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1년 전 의사파업 때는 잘 한다고 나중에 파업기간 월급까지 다 주던 병원들의 교회가.....
영화 잔 다르크를 보았다. 생각해 볼 좋은 장면이 많았지만, 지금 이 글을 쓰는 내 머리에 깊이 기억되는 것은 제1부 전쟁편의 맨 마지막에 잔 다르크가 "오늘 안에 이 다리를 건너 저 성채를 점령할 것"이라고 한 예언이 이루어지는 장면이다.
이미 그날 낮의 여러 번 공격이 실패하고 잔 다르크 자신도 화살에 맞아 부상하는 등 연전연승하던 잔 다르크의 신화가 처음으로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다. 잔 다르크는 호젓한 곳을 찾아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 지 알려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었고, 병사들은 해 저물녁이 다가오자 승리는 포기한 채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자 슬그머니 화가 난 한 지휘관이 자신의 한 부하에게 잔 다르크의 깃발을 들려 둘이서 성벽 가까이 다가가 영국인들을 놀리자고 제의한다. 그러던 중 잔 다르크가 돌아와 "내가 내 깃발을 성벽에 대면 공격을 시작하라. 우리는 이길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기 깃발을 찾는다. 자기 깃발을 든 병사가 성벽 근처 다리 밑에 숨어 있고, 지휘관은 다리 밑 깊숙이 숨어서 병사만 더 앞으로 나가라, 깃발을 흔들어라 다그치는 상황이었다. 잔 다르크는 필마 단기로 다리를 건너 그 깃발을 뺏어들려 하고, 다리 밑 용감한 바스크인 병사는 영문을 몰라 그 깃발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자 지휘관은 더 용기를 내라고 꾸짖고, 주저하던 병사는 "좋아요. 그럼 오늘 일당에 이것도 계산해 주세요"하면서 깃발을 든 채 다리 밑에서 나와 툭 터진 성벽 앞으로 돌진한다. 마침내 잔 다르크는 깃발을 성벽에 대고, 그 때까지 지쳐 널부러져 쳐다보고 있던 프랑스인들은 돌격하여 단숨에 성채를 함락한다.
하느님 계시를 받아 프랑스를 망국의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 잔 다르크 성인의 영광 안에서, 생사를 걸고 규율을 생명으로 하는 군인의 전투 중에서, 이 "오늘 일당 더 주세요" 이야기가 내 관심사다.
오늘 일당 더 주세요
교회병원 파업이 지난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야에 끝났다.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던 파업 지도부는 그날 자정 미사에 참석한 뒤 파업을 풀었다. 노조의 처절한 패배였다. "불법파업을 풀기 전에는 국물도 없다"는 식으로 완강했던 교회측의 입장이 관철됐다. 교회는 승리한 것이다. 어쩌면 "원칙의 승리"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번 파업이 다른 병원 파업과 달리 유독 오래 끌고, 마침내 노조측의 패배로 일단 마무리 지어진 데에는 "원칙"에 대한 교회의 깊은 공경심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그것은 "법은 지켜야 한다"는 것이고, "병원은 다른 직업과 다르다"는 인식이다. 과연 그럴까? 곰곰 생각해 본다.
파업 막바지에 김수환 추기경은 교회병원 파업사태에 대해 노조측이 잘못했고 교회가 옳다는 입장을 언론에 밝힌 바 있었다. 그러나 김 추기경 자신도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악법도 법이니 지켜야 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잘못된 악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밝혀 세인의 감탄을 자아낸 바 있었으니, 문제는 불법파업 논란을 낳은 노동관계법이 과연 교회의 입장처럼 지켜야 할 법이냐 아니면 노동계의 주장처럼 쓸데없이 불법을 양산하는 악법이냐는 것부터 따져야 할 노릇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교회는 이런 원천적인 원칙에 대한 논란은 끝끝내 회피한 채 "일단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 일단 있는 법을 어겼으니 불법 파업이고, 불법 파업자를 정당한 대화 상대로 인정하는 자체가 불법을 용인하는 것"이라는 일관된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이번 파업 이전에 노동사목 등 교회의 관련 부문에서는 바로 해당 노동관계법을 전형적인 노동악법이라고 개폐를 주장해 왔던 것이다. 물론 "교회 한 부분의 의견을 이제 다시 보니 잘못된 것이었다, 그러니 교회 전체의 의견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생각을 달리할 수는 있다. 그렇다 해도, 최소한 그 잘못된 "부분의 의견"을 이 기회에 교정하는 자체 내 토론과 의견형성과정이 있어야 했다.
악법은 바로 잡아야
또한 이처럼 법 자체가 노동자에게 불리한 상태에서 그 법에만 정당성을 의지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더구나 인권주일 담화에서나마 노동자의 이 고난에 이해나 동정하는 몸짓이라도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을 확실히 깨버리고 파업노동자의 불법을 고발하는데 쓰인 것은 충격이었다. 병원파업에 관한 교회의 완강한 태도를 그래도 교회 전체의 태도는 아닐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사태는 병원과 노조의 문제이지 교회와 노동자의 대립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희생을 감수해 왔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일관된 노력은 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가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근로자의 단체행동권은 보장되어야 하나 그것은 '정당한 파업'이 갖추어야 할 조건을 구비한 단체행동에 국한되는 것입니다. 집단적 이기주의를 앞세워 환자를 볼모로 한 부당한 주장은 어느 경우에도 근로자의 권리행사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제21회 인권주일 담화문, 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 교회의 담화문은 자신의 말과는 정반대로 이번 사태가 병원과 노조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자신도 당사자의 하나임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었다.
나아가 늘 두리뭉수리한 추상 언어로 일관하던 교회의 문장법이 자기 이해가 걸린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구체적 사실을 거론하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는 것은 놀라웠다. 20여 년에 걸친 인권주일 담화 역사상 가장 구체적인 문장이 바로 이 구절이 아니었을까 기억을 더듬어 본다. 그 이전 수많은 추상적인 인권주일 담화를 읽을 때마다 많은 이들이 그나마 행간을 읽으려 노력했다. 어리석지 않았던가. 이번에 보듯, 이전에도 교회는 늘 원한다면 얼마든지 구체적일 수 있었으나, 다만 그렇게 인권침해를 구체적으로 규탄하길 꺼렸던 것이 아닌가.
아직 많은 이들이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병원에서 어찌 한낱 돈 이야기냐?"는 인식을 거두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교회 병원을 운영하는 사제나 수녀들의 마음속에는 과연 그것은 생명에 대한 존중뿐이었을까? 병원 등 특정한 어떤 직업, 기능을 필수공익사업장으로 규정하여 노동쟁의를 제한한 것 자체가 노동행위에 대한 어떤 선입견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앞서 잔 다르크의 전투 장면을 이야기한 것은, 그 전투 중에 벌어지는, 아니 하느님 계시가 이루어지는 성스런 그 기적의 시간에도, "힘든 일 하니까 일당 더 달라, 그래 더 줄 테니 빨리 깃발 들고 나가" 하는 숨가쁜 임금교섭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그것은 성스러움의 반대가 아니라 성스러움의 일부였다.
흔히 군인이나 경찰, 법원, 공무원, 병원, 군수공장, 전력이나 철도 같은 기간산업 등에서는 파업이란 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 성스런 영역인 것처럼 알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다 정당한 파업의 사례가 있다. 2차대전 중 영국 여성노동자들은 파업을 했다. 우리의 6.25 전쟁 중에도 당시 남한 최대의 공장이라던 조선방직의 여성노동자들은 적전 파업을 했다. 그리고 그 몇 달 뒤 만들어진 것이 바로 지금 근로기준법이다. 그들은 이번 병원파업과 달리 아무도 체포되지 않았고, 아무도 해고되지 않았다. 화가는 그들의 노동을 그림으로 남겼다. 전쟁 중에도 파업은 제한되지 않는 노동자의 권리였거늘, 하물며 전시도 아닌 평시에 파업이 직간접 원천봉쇄된 영역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법의 이름으로 노동자의 권리가 원천봉쇄됐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늘상 쏟아지는 비난이 있다. 교통노동자들이 파업하면 "시민의 불편을 볼모로", 병원에서 파업하면 "환자를 볼모로", 전쟁 때 파업하면 "민족의 운명을 볼모로". 교회도 인권주일 담화에서 그랬다. 노무현 대통령당선자는 과거에 "여군 속옷을 만든다는 이유로 방위산업체로 지정하고 노조결성을 금지하는" 사례를 지적한 적이 있다. 과연 시민과 환자와 민족을 볼모로 노동자의 파업권을 포기하라고 위협하는 것이 아닌가? 겨우 1년 전 의사파업 때는 잘 한다고 나중에 파업기간 월급까지 다 주던 병원들의 교회가, 똑같은 파업을 하는 같은 병원 노동자들에게는 "집단이기주의", "환자들을 볼모로"라고 비난했다. 물론 파업기간 임금은 무노동무임금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고. 교회는 원칙을 내세웠지만 오히려 원칙이 없던 것은 교회였다.
파업 의사에겐 무노동 유임금
영구히 신성한 파업예외의 영역은 원래 없다. 그런 신성한 영역이 있다는 관념 자체가 바로 특수한 시대, 특수한 계급 역학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 특정한 사회현실 속에서 파업이 제한되는 영역을 두기로 사회 전체가 합의한다 해도, 그것은 "나는 성스럽고, 너는 저질이다"는 구분과는 상관없다. 그런 관념이 숨어든다면, 그것은 오히려 성스러움을 모독하는 오해다. 교회병원 파업은 교회의 숨은 약점을 많이 드러냈다.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이라는, 이른바 사회교리는 노조와 병원 측에서 각기 자기에게 유리한 측면을 가지고 논쟁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사회교리는 교회 자신이 당면한 문제에서조차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앞으로 교회는 당분간 교회가 관여되지 않은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사회적 가르침을 거론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오만한 태도로 보일 것이다. 이번 파업사태에서 사회교리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는 것은, 파업이 7개월 넘게 진행되는 긴 시간 동안 이 문제를 둘러싼 사회교리 논쟁이 교회 안에서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던 것으로도 증명된다.
이번 파업에서 교회언론의 문제도 또다시 드러났다. 교회 언론은 이번 파업을 신자들에게 충실히 보도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나마 사건의 한편 당사자인 교회측의 입장만 그대로 실었다. 거기엔 일방적 전달만 있었지 보도는 없었다. 또 사태가 종반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이번 파업문제에서 교회가 나서라는 노조측의 주장에 대해 교회는 당사자가 아니며 노조와 병원이 당사자라는 입장을 내세워 노조측의 대화 요구를 거부했다. 그렇다고 교회가 충실한 제3자였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제3자"인 교회가 내는 교구 주보 등에서 파업문제를 신자들에게 알리려면 양자의 의견을 공평하게 전했어야 했다. 그러나 교구 주보는 병원 측의 입장만 100% 전달함으로써 사실상 교회가 당사자이거나, 적어도 확실한 병원편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이번 파업을 계기로 적어도 노동운동 지도부 사이에는 교회에 대한 환멸감이 폭넓게 자리잡았다. 그깟 노동운동가 몇은 문제가 아니고, 실제 하층민이 교회에는 많다고 생각한다면 매우 위험하다. 이들 전투적 노동자들은 지금은 소수지만, 앞으로 점차 이 사회의 주류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노동자들 안에서도 물론 현 지도부에 속하는 층에는 아직 상대적으로 가톨릭 신자가 많다. 그것은 교회가 자랑하듯 과거의 유산일 뿐이다.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였던 권영길의 부인이 독실한 신자로서 이번 파업의 한 당사자였던 한 교회병원에서 8년이나 호스피스 자원봉사 활동을 했던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 교회와 노동자 사이에 어떤 간극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하는데 좀 도움이 될 것이다. 이대로 한 세대만 더 흐른다면 "노동자가 교회를 떠났다"던 19세기 유럽교회의 한탄은 한국에서 다시금 재현될 것이다. 아니 이미 재현되고 있다. 노동자들은 한국교회에 대해 아직 호감과 미련이 남아 있으나, 이처럼 직접 이해가 부딪히고 교회가 다른 회사의 고용주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아니 직접 고발당하고, 감옥에 가고, 수억 원씩 피해배상 소송을 당하고 하면서 교회에 다가올 때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갈 것이다.
일반 기업과 다르지 않은 교회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줄어드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옳은 일 하다가 그런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다만 교회가 낮은 자들에게 봉사하지 못했음을 두려워할 뿐이다. 오히려 "신자수"에 신경이 집중되는 것이 교회의 이런 잘못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며칠 전에 창원에 있는 두산중공업에서 한 50대 노동자가 분신 자살했다. 그는 자녀 둘이 고등학생인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그 공장에 20년 넘게 다닌 열성 노조원이었고, 그 때문에 2개월 옥살이는 물론 불법파업이 회사에 끼친 손해에 대해 2,000만원 배상 판결을 받아 6개월 째 월급을 못 받고 있었다. 그는 정직 3개월 징계가 끝나 복귀한 뒤에도 "오줌 누러 갈 때도 감시", 각서를 써라, 근무지를 이전하라는 압박에 한사코 버텨왔었다. 그런 압박은 인간을 파괴한다.
그런 두려움을 잘 알면서도 시작하는 파업은 노동자들의 성사와 같다.
이번에 교회 병원이 "불법파업자"에게 한 여러 조치와 두산중공업이 "불법파업자"에게 한 조치는 똑같다. 해고, 형사고발, 배상소송, 복귀 뒤 각종 압박과 불이익 조처. 나는 교회가 두산중공업과 입장이 똑같으며, 비난받는 두산중공업의 처지를 오히려 동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대 한국교회가 교회가 아닌 괴회(怪會)
불법파업으로 회사에 끼친 손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원래 파업이란 것 자체가 "회사에 끼칠 손해"가 없다면 원래 성립부터 되지 않는다. 손해는 당연한 것이고, 그것은 노동자를 고용한 자본가가 당연히 셈에 넣어 두어야 할 한 가지 사업조건일 뿐이다. 그것을 "손해"로 여기는 것 자체가 이미 노동자를 자본 보호와 증식의 여러 생명없는 도구 가운데 하나로 보는 시각을 전제로 한다. 진정 노동자를 자본가와 대등한 입장으로 인정해야 한다.
일개 노동자에게 평생 갚다가 자손에게까지 물려주어야 할 수억, 수십 억의 손해배상이란 멍에를 들씌우는 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를 따지기 전에, 이런 손해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인지 교회는 성찰했어야 한다. 사정은 전혀 다르지만, 사제에 의한 성추문 문제로 소송비용과 피해보상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법원에 파산신청을 하는 미국 교구들의 마음을 한국교회는 아직 모르는 듯하다. "파산자", 내쫓긴 자(the wretched)의 심정을.
파산자란 구절은 그저 성서에 쓰여있는 뜻 모를 글자일 뿐이다. 왜 그 성서구절을 노동자들이 노래가사로 쓰는 지도 모를 것이다.
이번 교회병원 파업에서 교회가 과연 현실의 법을 넘은 인간구원의 차원에서 사태를 보고, 세상을 보았는지 의심스럽다. 교회는 그런 영성의 눈을 보여주지 못했다. 현대 한국교회가 교회가 아닌 괴회(怪會)라고 했던 것은 예수회 정일우 신부였다. 십 오륙 년 전 그의 말을 들으며 웃을 때는 그저 한국말이 서투른 외국인 처지를 장점으로 살려 교계제도의 경직성을 꼬집는 말인줄 알았더니, 이제 곰곰 생각해 보건대, 영성을 놓친 교회는 차라리 없느니 만도 못한 집단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