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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93
11월28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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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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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qu4omvMCOw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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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해의 끝자락에서>
저희 한국 살레시오회 출신 몽골 선교사인 이호열 시몬 신부님께서 얼마 전 한국국제협력단(KOICA·코이카)이 주관한 개발원조의 날 기념행사 때 영예로운 해외봉사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올 여름 잠시 몽골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신부님은 마치 몽골 아이들의 자상한 친 아버지 같았습니다.
신부님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몽골 아이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몽골 아이들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신부님이기에 아이들은 하루 온 종일 신부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역사상 유례없이 짧은 기간에 원조를 받던 국가에서 원조를 하는 국가로 탈바꿈한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경제적인 원조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원조가 인적 자원의 원조입니다.
하루하루 생사마저 보장되지 않는 위험한 분쟁 지역에서,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혹독한 가난과 그로 인한 고통뿐인 세상의 끝에서 자신의 삶 전체를 바쳐 헌신하고 있는 수상자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정말이지 큰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대표로 두 분의 소감을 듣게 되었습니다. 말씀 한 말씀 한 말씀이 무뎌질 데로 무뎌진 제 마음을 크게 건드렸습니다.
“나이 마흔이 되었을 때 인생을 좀 더 보람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고민하던 끝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큰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지만 여기 오기를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이 오지의 전쟁터로 보내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이 세상을 세우는 일이며 사람을 구하는 일이 세상을 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은 생애도 그곳 형제들을 세우고 구하는 일에 전념하겠습니다.
해외봉사 시작할 때 내가 뭔가 그들에게 준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큰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은 그들이 제 큰 사랑과 소중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들 사이에서 다정한 친구가 되어 그들 사이에서 머물고 싶습니다.”
교회 전례력으로 우리는 한해의 끝자락에 서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은총의 선물인 ‘새해’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고민할 때입니다.
세상의 끝으로 나아가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젊음을 바치고 있는 분들과 견주어 보니 그저 내 발밑만을 바라보며 나만을 위해 허덕이며 살아온 지난 삶이 정말 부끄럽습니다. 마지막 날에 저희에게 건네시는 주님의 메시지도 오늘따라 가슴을 치게 만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장 34절)
바오로 사도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서 설명합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서 13장 12~13절)
우리가 전혀 준비하고 있지 않은 순간에 마치 섬광처럼 다가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몸과 마음으로 준비해야겠습니다.
지나온 한 해 동안의 내 삶을 진지하게 한번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진흙탕처럼 흐려진 영혼의 상태를 진정시켜야겠습니다. 아직도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이나 사건이 있다면 하느님의 크신 자비에 맡겨드려야겠습니다.
좀 더 영적이고 좀 더 단정하고 품위 있는 하루를 살아가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좀 더 자주 성체 앞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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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기도하지 않는 하루는 몽유병 환자의 밤과 같습니다>
(묵상 동명상)
https://youtu.be/6Ywy0Gfp6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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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이고 또 복음 말씀은 심판에 대한 마지막 조언입니다. 마지막 조언은 역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이 마음을 짓눌러 마지막 때가 덫처럼 갑자기 덮쳐도 알아볼 수 없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삶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깨어있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인데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되고 그러면 세상에 휩쓸려 소경이 되어 죽어도 죽는 줄 모르고 살게 됩니다. 그런데도 기도에 대한 중요성을 모르면 아직 진정한 신앙은 시작되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에 관한 좋은 책이 있는데 『천로역정』(天路歷程, The Pilgrim’s Progress)입니다. 크리스천이란 사람이 한 책을 발견하는데 아내와 자녀들이 사는 자신의 도시가 불로 멸망하게 될 것이란 예언이 쓰여 있습니다. 그 책을 너무 믿어버린 나머지 모든 사람과 가족에게까지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힙니다. 하지만 등에 보이지 않는 짐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집니다. 크리스천은 가족을 떠나, 아니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 등짐의 무게를 덜기 위해 여행을 떠납니다. 두려움과 의심, 재물과 교만함 등의 유혹을 모두 물리치고 천국의 성까지 가는 여정을 담은 책입니다. 신앙인의 삶을 우화적으로 그려낸 책입니다. 이 책의 핵심은 ‘기도’입니다. 구원의 길에서 여러 갈래의 오류로 빠지려 할 때 기도를 하면 목자나 도움을 주는 이들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다시 올바른 길로 되돌려놓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항상 ‘좁은 길’입니다. 알면서도 잊어버리는 이 ‘좁은 길’은 오늘 복음 말씀의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과 반대의 길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과 반대이고, 자신이 원하는 길과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믿음과 희망으로 크리스천은 무거운 짐을 벗고 그리스도의 피로 하늘나라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책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고도 말하는 만큼 수백 년이 지나도 여전히 많이 읽히고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이 책은 17세기 존 번연이란 선교사에 의해 쓰였습니다.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가 제한되었던 때, 나라의 허락을 받지 않고 설교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 한 젊은이가 존 번연입니다.
무려 12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던 중 그의 사랑하는 아내 메리가 죽었습니다. 소경이었기 때문에 거지로 살던 아내가 죽자 세 자녀는 스스로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고아의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런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는 이와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느님, 너무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제가 할 일이 남아 있을까요? 만약 제가 해야 할 그 일을 볼 수만 있다면 저는 절망하지 않겠습니다.”
이때 주님은 그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을 넣어주셨습니다.
“너는 글을 써라. 나는 너에게 글을 쓰는 달란트를 주었단다.”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던 그에게 환상이 보였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한 사람이 보였습니다. 감옥에 갇혔던 그 사람,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존 번연은 좁은 감옥 안에서 자기 자신의 신앙의 길을 책으로 엮어 수많은 영혼의 길잡이가 되는 《천로역정》을 쓰게 된 것입니다.
어떤 분이 자신은 죄를 짓지 않기로 ‘절대 결심’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분이 잘 안 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마치 결심만으로 모든 걸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죄를 짓지 않을 만큼 기도하기로 결심했습니다”가 기도의 힘을 믿는 신앙인의 말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목적을 이룰 가능성이 큽니다.
바이든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처음으로 한 일이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낙태를 찬성하기도 하여 사제가 성체를 주지 않은 적도 있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기도할 줄 알기에 그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쉽게 판단할 수는 없어도 ‘트럼프 때보다는 좀 나은 미국이 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 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길을 잃습니다.
기도는 그 사람의 신앙을 판별하는 유일한 기준이 됩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있는지, 없는지는 세속-육신-마귀에게 얼마나 사로잡혀 있는지로 판별이 됩니다. 자신과 세상의 욕망을 따르는 길은 넓고 편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좁은 길로 가라고 안내를 받습니다. 절제의 삶을 살 수밖에 없고 선교의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 내려오는 성령의 불이 태우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 자아와 싸우지 않는 사람과 신앙에 대해 논하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몽유병 환자처럼 세상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일부터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됩니다. 내년의 목표를 정하지 않았고 단 하나만 정하고 싶다면, 기도의 목표를 꼭 정하도록 하십시오. 매일 아침 30분이나 1시간은 기도하는 시간을 꼭 정하고 죽어도 그 시간은 지키겠다고 다짐하십시오. 그것이 내년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핵심 열쇠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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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1,34-36 : 늘 깨어 기도하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34절) 영원하신 임금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술의 위험과 또한 ‘술 중독’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아무리 술을 많이 먹는 사람도 의사가 술을 먹으면 이제 죽는다고 하면 모두 술을 끊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제 영혼과 육신의 의사이신 주님께서 만취와 방탕과 일상의 근심에 빠지지 말라고 하신다. 그렇게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에 빠져 살면서 아무 탈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기에 만취는 모든 것을 망치는 원인이다. 육신과 함께 영혼까지 약하게 하는 유일한 병이다. 사도 바오로는 육신이 약할 때 영은 강해진다(2코린 12,10)고 하였다.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2코린 4,16)고 하였다. 그러나 술에 취해 살면 육신과 영혼이 파멸한다. 육신과 영혼이 한꺼번에 타락하는 것이다. 모든 지체가 약해지면서 손과 발이 말을 안 듣고, 혀는 풀리고 눈은 어두워진다. 정신 또한 망가져서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심하면 자기가 인간이라는 사실조차 모른다. 술 중독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생의 마지막 시간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순간이 나에게는 아직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고, 애써 잊으려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여도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앞에 당당히 버티고 있으며, 언제나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다만 그 때가 언제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하여간에 우리 인간은 언제고 어느 때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깨어있다는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니라, 지금 당장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 있게, 기쁘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느님을 기쁘게 잘 만날 수 있기 위해서는 평소에 죽는 연습을 잘 해야 한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기 위해서 나 자신을 이기는,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나의 인간적인 뜻을 죽이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죽는 연습이 잘 되어있다면,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이 세상 삶도 잘 마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삶이며, 우리는 그 날 어떤 어려움과 고통도 이겨내고 주님을 뵈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은 항상 기도하는 자세와 함께 이루어갈 수 있다. 기도하면서 내가 살아가는 매 순간들의 삶이 하느님께 바쳐지는 아름다운 기도로써 바쳐질 수 있도록 한다면 진정 신앙인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써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잘 새기고 실천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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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신부님]
신앙인들에게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내일부터 대림 시기와 함께 새로운 전례주년을 다시 시작합니다. 우리는 한 해를 되돌아보며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듣는 예수님의 말씀은 “늘 깨어 기도하여라.”입니다. 늘 깨어 있는 것, 그리고 기도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신앙인에게 필요한 자세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요청은 마태오 복음서가 전하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 잘 드러납니다(25,1-13 참조). 그날이 언제 올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날이 언제 오더라도 준비하며 깨어 있는 것이 종말을 맞는 적절한 자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깨어 있지 못하던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인간적인 부족함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스스로 부족하다는 핑계를 대면서 현실에 안주하며 말씀에 집중하지도 또 말씀을 실천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도에 대한 말씀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제자들 그리고 성인들을 통하여 다방면으로 듣게 됩니다. 기도는 신앙인들의 표지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바로 신앙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모범을 몸소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 모범에 따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기도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행합니다. 매일, 자주 하는 기도는 신앙인의 양식과도 같습니다. 깨어 있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늘 기도하는 사람은 늘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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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10월 30일입니다. 뉴욕에서 코네티컷은 2시간 정도면 갈 수 있습니다. 약속이 있어서 올라갔습니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는 있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갔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비가 왔지만 정겨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보스턴으로 가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뉴욕에서 보스턴은 4시간 넘게 가지만 코네티컷에서는 2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었습니다. 가는 길에 첫 눈이 내렸습니다. 첫 눈이 내리는 날, 찾아온 손님을 보스턴의 한인 성당 신부님께서는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날은 어머님께서 하느님 품으로 가신지 50일 되는 날이었습니다. 보스턴의 신부님께서 제게 미사 주례를 부탁하였습니다. 저는 보스턴에서 어머니를 위해서 미사를 봉헌 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를 위해서 배려를 해 주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보스턴에서는 ‘월든 호수’를 보는 것이 기쁨입니다. 눈이 내린 월든을 보는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이었습니다. 비가 오지 않았으면, 눈이 오지 않았으면 보스톤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삶은 폭풍우가 멈추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폭풍우 속에서도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Life is not about waiting for the storm to pass, it is about learning to dance in the rain.)
월든 호수가 특별한 것은 그곳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살았기 때문입니다. 호숫가에는 소로우가 살던 집터가 있었고, 소로우가 호수에서 살게 된 이유를 적어 놓은 글이 있었습니다.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I went to the woods because, I wished to live deliberately, to front only the essential facts of life. And see if I could not learn what it had to teach, and not, when I came to die, discover that I had not lived. (나는 의도적으로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삶의 본질적인 문제에 직면하기 위해서 숲으로 갔습니다. 세상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숲으로 왔습니다. 나는 죽음이 다가올 때 나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했는지 알고 싶어서 숲으로 왔습니다.) 의역이지만 소로우는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알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 목적을 알았다면 최선을 다해서 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조용한 숲속 호숫가에 살면서 소로우는 이렇게 답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방향으로 자신 있게 나아가며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삶을 살려고 노력하면 평범한 삶을 살 때는 생각지도 못한 세상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어떤 것들은 잊고 보이지 않는 경계를 넘어갈 것이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소로우가 추구했던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소로우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새로운 세상을 알려줍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은 신앙인이 추구해야 할 삶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소로우가 월든 호수에서 성찰하였듯이, 제자들이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졌듯이, 우리들 또한 침묵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지키고 따른다면 그곳이 바로 ‘꽃자리’입니다. 우리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진다면 그곳이 바로 ‘가시방석’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한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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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음 다듬기>
루카 21,34-36 (깨어 있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 다듬기>
가끔은
나를 보며
마음을 느끼고
가끔은
너를 보며
마음을 열고
가끔은
하늘을 보며
마음을 넓히고
가끔은
땅을 보며
마음을 낮추고
가끔은
공기를 보며
마음을 비우고
가끔은
물을 보며
마음을 흐르게 하고
가끔은
불을 보며
마음을 뜨겁게 하고
가끔은
어둠을 보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끔은
풀잎을 보며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가끔은
바위를 보며
마음을 굳건하게 하고
가끔은
하느님을 보며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그리하여 늘
마음이 살아있도록
그리하여 늘
마음이 깨어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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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루카 복음의 종말론적 설교로 전례주년도 끝나고 이제는 대림 시기로 넘어갑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뒤로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음에 대한 루카의 권고에는 특별한 것, 곧 기도가 들어 있습니다. 깨어 있음과 기도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으로 서로를 지탱해 줍니다. 이 둘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자세, 믿음과 희망으로 고무된 삶의 버팀목이요 반석입니다.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콜로 4,2)라고 콜로새 신자들에게 권고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기도는 믿음과 깨어 있는 희망을 지탱하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대로 사람과 하느님의 만남과 대화를 지속시켜 줍니다. 따라서 기도는 개인과 공동체 삶 안에서 하느님의 시간을 분별하는 데 필요한 그리스도인의 이성과 감성과 내적 성찰을 흐려 놓는 영적 해이와 나태를 물리치는 데 가장 좋은 해독제입니다.
또 기도는 세상 종말에 있을 큰 싸움을 예시하는 일상의 유혹을 물리치는 데 큰 힘이 됩니다. 깨어 있음과 깨어 있는 기도의 탁월한 모범을 보여 주신 분은, 겟세마니에서 자고 있는 제자들과는 달리 고뇌에 싸인 예수님이십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6,41)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미 아버지께 드리는 주님의 기도의 여섯 번째 청원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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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언젠가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초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들입니다. 43년 만의 만남이었기에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참고로 여자친구가 아니라, 모두 남자친구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같은 반이었음은 분명한데, 기억하고 있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기억나니? 내가 너희 집에 놀러 갔었는데, 그때 네 어머니께서 아이스크림 ‘아이차’를 사주셨어.”
당시에 어머니께서 매우 편찮으셔서 친구를 데려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이 친구를 데리고 집에 갔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저 역시 기억하고 있는 것을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이 친구들 역시 기억하지 못하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습니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는 것일까요? 아니면 기억하지 못하는 척일까요? 저의 경험을 보니,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이유도 있겠지만,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종 과거에 받은 상처로 힘들어하는 분을 만납니다. 그분들의 억울함은 자신이 이렇게 과거의 기억으로 지금까지 힘들어하는데 상대방은 그런 일이 있었던 것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 상대방이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기억 때문에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를 준 사람으로 인해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나만이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연중 시기를 마무리하는 주님의 마지막 훈계 말씀입니다. 일상생활에서 거창한 죄로 여겨지지도 않고 별로 흠 없어 보이는 행위들이지만, 당신의 임박한 재림과 갑자기 닥치는 세상의 종말을 경계하는 마음을 흐리게 만드는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는 누가 해야 할까요? 내 이웃이 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또 그런 마음을 품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하실 것도 아닙니다. 바로 ‘나’만이 가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유의지를 주셔서 우리 스스로 해야 할 것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는 당신이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으며 당연히 해야 할 것을 남에게 책임을 지우고 남 탓을 하는 데 시간과 힘을 쏟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으로 많은 것을 주신 하느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처럼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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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배려>
2011년, UN 평화의 날 행사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 스티비 원더와 피겨여왕 김연아 선수가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이 보이지 않는 스티비 원더가 발언해야 할 때, 그의 마이크가 꺼져 있었던 것입니다.
마이크의 소리 스위치를 찾지 못해서 당황하고 있을 때, 옆에 있었던 김연아 선수가 그의 마이크 스위치를 켜주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이상한 내용도 아니고, ‘그럴 수도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김연아 선수가 스위치를 켜기 전에 스티비 원더 뒤에 있던 그의 비서에게 ‘제가 이분을 도와드려도 될까요?’라고 먼저 양해를 구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선의이지만 혹시 불편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진정으로 남을 배려하는 것은 상대의 마음까지도 생각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의 마음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충분히 배려했어.”라고 외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진짜 배려를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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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방심하는 날 심판을 받는다>
때로는 풀어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마음껏 즐겼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21,34).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간곡히 당부하셨는데 그 말씀을 외면 한다면 결과는 뻔합니다. 저의 마음을 꿰뚫고 계시니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흔들비쭉입니다. 사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7,15)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 하여라.”(루카 21,3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육체를 따라 삽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며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가야 하지만 마음뿐입니다. 몸은 예수님 앞이지만 마음과 생각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로마8,5). 그러나 우리 삶의 현실은 영적인 것보다는 육적인 것이 더 매력적이고 가까이 있습니다. 아파트 베란다 밑으로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들이 번쩍이며 유난히 빛나는 빨간 십자가를 등지고 유혹합니다. 한 잔술에 몸을 맡길 수 있는 그곳에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후회할 것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을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유혹은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고 말씀으로 물리치셨지만,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루카4,13). 하물며 연약한 우리에게는 얼마나 자주 접근하겠습니까? 그러니 회개의 삶도 한 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을 통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 5,8-9)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전 생애를 따르고 그분과 일치되기 위해 깨어 있는 시간의 연속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과 시간을 모르니만큼 언제나 깨어 기도하고 잠시라도 방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분명 방심하는 순간이 심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있으십시오”(에페6,18). 세상에 너무 푹 빠져 있어도 문제요, 세상을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세상에 발을 딛고 있기 때문이고 하늘은 세상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영생을 희망하는 만큼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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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새 예루살렘>
-늘 깨어 기도하여라-
끝은 시작입니다. 만추晩秋의 늦가을인가 했더니 추위가 초겨울입니다. 창세기에서 시작한 성서가 오늘 제1독서 성서의 마지막 요한 묵시록 22장입니다. 연중 제34주간 마지막 토요일이 끝나면 내일부터는 주님을 기다리는 기다림과 그리움의 꿈과 설렘의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 요한 묵시록 마지막 장 마지막 말씀이 대림을 앞두고 주님을 갈망하는 우리 심정을 잘 대변합니다.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님!”
‘마라나타!’ 그리스어는 우리 말로 풀이하면 ‘오십시오, 주 예수님!’입니다. ‘마라나타’는 바로 명상기도의 대가 분도회 존 메인 신부님이 권한 만트라(성구)입니다. 호흡에 맞춰 성구를 계속 되뇌이며 끊임없이 기도를 바칠 때 깨어있는 삶이 이뤄집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면 저절로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기교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늘 해도 늘 부족한 것이 기도요 사랑입니다. 기도와 사랑에는 늘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20년전 꼭 이 때쯤 써놨던 ‘겨울나무’란 시가 생각납니다.
-“떠나자
떠나 보내자
미련없이 아름답게
나 늘 푸른 사철나무보다
단풍잎들 다 떠나 보낸 겨울나무가 좋다
가난한 겨울나무앞에 서면
왜 이리 부끄러워질까
왜 이리 가슴저릴까
하늘 향해 쭉쭉뻗은 무수한 나뭇가지들
찬 간절한 그리움의, 기다림의 촉수觸手들
볼품은 따질 게 아니다
그대로 그리움의 덩어리, 침묵의 기도로구나
침묵의 기도,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간 겨울나무로구나
하늘님 향해 쭉쭉 벋은
무수한 내 그리움의, 기다림의 촉수觸手들!
나도 한 그루 겨울나무로구나
그대로 그리움 덩어리, 침묵의 기도로구나
나도.”-2000.11.29
흡사 겨울 침묵의 동안거에 들어가 기도하는 배밭의 겨울 배나무들 같습니다. 오늘 아침미사중 서원갱신으로 끝나는 연중 마지막 주간의 연피정 주제는 ‘곱게 늙기’ 였고, OLYMPICS(올림픽)의 문자 풀이를 중심으로 한 강의가 참 흥미로웠습니다.
O; Open-개방
L; Listen-경청
Y; Yield-물러남
M; Modesty-겸손
P; Possession(소유의 집착)-이탈
I; Interesting-관심
C; Clean and Bright-순수와 광명
S; Smile, Spirit, Soul-미소와 영, 영혼
‘곱게 늙기의 인생 여정’은 그대로 ‘기도의 인생 여정’이자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노추老醜란, 노욕老慾이란 말도 있듯이 기도하지 않으면 위와는 반대로 전개되어 십중팔구 ‘추하게 늙기’가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기도가, 끊임없는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뿐이 길이 없습니다. 창세기의 잃었던 낙원, 즉 실낙원失樂園이 오늘 묵시록의 되찾은 낙원, 즉 복낙원復樂園을 미리 맛보는 것도, 또 이런 복낙원의 새 예루살렘의 궁극의 꿈이 실현되는 것도 기도뿐임을 깨닫습니다.
아니 이런 새 예루살렘의 궁극의 비전이, 꿈이, 희망이 우리가 늘 깨어 기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생명수의 강이 흐르며 생명나무 열매들과 치료약으로 쓰이는 나뭇잎들은 얼마나 생명으로 충만한 낙원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다음 새 예루살렘의 묘사가 절정입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뵈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묵시22,3-5).
얼마나 고무적인 궁극의 꿈이자 비전이자 희망인 새 예루살렘인지요! 이 거룩한 미사전례 은총으로 은연중 미리 맛보는 새 예루살렘입니다. 이런 새 예루살렘의 비전이, 꿈이, 희망이 우리를 더욱 늘 깨어 기도하게 합니다. 저절로 오늘 복음의 우려도 말끔히 사라질 것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바로 이에 대한 답이 늘 깨어 기도하는 영적 수련입니다. 새 예루살렘을 미리 맛본 기도의 사람들은 도저히 이런 타락 상태에 머물 수가 없으며, 언젠가 불행의 그날이 우리를 덫처럼 덮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서 벗어나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늘 깨어 기도하며 새 예루살렘의 꿈을 실현하며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간다. 아멘,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님!” 주 예수님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묵시22,20-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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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인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온통 희망입니다.
"생명수"(묵시 22,1)
"생명나무"(묵시 22,2)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는 강입니다. 이 강으로 매달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자라나 사람에게 열매를 내주고 그 나뭇잎으로는 치료를 합니다.
제1독서의 시작은 이처럼 주님에게서 나오는 활기 넘치는 생명의 기운을 이야기합니다. 이 생명이 사람을 어루만지고 키우고 치유하고 살립니다.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묵시 22,3-4)
주님 어좌 곁에는 그분과 얼굴을 마주하며 그분을 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지복직관의 행복은 모든 신앙인의 바람이지요. 사랑이신 분과 사랑으로 머무르는 상태!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모습입니다.
"주 하느님이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묵시 22,5)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주님의 현존으로 인공적인 빛은 물론 자연의 빛조차 더 이상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빛이시고 모든 이가 골고루 그 빛을 받으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 밝고 따사롭고 온화한 빛 안에서 모든 피조물은 저마다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심어 주신 본성의 가장 충만하고 아름다운 상태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동안 제자들에게 펼쳐 보이신 종말과 재난의 예고를 간곡한 당부로 마무리하십니다.
"방탕과 만취와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이기심과 아집과 증오로 마음이 굳어지는 것 못지않게, 자기 분수와 절제와 감사를 잊은 허약한 마음을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때를 가늠할 수 없게 느닷없이 들이닥칠 사람의 아들의 날을 기다리며 겪어야 할 박해와 재난에 대비해, 충실한 사랑과 굳건한 신앙, 용기와 인내를 견지하라는 촉구시지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종말에 대한 가르침은 이처럼 기도의 권고로 끝은 맺습니다. 충실한 사랑과 굳건한 신앙, 용기와 인내는 갑자기 뚝 떨어지는 마술이나 요행이 아니라, 하느님과 사랑하고 일치하는 가운데 자연스레 형성되는 덕일 겁입니다. 기도하는 이는 기도함으로써 "힘"을 얻습니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
지상에 사는 우리 중에는 사람의 아들의 날 이후 펼쳐질 영원한 삶을 체험한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저 주님의 가르침과 말씀에 기대어 더듬거리며 나아갈 수밖에요. 세속의 재물과 권력, 명예를 쟁취하기 위해 저마다의 방법론이 존재하는 것처럼, 세상 창조 때부터 우리를 위해 마련된 복된 미래를 얻는 길은 기도가 될 것입니다.
이 "기도"에서 사랑이 나오고 나눔이 나옵니다. 존중과 배려와 희생이 나오지요. 위로와 격려, 치유도 기도에서 흘러나옵니다.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흘러나와 도성을 흐르는 생명수의 강처럼 기도는 우리 자신과 타인, 세상을 살리는, 고요하고 온화하지만 매우 강력한 힘입니다.
깨어 기도하는 이는 이미 주님과 하나입니다. 내면에 그분의 거처가 단단히 자리하기에, 그분의 날이 언제 어떻게 닥치든 괜찮습니다. 진즉에 그 자신의 일이 곧 하느님의 일이 되고, 하느님의 일이 그 자신의 일이 되었으니, 주님을 맞이할 그 자리에 굳건히 서서 기다리면 되겠지요. 그날은 주님과 누리는 사랑이 일상이 된 이에게는 그 일상의 연장이고 절정이 될 것이니, 깨어 기도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맞이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주님께서 오십니다! 지난 한 해를 정성껏 마무리하시면서, 다가오는 기다림의 시기를 잘 준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모두 정말 수고하셨고, 진짜 애 많이 쓰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마라나 타! 오소서, 주 예수님!(화답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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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하느님 말씀으로 삶을 해석하면 참자아로 하느님 앞에 선다.
“우리가 겪은 어려움은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러한 어려움은 오히려 우리 마음을 하느님을 향해 열게 하고, 우리의 완고한 해석 기준과 우리가 만든 삶에 대한 환상을 파괴하여 마침내 참자아를 찾아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하느님 상이 깨지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참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열게 될 것이다.
*성경 묵상은 일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체험하고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성경 말씀은 인생길을 비추는 빛과 같다. 말씀은 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것을 다른 빛, 곧 하느님의 빛으로 바라보게 한다. 하느님의 밝은 빛으로 우리 삶을 이해할 때 우리는 바로 우리 자신의 운명 앞에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안셀름 그륀-「희망의 메시지」중에서
♣“복음으로 돌아갑시다. 우리들이 복음에 따라 살지 않으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살아주시지 않습니다.”(가경자 샤르 드 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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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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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우리는 이번 주 내내 종말에 관한 말씀을 들었고, 오늘은 그 마지막 결론 부분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사흘 남짓 남겨둔 시점에서, 당신의 공생활을 마무리 짓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약혼한 처녀에게 있어서 유일한 소망은 결혼하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듯이,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도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기 위한 ‘기다림’에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고대하고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소중함이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사랑하는 임을, 소중한 임을, 주님이신 벗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그야말로, 하느님의 개입이 야기 시킨 놀라움이요 경이로움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로 하여금 기다리도록 부추기는 분의 활동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저 스쳐 지나쳐 통과하시지 않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고 변형시키기 위해 우리 안에 오십니다. 곧 당신의 사랑과 구원에 우리를 참여시키기 위해, 우리의 역사 안에 들어오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승리의 개선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십니다.”(2코린 2,14 참조) 당신 승리의 역사 안으로 우리를 동행하십니다. 주님이신 당신으로 하여, 오늘도 우리는 당신의 나라의 완성을 고대하고 기다리며, 당신의 승리의 역사 안으로 들어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기다림의 자세를 3중의 구조로 말씀하십니다. 곧 ‘기도하라’는 것이요, 기도하되 ‘깨어 기도하라’는 것이요, 깨어 기도하되 ‘늘 깨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라’는 것은 자신의 약함과 무능력과 한계를 받아들이고 주님의 능력과 선물을 믿고 소망하라는 것이요, ‘깨어 기도하라’는 것은 그분을 맞아들이기 위해 준비하고 마음을 경계하라는 것이요, ‘늘 깨어 기도하라’는 것은 이미 오신 그분을 사랑하고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깨어남’의 종교가 아니라, ‘깨어있음’의 종교임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 깨우쳐 알게 된 진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계시된 바를 믿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어나라’라고 하지 않고, ‘깨어있으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에 놓여있음을 말해준다. 곧 이미 오신 주님께 깨어있음이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깨어있음’은 이미 승리를 이루신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참여하는 일이기에, 기쁨과 활력에 넘친 희망 찬 발걸음입니다.
결국, ‘늘 깨어 기도하라’는 말은 ‘늘 동행하시는 주님 앞에 서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곧 지금 ‘사람의 아들 앞’에 서 있으면 깨어 기도할 것이요, 그렇지 못하고 ‘자신 앞’에 서 있으면 먹고 마시는 일과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길 것입니다.
지금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그날을 갑자기 맞이하게 될 것이요, 지금 주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그날에도 역시 신랑을 맞이하듯이, 주님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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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주님!
제 마음이 물러지지 않게 하소서.
흔들리더라도, 당신을 벗어나지 않게 하소서.
넘어지더라도, 당신을 붙들고 있게 하소서.
근심에서 벗어나, 당신 사랑에 열렬하게 하소서.
안일과 편리로 무뎌지지 않고, 늘 깨어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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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21,36)
연중 제34주간 토요일인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내일부터는, 더 정확한 시간으로는 '오늘(11.28) 제1저녁기도부터' 대림시기와 함께 새로운 한 해인 '나 해'가 시작됩니다.
먼저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충실하게, 기쁘게, 겸손하게 살지 못한 나의 부족함을 하느님의 자비에 내어 맡겨드리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새 해를 기쁘게 맞이하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에 들려오는 복음 말씀은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우리의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라는 말씀과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새로운 한 해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 앞에 서는 날, 곧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 언제일 지 아무도 모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 '항상 조심하면서 깨어 기도하는 것 뿐'입니다.
잘못된 길로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
잘못된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
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
그렇게 되기 위해서 늘 깨어 기도하는 것!
이것이 날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나무에 달려 죽으신 극진한 사랑을 늘 기억하고, 이 사랑 안에 머무는 것! 그리고 말씀과 함께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깨어 기도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새해에는 더 깨어 기도하는 하느님의 자녀들!
그래서 지금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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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m99L5Y-mP9A&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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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 36)
늘 깨어
기도하는
삶이란
추상적이지 않다.
우리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 현실을
이끌어가시는
하느님을 직접
맛보고 몸소 깊이
체험하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떠나보내야
할 것을 떠나
보내야 할
우리들 삶이다.
떠나보내야
할 것을
떠나보내는 것이
깨어있는 삶이다.
무엇보다
깨어있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우리자신을
알게되고
만나게된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게된다.
하느님이시다.
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하느님과의
만남이다.
과거를
떠나보내야
현재를 살 수
있다.
늘 깨어
기도하는
삶이란
내어맡기는 삶을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가 사는
기쁨이다.
내어맡기는
삶이란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본질적인 삶이다.
불완전한
우리들은
하느님을
향해야 한다.
생명이신
하느님
그 사랑을
깨닫는 것이다.
본질을
살아가는 삶이
깨어있음이요
기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질의 삶을
하느님 중심의
삶을 지금
살고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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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 36)
어제와 오늘이라는 일상은 예수님께로 이어져 있습니다. 어떠한 모습으로 살던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진심으로 원하는 사랑과 용서를 예수님에게서 다시 보게됩니다. 초라한 영혼에게 필요한 것은 진심어린 기도였습니다. 우리를 깨우는 기도에 이르기까지 혼돈의 많은 시간이 있었습니다.
모든 시간은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삶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은총의 시간입니다. 은총을 통해 우리가 기다리는 일상이 무언지를 다시 보게 됩니다. 사랑의 일상이며 감사의 일상임을 알게 됩니다.
일상에서 맛보았던 쓴 맛 단맛 모두 예수님께 봉헌합니다. 베풀어주셨던 모든 사랑을 기도로 뜨겁게 올려 드립시다.
예수님 앞에 서는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나 기도입니다. 기도의 삶으로 기쁘게 다시 돌아갑시다. 삶의 힘은 바로기도의 힘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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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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