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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사랑 쉼터 ( 일운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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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노래 스크랩 눈물의 여왕 전옥의 작품과 일대기 노래 - 울음의 벗
하일사랑 추천 0 조회 55 13.04.26 13: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전옥 - 울음의 벗

 

 

      아~ 나는 서러운 몸 폐허 위에서 
          떠오르는 옛 생각에 아~ 오늘도 우네

     아~ 나는 꿈을 따라 헤매이는 몸
           상한가삼 부여안고 아~ 이 밤을 새네 
  
                   아~ 나는 외로운 몸 치밀어 오는 향수일네  

 한숨 지며 아~ 오늘도 우네  

       아~ 나는 울음의 벗 젊은 가삼에 
            눈물의 비 받으면서 아~ 이 밤을 새네

 

 

 

 

 

 

  1927년 <아리랑>의 여주인공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신일선이,

 

전남 화순의 부자 양승환과 조선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독립해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첫 작품 <잘 있거라>(1927년)를 준비하고 있던 나운규에게는,

자신의 영화에서 여주인공을 도맡았던 신일선의 공백이 급작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운규는 <들쥐>(1927년)에서 단역으로 출연했던 전옥을,

신일선 대신 출연시키기로 한다.

사슴 같은 눈에 콧날이 오뚝하여 이목구비가 뚜렷한 전옥은 당시 16세로,

나이는 어렸지만 토월회 무대에 섰고,

<낙원을 찾는 무리들>(황운 연출·1927)에서 주연을 맡은 경험도 있었다.

<잘 있거라>에 출연한 그는 돈에 팔려 부호에 시집가는 황순녀 역을 능숙하게 잘 해냈다.
전옥은 곧 신일선을 대신해 나운규 프로덕션의 대표 여배우가 되었고,

연이어 <옥녀>(1928), <사랑을 찾아서>(1928)에서 주연을 맡으며 스타의 길을 걷는다.

전옥은 1911년 함흥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전덕례다.

영생중학교 2학년 때 가세가 기울자 집에서 그녀를 시집보내려 했다.

배우가 되고 싶어 극단을 기웃거렸던 그는 부모를 설득해 오빠 전두옥과 함께 서울로 내려갔다.
전옥은 복혜숙과 석금성이 스타로 있던 토월회 문을 두드려 그곳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배우의 꿈을 키웠다.


기회가 찾아왔다.

1925년 토월회 창립 2주년 기념공연 <여직공 정옥>과 <농중조>가 광무대에서 상연되던 어느 날,

<여직공 정옥>에서 주인공으로 연기를 하던 석금성이 관객이 던진 사과에 배를 맞았다.

임신 중이던 석금성은 졸도했고 그녀를 대신하여 전옥이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전옥은 다음 공연인 <일요일>에서도 석금성을 대신해 역을 맡았다.

이 공연에서 흥분한 전옥이

"구주대전이 군국주의를 타파한 지가 오래되었다"는 삭제된 대사를 해버리는 바람에,

공연은 중단되고 그는 경찰서에 끌려가 밤새 시달렸다.
전옥은 토월회 무대에서 착실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극단이 갑자기 해산하게 되었다.

1926년 2월 박승희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주요 단원들이 극단을 탈퇴하면서 공연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녀는 영화 일을 하고 있는 오빠를 따라 무대를 떠나 영화로 자리를 옮겼다.

전옥은 앞서 말한 대로 나운규의 작품에 연이어 주연을 맡으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나운규가 자신의 애인인 기생 유신방을,

<사나이>(1928), <벙어리 삼룡>(1929), <아리랑 후편>(1930)에 주인공으로 기용하면서,

전옥은 영화를 떠나 다시 무대로 옮겼다.

1928년 17세의 전옥은 오빠의 전문학교 시절 친구이자 가수, 배우로 활동하고 있던 강홍식과 결혼한다.

그녀는 남편 강홍식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에서 노래를 생방송했고 방송극에도 출연했다.
1929년에는 다시 문을 연 토월회의 무대에 섰으나 이내 토월회가 문을 닫자 지두한이 세운 조선연극사의 무대에 섰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게 만드는 독백으로 유명했으며,

비극의 여인 역을 잘 해 '비극의 여왕', '눈물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30년대 전옥은 남편 강홍식과 함께 많은 음반을 발표했다.

이때 발매된 그녀의 음반은 남편 강홍식과 함께 발표한 여러 노래들과 <항구의 일야>로 대표되는,

자신이 출연한 인정비극을 레코드에 담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중 1934년 남편 강홍식이 발표한 <처녀총각>은 10만장이라는 엄청난 양이 팔렸다.

큰 돈을 번 강홍식은 한 일본여자와 바람이 나서 가정을 떠났고 해방 후 월북했다.

그녀는 라미라 가극단에서 나운규의 <아리랑>을 각색한 <아리랑>(1943)을 비롯해 많은 가극을 공연했다.

가극에 출연하면서 그녀는 다시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 일제에 의해 철저히 통제된 영화계는 친일영화만 만들 수밖에 없었다.

<복지만리>(1941), <망루의 결사대>(1943), <병정님>(1944)이 당시 그녀가 출연한 친일영화다.

 

 

 

▲ 나운규가 만든 <옥녀>의 스틸사진

해방 후 전옥은 전국순회공연을 하던 남해위문대를 백조가극단으로 개칭하여 악극을 공연했다.

그녀는 평생 백조처럼 살기를 원했다.

그래서 극단의 이름도 백조가극단으로 정한 것이었다.

당시 백조가극단의 공연은 1부에 전옥이 나오는 인정비극 <항구의 일야>가 공연됐고,

2부에는 버라이어티쇼로 고복수, 황금심 같은 유명 가수들의 무대로 구성되었다.

수많은 악극단이 명멸했던 그 당시,

전옥의 백조악극단은 모든 면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백조가극단의 공연은 전쟁 중에도 계속되었다.

이즈음 전옥은 극단의 살림을 맡던 일본 유학출신 최일과 재혼했다.

50년대 중반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전옥은 다시 영화로 눈을 돌린다.

자신이 출연한 인정비극 <항구의 일야>(1957), <눈나리는 밤>(1958), <목포의 눈물>(1958)을 영화로 만든다.
50년대 후반 영화가 양산되기 시작하자 전국의 극장이 영화관으로 바뀌어 갔다.

이와 더불어 전국의 악극단은 자연 소멸의 위기를 맞는다.

백조가극단은 주력을 영화로 바꾸었다.

1960년 전옥과 최일은 백조가극단을 백조영화사로 변경했다.

하지만 1962년 영화법이 개정되어 군소영화사들이 퇴출되면서 백조영화사도 문을 닫았다.

60년대 이후 전옥은 무대와 다른 모습으로 영화에 출연했다.

영화평론가 변재란은 전옥이,

<고려장>(김기영 연출·1963)과 <쌀>(신상옥 연출·1964)에서는 무당역으로 신기 어린 카리스마를,

<연산군>(신상옥 연출·1962)에서는 인수대비역으로 강력한 모성과 뒤틀린 권력욕을,

<육체의 문>(이봉래 연출·1965)에서는 시골처녀를 팔아넘기는 포주역으로 악독한 모습을 연기해,

'눈물의 여왕'이라는 별명과 다른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한국영화사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독특하다고 평가했다.

1969년 10월 전옥은 고혈압과 뇌혈전 폐쇄증으로 58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자식들은 남과 북의 영화계를 대표하는 스타가 되었다.

영화배우 최민수의 모친인 배우 강효실과 북한의 대표적인 배우 강효선이 그의 딸이다.

 

눈물의 여왕 - 전 옥

 

 

전옥 /째즈의 멜로디

눈물의 여왕 전옥의 본명은 전덕례로,

16세 소녀시절 오빠 전두옥에게 떼를 쓰다시피하여 배우의 꿈을 안고,

고향 함흥에서 서울로 오게 되었다.
오빠 전두옥은 만능운동가로 나운규의 무성영화에서 스턴트맨으로 자주 출연하였다.

전옥이라는 예명은 오빠 전두옥의 끝이름 글자에서 지어졌다.

1927년 단성사에서 상연된 무성영화 <낙원을 찾는 무리>에서,

임운학 상대역인 여주인공으로 첫데뷔한 전옥은,

11월에는 나운규가 감독한 <잘있거라>에서,

나운규, 김연실, 이금용 일류 인기배우와 출연하면서,

연이어 나운규 감독의 <옥녀> <사랑을 찾아서>에 출연하였다.

 

 

 

 

 

 

낙원을 찾는 무리(1926)

1920년대의 무성영화 제작은 일년에 몇편 정도 밖에 제작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전옥의 활동 무대는 극장무대가 중심이 되었다.

토월회에서 <아리랑고개>를 공연할 때,

여주인공역의 석금성이 사고로 무대에 못나오자 전옥이 대신하게 되었다.

전옥은 북녘 만주땅으로 떠나는 이별장면에서 울음 섞인 절규가 터져나오는 연기로,

관객들의 열렬한 갈채를 받으면서 단숨에 장안의 인기를 모았으며,

레코드회사에서는 전옥을 등장시켜서 노래하는 배우로 음반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4월에 포리돌레코드에서,

<째즈의 멜로디> <살어지는 정염> <님을 두고 가는 나를> 노래하면서,

연극과 넌센스도 음반으로 나왔는데,

강홍식과는 <침묵> 음반과 넌센스로 <카페일경>을 발표하였고,

연이어 극작가 왕평과 전옥이 출연하는 <항구의 일야> 음반(上下편)이 나오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잘있거라(1927)

<항구의 일야> 주제가는 싱어송 라이터인 김용환이 노래하였다.

1939년 1월에도 <항구의 일야> 음반이 나와서,

전옥의 노래보다는 전옥의 연극음반이 전국을 휩쓸었었다.

 

세상이 덧없으니 믿을 곳없어
마음속 감춘 정도 그 누가아랴
잔들어 이 설움을 잊으나 보랴
떠나는 그를 잡고 울어나볼까
외로운 이 한밤을 울며 세우니
하늘가 별빛마저 고향이 그려 고향이 그려

 

빅터레코드에서도 9월에 <풍년맞이> <한세상 웃세> 등 몇곡의 노래가 나왔었다.

1934년 남편 강홍식과 콜럼비아 레코드 전속가수로 1월에 <그리운 님> <섬밤> <실연의 노래>를 시작으로 계속 음반이 발표되었으나,

노래보다는 극장에서 인기가 높아 비극의 주인공으로서의 인기는 계속되었다.

전옥

1932년 전옥 강홍식 부부는 딸 강효실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왔으나,

강홍식의 노래 "처녀총각"이 대힛트 된 이후 차츰 남편 강홍식의 자유분방한 성품이,

내성적이고 감성적인 전옥을 눈물의 여인으로서 슬픔의 여인이 되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분방한 강홍식은 연극배우와 극단무대의 연출가로서 전옥의 곁에 있는것보다도,

항상 밖으로 나도는 시간이 더욱 많았다.

" 말못할 이 사정을 뉘게 말하며
  안타까운 이 가슴 늬게 보이나
  넘어가는 저 달도 원망스러워
  몸부림 이 한밤을 눈물로 사네"

1934년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노래한 <실연의 노래> 가사처럼 안타까운 속사정으로 살아가는 눈물의 여인이었다.
6.25 전쟁때에 월남한 첫딸 강효실(탈렌트 최민수 모친)도
1963년 배우 최무룡과 이혼하여,

눈물의 여왕 전옥은 1969년 사망할때까지 눈물의 여인으로 계속되는 여정이었다.

1951년 국군이 서울을 탈환하고 북으로 진격시 평양에 입성한 육군 1사단 선무공작대에 한복을 차려입은 한처녀가 찾아왔다.

선무공작대는 배우와 가수등으로 조직된 연예대로서,

육군 1사단에는 이종철(희극배우), 최남용(초기의 가수), 송달협(OK 레코드 전속가수), 김희갑(희극배우)등이 있었다.
한복의 처녀는 강효실이었으며 선무공작대에서 서울로 보내어져 그리던 어머니 전옥을 만나게 되었다.
60년대에는 부모의 자질을 이어받아 국립극장에서 연극배우로 연기력을 인정받아,

1965년 변기종, 백성희, 박근영, 여운계, 김금지등과 국립극장 단원으로 무대배우활동을 하였다. 드라마 센터에서는 유치진의 연출 <소> <춘향전>을 어머니 전옥과 같이 출연도 하였다.

목포의 눈물(1958)

전옥과 재혼한 최일은,

1933년 경평축구대회(경성, 평양 축구대항전)에서 평양축구단의 감독으로 나온 축구인으로,

1943년 전옥과 백조가극단을 조직하고,

8.15 해방이후도 백조가극단을 재건하여 흥행사업을 한 인물로 현재 생존하고 있다.

8.15 해방이후부터 1960년초까지 전옥은 극장무대에서 계속 정열적인 연기로 관중의 인기를 끌었다. 연극내용 보다는 전옥의 연기를 보기 위하여 관중들이 모여들었다.

전옥의 연기특징은,

한국여성의 삶과 희비애락이 담긴 모노드라마(독백)에서 천부적인 표현력이 담겨져 있다.

비통한 울부짖는 절규의 연기에 조용한 객석에는 눈물로 젖어 마력에 이끌리듯 하였다.
1950년대 극장 선전문구에는

"눈물없이 볼 수 없는 무대"

"필히 손수건을 준비하시라"는 글이 전옥의 공연에는 필수문구였다.

연극의 레파토리는,

<항구의 일야> <눈나리는 밤> <자장가> <종로의 밤> 등이 주요 레파토리였다.
일제시대 전옥의 상대역으로는 강홍식, 김용환, 장동희등이며,

8.15 해방이후의 상대역은 신영균, 황해, 최봉, 최무룡 등이었다.
1957년에 백조영화사를 설립하여 최무룡, 전옥 주연으로 <항구의 일야>를 제작하고,

1958년에 황해, 전옥 주연의 <눈내리는 밤>과

황해.독고성.최봉,전옥 출연의 <목포의 눈물>을 제작하였으며

저언덕을 넘어서(1960)

1960년에는 김승호, 허장강, 황해와 함께 출연하여 <저 언덕을 넘어서> 영화와,

 김수용 감독 연출인 <버림받은 천사>를 제작하였다.

1958년에는 한국무대예술원상을 처음으로 수상하였다.

1965년에는 <항구의 일야>를 LP음반으로 제작하였는데,

성우 남성우, 천선녀, 배우 김영준, 원희옥이 출연을 하고 주제가는 이미자가 노래하였다.

배우 전옥은 가수로서의 발자취보다는,

극장무대에서 비극의 주인공으로 무대를 장식하였고,

눈물의 여왕으로 연예사의 한폐이지를 장식한 여인으로서 1969년 고혈압으로 눈을 감았다.
1998년 삼성영상사업단의 주관으로 예술의 전당에서,

연극 <눈물의 여왕>을 공연하고 전국대도시 순회공연을 하였다.

1953년 전옥의 백조가극단 공연내용으로서,

대본연출에 이윤택, 전옥역에 영화배우 이혜영,

연희단거리패의 20여명과 신구, 배삼룡등이 특별출연하였다.




 

 

항구의 무명초(1954)


   

 

 

 

 

 

'항구의 일야' 음반표지와 전옥.


그의 자식들은 모두 남과 북의 영화계를 대표하는 스타가 되었다. 영화배우 최민수는 전옥의 외손자이며,

그 어머니 강효실은 강홍식과 전옥 사이에서 난 딸이다.

북한의 대표적인 배우 강효선도 강효실과 자매간이다.

 

1950년대 대구에는 제법 이름 있는 극장들이 있었다.

당시 10대 후반의 소년이었던 나는

아버지를 따라서 극장 구경을 더러 다녔다.

만경관도 갔고, 대구극장에도 갔다.

아버지가 즐겨 찾던 극장의 프로그램은

주로 비극을 테마로 하는 영화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영화 제작 기법이나 기술이

발전된 시기가 아니어서

대개 권선징악이나 벽사진경과 관련된 판박이 줄거리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살아가는 것이 워낙 힘겹고 고단하던 시절이라

비극을 보는 경험은 자신의 가슴 속에 쌓인 한과 슬픔을 털어내는 여과와 조절의 시간이었다.

이 때문에 비극영화를 상연하는 극장 앞은 인산인해로 넘쳐났다.

'목포의 눈물' '눈 나리는 밤' 등이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기억된다.

흑백으로 만들어진 이 비극 테마 영화의 대부분에서 단골 배역을 도맡았던 한 배우가 있었다.

그가 바로 전옥(全玉)이다.


영화배우 전옥은 1911년 함흥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전덕례(全德禮)다.

함흥 영생중학교 2학년 때 가세가 기울자 집에서 그녀를 시집보내려 했다.

하지만 배우가 되고 싶어 극단을 기웃거렸던 그는 부모를 설득해 오빠 전두옥(全斗玉)과 함께 서울로 내려갔다.

전옥은 복혜숙과 석금성이 스타로 있던 토월회 문을 두드려 그곳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배우의 꿈을 키웠다.

전옥은 토월회 무대에서 착실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이후 극단이 해산하게 되면서 영화 일을 하고 있는 오빠를 따라 무대를 떠나 영화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부터 전옥이란 예명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은 본명 대신에 오빠의 이름 끝자를 끌어와서 만든 것이다.

맨 처음에는 나운규와의 인연으로 시작되었다.

1928년 17세의 전옥은 오빠의 전문학교 시절 친구이자 가수, 배우로 활동하고 있던 강홍식과 결혼한다.

그녀는 남편 강홍식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에서 노래를 생방송했고 방송극에도 출연했다.

29년에는 다시 문을 연 토월회의 무대에 섰으나 이내 토월회가 문을 닫자 지두환이 세운 조선연극사의 무대에 섰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게 만드는 독백으로 유명했으며

비극의 여인 역을 잘 해 '비극의 여왕' '눈물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광복 후 전옥은 전국순회공연을 하던 남해위문대를 백조가극단으로 개칭하여 악극을 공연했다.

당시 백조가극단의 공연은 1부에 전옥이 나오는 인정비극 '항구의 일야'가 공연됐고,

2부에는 버라이어티쇼로 고복수·황금심 같은 유명 가수들의 무대로 구성되었다.

수많은 악극단이 명멸했던 그 당시, 전옥의 백조가극단은 모든 면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백조가극단의 공연은 전쟁 중에도 계속되었다.

이즈음 전옥은 극단의 살림을 맡아보던 일본 유학 출신 최일과 재혼했다.

50년대 중반,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전옥은 다시 영화로 눈을 돌린다.

자신이 출연한 인정비극 '항구의 일야'(1957), '눈나리는 밤'(1958), '목포의 눈물'(1958)을 영화로 만든다.

60년대 이후 전옥은 무대와 다른 모습으로 영화에 출연했다. 그러다가

눈물의 여왕 전옥.
전옥·황해·김승호·허장강 주연의 1960년 제작 영화 '저 언덕을 넘어서'의 한 장면.
1958년 출연 영화 '자장가'의 한 장면.

1969년 10월 전옥은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자식들은

모두 남과 북의 영화계를 대표하는 스타가 되었다.

영화배우 최민수는 전옥의 외손자이며,

그 어머니 강효실은 강홍식과 전옥 사이에서 난 딸이다.

북한의 대표적인 배우 강효선도 강효실과 자매간이다.

 

가수로서의 전옥은

영화의 선전 효과를 높이기 위해

주제가나 관련되는 곡을 직접 부른 경우가 많다.

'실연의 노래'(범오 작사, 김준영 작곡, 천지방웅 편곡, 1934)는

1930년대 초반 당시 유행하던 풍조 중의 하나인

자유연애 사상을 한껏 고취시켜 주었다.

 

'말 못할 이 사정을 뉘게 말하며/

 안타까운 이 가슴 뉘게 보이나/

 넘어가는 저 달도 원망스러워/

 몸부림 이 한밤을 눈물로 새네.'

-'실연의 노래' 1절


전옥이 부른 노래의 창법은

가슴 속에 깊이 가라앉은 슬픔을 다시 불러일으켜서

그것을 과장하지 않고, 스스로 조절하고 정리하여

심정적 안정을 느끼게 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이 점은 전옥이 출연했던 영화에서 시도된 방법과도 일치된다.

위에 인용한 '실연의 노래'만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상적 삶에서의 로맨스를

중심 테마로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실연이라는 테마를

좌절과 비탄으로 빠지지 않게 하고,

저급한 센티멘털리즘으로 떨어지는 것도 거부한다.

역시 전옥이 부른 노래 '피지 못한 꿈'도

청년기 특유의 애잔한 심정을 잘 담아낸 노래다.

특히 2절 가사는

'네온사인 불 밑이라 피지 못한 꿈 피지 못한 꿈'이란

대목을 통해 식민지적 근대와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청년기의 내적 고뇌를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전옥이 남기고 있는 상당수의 가요 작품들은

시인 유도순이 노랫말을 만든 곡들이다.

작곡가로는 김준영과 호흡을 잘 맞추었다.

작사가, 작곡가 두 사람은 전옥의 감성과 표현능력을

잘 이해하여 그 효과에 잘 부합되는 작품을 만들어 주었다.

 

아리따운 처녀의 고운 자태를 묘사한

'첫사랑'(범오 작사, 김준영 작곡)과

'수양버들'(유도순 작사, 전기현 작곡, 1936)의 가사에서

마치 혜원 신윤복이 그린 한 폭의 한국화를 보는 듯한

전통적 감각과 고풍스러운 색조가 느껴지는

어휘구사도 돋보인다.

이를 전옥 특유의 창법이 잘 소화시켜 내고 있는 것이다.

 

전옥의 가수로서의 특징을 가장 잘 살려낸 최고의 걸작은 역시 악극 대본으로 구성한 '항구의 일야'를 손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의 여주인공은 사랑에 모진 상처를 겪고 삶의 좌절로 이어지는 탄심이란 인물이다.

이 배역을 전옥이 맡아 크나큰 성공을 거두었다.

탄심의 연인이었던 상대역으로는 이철이란 인물이 설정되었고,

탄심의 친구로 영숙과 의형제를 맺었던 박민이란 인물이 좌절 속에 빠진 탄심을 위기에서 구출해준다.

이 악극의 삽입곡을 원래 남일연이 취입했는데,

광복 후 이미자에 의해 재취입되어 LP음반으로 발매된 적이 있다.

이 음반을 통해 들어보는 전옥의 대사는 산전수전과 세상의 풍파를 다 겪은 노배우의 관록과 역량을 물씬 느끼게 한다.

이렇게 해서 가수와 배우로서의 전옥의 생애는

오로지 가파른 세월의 부담이 주는 중압감과 그 무게에서 괴로워하던 민중들의 한과 슬픔을

여과하고 조절해주는 대중예술가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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