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문턱
장병학
가을 문턱에 들어서면 아침 햇살 마시며 풀 섶에 초롱초롱 맺혀 있는 이슬방울은 초록빛 이파리마다 은빛 세계를 이루면서 반짝반짝 조각내며, 돌돌돌 무심히 흐르는 강물도 해맑아진다. 햇밤송이마다 ‘쪽’ 입을 열면서 마음까지 넉넉해진다.
어릴 적,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이 다가오면 죽마고우들과 수수 잎을 가지런히 추려 한 올 한 올 정성껏 녹색 옷을 엮어 만든다. 그리고 짚을 묶어 망월 놀이할 횃불 뭉치까지 엮는다.
은혜로운 추석날 아침이면 온 가족이 모여 조상님께 정성 다해 차례를 올리며 감사의 마음을 갖게 하며, 가족들이 함께 산소를 찾는다.
해님이 서산으로 살포시 넘어가고, 온 산하에 어둠이 묻어나기 시작하면 짚 뭉치를 걸머메고 뒷산에 오른다. 연중 가장 크고 밝은 달님이 동산위로 떠오르는 순간, 하늘높이 횃불을 치켜들며 저마다 달님께 큰절 올리며 자신의 소망과 건강을 빌면서 소원성취를 빌어 댄다. 마을 사람들도 산등성이마다 밝고 둥근 달님에게 소원성취를 빌어댄다.
조상님을 위하고 소망을 달님에게 비는 삶의 모습은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이산 저산마다 이웃 마을 사람들의 횃불 행렬이 장관을 이루었던 정경이 지금도 애잔하게 생각나며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며칠 전부터 동네 꼬마들은 정성껏 만들었던 수수 잎으로 온 몸을 꾸민 이십여 명의 거북이들은 쏟아지는 달빛 아래, 꽹과리와 징, 북, 장구 치며 동네 거북이들은 가가호호 방문한다. 밤이 지새는 줄 모른 채 온 동네가 들썩이듯 노래와 함께 덩실덩실 어깨춤이 이어지면서
“거북아, 거북아! 놀아라. 진천 거북아 놀아라.…….”
“거북아, 거북아! 놀아라. 청주 거북아 놀아라.…….”
춤과 노래로 서로가 서로의 축복을 주고받으면서 잡신까지 내쫓으며 흥겹게 즐긴다. 이 때 동네 어린 꼬마들도 양동이나 세숫대야, 깡통을 두드리며 함께 흥을 돋궈댄다. 마을 우물가와 집집마다 안마당, 장독대를 찾아 춤과 노래로 이어질 때 어느새 어르신들까지 함께 어울려 덩실덩실 춤을 추며 마을 축제로 승화한다. 집 주인 아주머니께서 추석 차례를 지내고 남은 고리털이 음식을 대소쿠리에 담아 내오시며, 막걸리까지 내놓으실 때 감사한 마음이 속 깊이 스며온다.
달님이 하늘 한복판에 오를 이슥한 밤까지 아름답고 정이 담뿍 넘쳐나는 우리의 세시풍습인 우리의 울림인 ‘거북놀이’에 대해 축복을 내려주신다. 가을 문턱이 다가오면 죽마고우들과 뒹굴며 얼싸 안으면서 ‘거북놀이’ 하며 즐거움을 만끽했던 아름다운 옛 추억이 순간순간 가슴을 누르며 정든 고향 마을 향수에 흠뻑 젖어든다.
봄부터 자란 연둣빛 새싹들도 점차 녹색 빛을 띄우며 한해(寒害)와 수해(水害)는 물론 병충해를 꿋꿋이 견디면서 가을 문턱에 닿았을 때, 황금물결의 풍성한 가을 향연을 우리에게 예고한다. 나 역시 폭염의 맹하를 지나 가을 문턱에 들어서면 산모롱이에서 간간이 실어다 주는 산들 새님에 의해 여름내 달궈졌던 심장(心臟)이 청량음료 되며 마음의 여유까지 찾아온다.
가을 문턱이 들어서면 등화가친(燈火可親)처럼 마음의 양식을 찾기 위해 밤이 이슥하도록 책과 더불어 사는 시간이 찾아오지 않는가? 가을은 ‘독서의 계절’, ‘결실의 계절’이란 이미지도 있지만, 나의 꿈과 소망이 보다 넘쳐나는 계절이기도 하다.
40여년의 정든 교단을 떠날 무렵, 중앙에서도 대 문인 10여명이 참석하셨던 나의 출판기념회 및 정년퇴임식장! 내가 태어나서 올곧게 자란 마을을 소재로 한 『갬절이 행복마을』 시를 프랑카드에 올올이 담아 향수어린 기념식장으로 변했다. 낭송가가 마을시를 애잔하게 낭송할 때 박수를 받으며 큰 호응을 얻었던 그 날이 생각난다. 이날 참석한 다수의 죽마고우들은 기념식이 끝나자마자 고향마을에 상설 게시함으로써 마을사람들의 총애를 받았던 지난날의 아름다움이 넌지시 생각난다.
지난 해, 내가 나서 자랐던 마을 이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군청 재정지원을 받아 『갬절이 행복마을』 마을시를 대형 조각품으로 제작, 금년 말 경 상설 전시함을 마을회의에서 결정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수필과 동시를 쓰는 작가로서 현재 나의 시비가 2개나 건립되어 있지만, 내가 자란 행복마을에 입체화된 대형 행복마을시가 조각되어 상설 전시된다니 고향에 대한 향수가 가슴 벅차게 끌어 오르면서 가을 문턱이 성큼 다가오기만을 학수고대한다.
세시풍습인 거북놀이 등 우리의 옛 전통문화, 정 깊은 미풍양속이 한 순간에 역사의 뒤안길로 자취를 감춰 감은 못내 아쉽다. 가을 문턱이 다가올 때마다 아름다운 우리의 미풍양속이 다시 재현되었으면 하는 마음 가눌 길 없다.
가을 문턱은 우리 삶의 촉진제요, 활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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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와意識 수필(1986), ‘한국아동문학연구’ 동시(2002) 등단
* 청주문인협회장, 국제PEN충북위원장, 충북수필문학회장, 중부문학회장, 한국아동문학연구회부회장,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주최 ‘전국 대학생 수필공모대회’ 심사위원장 역임
* 충북수필문학상, 충북문학상, 한국아동문학창작상, 박화목아동문학상, 충북아동문학상, 한국아동문학연구상, 운초문화상, 진천문학상, 청주문학상, 문예한국작가상, 한국교육자대상 수상
* 꿈을 주는 동시, 별님도 덩실덩실(동시집), 늘 처음처럼, 신이 내린 선물(수필집)외 다수 펴냄
현) 수필의 날 조직위원, 한국아동문학회 중앙위원장, 한국아동청소년문학협회 충북지회장, 국제펜한국본부 자문위원, 한국문협 전통문학연구위원, 고문(충북펜, 충북아동문학회, 충북글짓기지도회, 진천문협) , ‘대한민국 직지문화예술콘서트’ 추진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