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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列國志 제136회
진평공(晉平公)이 말했다.
“과인은 이미 늙었노라! 참으로 청각(清角)을 한 번 들을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사광(師曠(이 사양하자, 평공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삼 강요하였다. 사광은 할 수 없이 거문고를 당겨 연주하기 시작했다.
사광이 청각을 한 번 연주하자, 서쪽에서 검은 구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두 번 연주하자, 광풍이 불어 닥쳤다. 주렴과 장막이 찢어지고, 상 위의 그릇들이 뒤집어져 깨졌다. 지붕 위의 기와들이 어지럽게 날리고, 복도의 기둥들이 흔들려 기울어졌다. 천둥이 치면서 큰비가 쏟아져 대 아래의 물이 차서 수심이 몇 자나 되었으며, 대 위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옷이 흠뻑 젖었다.
종자들은 놀라서 흩어져 도망치고, 평공은 두려워 위영공(衛靈公)과 함께 복도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 엎드려 있었다. 한참 후, 바람이 그치고 비가 멈추자 종자들이 차츰 돌아와 두 군후를 부축하여 대 아래로 내려갔다.
그날 밤, 평공은 너무 놀란 나머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병을 얻게 되었다. 꿈속에 한 괴물이 나타났는데, 색깔은 누렇고 크기는 수레바퀴만 했는데, 비틀거리며 침실 문으로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그 형상이 자라같이 생겼는데, 앞발은 두 개고 뒷발은 하나였다. 그 괴물이 발을 딛는 곳마다 물이 솟아올랐다. 평공은 놀라서 큰소리로 외치다가 홀연 잠에서 깨어났지만,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침이 되어 백관이 침실로 와서 문안하자, 평공은 꿈속에서 본 것을 얘기하였다. 백관은 아무도 해몽하지 못했다. 잠시 후, 역관의 관리가 와서 보고하였다.
“鄭君이 조하(朝賀)하기 위해 역관에 당도하였습니다.”
평공은 양설힐(羊舌肹)을 보내 鄭君의 원행을 위로하게 하였다. 양설힐이 기뻐하며 말했다.
“주군의 꿈을 해몽할 수 있겠다.”
백관이 그 까닭을 묻자, 양설힐이 말했다.
“제가 듣건대, 鄭나라 대부 자산(子產)은 박학다문(博學多聞)하다고 하였습니다. 鄭伯이 예법에 도움을 받기 위해 필시 그를 데려 왔을 것이니, 그에게 물어보면 될 것입니다.”
양설힐이 역관으로 가서 음식을 대접하고, 晉君은 병이 나서 상견할 수 없다고 전하였다. 그때 위영공도 너무 놀라 몸이 불편하여 귀국하겠다고 고하였다. 정간공(鄭簡公)도 귀국하겠다고 고하고, 공손 교(僑)를 남겨 晉君의 병문안을 하게 하였다.
양설힐이 공손 교에게 물었다.
“과군께서 꿈속에 자라 같은 괴물을 보았는데, 몸은 누렇고 발은 세 개가 달렸다고 합니다. 그 괴물이 침실로 들어왔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징조일까요?”
공손 교가 말했다.
“제가 듣기로, 발이 세 개인 자라 같은 괴물을 능(能)이라 합니다. 예전에 우(禹)의 부친 곤(鯀)이 치수(治水)에 공을 세우지 못해, 요(堯)임금의 섭정(攝政)이었던 순(舜)이 동해(東海)의 우산(羽山)에서 곤을 처형하고 발을 하나 잘랐습니다. 곤은 황능(黃能)이라는 신이 되어 우연(羽淵)이라는 못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후 우(禹)가 제위(帝位)에 올라 그 신에게 제사를 지내 삼대(三代) 이래로 그 제사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왕실이 쇠약지면서 국정이 맹주에게 있게 되었으니, 맹주가 마땅히 천자를 보좌하면서 백신(百神)에게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晉君께서 혹 그런 제사를 안 지낸 것은 아닙니까?”
양설힐이 돌아와 평공에게 공손 교의 말을 전하였다. 평공은 대부 한기(韓起)에게 명하여 교제(郊祭)의 예(禮)로써 곤(鯀)에게 제사지내게 하였다. 평공은 병세가 좀 안정되자, 감탄하며 말했다.
“자산은 진정 박물군자(博物君子)로다!”
[‘교제(郊祭)’는 하늘과 땅에 지내던 제사이다. ‘박물군자(博物君子)’는 온갖 사물을 널리 잘 아는 사람이다.]
평공은 거(莒)나라에서 바친 네모난 정(鼎)을 공손 교에게 하사하였다. 공손 교는 鄭나라로 돌아가면서, 양설힐에게 은밀히 말했다.
“晉君께서는 백성의 고통은 돌아보지 않고 楚나라의 사치만 본받으시니, 마음이 이미 한쪽으로 치우쳤습니다. 병이 다시 발작하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드린 말씀은 잠시 그 마음을 풀어주고자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아침 일찍 위유(魏榆) 지방을 지나는데, 산 밑에서 몇 사람이 모여 晉나라의 일을 의논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다만 돌덩어리 10여 개만 놓여 있고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다시 길을 가는데, 또 좀 전의 소리가 들렸다. 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소리가 돌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크게 놀라서, 그곳 주민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주민이 말했다.
“우리도 며칠 전부터 돌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만, 하도 괴이한 일이라 감히 말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 얘기가 강주성(絳州城)에까지 전해지자, 평공이 사광을 불러 물었다.
“돌이 어떻게 말을 하는가?”
사광이 대답하였다.
“돌은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귀신이 빙의(憑依)한 것입니다. 본래 귀신은 백성에 의지하므로, 백성의 원한이 많아지면 귀신이 불안하게 되어 요사스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지금 주군께서 화려한 궁실을 짓느라 백성의 재력(財力)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돌이 말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평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광이 물러나와 양설힐에게 말했다.
“귀신이 노하고 백성의 원성이 높으니, 주군께서는 얼마 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사치스런 마음은 楚나라에서 먼저 일어났으니, 楚君에게도 곧 화가 닥칠 것입니다.”
한 달쯤 지나자, 평공은 다시 병이 발작하여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사기궁(虒祁宮)을 짓고서 훙거할 때까지 3년이 되지 못했다. 자신은 병이 들고 애꿎은 백성만 괴롭혔으며, 향락을 즐기지도 못했으니 어찌 가소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사관(史官)이 시를 읊었다.
崇臺廣廈奏新聲 화려한 궁실을 짓고 새로운 곡을 연주했지만
竭盡民脂怨黷盈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고 원성만 가득 하였네.
物怪神妖催命去 괴물과 요사한 귀신이 나타나 목숨을 재촉했으니
虒祁空自費經營 사기궁은 헛되이 경비만 낭비하였도다.
평공이 훙거한 후, 백관은 세자 이(夷)를 받들어 즉위시켰다. 그가 진소공(晉昭公)이다.
한편, 齊나라 대부 고채(高蠆)가 고지(高止)를 축출하고 여구영(閭邱嬰)을 참소하여 죽이자, 조정의 모든 대부들은 마음속으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고채가 고지를 축출하고 여구영을 참소하여 죽인 일은 제133회에 있었다.]
고채가 죽고 아들 고강(高彊)이 부친 뒤를 이어 대부가 되었는데, 나이는 아직 젊었지만 술을 좋아하였다. 난시(欒施)도 술을 좋아하여, 두 사람은 함께 술을 마시면서 매우 친밀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진무우(陳無宇)와 포국(鮑國)과는 사이가 멀어지게 되어, 네 가문은 두 당으로 분열되었다. 난시와 고채는 술을 마실 때마다 진씨와 포씨의 장단점을 얘기했는데, 진무우와 포국은 그것을 듣고 점점 의심을 품게 되었다.
어느 날, 고강이 술에 취해 어린 시동을 매질했는데, 난시가 옆에서 거들었다. 시동은 원한을 품고 밤중에 진무우에게 달려가 고하였다.
“난시와 고강이 가병을 모아 내일 진씨와 포씨 집안을 기습하려고 합니다.”
시동은 또 포국에게 달려가 같은 말을 고하였다. 포국은 황급히 시동을 진무우에게 보내 함께 난씨와 고씨를 공격하자는 약속을 전하게 하였다. 진무우는 가병들을 동원하여 병거를 타고 포국의 집으로 가다가, 도중에 수레를 타고 오는 고강을 만났다.
고강은 이미 반쯤 술에 취해 있었는데, 진무우를 보고 수레 안에서 두 손을 마주잡으며 물었다.
“가병들을 거느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진무우가 응답했다.
“반노(叛奴) 한 놈을 잡으러 가는 길이오.”
그리고 진무우가 고강에게 물었다.
“자량(子良)은 어디 가시오?”
고강이 대답했다.
“저는 난씨 집에 술 마시러 갑니다.”
고강과 작별한 진무우는 어자에게 병거를 빨리 몰게 하여 포국의 집으로 달려갔다. 포국의 집 앞에는 이미 병거와 가병들이 열을 지어 있는데 무장이 삼엄하였다. 포국 역시 갑옷을 입고 활을 들고서 막 병거에 오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상의하였다. 진무우가 고강의 말을 전하면서 말했다.
“자량이 난씨 집에 술 마시러 간다고 했는데, 확실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사람을 보내 정탐해 봐야겠습니다.”
포국이 사람을 보냈더니, 돌아와서 보고하였다.
“난시와 고강 두 대부가 의관을 벗어놓고 술 마시기 내기를 하고 있습니다.”
포국이 말했다.
“시동이 거짓말을 했습니다.”
진무우가 말했다.
“시동의 말이 비록 사실이 아니라 해도, 내가 이리로 오는 도중에 자량을 만났는데, 내가 가병을 거느리고 가는 것을 보고 어디 가느냐고 묻기에, 반노를 잡으러 간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무도 잡으러 가지 않으면, 그가 필시 의심할 것입니다. 만약 저들이 먼저 모의하여 우리를 축출하면,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차라리 저들이 술을 마시느라 준비가 없을 때 우리가 먼저 기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포국이 말했다.
“좋습니다.”
두 집안의 가병을 모두 일으켜, 진무우가 앞장서고 포국이 뒤를 따라 난시의 집으로 쳐들어가 앞뒤 문을 단단히 포위하였다.
난시는 막 큰 술잔을 들어 마시려고 하다가, 진씨와 포씨의 두 집안 가병이 쳐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놀라서 술잔을 떨어뜨렸다. 고강은 비록 술에 취하긴 했어도 아직 삼분 정도는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난시에게 말했다.
“빨리 가병들을 모아 무장을 하고서 입조하여, 주공을 받들어 진씨와 포씨를 토벌한다면, 이기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난시는 가병들을 모두 소집하였다. 고강이 앞장서고 난시가 뒤를 따라, 후문으로 뛰쳐나가 혈로(血路)를 뚫고 공궁으로 달려갔다. 진무우와 포국은 그들이 齊侯를 등에 업게 되면 큰일이라고 생각하여, 긴급히 추격하였다. 고씨 종족들은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가병을 모아 구원하러 왔다.
제경공(齊景公)은 궁중에 있다가 네 가문이 가병을 거느리고 서로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경공은 급히 명을 내려 궁문을 굳게 닫고 지키게 하면서, 내시를 보내 안영(晏嬰)을 불러오게 하였다.
난시와 고강은 궁문을 공격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궁문 오른쪽에 진을 쳤다. 진무우와 포국은 궁문 왼쪽을 진을 쳐서, 양진이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잠시 후, 안영이 의관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수레를 타고 궁문 앞에 당도하였다. 네 가문에서 사자를 보내 불렀지만, 안영은 쳐다보지도 않고 사자들에게 말했다.
“나는 오직 군명을 따를 뿐, 감히 사사로이 누구를 따를 수 없습니다.”
궁문의 수문장이 문을 열어주자, 안영은 궁 안으로 들어가 경공을 알현하였다. 경공이 말했다.
“네 가문이 서로 싸워 가병들이 궁문까지 이르렀는데, 그들은 대체 왜 그러는 것이오?”
안영이 아뢰었다.
“난씨와 고씨가 선대가 받은 총애를 믿고 정사를 전횡해 온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닙니다. 고지가 축출되고 영구영이 죽은 것에 대해, 나라 사람들이 모두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이제 또 궁문까지 침범하였으니, 그 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진씨와 포씨도 군명을 기다리지 않고 제멋대로 가병을 일으켰으니, 그 또한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주군께서 현명하게 처결하십시오!”
경공이 말했다.
“난씨와 고씨의 죄가 진씨와 포씨의 죄보다 더 무거우니, 마땅히 그들을 제거해야겠소. 누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소?”
안영이 대답했다.
“대부 왕흑(王黑)이라면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경공은 명을 내려, 왕흑으로 하여금 공궁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진씨와 포씨를 도와 난씨와 고씨를 공격하게 하였다. 난씨와 고씨는 패전하여 큰 길거리로 밀려났다. 그러자 난씨와 고씨를 미워하는 백성들이 모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서 싸움을 도왔다.
고강은 아직 술이 덜 깨서 힘을 다해 싸울 수가 없었다. 난시가 먼저 동문으로 달아나자, 고강도 그 뒤를 따랐다. 왕흑은 진씨·포씨와 함께 추격하여 동문에서 또 싸움이 벌어졌다. 난씨와 고씨의 가병들은 점점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난시와 고강은 겨우 동문을 빠져나가 魯나라로 달아났다.
진무우와 포국은 난시와 고강의 가족들을 모두 쫓아내고 그 재산을 나누어 가졌다. 안영이 진무우에게 말했다.
“그대는 군명도 받지 않고 멋대로 세신(世臣)을 내쫓고 또 그 재산을 차지하였으니, 사람들이 그대를 비난할 것이오. 만약 그대가 빼앗은 재산을 여러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주면 사람들이 필시 그대에게 겸양의 덕이 있다고 칭찬할 것이니, 그러면 얻는 바가 더 많을 것이오.”
진무우가 말했다.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어찌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진무우는 빼앗은 식읍과 재산을 모두 장부에 기록하여 경공에게 바쳤다. 경공은 크게 기뻐하였다. 진무우는 또 경공의 모친 맹희(孟姬)에게도 자신의 재산을 바쳤다. 맹희가 경공에게 말했다.
“진무우가 강신(強臣)들을 쫓아내고 공실을 높였으며 또 그 재산을 주공에게 바쳤으니, 그 겸양의 덕을 모른 체할 수는 없소. 고당읍(高唐邑)을 그에게 하사하는 것이 어떻겠소?”
경공은 그 말에 따랐고, 진씨는 더 부유해졌다. 진무우는 자신이 좋은 사람임을 보이기 위해 경공에게 말했다.
“지난번에 많은 공자들이 고채에게 쫓겨났었는데, 실은 그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마땅히 불러들여 복위시켜 주어야 합니다.”
[제133회에, 고채가 고지를 축출하고 여구영을 참소하여 죽이자, 자산·자상·자주 등 여러 공자들이 모두 불평하며 고채를 비난하였다. 고채는 노하여, 다른 트집을 잡아 공자들을 모두 축출했었다.]
경공이 그 말에 찬성하자, 진무우는 군명으로 자산(子山)·자상(子商)·자주(子周) 등 공자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진무우는 공자들이 돌아올 때 필요한 장막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물품과 종자들의 옷·신발까지도 모두 자신의 비용으로 마련하여 사람을 보내 공자들을 맞이하였다. 공자들은 귀국한 것만으로도 기뻐하였는데, 집에 돌아가 보니 모든 가구가 다 준비되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진우무가 마련해 준 것임을 알고, 감격해 마지않았다.
진무우는 또 공실에 많은 재산을 바쳤으며, 공자나 공손 가운데 나라에서 봉록을 받지 못하는 자들에게 자신이 사적으로 봉록을 지급하였다. 또 나라 안의 가난한 사람과 고아·과부 등을 찾아가 사적으로 곡식을 나누어주었다.
곡식을 빌려주고 받을 때에도, 빌려줄 때는 큰되로 빌려주고 받을 때는 작은되로 받았다. 가난하여 빚을 갚지 못하는 자들은, 차용증을 불태워 버렸다. 齊나라 안에서는 진씨의 덕을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진씨를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사람이 많았다.
사관(史官)이 논하였다.
“진씨가 백성에게 후하게 베풀었기 때문에 훗날 나라의 주인이 바뀌게 되었다. 이는 군주가 덕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에, 신하가 사사로이 작은 은혜를 베풂으로써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를 읊었다.
威福君權敢上侵 군주의 권한인 위복(威福)을 감히 침범하여
輒將私惠結民心 사사로운 은혜를 베풂으로써 민심을 사로잡았네.
請看陳氏移齊計 진씨가 제나라를 빼앗은 계책을 보라.
只為當時感德深 당시 후한 덕을 베풀어 민심을 감동시켰을 뿐이었도다.
경공은 안영을 상국(相國)에 임명하였다. 안영은 민심이 모두 진씨에게 귀부하는 것을 보고, 은밀히 경공에게 형벌을 너그럽게 하고 세금을 줄이며 산업을 장려하고 어려운 자를 도와 백성에게 은택을 베풂으로써 민심을 붙잡아야 한다고 권하였다. 하지만 경공은 안영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한편, 초영왕(楚靈王)은 자신이 장화궁(章華宮)을 짓고 낙성식에 초대했을 때는 제후들이 거의 오지 않았는데, 晉나라가 사기궁을 지었을 때는 제후들이 모두 가서 경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영왕은 오거(伍舉)를 불러, 군대를 일으켜 중원을 침략할 일을 상의하였다.
오거가 말했다.
“왕께서 덕과 의로써 제후들을 소집했는데 오지 않았다면, 그것은 제후들의 죄입니다. 하지만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제후들을 불렀는데, 오지 않았다고 책망한다면 어떻게 제후들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군대를 동원하여 중화(中華)에 위세를 떨치려 하신다면, 반드시 죄 있는 자들을 택하여 정벌해야만 명분이 설 수 있습니다.”
영왕이 말했다.
“지금 죄 있는 나라가 어느 나라요?”
“蔡나라 세자 반(般)이 그 父君을 시해한 지 9년이 되었습니다. 왕께서 처음 제후들을 소집했을 때 채군(蔡君)이 왔기 때문에 차마 죽이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시역(弒逆)의 죄는 그 자손이라도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데, 하물며 그 자신은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蔡나라는 우리 楚나라와 가깝기 때문에, 蔡나라를 토벌하여 그 땅을 겸병한다면, 명분과 실익을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134회에, 채경공(蔡景公)은 세자 반을 초나라 왕녀 미씨(羋氏)와 혼인시켰는데, 며느리와 사통하였다. 그래서 세자 반이 경공을 시해하고 군위에 올랐다. 그가 채영공(蔡靈公)이다.]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근신이 와서 보고하였다.
“陳나라에서 부음(訃音)이 당도했습니다. 陳侯 익(溺)이 훙거하고, 공자 유(留)가 즉위했다고 합니다.”
[제119회에, 진성공(陳成公) 오(午)가 훙거하고 세자 약(弱)이 즉위하였으니, 그가 진애공(陳哀公)이라고 했었다. 진애공의 이름은 ‘弱’이라고도 하고 ‘溺’이라고도 한다.]
오거가 말했다.
“陳나라 世子는 언사(偃師)로서 그 이름이 이미 제후의 명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공자 유가 즉위했다니, 언사는 어디로 갔을까요? 신이 생각건대, 陳나라에 필시 변란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