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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서울올림픽을 치르고 나서 대한민국은 급속도로 경제가 성장했다. 거기에 딱 맞는 새로운 유행어가 생겼고,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면허증 있으십니까? 라는 말이 전 국민의 안부 인사가 되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또다시 “면허증 있으십니까?”였다.
면허증 취득은 내게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배우자를 놓고 기도하라고 했다. 중학생인 내게 배우자에 대한 기도는 성급한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혼할 배우자를 놓고 기도하라는 말을 웃어 넘겼다. 하지만 아버지는 끊임없이 원하는 배우자상을 생각하고 평생을 동반자로 살아갈 남편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설득에 배우자상에 대한 구체적인 조건을 놓고 내게 맞는 기도를 했다.
기도했던대로 종교, 직업, 나이, 부모님의 경제력 등 조건의 80%에 달하는 남편과 1986년 10월 25일 27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결혼했다. 결혼생활 3개월 만에 임신을 하여 1987년 10월에 첫째 딸아이를 낳았다. 당시 우리의 보금자리는 잠실 저층주공아파트 2단지에서 신접살림을 했다.
1988년 여름, 역사적인 순간에, 현장감 넘치는 역사적인 장소에서 우리는 살았다. 덕분에 올림픽 여러 종목을 12개월도 되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관람을 했다. 바로 옆에서 터지는 폭죽 소리가 어찌나 큰지 아기에게는 대포소리쯤으로 들렸나보다. 폭죽이 터질 때마다 경기에 가까울 정도로 놀랐다. 잠을 자다가도 폭죽 소리에 소스라치며 놀라서 깨어나곤 했다.
올림픽이 끝나자 잠실주공아파트에 중고로 보이는 승용차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나, 이런 서민 아파트에서 자가용 웬 말이야......”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가 가랑이 찢어지겠네.”
누군가 주차해 둔 차를 보며 지나가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던지고 지나갔다.
1989년 내가 근무하고 있는 사무실에서도 재빠르게 면허증을 취득한 사람이 있었다. 운전연습 겸 K303 중고차 1대를 구입해서 자가용으로 출퇴근하였다. 그리곤 그 차로 방학 동안 학생이 없는 운동장에 T자, S자 코스를 그려 놓고 운전연습을 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지위 고하를 따지지 않고 점심시간이면 먼저 줄을 선 순서에 입각하여 운전연습을 하였다.
마이카 시대가 오면 평생 운전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목숨을 담보한 그런 운전면허증을 운동장에 선을 그려 놓고 야매로? 당시 야매가 성행하던 시대였다. 나는 야매 교습과 연습으로 면허 취득하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강남역에 위치한 운전면허학원 이었다. 많은 수강료를 내고 운전학원에 등록했다.
당시 몸에 이상 신호가 있어서 동네 산부인과에서 소견서를 써줘서 원자력 병원 산부인과 검사를 받으러 다녔었다. 지금은 종합병원에서 모두 암환자를 진료하지만 당시에 원자력병원은 암환자들이 주로 가는 병원이었다. 그런 원자력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으라고 소견서를 써 주신 것이다.
하루는 의사선생님이 다음에는 보호자 1분을 꼭 모시고 와야 한다고 재차 당부하셨다. 반복해서 당부하는 말을 듣는 순간 “아, 암이구나. 이제 나는 암으로 죽는 거구나. 저기 병실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바닥에 누워서 순서를 기다리는 저 사람들과 같은 환자라고? 내가 결혼 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죽어?”
자가진단으로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고 생각하니 눈물샘과 침샘이 창피한 줄도 모르고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다음 진료 예약을 필히 하고 가라고 했다. 예약을 하러 다니는 동안 초상이라도 난 것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면서 예약하러 다녔다. 나 자신이 불쌍한 것인지, 내가 떠난 뒤 남겨질 남편과 큰딸이 불쌍한 건지 알 수 없지만 슬픔 그 자체에서 빠져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당시에 원자력 병원에 간다고 하면 암과 연관을 지어 생각했다. 원자력병원은 암 전문 병원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원자력병원에서 조직 검사 중에 쇼크로 사경을 헤맸다. 깜깜한 허공 외줄위에서 외발자전거를 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래를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까만 절벽이었다. 떨어지면 죽는다는,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외발자전거의 중심을 잡기위해 몸부림쳤다. 삶에 대한 애착이 나를 쇼크에서 깨웠다.
다행히 검사 결과 암은 아니었다. 암에 걸리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일 당장 죽는다 해도 운전면허증은 포기할 수 없었다. 꼭 취득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누군가 “원자력 병원에 다니면서 왜 면허증을 따려고 하냐?”고 물었다.
그때 내 대답은 간단했다.
첫째 “면허증 있으십니까?”란 말에 당당하게 “네”라고 답하기 위해서이고, 둘째 “내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을 때 거기서도 면허증 있으십니까?”라고 물으면 기죽기 싫어서 내일 죽더라도 꼭 운전면허를 따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 무 한 그루를 심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1989년 ‘내일 당장 내가 죽더라도 오늘 면허증은 꼭 따고 죽겠다’고 했다. 그리고 강남역 근처의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을 했다. 학원에 등록을 하니 실기교육 자료를 인쇄해서 주었다. 거기 적힌 내용만 읽어봐도 이론은 물론 실기까지 면허증을 단번에 취득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때처럼 지금도 코스 연습을 수학적으로 하는지 궁금하다. 공간 감각만 있으면 한 번에 합격할 수 있는 정확한 지침서였다. 총15매의 연수티켓 중 6~7장이 남아있을 때 운전 연수를 해주던 조교는 “기본적으로 3~4번 떨어져요” 떨어질 것을 대비하여 쿠폰을 남겨두고 실기 시험을 보라고 하였다. 시험당일 강남면허시험장의 풍경은 운동화와 바지 차림에 쿠션을 안고 있는 여성들이 여기 저기 보였다. 쿠션은 숏 다리의 비애가 아닐 수 없다.
코스 합격 노하우인 거리의 센티까지 자세히 알려주는 이론 지침서를 보고 연습했으므로 면허시험은 단번에 붙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근무하며 입었던 정장차림과 하이힐을 착용한 그대로 시험을 쳤다. 코스와 주행까지 시험을 마치자 방송으로 “000, 합격” 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다.
차에서 내리자 팝콘이 허공을 날아오르듯이 축하의 박수가 터졌다. 그리고 옷차림을 본 사람들이 “어머, 정장에 하이힐을 신고 합격 했어요?”라고 놀라며 부러워했다.
하고 싶은 일은 꼭 해 내고야 마는 핫한 성격. 그 성격은 나이가 들어도 좀처럼 늙지 않는다. 그때 취득한 운전면허로 큰 사고 없이 베스트드라이버를 자칭한다. 무사고로 1종 녹색면허까지 취득하여 아직도 운전을 하고 있다.
“면허증 있으십니까?” 라는 도전적인 한마디가 평생을 사용하는 큰 선물을 주었다.
2016년 시와세계 시 부문 등단.
시집 <화요일의 화> <천하보다 귀한 선물>
에세이 <방구공장 공장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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