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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밀알감리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류창원권사
장기려 박사
병원 옥탑방 살며 병든 빈민 돌본 ‘한국의 슈바이처’
(16) ‘살아있는 예수’ 장기려 박사 /병든 빈민 보살핀 ‘한국의 슈바이처’ [포토]
부산 복음병원 옥탑방에 살며 의술 베풀어 /북한가족 그리며 독신생활…평생 무소유 삶
» 장기려 박사
부산은 평양에서 1·4 후퇴 때 둘째아들만을 데리고 피난온 장기려(1911~95) 박사가 북에 두고 온 부모와 부인과 다섯명의 자식을 그리면서 45년을 독신으로 보낸 곳이다. 경성의전을 수석 졸업하고, 김일성의대에서 교수를 했던 그는 1959년 국내 최초로 간대량 절제 수술에 성공하는 등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로 손꼽히는 존재였다.
그는 또한 슈바이처 못지않은 자선가였다. 의사가 되기로 했을 때부터 평생 의사 얼굴 한 번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기로 한 장기려는 평생 집 한 채 없이 부산복음병원 옥탑방에서 살면서 그의 정성으로 완쾌해 새 생명을 얻고도 수술비가 없어 퇴원하지 못하는 환자들의 수술비를 자기 월급으로 다 대주곤 했다. 그로 인해 장기려의 월급은 항상 적자였고, 병원 재정에도 타격이 컸다. 그러자 병원에선 입원비 지원 결정을 원장 혼자 내릴 수 없게 했다. 그 이후 장기려는 돈 없는 환자들에게 뒷문을 열어놓을 테니 몰래 도망가라며 살짝 문을 열어놓곤 했다. 그를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진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에서 작가가 “당신은 성자 아니면 바보요”라고 물을 만큼 그는 바보스러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으로도 장기려를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은 그를 ‘살아 있는 예수’로 기억한다. 병원 근무자들의 가족들을 모두 합쳐 월급을 똑같이 나누는 바람에 운전기사와 같은 월급을 받을 만큼 기득권을 내려놓고 평등한 세상을 실현하려 했던 그를 종교나 교단이나 교리적 도그마 같은 기득권도 가둘 수는 없었다. 그는 예수를 신격화하고 대상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자신이 예수와 같이 되었던 사람이었다.
70년부터 75년까지 복음병원에서 수련의로 근무했던 부산 서면복음외과 최중묵(76) 원장을 찾았다. 부전동 번화가에 있지만 허름한 건물에서 흰 가운을 입고 환자들을 돌보는 그는 자상한 동네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는 가톨릭 신자다. 그럼에도 장기려가 좋아 복음병원에서 근무했다. 복음병원의 운영 주체였던 고신 교단 목사들이 “왜 우리 신자가 아닌 가톨릭 신자를 수련의로 받아주느냐”고 했지만, 장기려는 종교가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불교든, 또 고향이 이북이든 경상도든 전라도든 개의치 않았다. 어떤 식의 편가르기와도 그는 애시당초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일부 의사들이 장기려를 몰아내고 복음병원의 이사장직을 차지하려 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젊은 수련의들은 분노했다. 그것이 폭력 사태로 번졌고, 생전 싸움이라곤 모르고 살았던 최중묵도 폭력 사건에 연루돼 2개월 형을 받았다.
그때 장기려를 마음으로부터 존경하던 부산고검 검사장은 별일 아니니 구속된 의사들을 곧 내보내줄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런데 장 박사는 병원엔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말해버렸다. 그러자 반대쪽에서 폭력 연루자들이 석방될 수 없게 해버렸다.
“그래서 형을 살게 됐지요. 장 박사님은 그만큼 순진하고, 도무지 비밀이라는 게 없었어요. 사심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정치적인 술수 같은 건 아예 몰랐지요. 장 박사님 말 때문에 검사장도 목이 날아갈 뻔했지요.”
최중묵은 장기려를 지켜주기 위해 나섰지만 장기려로부터 칭찬을 듣기는커녕 감당키 어려운 꾸중을 들어야 했다. 장기려는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사용해선 안 되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했다. 오히려 상대방은 껴안으면서도 자기를 역성든다고 나섰던 사람들에겐 그토록 무섭게 질책했다. 이해타산과 편가르기에 물든 사람들에게 장기려는 별종이었다. 그런데도 명절 때 윷놀이를 하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못하면 천국에 이를 수 없다는 말은 그를 두고 한 말인 듯했다.
장기려는 평생 다녔던 기존 교회를 벗어나 완전한 무소유를 지향했던 ‘종들의 모임’에 함께할 만큼 기득권이나 장로로서의 직위나 시선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직 진실만을 추구했다.
정부 당국이 그에게 북에 가서 부인과 자식들을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했을 때도 그는 “이제 만나면 가족들과 헤어질 수 없다”며 “북한이 가족들을 남한에 내려보내줄 리 없을테니 나는 그곳에서 살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면 정부 당국이 그를 보내줄 리 만무함에도 그는 “거짓말은 할 수 없다”며 이렇게 말했고, 결국 북한행도, 그리던 가족과의 상봉도 이뤄지지 못했다.
그를 사모하며 수많은 여인들이 상사병이 나기도 했지만, 그는 끝내 부인 김봉숙에 대한 사랑을 가슴에 간직한 채 하늘에서 만날 것을 믿으며 선종했다.
** 바보 의사 이야기**
장기려 박사는
우리나라 외과 학회에서는 아주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외과 전문의였지만,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서민적이고 초라했다. 1995년 12월, 8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부산 복음 병원 원장으로
40년, 복음 간호 대학 학장으로 20년을 근무했지만,
그에게는 서민 아파트 한 채, 죽은 후에
묻힐 공동 묘지 10평조차 없었다.
장기려 박사는 언제나 ,
매우 어려운 처지에서 사셨다.
물론, 병원 원장이나 대학 학장으로서의
수당은 있었겠지만, 그에게는
월급이나 수당보다는 가불이 많았다.
여기에서 그의 수수께끼가
시작된다. 장 박사에 대해 떠도는 미신에 가까운
풍문 때문에 전국의 가난한 수술 환자들과
다른 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말기 암 수술 환자들이 부산 복음 병원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겨우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아 병이 나으면 그 다음에는 또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들 대부분은 입원비와 약값이 없었다.
이 때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이 원장실이었다.
원래, 잇속이 밝지 않아
셈을 잘 할 줄 모르고, 바보 같을 정도로 마음이
착한 장 박사에게 "시골 우리 집은 논도
밭도 없고 소 한 마리도 없는 소작농이어서
입원비나 치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환자들이 하소연하면, 장 박사는 그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고는 눈물겨워하였다. 병원비
대신에 병원에서 잡일을 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는 없겠느냐는 환자들의 제안에 장 박사는
환자의 치료비 전액을 자신의 월급으로 대신
처리하고는 하였다.
병원 행정을 이렇게
하다 보니 장 박사의 월급은 항상 적자였고,
이것이 누적되면서 병원 운영도 어려워지게
되었다. 결국, 병원 회의에서 결정이 내려졌다.
앞으로 무료 환자에 관한 모든 것은 원장님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부장 회의를 거쳐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가난한 환자들이
장 박사를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결정권을 박탈당한 이후부터 장 박사는 어려운
환자들이 생기면 야밤에 탈출하라고 알려주고는
하였다. "내가 밤에 살그머니 나가서
병원 뒷문을 열어 놓을 테니 탈출하라."는
것이었다. 장 박사의 이러한 '바보 이야기'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북녘에
두고 온 아내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지낸 장기려 박사는 평생에 걸쳐 묵묵히
사랑을 실천한, 진실로 아름다운 예수의 사람이었다.
** 이산의 아픔 삭이며 희생과 봉사의 삶 살다간 참의사**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4개월만인 1950년 10월 19일 유엔군과 국군은
평양을 탈환했다 당시 김일성의과대학 외과의사였던 장기려는
대학병원과 야전병원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해 12월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국군은 평양을 철수하게 되고
이 때 장기려를 남으로 데려가기 위해 그를 야전병원 환자수송용
버스에 태웠다.그것이 가족과의 45년에 걸친 긴 이별의 시작이
될 줄 몰랐다.
그는 언젠가 가족들을 만날거라는 희망하나로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곧 다시 가족을 만날거라 했던 그의 바람은 길고 긴 분단의
세월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장기려의 인생은 헤어진 가족을 향한 그리움으로 바쳐진 사랑과 기도였다.
"의사를 한번도 못보고 죽어 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
의사 장기려의 가족에 대한 사랑은 황무지나 다름없던 우리 의료계에
'가난한 사람도 치료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박애정신의 꽃을 피워냈다.
그는 의사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이
허락한 소명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의사 한번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노라고 하나님 앞에 맹세했다.
장기려는 경정의전에 들어가면서 한 이 하나님앞에 약속을
생이 다할 때까지 지켜나갔다.
평생을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인술을 펼친 의학박사 장기려.
그는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실제 모델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성자'로 불렸다.
이광수는 장기려를 가리켜 '당신은 聖者아니면 바보요'라고 말했다.
장기려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 북에 있는 가족도 누군가
도와줄 것이라고 믿음을 갖고 하루 200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았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 -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 설립
병원 규모가 커지면서 무료진료가 불가능하게 되자 장기려박사는
1968년 '건강할 때 이웃돕고, 병났을 때 도움 받자'라는 표어 아래,
북유럽의 의료보험제도를 본 딴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탄생시켜
한국 의료보험제도의 모태가 되었다.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그때, 주변의 몰이해와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
하고, '병의 고통으로 시달림을 받는 것으로도 슬픈데 가난한 사람에게
과중한 치료비를 부담시킬 수 없다'는 신념 하나로
장기려는 한국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장기려박사는 서울의대 전신인 경성의전을 수석 졸업하고
59년 국내 최초로 간대량(肝大量) 절제수술에 성공하는 등
학문적으로도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중 한 사람이었다.
장기려는 한국 간외과학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나는 가진 것이 너무 많다'
장기려는 수술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서 자기 돈으로 수술을 해주었다.
자기 월급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환자를 야밤에 탈출시키기도 했다.
평양 시절 그의 부인은 장기려가 생활비를 가져다 주지 않아
의사가운과 환자복 삭바느질로 생계를 꾸려갔다.
그는 평생 자기 집 한 칸 갖지 않고 병원 옥상의 24평 사택에서 살았다.
'다른 사람이 모두 만날 수 있을 때, 나도 가족을 만날 것이다'
평생 나누고 봉사하는 삶을 산 장기려 박사.
그 자신은 분단 조국에 의한 피해자였다.
1.4후퇴 때 환자를 돌보는 와중에 부모 부인 5남매를 평양에 남겨두고
둘째아들만 데리고 피난길에 올라 이산가족이 된 장박사는
평생 재혼하지 않고 고향의 가족을 다시 만날 날만 기다리며 살았다.
그런 그가 85년 정부의 방북권유를 거절하였다.
혼자만 특혜를 누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장박사는 끝내 그리운 가족과 상봉하지 못한 채 95년 성탄절 새벽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그는 임종을 앞둔 1995년 10월 가족들에게 통일과 민족의
만남에 대해 " 이 땅에서 지금 만나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
게 짧게 만나느니 차라리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만나야지 " 라고
말하며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는 부산시민상, 막사이사이상, 국제적십자상, 국민훈장, 호암상
등을 수상했다.
특히 그는 지난 95년부터는 당뇨병과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상오 청십자병원에서 영세민 10여명씩 진료해 주다가
그해 성탄절 새벽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경기도 마석 모란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장기려 박사의 비문에는 그분의 유언대로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들의 벗'임을 자처하며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철저한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간, '이 땅의 작은 예수' 로
칭송받은 사람이다.
그에게 붙은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푸른 십자가' 라는 찬사에
한 점도 부끄럼 없이 평생 이웃 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
예수처럼 살고 싶었던 사람
절대빈곤시절의‘천막 무료진료’부터 미래를 내다본 의료복지 정책인
‘청십자 의료조합’까지, 그것은 그의‘사랑'이 이뤄낸 기적이었다.
그는 예수처럼 살고 싶어했고, 그렇게 살았다.
분단의 아픔을 환자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한
의사 장기려의 삶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이다
세상을 치유한 장기려박사
장기려 박사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장기려 박사가 운영하는 청십자 병원에 한 농부가 입원하였습니다. 그는 워낙 가난하여 치료를 끝내고도 입원비가 밀려서 퇴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다 못한 농부는 장기려 박사를 찾아가 하소연 하였습니다. "원장님, 모자라는 입원비는 돈을 벌어서 갚겠다고 해도 도무지 믿지를 않습니다. 이제 곧 모내기를 해야 하는데, 제가 가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환자의 사정을 들은 장기려 박사는 "밤에 문을 열어 줄 테니 그냥 살짝 도망치시오."라고 마치 남의 병원의 환자에게 인심이나 쓰는 듯이 태연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떻게...""병원에서는 병원비를 받아야 퇴원을 시켜 주겠다고 하는데 낼 돈이 없으니 할 수 없는 일 아니오. 도망을 쳐서라도 당신이 빨리 집에 가서 일을 해야 가족들이 살 것 아니오." 그 날 밤, 장기려 박사는 서무과 직원이 모두 퇴근한 다음에 병원 뒷문을 살그머니 열어 놓았습니다. 얼마 뒤 농부와 그의 아내가 머뭇거리며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장기려 박사가 농부의 거친 손을 잡았습니다. "얼마 안 되지만 차비요. 가서 열심히 사시오." 농부 내외는 자신들을 위하는 장기려 박사의 마음이 너무나 고마워 눈물이 나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 환자가 사라졌다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 서무과 직원이 원장실로 뛰어들어 왔습니다. "106호 환자가 간방에 사라졌습니다." 장기려 박사가 겸연쩍은 듯이 웃으며 말하였습니다. "사실은 내가 도망치라고 문을 열어 주었소. 다 나은 환자를 병원에서 마냥 붙들고 있으면 그 가족들은 어떻게 살겠소? 이 과장도 알다시피 지금이 한창 바쁜 농사철 아니오." 서무과 직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원장실을 나왔습니다. 몇 걸음 옮기다 원장실 쪽을 힐끔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 조금 전과는 달리 웃음이 번지고 있었습니다. 여느 병원보다 월급이 적은데도 직원들이 즐겁게 일하는 까닭을 알 수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성산 장기려 박사는 1911년 음력 8월 14일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한학자 가정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친이 설립한 의성학교, 송도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지원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이 학교에 들어가게만 해 준다면 의사를 한번도 못보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 할머니를 통해 신앙을 배웠고 교회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송도고등보통학교 재학중인 1925년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가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깨닫고 신앙적 삶을 모색하게 된 것은 경성의전을 졸업한 후 김교신의 r성서조선」을 정기구독 하였고 또 10년 연배였던 함석헌으로부터 받은 영향때문이었습니다. 그를 처음 만난 때는 1940년 1월초 서울 정릉에 있던 김교신의 집에서였습니다. 이때부터 선생님은 함석헌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를 존경하였고 깊은 교우관계를 유지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장인의 권유로 백인제선생 문하에서 외과를 전공하였고 1940년 9월 의학박사가 되었습니다. 평양의 연합 기독병원 외과 과장으로 갔다가 병원장에까지 취임하였지만, 인사에 불만을 가진 이들의 질시와 텃세때문에 불과 두달만에 원장직에서 물러나 외과과장으로 강등되었습니다. 그러나 변함없이 성실히 봉사한 일은 아름다운 일화로 희자되고 있습니다.
해방후 1947년 1월부터는 김일성대학의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겸 부속병원 외과과장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주일에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이 대학으로 갔고, 이 학교에 근무하면서도 주일을 지키고 환자를 수술할 때는 먼저 기도하는 등 일관된 신앙의 길을 갔습니다. 그의 성실함과 신실함, 그리고 검소한 생활때문에 이곳에서도 그는 인정을 받았고, 1948넌에는 북한 과학원으로부터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전쟁중 1950년 12월 차남 가용과 남하하게 되는데 평양 종로 앞에서 마지막 본 아내와 다른 가족이 함께 남하하지 못한 것은 일생동안의 가장 가슴아픈 순간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 이후 여러 사람들의 재혼 권유했지만 "결혼은 오직 한번하는 것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따라 40년이 넘도록 홀로 사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단지 육적인 관계에 머물러 있지만 장기려의 부부관계는 영적인 결합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참된 사랑이 무엇이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부산에 온 그는 곧 부산 제 3 육군병원에서 근무하다가 1951년 6월 부산 영도구 남항동에 위치한 제 3교회 창고에서 무료의원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그는 25년간 복음병원에서 일했는데 초기 복음병원 시절은 의사로서 가장 보람된 시기였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는 의사가 된 동기를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복음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동시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로,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및 학장으로 서울 카톨릭 의대 외과학 교수로 봉사하기도 했다. 간암에 대한 연구로 그는 1961년 대한의학회 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남하한 이후 첫 주일인 1950년 12월 24일 한상동목사가 시무하던 초량교회에 참석하여 예배드렸고, 산정현 교회를 재건하여 장로로 봉사해 온 그는 1981년 12월 시무장로에서 은퇴하였고 원로장로로 추대되었습니다. 그후 1987년부터는 '종들의 모임'이라고 흔히 불리는 비교파적, 비조직적 신앙운동 단체에 관여하였습니다.
장기려박사는 한국교회에 기독교적 사회참여 방식 혹은 기독교적 사회봉사의 한 모델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료활동 의에도 그는 1956년 전도 및 성경공부를 위한 목적으로 “부산모임을 시작하였고, 1959년에는 '부산기독의사회'를 조직하였는데, 어느 날, 장기려 박사는 이 모임에서 덴마크의 의료보험제도에 대해서 처음 듣게 됩니다. 평소 가난한 사람들이 돈이 없어서 진료를 받지 못하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긴 장기려 박사는 1968년 정부가 의료보험제를 실시하기보다 10년 앞서 복음병원 분원에서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발족하게 됩니다.
처음에 이 운동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하였다. 사람들이 아프지도 않은데 미리 돈을 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장기려 박사를 보고 사기꾼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청십자 운동을 벌인지 4년이 지난 1975년, 드디어 청십자 병원이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정말 감사합니다. 하느님께 약속한 것처럼 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평생을 살겠습니다." 병원 간판을 달며 장기려 박사는 하느님께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듬해에는 한국 청십자 사회복지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그의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1979년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했습니다. 선생님은 복음병원에서 은퇴한 후에도 청십자의원에서 진료하는 등 여러 사회봉사활동을 계속하였고 은퇴가 없는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직업과 재능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것입니다. "주의 손과 발되어 세상을 치유하며 주따르게 하소서"라는 찬양가사처럼 세상을 향한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위대한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시기 바랍니다.
* 성산 장기려선생 기념사업회(http://www.bluecross.or.kr)로 가시면 사진과 보다 많은 자료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와 함께한 장기려선생님
장기려 박사는 우리나라 외과 학회에서는 아주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외과 전문의였지만,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서민적이고 초라했다.
1995년 12월, 8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부산 복음 병원 원장으로 40년,
복음 간호 대학 학장으로 20년을 근무했지만,
그에게는 서민 아파트 한 채, 죽은 후에 묻힐 공동 묘지 10평조차 없었다.
장기려 박사는 언제나 매우 어려운 처지에서 사셨다.
물론, 병원 원장이나 대학 학장으로서의 수당은 있었겠지만, 그에게는
월급이나 수당보다는 가불이 많았다 .
여기에서 그의 수수께끼가 시작된다.
장 박사에 대해 떠도는 미신에 가까운 풍문 때문에 전국의 가난한
수술 환자들과 다른 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말기 암
수술 환자들이 부산 복음 병원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겨우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아 병이 나으면 그 다음에는 또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들 대부분은 입원비와 약값이 없었다.
이 때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이 원장실이었다.
원래, 잇속이 밝지않아 셈을 잘 할줄 모르고, 바보 같을 정도로 마음이
착한 장 박사에게 "시골 우리 집은 논도 밭도 없고 소 한 마리도 없는
소작농이어서 입원비나 치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환자들이
하소연하면, 장 박사는 그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고는 눈물겨워하였다.
병원비 대신에 병원에서 잡일을 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는 없겠느냐는
환자들의 제안에 장 박사는 환자의 치료비 전액을 자신의 월급으로 대신
처리하고는 하였다.
병원 행정을 이렇게 하다 보니 장 박사의 월급은 항상 적자였고,
이것이 누적되면서 병원 운영도 어려워지게 되었다.
결국, 병원 회의에서 결정이 내려졌다.
앞으로 무료 환자에 관한 모든 것은 원장님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부장 회의를 거쳐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가난한 환자들이 장 박사를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결정권을 박탈당한 이후부터 장 박사는 어려운 환자들이 생기면
야밤에 탈출하라고 알려주고는 하였다.
"내가 밤에 살그머니 나가서 병원 뒷문을 열어 놓을테니 탈출하라."는
것이었다.
장 박사의 이러한 '바보 이야기'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북녘에 두고온 아내와 가족에대한 그리움을 가슴에묻고 지낸 장기려 박사는
평생에 걸쳐 묵묵히 사랑을 실천한, 진실로 아름다운 예수의 사람이었다.
** 이산의 아픔 삭이며 희생과 봉사의 삶 살다간 참의사**
무료병원 운영과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통해 仁術을 펼친 명의 장기려,
그는 북녘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지낸 민족분단의
희생자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4개월만인 1950년 10월 19일 유엔군과 국군은 평양을
탈환했다 당시 김일성의과대학 외과의사였던 장기려는 대학병원과
야전병원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해 12월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국군은 평양을 철수하게 되고 이 때
장기려를 남으로 데려가기 위해 그를 야전병원 환자수송용 버스에 태웠다.
그것이 가족과의 45년에 걸친 긴 이별의 시작이 될 줄 몰랐다.
그는 언젠가 가족들을 만날거라는 희망 하나로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시작했다.그러나 곧 다시 가족을 만날거라 했던 그의 바람은 길고 긴
분단의 세월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장기려의 인생은 헤어진 가족을 향한 그리움으로 바쳐진 사랑과 기도였다.
"의사를 한번도 못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위해 평생을 바치겠다"
장기려의 가족에 대한 사랑은 황무지나 다름없던 우리 의료계에
'가난한 사람도 치료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박애정신의 꽃을 피워냈다.
그는 의사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이
허락한 소명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의사 한번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노라고 하나님 앞에 맹세했다.
장기려는 경정의전에 들어가면서 한 이 하나님앞에 약속을 생이 다할 때
까지 지켜나갔다.
평생을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인술을 펼친 의학박사 장기려. 그는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실제 모델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성자'로 불렸다.
작가 이광수는 장기려를 가리켜 '당신은 聖者아니면 바보요'라고 말했다.
장기려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 북에 있는 가족도 누군가
도와줄 것이라고 믿음을 갖고 하루 200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았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 -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 설립
병원 규모가 커지면서 무료진료가 불가능하게 되자 장기려박사는 1968년
'건강할 때 이웃돕고, 병났을 때 도움 받자'라는 표어 아래, 북유럽의
의료보험제도를 본 딴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탄생시켜 한국 의료보험
제도의 모태가 되었다.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그때, 주변의 몰이해와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
하고, '병의 고통으로 시달림을 받는 것으로도 슬픈데 가난한 사람에게
과중한 치료비를 부담시킬 수 없다'는 신념 하나로 장기려는
한국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장기려박사는 서울의대 전신인 경성의전을 수석 졸업하고 59년 국내
최초로 간대량(肝大量) 절제수술에 성공하는 등 학문적으로도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중 한 사람이었다.
장기려는 한국 간외과학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나는 가진 것이 너무 많다'
장기려는 수술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서 자기 돈으로 수술을 해주었다.
자기 월급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환자를 야밤에 탈출시키기도 했다.
평양 시절 그의 부인은 장기려가 생활비를 가져다 주지 않아
의사 가운과 환자복 삭바느질로 생계를 꾸려갔다.
그는 평생 자기 집 한 칸 갖지 않고 병원 옥상의 24평 사택에서 살았다.
'다른 사람이 모두 만날 수 있을 때, 나도 가족을 만날 것이다
평생 나누고 봉사하는 삶을 산 장기려 박사. 그 자신은 분단 조국에 의한
피해자였다. 1.4후퇴 때 환자를 돌보는 와중에 부모 부인 5남매를 평양에
남겨두고 둘째아들만 데리고 피난길에 올라 이산가족이 된 장박사는
평생 재혼하지 않고 고향의 가족을 다시 만날 날만 기다리며 살았다.
그런 그가 85년 정부의 방북권유를 거절하였다. 혼자만 특혜를 누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장박사는 끝내 그리운 가족과 상봉하지 못한 채 95년
성탄절 새벽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그는 임종을 앞둔 1995년 10월 측근들에게 통일과 민족의
만남에 대해 " 이 땅에서 지금 만나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게
짧게 만나느니 차라리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만나야지 " 라고
말하며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는 부산시민상, 막사이사이상, 국제적십자상, 국민훈장, 호암상
등을 수상했다. 특히 그는 지난 95년부터는 당뇨병과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상오 청십자병원에서 영세민 10여명씩
진료해 주다가 그해 성탄절 새벽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경기도 마석
모란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장기려 박사의 비문에는 그분의 유언대로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들의 벗'임을 자처하며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철저한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 간, '이 땅의 작은 예수'로
칭송받은 분이다.
그에게 붙은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푸른 십자가' 라는 찬사에
한 점도 부끄럼 없이 평생 이웃 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
예수처럼 살고 싶었던 사람
절대빈곤시절의‘천막 무료진료’부터 미래를 내다본 의료복지 정책인
'청십자 의료조합’까지, 그것은 그의‘사랑'이 이뤄낸 기적이었다.
그는 예수처럼 살고 싶어했고, 그렇게 살았다.
분단의 아픔을 환자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한 의사 장기려의 삶은
우리 모두가 본 받아야 할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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