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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8일 토요일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제1독서 : 하바 1,12─2,4
복 음 : 마태 17,14ㄴ-20
그때에
14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15 말하였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
자주 불 속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또 자주 물속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16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 하고 이르셨다.
18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 호통을 치시자 아이에게서 마귀가 나갔다.
바로 그 시간에 아이가 나았다.
19 그때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다가와,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20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믿음의 여정, 믿음의 전사
-믿음 예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새로운 주의 용사 도미니코는
위대한 그의 업적 찬양받으며
그 이름 삶과 맞는 주님의 사람
복음의 전파자가 되시었도다”-
아름다운 전례의 찬미가가 성 도미니코 축일을 참 풍요롭게 합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참 자랑스런 종교입니다. 교회 안에는 얼마나 많은 보물이 있는지요.
보물중의 참 좋은 보물이 아름다운 전례에 성인들입니다.
교회가 필요한 시기마다 선물처럼 보내주신 성인들입니다.
성인들이야말로 참으로 자기를 살았던 참자기를 실현한 분들로
우리 모두의 희망의 표지, 구원의 표지, 회개의 표지가 되는 분들입니다.
기억하고 기념할 뿐 아니라,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고
우리 삶의 모범으로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선물이 성인들입니다.
성인이 되는 것, 주님이 바라시는 바요, 우리 모두의 삶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하느님 불러주신
각자 고유의 모습, 크기, 색깔, 향기로 사는 평범한 성인들입니다.
오늘은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이자 우리 요셉수도원 수도형제들의 신뢰와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문도미니코 수사의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문수사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때마다 ‘문보물’, ‘문천사’. ‘문천재’라 부르기도 합니다.
혼자만의 믿음은 약해 병들고 시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와 '더불어 믿음의 여정' 중에 강하고 건강해지는 믿음의 성장이요 성숙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도미니코 사제는 참으로 치열하게 살다가
만51세에 전사한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입니다. 저는 성인보다 무려 20세를 넘어 살고 있네요.
성인은 12세기 말 13세기 초 스페인 출신으로 남프랑스에 만연해 있던
알빈파 이단과의 대결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두신 분입니다.
성인은 복음적 가난을 살았고 설교했으며 설교 수도회의 창립자가 되었습니다.
성인은 설교와 공부에 강조점을 두었으며
전통적인 수도승 삶 중 육체노동을 포기했고 성무일도도 많이 간소화했습니다.
마침내 일과 고행에 소진했던 성인은 51세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합니다.
말 그대로 치열한 복음적 청빈의 삶을 살다가 전사戰死한 ‘믿음의 전사戰士’입니다.
문득 ‘믿음으로’라는 성가 480장이 생각납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저 산도 옮기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바다도 가르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한생명 다하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한넋을 다하리 믿음으로”
2절까지만 인용했지만 4절까지 다 불러 보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성인이요 아름다운 품위의 사람들입니다.
살아갈수록 진가를 발휘하는 믿음입니다. 노추와 노욕의 노년에 대한 답도 믿음의 삶입니다.
끝까지 믿음의 전사로 살다가 전사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의 여정중의 우리들이요 믿음의 전사인 우리의 신원입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성장, 성숙하는 믿음의 내적 여정인지요.
성서의 모든 인물들이, 교회의 모든 성인들이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요
그 모범이 복음의 예수님이요 제1독서의 하바꾹 예언자입니다.
오늘 복음의 어떤 사람은 아들의 치유를 간청합니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오.”
바로 기도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이요 기도의 힘은 그대로 믿음의 힘이 됩니다.
주님은 이들의 믿음 없음을 책하십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아침성무일도 모세의 찬미가중 다음 대목도 같은 맥락입니다.
“마음 굽은 자식들아. 너희는 나쁘고 사악한 세대로다!
생각 없고 미련한 백성들아, 너희는 이따위로 주님께 은혜갚음 하느냐
주님은 너를 낳아주신 아버지가 아니시며, 너를 만드시고 보존하시는 주님이 아니신가.
지나간 옛날을 추억해 보아라. 여러 세대에 지난 일들을 헤아려 보려므나.”(신명32,5-7).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죽비 같은 말씀입니다.
믿음이 없기에 비뚤어진 세대입니다. 이어 주님께서 호통 치시니 마귀는 나갔고 아이는 나았습니다.
주님은 이어 제자들이 믿음이 약해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음을 지적합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다.”
인자무적仁者無敵만 있는 게 아니라 신자무적信者無敵이란 말도 그대로 통합니다.
무신불립無信不立, 믿음이 없으면 서지 못 한다 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믿음은 삶의 기초임을 깨닫습니다. 반석 같은 믿음위에 인생집인지 반성하게 됩니다.
믿음은 기도입니다.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믿음은 인내입니다. 믿음은 희망입니다.
희망이 있어야 기다림과 인내의 믿음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침묵입니다. 믿음은 순종입니다. 믿음은 겸손입니다,
우리 삶의 모두가 믿음을 드러내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우리 분도 수도자의 정주서원 역시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내리는 항구한 믿음의 수행을 뜻합니다.
주님은 초조히 탄원기도를 바치는 기도의 전사이자 믿음의 전사인 하바꾹에게 응답합니다.
“지금 이 환시는 정해진 때를 기다린다.
끝을 향해 치닫는 이 환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한다. 지체하지 않는다.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살리라.”
주님께 희망을 두고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믿음의 전사가 구원을 받습니다.
의인은 성실함으로 믿음으로 삽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모토였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목표하는바 성실한 믿음의 전사들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이요 죽는 그날까지 주님의 영원한 현역인 믿음의 전사로 살다가
선종의 죽음으로 전사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믿음의 전사로 항구하고 충실히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냈던 형제님 중에
젊었을 때부터 건강 하나는 누구보다도 자신 있는 분이 계십니다.
건강해서 그런지 술도 엄청나게 마시고, 밤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실 때
늘 끝까지 남는 분도 이 형제님일 정도 타고난 건강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글쎄 직장암 3기라는 것입니다.
건강을 잃고 나서 그렇게 좋아했던 술, 담배를 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했지만 이제는 가족과만 함께 하면서 기도 생활에 전념하고 계십니다.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건강을 잃고 나서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병이 왜 나를 찾아왔는지 하느님께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도 감사할 일이구나 싶습니다.
병이 생기고 나서 욕심도 줄어들었고, 무엇이 더 소중한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병도 하나의 은총일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고 하십니다.
불평불만만 가득하다면 이런 깨달음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감사할 일을 찾으면서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덕에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필요한 것을 모두 얻었을 때,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될 때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짜 믿음, 완전한 믿음은 늘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필요를 채웠을 때, 원하는 바를 이루어질 때 생기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과 이기심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짜 믿음, 완전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런 믿음을 갖추고 있을 때 하지 못할 일은 없다고 하시지요.
엄청난 사악함의 홍수 속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권능까지도 거뜬하게 무찌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들에게는 마귀들을 무찌르는 것뿐 아니라
죽은 이들을 되살리기도 하는 모든 권능이 주어졌습니다.
어떻게 가능한 것이 되었을까요? 진짜 믿음, 완전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믿음은 사도들이 원하는 바를 채우면서 생겼던 것이 아니지요.
오늘 복음에서처럼 마귀를 쫓아내는 실패를 통해서 갖게 되었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얻게 되었으며,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온갖 박해를 통해 얻게 된 것이 믿음이었습니다.
하바쿡 예언자는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실함이라는 덕목을 가지고 진짜 믿음, 완전한 믿음을 키우도록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게 될 것입니다.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 산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모’하신 후,
산을 내려오시어 군중에게 가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말하였습니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마태 17,15-16)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너희를 참아주어야 한다는 말이야?”(마태 17,17)
내가 언제까지 “비뚤어진 세대”라는 표현은 <신명기>(32,5)에서
모세가 죽기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비판을 연상시켜줍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 없이 홀로서기를 할 때처럼,
이제 그 당시의 사람들도 예수님이 수난의 길을 가신 뒤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데도
믿음이 없는 현실을 개탄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주어야 한다는 말이야?”라고
하시는 “언제까지”라는 표현에서는
당신 수난의 운명을 감지하고 난 뒤의 상황에서 오는 급박감을 드러내줍니다.
특별히 여기서는 ‘비뚤어졌다’는 말과 ‘믿는다.’는 말이 대조를 이루는데,
‘비뚤어졌다’는 것은 <신명기> 32장 5절에서 모세가 말해주듯이,
주님을 향하지 않아 비뚤어졌기에 우상숭배에 빠짐을 말합니다.
곧 주님께 속하기보다 우상을 소유하고 자신이 주인이 되고자 함을 말해줍니다.
반면에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무능과 한계를 인정하기에 전능하신 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임입니다.
곧 ‘비뚤어졌다’는 것은 타자를 믿으려 하지 않음이요,
그 결과 병을 치유하지 못하는 무능력임을 말해주는 반면, ‘믿는다.’는 것은 받아들임이요,
그 결과 병을 치유하고 마귀를 쫓는 능력이요,
나아가서는 ‘못할 일은 하나도 없는 전능’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마태 17,19) 하고
묻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약한 탓입니다.
‘믿음이 약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님의 전능하심에 온전히 개방되어 있지 못하고 의혹이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그분에게서 오는 치유의 능력이 흘러들지 못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복음에 바탕을 둔 믿음이 아닌 자기 자신을 믿어버린 까닭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무능한 자신을 믿으면 무능해질 것이고,
전능하신 그분을 믿으면 전능해질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기도 -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주님!
제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보다, 당신 뜻에 합당하게 하소서.
당신을 통해 제 뜻을 이루기보다, 당신 뜻을 알아듣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 하고, 먼저 기도하게 하소서!
힘을 주시는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소서.
모든 것 안에서, 당신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0년 동안 염색을 하였습니다.
아버님을 닮아서 일찍 머리가 하얗게 되었고 아직은 젊은 나이였기에 염색을 시작하였습니다.
염색을 하지 않고 지내는 동창신부들도 있었습니다.
염색을 해야 하는 이유도 찾으면 많고, 염색을 하지 않는 이유도 찾으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적도 있었습니다.
코로나19로 외부의 일정이 대부분 취소되면서 20년 동안 하던 염색을 그만두었습니다.
오랫동안 가려졌던 하얀 머리카락을 보았습니다. 조금은 낯설었지만 곧 익숙해졌습니다.
지인들도 좋게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염색을 하는 것도, 염색을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며 기쁘게 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문도 새롭게 지면을 개편하곤 합니다. 최근에 평화신문은 지면을 새롭게 단장하였습니다.
정민 베르나르도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사보다는 야사가 흥미진진하듯이 정민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한국 교회사의 숨은 그림을 찾는 재미가 있습니다.
김혜경 세레나 연구원의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도 있습니다.
교회사의 큰 사건을 그림으로 보면서 해설을 읽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분도회의 박재찬 신부님의 ‘토머스 머튼 영성 배우기’가 끝났고,
작은 형제회 호명환 신부님의 ‘프란치스코 영성’배우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성인(聖人)은 업적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성인은 삶으로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낸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야기가 기대됩니다.
오늘은 도미니코 사제 축일입니다.
동창 중에는 두 명이 도미니코 본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신부님은 운동을 아주 잘 하셨습니다.
테니스, 농구, 축구와 같이 공으로 하는 운동을 잘 하였습니다.
다른 신부님은 음악을 잘 하셨습니다.
전체 회식이 있을 때면 우리 반을 대표해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두 분 신부님 모두 한번 마음먹은 것은 꼭 실천에 옮기는 성격이었습니다.
한분은 운동만으로 20킬로를 감량하였습니다. 그것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감량도 중요하지만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더욱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신부님은 악기를 손에 잡으면 능숙하게 다룰 수 있을 때까지 연습을 하였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동창 신부님들을 생각하면서 문득 생각합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고 실천이다.’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은 많이 합니다. 그러나 정작 실천을 할 때는 주저하곤 합니다.
실천을 하다가도 며칠 하고 그만두곤 합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금연을 하겠다고, 금주를 하겠다고,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결심은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한 어머니에게서 난 자녀들도 각기 재능과 성격이 다르듯이
한 못자리인 신학교를 나왔지만 저마다 다른 재능으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고 있습니다.
축일을 맞이하는 동창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전에 이런 격언을 배웠습니다.
‘Rome was not built in a Day!'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이루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텃밭을 가꾸면서 변화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 있습니다.
여린 모종이 잎을 내고, 줄기를 세우며 꽃을 피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꽃이 지는 자리에는 방울토마토, 고추, 오이, 호박이 열렸습니다.
물을 주고, 지지대를 세워주고, 거름을 주면 텃밭은 좋은 결실을 맺습니다.
예전에 주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를 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 말씀 역시 신앙 안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태산이 높다고 하지만 하늘 아래에 있는 뫼’일 뿐입니다. 오르지 못할 산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그 믿음은 인내와 성실함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마태 17, 20)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자신의
믿음을 되돌아봅니다.
언제나 그렇듯
결정적인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단순한 믿음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게 하는
간절한 믿음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를
살아가게 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약한 까닭입니다.
믿음은
실천 속에서 자라납니다.
실천은
믿음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게 합니다.
바꿀 수 없는 믿음이
오늘을 태어나게 합니다.
오늘에 필요한 것은
오늘의 믿음뿐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산을 옮길 믿음이 있다면 삽부터 산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간질병 마귀에 걸린 아이를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타볼 산에서 변모된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내려오시는 중이셨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안 계시니 먼저 제자들에게 이를 청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그 마귀를 쫓아낼 수준까지는 올라오지 못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실 때 제자들도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있는 가운데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에 제자들이 못 쫓아내는 마귀가 없고
못 고치는 병이 없기를 바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은 매우 암담합니다.
우선 우리 안에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때 제자들은 시도라도 해 보았습니다.
저도 본당에 있을 때 아프다고 안수해 달라고 오시는 분들이 제일 겁났습니다.
어차피 제 믿음으로는 안수해 줘 봐야 치유가 안 일어나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치유해 달라고 기도하고서도 “병원 가보셔야죠!”, “수술 잘 받고 오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마음 안에서는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열매로 주어질까요, 씨앗으로 주어질까요?
예수님께서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을 옮기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런데 만약 복권에 당첨될 믿음이 있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먼저 복권을 살 것입니다. 한 번에 안 되면 또 살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것들이 맞아가며 정말 믿음이 성취될 수 있음을 더 확고하게 믿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엔 반드시 당첨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이 자라나는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오늘 제자들이 예수님께 꾸중을 받는 것은
“그동안 왜 믿음을 성장시키지 못했느냐?”인 것이지, 믿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한자성어를 잘 압니다.
중국의 어느 마을에 ‘우공’이라는 사람이 죽기 전에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을 앞에 있는 큰 산 때문에 외지와의 소통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 산을 옮길 계획을 짭니다.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어디서부터 옮길 것인가를 궁리하고 삽을 삽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못하면 내 아들이 이을 것이요, 아들이 못하면 손자가 이을 것입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렇게 한 노인이 산을 옮기기 위해 매일 산을 파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자,
이에 감복한 임금이 산을 옮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인도에서 ‘다쉬라트 만지히’라는 농부가 바위산을 뚫은 일이 있습니다.
그가 살던 마을은 바위산으로 갇혀있어 다른 마을로 가려면 70km를 걸어야 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다쳤을 때 그 산 때문에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게 된 것이
그가 산을 파기 시작한 이유입니다.
그는 염소를 팔아 망치와 정을 사고 그것으로 22년간 돌을 깨서 110m의 길을 만듭니다.
이로 인해 70km가 5km로 단축되었습니다.
인도 정부에서 그에게 상을 주려고 했을 때
그는 그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만든 길을 포장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 길이 완성된 것입니다.
현대에 이렇게 치유의 기적이 부족한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키울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믿음은 열매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씨로 뿌려집니다.
살이 빠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식사량을 줄이기 시작하고 운동을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산을 옮길 수 있다고 믿으면 옮겨지기를 기다리지 말고 삽과 곡괭이를 사야 합니다.
재테크 크리에이터 주언규 씨가 tvN ‘유퀴즈 온 더 블록’에 나왔습니다.
그의 수익이 한 달에 1억 8천이 넘을 때도 많다고 합니다.
180만원 월급쟁이에서 어떻게 100배의 성장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의 재테크 비법 때문입니다. 비법은 간단합니다.
우선 삽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터넷 쇼핑몰을 만드는 데는 그리 큰 비용이 안 든다고 합니다. 물론 잘 안 될 것을 압니다.
그러나 안 되는 카페도 한 명은 손님이 있게 마련이라는 생각으로,
매일 한 개씩, 수백 개의 쇼핑몰을 만드는 것입니다.
잘 되는 쇼핑몰이 하루 10개를 판다면 그는 100개의 쇼핑몰을 만들어 하나씩만 판다고 합니다.
결국, 다 합치면 한 달에 엄청난 수입이 들어옵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도 키워나가야 합니다.
저는 그래서 몸이 아프다고 안수해 달라고 하는 분들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물론 나에게 치유할 능력이 없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크게 에너지가 소비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산 성당에 있을 때는 미사가 끝나고 나면 항상 수십 분의 신자분들이 머리를 숙이고 계셨습니다.
100명 안수해 드리면 2~3분은 몸이 좋아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볼 때 감기가 낫는 정도인 것도 있고 조금 신기한 경우도 분명 있습니다.
본당 평일 미사 중에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치유의 미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많은 분께 병자성사를 드리면 한두 분은 분명히 치유되는 분이 나올 것입니다.
병자성사는 돌아가실 분들만이 아니라 치유를 위한 성사입니다.
그 좋은 것을 돌아가시기 직전인 분들에게만 주기 위해 묵혀두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을 키울 때야 주님께서 오늘 제자들에게
들으라고 하시는 이 꾸중을 듣지 않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전 요세피나 수녀
꿀벌은 몸통에 비해 날개가 너무 작아서
원래는 날 수 없는 몸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꿀벌은 자기가 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당연히 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열심히 날개짓을 함으로써
정말로 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 생에 단 한 번> 장영희
믿음의 힘, 크기의 차이가 아닌
있음과 없음의 차이임을 꿀벌에게서 배우고
겨자씨에게서 답을 찾는다.
어쩌면 오늘 복음에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호통은
이천년 전 세대의 구마가 아니라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세대에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수님께서는 물불을 가리지 못하는 간질병자를 아들로 둔 부모의 심정,
치유의 능력을 펼치지 못하는 주님의 제자들의 심정을 알고 계셨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하고 한탄하심은
부족한 믿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음'에 대한 안타까움이셨으리라.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우리에게는 이미 하느님 심어주신 믿음이 '있음'을 알게 해주는 이 기도에
부족한 믿음을 더하여 주십사 간구하며 오늘을 봉헌한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