무를 파악하느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신입사원이나, 자녀의 어려움으로 고통 가운데 있는 동료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함으로써 여러분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경우이든 간에, 우리의 직장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한 목적만을 지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직장에서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누어 주는 일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점에 대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교회에 와서 드리는 예배만이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당신을 예배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나누어 주는 삶을 실천함으로 우리가 삶의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처한 삶의 자리가 거룩한 곳임을 알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얻게 되는 유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직장생활을 통해서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해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소중한 일을 위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러한 원대한 계획을 듣고는 하나님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11절)”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
저는 이러한 모세의 대답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지금 그의 나이는 80세였고,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계획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모세는 자신의 표현대로,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였습니다. 위대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좋은 언변은 필수적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모세의 입장이라면, 여러분도 모세처럼 순종하지 못할 두, 세 가지의 그럴싸한 이유를 댈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내가 누구입니까? 나는 목사도 아니고, 선교사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나는 주님을 위해 많은 시간을 내지도 못합니다. 직장 일과 아이들 뒤치다꺼리와 교회일 만으로도 저는 지금 충분히 지쳐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혹시 이 대답이 여러분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차례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12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 4:11-12).”
사실 “모세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말을 잘한다고 한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중요한 것은 누가 모세와 함께하시는가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 입니다(14절). 여기서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은 ‘나는 나다’라는 의미입니다.
가령, 어느 가장이 밤늦게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왔습니다. 집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아이들이 묻습니다. “누구세요?” 그 때 밖에서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나다! 문 열어라.”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너희들이 문을 열어 주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거나 설득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다!”라는 그 한마디만으로도 자녀들이 문을 열어 주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권위를 나타내고, 아버지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모세가 순종하지 못할 이유를 늘어놓자,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친히 모세에게 지팡이가 뱀이 되는 표징과 손에 나병이 생기는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말 못하는 모세를 위해 말 잘하는 형 아론을 그에게 붙여 주시고, 능력의 지팡이도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자! 전능의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는데, 모세에게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이 직장에서 겪는 말 못하는 고통과 어려움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여러분이 직장과 가정과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감당하고 있는지도 이미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직장에 복을 주시고, 여러분이 직장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직장에서 선교사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이 직장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고, 복음을 나누라고 여러분을 그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처한 곳이 거룩한 곳임을 깨닫고 여러분이 직장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 부족한 점이 있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더욱 큰 능력을 주시고, 필요할 때 돕는 사람을 붙여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직장을 거룩한 곳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직장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여러분이 할 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에 나에게 할 일이 있고, 아침마다 출근할 직장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감사의 제목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직장이 남들과 비교해 썩 좋지 않더라도 감사하십시오. 왜냐하면 감사는 환경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여러분이 일에 대한 보상에 감사하십시오.
많은 사람이 자신이 일한 것에 비해 정당한 보상을 받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어느 정도 받는 것이 과연 정당한 보상인지는 내가 함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봉급을 주는 사람과 봉급을 받은 사람 사이에 시각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느끼기에, 충분한 보상이 아닐지라도 일에 대한 보상에 감사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빈궁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하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여러분이 여러분과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감사하십시오.
우리는 만나는 사람들을 통하여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축복하기 위해 보낸 사람들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감사하십시오. 그러나 혹시 그렇지 못하더라도 감사하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여러분을 성숙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여러분에게 육일 약국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김성오 씨가 지은 「육일약국 갑시다!」 (21세기 북스, 2007)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분은 서울대 약대를 졸업하고, 마산으로 내려가 채 다섯 평도 안 되는 작은 약국을 운영했습니다.
어느 날, 이분이 시내에서 볼일을 보고 약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탔는데, 약국 위치를 설명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차피 위치를 설명할 포인트도 없는데, 우리 약국을 랜드마크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그래서 이분은 택시를 탈 때마다, “육일약국 갑시다!”라고 택시기사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약국을 찾아오는 손님과 가족에게도 택시를 탈 때마다 꼭 “육일약국 갑시다!”라고 말하도록 부탁했다고 합니다.
맨 처음에는 택시기사님들이 “도대체 육일약국이 어디냐?”라고 묻기도 했지만, 1년 6개월 동안 계속 이 운동을 벌인 끝에, 마산에 있는 택시기사의 50%가 육일약국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이분은 크리스천으로 매주 교회에 가야 했기 때문에 주일에 약국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헛수고하고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이분은 늘 죄송스러운 마음이 있어서, 아예 약국 이름을 ‘6일만 영업한다.’라는 뜻으로 ‘육일 약국’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이분의 경쟁력은 찾아오는 손님들의 말을 들어주고, 그들에게 공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약사로서, 자기가 손님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친절’뿐이라고 확신하고, 차트를 수시로 들고 다니면서 손님들의 이름을 암기했습니다.
마치 벼락치기를 하는 수험생처럼, 손님이 돌아간 후에도 40~50번씩 손님들의 이름을 외우고, 발음이나 암기가 어려운 이름은 온종일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는 한 호텔 현관에 설치된 자동문을 보고, 자기 약국을 찾는 어르신이나 짐이 많은 손님이 편리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자동문을 설치했습니다. 그래서 마산에서 두 번째로 자동문을 설치한 지역 명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선배의 권유로 한방 공부에 도전해 양약만이 아니라 한약을 조제해서 한약의 ‘향기 마케팅’에 도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변화와 사람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마케팅으로 처음에는 5평으로 시작했던 ‘마산역 육일약국’이 마침내 13명의 약사를 둔 기업형 약국으로 발전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일터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일터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일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복음을 전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일하는 제자로 부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