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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관한 시모음♤
+ 여행
얼떨결에 떠나자
기대는 조금만 하고
눈은 크게 뜨고
짐은 줄이자
어디라도 좋겠지만
사람과 엉키지 않는
순수한 곳이라면
만사를 팽개치고
뒷일도 접어두자
여정에 뛰어들어
보물이 드러나면
꿈꾸던 보자기마다
가득히 채워오자
문물을 얻지 말고
세상을 담아오자
태엽을 달아
늘어지게 우려먹자
돌아오면 바로
어디론가 곧
떠날 준비를 하자
(임영준·시인, 1956-)
+ 여행
여행이란 늘 외부에서 일어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시공의 특정한 곳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행이란
공중에 원을 그리며 나는 새들이나
단숨에 땅을 몇 마일씩 삼켜버리는
비행기의 그림자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인장 사이 마른 샘터에서 목을 축이려고
괴롭게 괴롭게 앞으로 나아가는
썩어가는 뱀의 그런 전진은 보지 못한다.
여행은 종종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
우리의 궁극적 여행은
우리 내부의 공간 깊숙이로 향해 가는 것.
우리의 말이 그 궁극적 무의미 속으로 가고
백조가 그 마지막 황홀 속에 부리를 묻듯.
(고창수·영상작가 시인)
+ 여행에 대한 짧은 보고서
사는 일이 그냥
숨쉬는 일이라는
이 낡은
생각의 驛舍에
방금 도착했다
평생이 걸렸다
(이화은·시인, 경북 경산 출생)
+ 여행旅行
목하 수행중이다
살을 째보기도 하고
피를 철철 흘려도 본다
말수를 줄여도 보고
명상에 잠겨도 본다
몸살을 앓아도 보고
오만 별 짓거리를 다해본다
허나 역시
참 수행은
길을 떠나는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는 듯싶다
길이 곧 깨달음의 스승이다
다시
길 떠날 채비를 해야겠다
(김낙필·시인)
+ 수학여행 길
오늘도 하루
370원어치
아침 수학여행 길
새로운 산과 강과 하늘과
나무와 만나고
다시 370원어치
저녁 수학여행 길
만났던 산과 강과 하늘과
나무와 이별하고
돌아와 고단한 하루
날개를 접는다.
(나태주·시인, 1945-)
+ 여행자의 길
긴 바다쪽 절벽을 따라가다가
울산 지나서
예쁜 수로부인 유람길쯤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동해 일주도로를 면해 누운 어느 해안선
어둠에 묻힌 정자의 품속에다
여장을 풀었다
수수께끼의 얼굴 감춰진 채
살 냄새 그윽하던
해맞이 여관 가슴께로
빠알간 젖무덤이 솟아오르는 아침
파도의 하얀 이빨이 맞대인 언덕에서
과메기를 샀다
사랑하라 사랑하라 살아 있을 동안
뼈가 마르도록 서로
그리워하여라
바닷바람을 쐰 물고기가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외쳤다
수평선을 향해 갈매기 몇 마리가
힘찬 비상을 하였다
(최상호·시인, 경북 경주 출생)
+ 旅行
떠나면 만난다.
그것이 무엇이건
떠나면 만나게 된다.
잔뜩 찌푸린 날씨이거나
속잎을 열고 나오는 새벽 파도이거나
내가 있건 없건 스쳐갈
스카프 두른 바람이거나
모래톱에 떠밀려온 조개껍질이거나
조개껍질처럼 뽀얀 낱말이거나
아직은 만나지 못한 무언가를
떠나면 만난다.
섬 마을을 찾아가는 뱃고동 소리이거나
흘러간 유행가 가락이거나
여가수의 목에 달라붙은
애절한 슬픔이거나
사각봉투에 담아 보낸 연정이거나
소주 한 잔 건넬 줄 아는
텁텁한 인정이거나
머리카락 쓸어 넘기는 여인이야
못 만나더라도
떠나면 만난다.
방구석에 결코 만날 수 없는 무언가를
떠나면 만나게 된다.
산허리에 뭉게구름 피어오르고
은사시나무 잎새들
배를 뒤집는 여름날
혼자면 어떻고
여럿이면 또 어떤가?
배낭 매고 기차 타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볼 일이다.
(손광세·시인)
+ 여행을 하고 싶다
강물 같은 세월 속에 부서진
혼신의 파편을 모아
마지막 모닥불을 지피는 정열로
당신과 여행을 하고 싶다.
이름 없는 작은 포구의
선술집 목로에서
정담을 나누며
마시는 한잔 술에
추억을 쏟아내며
그렇게 밤을 지새고 싶다.
세상의 추한 바람과
시샘의 눈총에도 아랑곳 않고
물욕도 육욕도 없는 세상을 찾아
그렇게 당신과 여행을 하고 싶다.
이제는 퇴색해 흔적조차 알 수 없는
유년의 방으로
돌아가고 싶다.
아득한 고향 그 꿈속으로
그렇게 당신과 여행을 하고 싶다.
(이여진·시인, 전남 해남 출생)
+ 여행 및 운행
민들레가 피고
흰 구름이 부풀고
민들레가 피고
기차가 부풀고
민들레가 피고
흰 모자가 부풀고
민들레가 피고
흰 공이 부풀고
아, 우리 어디쯤 가서
흰 모자를 날리자
흰 공을 날리자
민들레가 피고
간이역이 부풀고
민들레가 피고
깃발이 부풀고
민들레가 피고
호루라기가 부풀고
민들레가 피고
나비가 부풀고
아, 우리 얼굴을 맞대고 앉아
이 작은 우주를
후― 하고 불자
(신현정·시인, 1948-2009)
+ 무전여행에 부침
오늘 나 무전여행을 떠나니
비록 굶거나 잠자리가 불편할지나
시로서 사물을 보며
소설 같은 모험으로
수필 같은 일기를 쓰게 하소서
어느 곳에서든
시심으로 사물을 보고
소설 속의 주인공 돈키호테가 되려거든
그것이 자신의 삶인 양
한 편의 에세이로 마무리하게 하소서.
숲에 잠자고 논둑에서 샛밥을 청하다
한 여인이 그립다면
그땐 우체국으로 가
엽서 위에 시를 쓰소서
단양 팔경의 배 위에 앉으니
이백이 부럽지 않으며
경산의 능금밭에서 능금을 따니
당신의 볼이 생각난다며…
(김순진·시인, 1961-)
+ 아름다운 여행
봄 햇살이 노랗게 영그는 날
하얀 민들레 홀씨처럼 두둥실 날아
당신이 그렇게 예쁘게 노닐던
그 집 앞에서 앉고 싶습니다
사랑의 향기를 가득 실어 자리를 잡고
수줍은 듯 노란 자태로 당신을 향해
웃음 지으며 가끔은 비바람에 모진
아픔이라도 기쁜 마음으로 인내합니다
혹여 당신이 무심히 오가며 거니는 길에
한 송이 민들레가 방긋 웃어 길을 멈추시면
애타게 기리는 그 마음 이해하진 못하셔도
언제까지나 사랑한다 사랑한다 말을 합니다
(이성진·시인, 1969-)
+ 기차 여행
달리는 차창 밖으로, 고향 같은
마을이 내다뵌다
집집마다 감나무 대추나무
잎새들 몹시 반짝거려
동네가 환히 들여다보인다
툇마루마다 반들반들 닦아져 있고
방안엔 머리 감아 빗은
달덩이 같은 처녀 꽃수틀 안고 있네
그 앞집 부엌에선
떡시루 김 오르는 거 보이고, 또
그 옆집 말끔히 쓸어진 뜰의
뽀얀 흙 위엔 암탉 한 마리 졸고
그 곁으로 어린애기 아장 걸어가고 있네
"아, 저기는 내 고향,
내가 자라던 동네
저 아장아장 걷고 있는 애기는
바로 내가 아닐까", 하는 순간
기차는 새된 기적 소리를 지르며
시커먼 터널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김동리·소설가, 1913-1995)
* <문학사상> 1998년 7월호에 공개된 미발표 유작시
+ 여행은 때로
때로 여행은 그럴 때 있어라.
낯선 이들 속에 앉아 맛없는 음식을 먹거나
보내기 싫은 사람을 보내야 할 때 있어라
지구의 반대편을 걸어와 함께 시간을 나누던
친구와 작별하듯 여행은 때로
기약 없는 이별일 때 있어라
닫혀진 문 밖으로 음악이 흐르고
때로는 마음이 저절로 움직여
모르는 여인을 안고 싶을 때 있어라
한때는 내 눈이 진실이라 믿었던 것
초처럼 녹아내려 지워질 때 있듯이
여행은 때로 행복한 도망일 때 있어라
음음음, 소리내어 포도주를 음미하듯
눈감고 바라보는 향기일 때 있어라
숨죽인 채 들어보는 침묵일 때 있어라.
(김재진·시인, 1955-)
+ 어떤 여행
택시기사가 데려다 준
평창에서 제일 맛있다는
그 막국수집에는
수육과 막국수를 나르다가
손님이 건네는
막걸리 한 사발을 받아들면
아예, 뒷굽이 다 닳은 파란 슬리퍼를 벗고
평상위로 올라앉는 아주머니 한 분이 계시지
쭈욱 서울에서 살다가
나이 차이가 많은 남편 몸이 아파서
요양할 겸, 그곳으로 내려와
팔자에 없는 식당일을 하게 되었다며
한 잔 다 비울 때까지
한숨을 폭폭 내리쉬기에
짠한 마음이 들어
수육 한 쌈 싸서 입에 넣어 주었더니
들고 있던 부채를 내게 건네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오물거리다가
막 비운, 막걸리잔을 쓸쓸히 바라보면
또 한 잔 권하지 않을 수가 없어
늦기 전에 서울로 돌아오려면
그만, 일어서야 하는데
그 아주머니 푸념의 꼬리는
한 동이 더 비울 때까지도 그치질 않아서
다음에 다시 오마 약속했지만
언젠가 그 막국수집엘 또 가게 된다면
막걸리 한 잔 건네는 일은
한 번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
모처럼, 별러서 거기까지 갔다가
그 아주머니 얘기만 듣고 왔거든
사는 게 다 그런 거라지만 말야
(최원정·시인, 1958-)
+ 여행- 사랑하는 아이에게
얘야,
지금 나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얘야
여행에는 이런 기차 여행도 있지만
시간과 함께 하는 여행도 있단다
시간과 함께 하는 여행이란
사람이면 누구나 다 하는
그런 여행, 인생이란 여행이란다
인생이란 여행을 하다 보면
젊은이도 되고
엄마 아빠도 되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되지
또 여행을 하다 보면
슬픔의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지만
기쁨의 눈부신 꽃밭을 지날 때도 있지
때로는 희망의 언덕에서 노래를 부르고
성공의 산꼭대기에서 야호를 외치기도 하지
그렇게 여행은 계속된단다
그러나 얘야,
발을 헛디뎌 실패의 허방에 빠지더라도
절망이라는 무서운 늪엔 빠지지 말아라
그 점만 조심하면
시간과 함께 하는 여행 길이
그렇게 힘든 것만은 아니란다
얘야,
그 멀고 먼 여행
용기와 인내를 가지고 하여라
그리고 네 여행이 부디 멋지고
보람있는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
―옆에서 잠든 너를 보며
사랑하는 아빠가.
(권오삼·시인이며 아동문학가, 1943-)
+ 그래, 인생은 단 한번의 추억여행이야
눈물겹도록 미친 사랑을 하다가
아프도록 외롭게 울다가
죽도록 배고프게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삶의 짐 다아 내려놓고
한 줌의 가루로 남을 내 육신
그래, 산다는 것은
짧고도 긴 여행을 하는 것이겠지.
처음에는 나 혼자서
그러다가 둘이서
때로는 여럿이서
마지막에는 혼자서 여행을 하는 것이겠지.
산다는 것은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
사람을 사랑하고도 아닌 척
그렇게 수백 번을 지나치면
삶이 지나간 흔적을 발견하겠지.
아~ 그때는 참 잘했어.
아~ 그때는 정말 아니었어.
그렇게 혼자서 독백을 하며 웃고 울겠지.
아마도 여행 끝나는 날에는
아름다운 여행이기를 소망하지만
슬프고도 아픈 여행이었어도
뒤돌아보면 지우고 싶지 않은 추억이 되겠지
짧고도 긴 아름다운 추억여행
그래,
인생은 지워지지 않을 단 한번의 추억여행이야.
(김정한·시인, 경북 상주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