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490) 멧밭쥐
대과 급제에 실패한 배 초시
노름판에 발을 들이는데…
“여봐라 이방, 게 있느냐.”
“네, 대령하옵니다. 사또 나으리.”
헤헤헤헤 호호호호 킬킬킬킬 깔깔깔깔.
한낮의 매화촌 서당이 웃음바다가 됐다. 요란한 웃음소리에 낮잠에서 깬 훈장님이 계면쩍은 얼굴을 옷소매에 파묻었다. 선비들은 과거에 불합격해 등용되지 못하고 훈장이 돼 학동들을 가르치는 걸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매화촌 서당의 배 초시도 그런 선비다. 열두어명 학동이 훈장님의 그런 생각을 훤하게 꿰뚫고 조롱까지 하는 것이다. 배 초시를 더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매화촌 유림들이다. 유림들은 툭하면 서당에 와서 훈장님의 학식을 시험했다.
배 초시의 사십여년 인생은 파란만장이다. 천석꾼 집안에서 태어나 온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안고 열다섯살에 초시 합격, 대과는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는데 거기까지였다. 일곱번 낙방한 뒤 또 낙방하자 포기하고 주색잡기에 빠졌다. 천석꾼 부자 집안이라 술과 여자에 돈을 물 쓰듯 써도 재산은 줄지 않았다. 기생집에 친구들을 몰고 가서 주지육림 속에 빠지고 첩을 얻어 딴살림을 차려도 가을이면 또 곳간이 가득 찼다.
하지만 그런 것들에 무감각해져 더 짜릿한 자극을 찾아 노름에 발을 들여놓으면 문제는 달라진다. 노름판에 빠지면 판이 점점 커지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돈을 딴다. 노름꾼들이 일부러 잃어주는 것이다. 본격적인 노름판이 벌어지면 하룻밤에 문전옥답 수십 마지기가 휙휙 날아간다. 천석꾼 만석꾼도 소용없다.
배 초시도 그런 길을 걸어오며 마누라는 딸 하나를 남겨두고 가출하고,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까지 남의 손에 넘어갔다. 결국 어린 딸을 업고 집을 나와 허름한 서당에 똬리를 틀었다. 낮에는 학동들을 가르치다가도 해가 지면 그놈의 짜릿함을 잊을 수가 없어 정자관을 벗어놓고 외동딸 은지가 제 엄마에게 받았던 은비녀를 훔쳐 주막집 구석방 마작판으로 달려갔다. 은비녀는 금방 날려버리고 삼경에도 묵 한그릇 겨우 얻어먹고 터덜터덜 서당으로 돌아오곤 했다. 가을 추수가 끝나 학동들이 한해 학비로 가져온 쌀자루도 몽땅 마작판에 꼬라박자 배 초시는 당산목에 목을 매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열네살 은지는 홀연히 사라졌다. 매화촌에 춘하추동이 왔다 가고 배 초시와 은지가 가끔 회자되던 것이 뜸해지더니 십여년이 지나 완전히 잊혔다.
주막집 구석방은 여전히 마작판으로 뜨겁다. 금은방 구 영감, 인삼도매상 최 생원, 돈놀이꾼 황 처사, 천석꾼 지 대인 등 배 초시를 빨아먹던 꾼들은 여전히 터줏대감으로 마작판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마작판에 새파란 여자가 끼어들었다. 터줏대감들이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내자 그 여자는 비단 보자기를 풀어 오동나무 상자를 열어 보였다. 경면주사가 영롱한 빛을 발했다. 여자는 마작 패를 다루는 솜씨가 능숙했다. 잃고 따고를 반복하며 판을 자꾸 키웠다.
여자는 매화촌에서 조금 떨어진 집 아래채를 빌려 외부와 담을 쌓고 살고 있었다. 집주인은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다. 어디서 몇번 본 듯한 여자가 문을 꼭 잠그고 집 안에 처박혀 있다가 해가 떨어지면 야행성 들짐승처럼 밖으로 나간다. 새벽닭이 울고 나서야 소리 없이 들어와 방문을 꼭 잠가버린다. 어느 날 낮에 딱딱거리는 소리가 들려 문틈으로 들여다봤더니 여자는 마작판을 앞에 놓고 혼자서 마작을 하고 있었다. 네사람이 하는 것처럼 패를 네군데 놓았는데, 이상한 것은 뭔가 엄지손가락만 한 것이 여자의 치마 속에서 나와 방을 한바퀴 굴러다니다가 다시 치마로 쏙 들어간다는 것이다.
해가 떨어지자 여자는 집을 나섰다. 마작판은 더 커졌다. 서로 삿대질도 하고 언성을 높일 때도 있지만 여자 노름꾼은 언제나 조용했다. 이길 때도 표정에 변화가 없고 큰판을 져도 낙담하는 기색이 없었다. 자세히 눈여겨보면 엄지만 한 그 무엇이 돌돌 굴러서 구 영감 어깨 위에도 올라갔다가 최 생원 무릎에도 올라갔다가 여자 노름꾼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지만 아무도 눈치채는 사람이 없다. 여자는 역패·장풍패를 자유자재로 내놓았다. 엄지손가락만 한 놈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쥐, 멧밭쥐로 영리하다. 남의 패를 보고 여자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 종아리를 긁어 신호를 보낸 것이다. 이 여자는 배 초시의 딸, 은지다. 아버지 배 초시가 마작판에서 날렸던 돈을, 아니 그 이상을 긁어모아서 홀연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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