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정교회 (東方正敎會, Eastern Orthodoxy)
가톨릭 교회·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3대 교파 가운데 하나. 그리스 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 또는 정교회라고도 한다. 넓은 뜻의 동방 정교회는 후일 중국으로 들어와 경교(景敎)라고도 불리게 되는 네스토리우스 교회라든지 그리스도 단성론(單性論)으로 여겨지는 아르메니아 교회, 이집트의 콥트 교회, 에티오피아 교회 등 그리스도교의 이단 그룹을 포함한다. 그러나 동방 정교회라고 할 경우는 좁은 뜻의 동방 교회, 즉 중동(中東)·동유럽·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15개 자립교회의 연합체를 일컫는다. 동방 정교회는 다른 2대 교파인 가톨릭 교회나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와 비교한다면 대체로 낯선 편이다. 그러나 동방 정교회는 원래 고대교회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며, 원시 그리스드교의 정신을 잘 전해왔다. 고대 교회는 로마 제국에서 발생하여, 전교구(全敎區)를 예루살렘·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로마 등의 5대 교구로 나누었다. 그 중 로마 교회만이 11세기에 분리되어 나가,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로서 발족했으며, 다른 동로마(비잔티움) 제국 내의 여러 교회는 동방 정교회로서 발족했다. 그 후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비잔티움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였기 때문에 그 대신 러시아가 동방정교의 대국(大國)으로 등장하였다.
서방(라틴) 교회의 상대적 의미로 동방교회라 호칭되지만 더 깊은 뜻은 죽음에서 부활한 빛인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빛나는 태양이 동방(東方)에서 떠오른다는 데 있다. 파스카(Πασχα)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서방에서는 아직도 ‘East Day’(동방의 날)라고 한다. 동방정교회라고 할 때 정(正:Orthodox)이란 사도전통 ·교부전통의 올바른 가르침, 올바른 믿음, 올바른 예배의 의미를 지닌다. 동방정교회는 보편적 신앙의 교회이므로 그냥 정교회(Orthodox Church)라고 부르는 것이 정상이다.
정교회에서는 세계공의회(世界公議會:Ecumenical Council)를 최고의 권위로 인정한다. 주교들은 신앙의 문제를 결정할 때 전체교회의 승인과 동의를 받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그래야만 공의회가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는 것이 확실히 인정되는 것이다.
역사와 본질
그리스도가 주창한 그리스도교는 민족종교인 유대교를 초월한 세계종교이고, 그 이상주의적 체질이 로마제국의 현실적·국가주의적 체제에 적합하지 않아, 결국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되었다. 그러나 사흘 뒤에 부활하여, 40일이 지나 다시 승천했다. 그의 가르침은 베드로·바울 등의 사도들에 의해 로마제국 영토 내의 각지로 퍼졌다. 로마제국에서는 당초 그리스도교도가 박해를 받고 순교자가 속출하였으나,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1세)에 의해 간신히 공인되었다. 그들은 탄압을 받으면 받을수록 굳게 단결했으므로, 그리스도교를 차라리 공인해 주는 쪽이 사회질서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가 보급된 지역은 대개 그리스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나, 로마교구만은 문화적으로 뒤져 있었고 총주교는 다른 총주교들에 비해 종교적 권위뿐만 아니라 정치적 권위까지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교황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붙였다. 고대교회의 신앙의 요점을 정하는 공의회(公議會)가 니케아·콘스탄티노플·칼케돈 등지에서 7회에 걸쳐서 열렸다(325∼787). 결정된 내용은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인간이고, 그 2개의 성, 즉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은 구별되지 않으며, 분리될 수가 없다는 주지(主旨)였다. 몇몇의 설(說)은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아버지인 하느님과 아들인 그리스도의 동질성을 부정한 아리우스의 설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중요시한 네스토리우스의 설은 431년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의 신성을 중요시하는 그리스도 단성론은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이라고 규정되었다. 또, 콘스탄티노플 총주교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 내부에서도 8∼9세기에 성상(聖像)파괴운동이 일어났고, 결국 성화상(聖畵像)을 파괴하는 것도 이단으로 간주하기로 결정했다. 동서 양 교회간에는 정치적으로 틈이 생겼는데, 교황 레오 3세에 의한 프랑크 국왕 카롤루스대제의 대관은 로마 황제권에 대한 반역이라고도 할 만한 사건이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포티우스라는 인물이 일개 외교관에서 단번에 총주교로 뽑혀 로마교황 니콜라스 1세가 반발하고 나섰다. 또 교리상의 다툼도 있었다. 성령(聖靈)의 발출(發出)을 둘러싸고 <니케아 신경(信經)>의 <아버지로부터>에 로마 측이 <및 아들로부터>를 첨가한 사실에 대해 동방이 비난했다. 또, 성직자의 결혼금지라든지 효모를 넣지 않는 빵을 성체(聖體)로서 사용하는 일 등 로마 측의 관행에 대해서도 동방이 반대했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1054년 결국 고대교회는 동서로 분열하여, 서방은 서방 가톨릭 교회, 동방은 동방정교회가 되었다. 1204년에, 제4회 십자군의 서유럽 병사가 큰스탄티노플을 공격했기 때문에 서방 그리스도교가 비잔티움 제국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어, 양 교회의 대립은 한층 깊어졌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했고,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하의 동방 정교회는 19세기 중엽에 그리스가 터키로부터 독립하기까지 약 350년 동안 터키의 지배 하에 놓였다. 이리하여 비잔티움제국이 터키의 지배 하에 있었던 동안은 러시아가 그 대신 정교의 대(大)보호국이 되었다. 현재의 동방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안티오키아·알렉산드리아·예루살렘·불가리아·러시아·그루지아·세르비아·루마니아·그리스·키프로스·알바니아·폴란드·체코·일본 등 자립교회로 되어 있다. 서유럽이나 미국 등에도 이주자 또는 망명자들에 의하여 교회가 세워지고 있다. 정교의 신자총수는 약 1억∼1억 5000만 명으로 짐작된다.
일곱 공의회
정교회에서는 일곱 공의회, 즉 325년의 제1차 니케아 공의회, 381년의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431년의 제3차 에페소스 공의회, 451년의 제4차 칼케돈(할키돈) 공의회, 553년의 제5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680년의 제6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787년의 제7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한다.
일곱 공의회에서 결정된 주요내용은 먼저 교회의 신조(Creed: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가 확정되어 교회의 신앙으로 지금까지 고백되고 있다. 다음으로 전체 그리스도 교회의 가시적 조직이 선언되었는데, 대표적인 행정구역으로 로마·콘스탄티노플·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예루살렘인데 이를 펜타르키(Pentarchy:5집정 관할구역)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육화(成肉化:Incarnation)의 교리와 연관적으로 성모 마리아의 호칭은 테오토코스(θεοτοκοζ:하느님의 어머니)로 결정되었으며,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를 확고히 하였다. 끝으로 성화상(聖畵像:이콘) 공경은 성화상이 상징하는 내용을 공경하는 것임을 확실히 하였다.
교회와 이교
그리스도교계의 대표적인 문화권은 셈 문화권·그리스 문화권 ·라틴 문화권 등 3문화권으로 대별할 수 있다. 초대교회 때 신학자들과 저술가 그리고 교회학교로 번성했던 셈 문화권의 교회(Oriental Church) 곧 네스토리우스 교회와 아르메니아 교회, 시리아 교회(Jacobite Church라고도 함), 이집트 교회(Coptic Church), 에티오피아 교회, 인디아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소위 단성론파(單性論派:Monophicism)라는 이름으로 갈라져 나갔다.
두 번째로는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한 라틴 문화권 교회(Western, Latin, Roman Catholic Church)와 그리스 문화권 교회(Eastern, Greek Orthodox Church) 간에는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요소들과 교황권 및 필리오퀘(Filioque)라는 문제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 후 1274년에는 리옹에서, 1438년에는 피렌체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위협에 직면한 그리스 교회가 라틴 교회와 화해의 시도가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과 지역 정교회의 독립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투르크에게 함락되어 그 이름도 이스탄불로 바뀌었고 역사적인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아야 소피아 모스크로 바뀐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됨). 오스만 투르크 치하에서 동방정교회는 제2등급 종교로 전락되는 한편, 교회조직은 오스만 투르크 정권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가 되려면 오스만 투르크 정부의 재가를 얻어야 했고, 상당한 대가(세금과 같은)를 지불해야 했다. 총주교의 자리는 주로 반 라틴적인 인물에게 주어졌다. 오스만 투르크 정권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등의 총주교좌를 형식적으로는 정교회의 독립관구로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좌에 예속시켰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도 콘스탄티노플에 종속되게 하였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획득한 국가의 정교회들은 콘스탄티노플의 간섭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리스는 1833년, 루마니아는 1864년, 불가리아는 1871년, 세르비아는 1879년에 각각 독립을 선언하면서 자치적 교회로 행보 함으로서 콘스탄티노플의 관할구역은 아주 작아지고 말았으며, 아직도 터키정부의 압력 하에 있다.
러시아 정교회
기원 후, 1세기경 사도 안드레아가 처음으로 예루살렘에서 북동쪽 대륙으로 선교의 발걸음을 옮겨서 흑해(黑海) 주변 시노페와 코르순 지역에서 선교했다고 한다(교회사가 유세비우스의 기록). 사도 안드레아가 방문 선교했던 지역은 후일 키예프와 노보고라드라는 러시아에서 유명한 도시로 발전하였다. 988년 키예프 공국의 블라디미르 대공(980~1015)이 세례를 받음으로서 정교회는 러시아의 국교가 되었다. 1019년 야로슬라브 공(1015~1054)이 키예프 러시아의 권력자가 되어 러시아를 그리스도교화 하는 데 공헌하였다.
1037년에는 테오 펨프스 대주교가 키예프 러시아의 수좌주교로 착좌하였다. 1237년 11월 바투가 4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입하여 1240년에 키예프를 점령한 이후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대공의 막내아들 다니엘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전쟁으로 찌든 러시아 백성들은 모스크바로 몰려들었고 이반 1세(다니엘의 둘째아들) 때에는 모스크바가 전체 러시아의 수도가 되었다. 1380년 9월 8일, 약세의 러시아 군대는 40만 몽골대군을 격전 끝에 격파함으로써 러시아는 정교회 국가로 남게
되었다. 1472년 이반 3세(1462~1505)는 마지막 비잔티움 황제의 조카딸인 소피아 팔라이올로기나와 결혼하고 쌍두(雙頭) 독수리 문장(紋章)을 취하고 자칭 차르, 곧 황제가 되어 비잔티움 제국의 후계자로서 러시아를 제3의 로마라 불렀다.
1589년 모스크바 총주교좌가 축성되어 욥(1589~1605)이 초대 총주교로 취임하였다. 1917년 이래로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은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파괴했다. 1918년 2월 1일 총주교 티콘은 무신론 정권을 파문하고 무신론 정권에 동조하는 성직자들의 집단, 곧 ‘살아 있는 교회’를 단죄하였다. 1920년 11월 20일 티콘 총주교는 자기가 투옥될 것을 예견하고 주교들의 자치적인 조직을 증언하는 교령을 발표했다. 1921년 세르비아 총주교의 입회 하에 칼루프치에서 ‘러시아 밖의 러시아정교회 시노드’를 조직하였다. 1922년 서유럽의 엑사르크 에블로기 수좌대주교와 러시아 밖의 러시아정교회 주교들은 러시아 밖의 러시아 정교회 시노드를 재조직하였다. 1921년 이후 러시아 밖의 러시아정교회 시노드는 유고슬라비아의 칼루프치에서 독일 뮌헨으로 그 본부를 옮겼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뉴욕으로 옮겨서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1941년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던 스탈린은 교회의 협력을 얻기 위하여 러시아 안의 정교회에 다소 자유를 주었다. 당시 소련 헌법에는 반종교 활동의 자유가 있다는 조항을 두어서 교회의 사회활동 금지, 사제교육 금지, 종교교육 금지, 액션단체 조직 활동 금지, 교회 내 도서실 폐쇄, 성경 및 교회서적 출판금지, 교회의 토지 ·건물 ·현금은 언제든지 몰수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1990년 이후,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자 교회의 개방은 급격히 증가되어 90년 모스크바 관구에는 40개의 성당이 문을 열었다. 1993년에는 300여 개가 넘는 성당들이 문을 열고 열심히 선교사업에 열중하고 있다.
한국의 동방정교회
러시아정교회는 1897년 러시아정교회 시노드가 한국(조선)에 선교사 파송을 발의함으로써 러시아정교회의 한국선교사업은 시작되었다.
1898년에 니콜라이 부제가, 1900년에는 크리산토스 신부가 입국하여 본격적인 선교사업을 펼쳤다. 그러나 청일전쟁, 러일전쟁, 무신론 공산주의 혁명, 제1, 2차 세계대전, 6 ·25전쟁을 겪는 동안 한국에서의 러시아정교회는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러시아정교회 한국인 첫 사제는 요한 강탁(1912년 서품)이었으며 두번째로 루가 김희춘 신부가 방인사제로 활동했고(1924), 1950년 북한 공산당에 의해 강제 납북된 알렉세이 김의한 신부의 활동이 있었다. 1956년 한국의 정교회 공동체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의 관할이 됨으로써 한국에서 러시아정교회 선교사업은 사실상 막을 내린 셈이 되었다. 그러나 1994년 부활절에 러시아정교회 시노드(해외)는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정교회 신학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유스틴 강태용(姜泰鎔) 신부를 러시아정교회 한국선교부 주관사제로 임명함으로써 한국에서의 러시아정교회 선교활동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스정교회는 1954년 주한 그리스군 종군사제로서 활동하던 안드레아스 할키오풀로스 신부가 보리스 문이춘을 사제로 추천하여 일본정교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게 하였다. 1956년 보리스 문이춘 신부는 한국에 남아 있던 정교회 공동체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 관할 미국 그리스정교회 대관구에 소속되었다가 1970년 이후 뉴질랜드 대관구로 소속을 옮겼다.
1975년 말 그리스정교회 아르키 만드링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신부가 내한하여 그리스정교회 선교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1993년 초에 주교로 서품되었다. 1995년 4월 8일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바로톨로메오스 1세(이스탄불 주재)가 5박 6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가르침과 전통
정교회의 가르침은 성경과 성전(聖傳:Sacret Tradition)에 기초한다. 성경은 70인역(Septuaginta)으로서 구약 49권과 신약 76권이다. 구약에 붙어 있는 제2경전(외경)은 교리나 신학적으로 권위는 없다. 교회력은 대체적으로 율리우스력을 사용한다. 교회력의 중심이 되는 부활절은 춘분이 지나고 음력 보름이 지나서 다시 한 주간이 지난 주일이다. 성탄절은 1월 7일이다. 성사는 대표적으로 7가지 성사가 있다. 그러나 수(數)에 구애되지는 않는다.
집행 상 라틴교회와 다른 것은 견진성사에서 주교가 축성한 성유(聖油)로 사제가 집전한다. 성체 ·성혈 성사는 아기에게도 해준다. 신품성사에서 독신 남성, 기혼 남성 모두가 서품 될 수 있지만 서품 후에는 결혼 또는 재혼은 할 수 없다. 주교는 독신 성직자와 홀로 된 성직자 중에서 선임된다. 정교회 예배는 다양하다. 연중 매주일 아침(때로는 토요일 밤)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예배, 곧 조과(早課)가 집전된다. 물론 성령강림절은 제외된다. 그리고 만과, 시과예배가 있고 절기와 교회력에 따른 다양한 예배가 있다. 정교회 예배 중 대표적인 것은 리투르기아라고 하는‘거룩한 성찬예배’이다.
교의(敎義)
동방정교회는 원래 고대교회의 계속이며, 원시 그리스도교의 정신에 충실하다. 동방정교는 서방 그리스도교에 비해서 의(義)보다는 사랑, 십자가보다는 부활, 죄보다는 구원을 중요하게 여긴다. 신인일체(神人一體)이며, 신인현격(神人懸隔)은 아니다. 서방측은 그리스도교가 성(聖)과 속(俗)을 구별하고 정신을 물질보다도 우위에 놓으며 정교분리(政敎分離)의 경향이 있는 것과는 달리 동방정교는 성속일치·영육일치(靈肉一致)·정교일치가 특징을 이룬다. 가톨릭이 연옥(煉獄)을 인정하고, 마리아의 무원죄설(無原罪說)을 펴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정교에서는 연옥을 인정치 않으며, 마리아의 무원죄설을 펴지 않는다. 가톨릭 신학이 사변적(思辨的)·체계적이고 신에 대해서 지적(知的)으로 배우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정교에서는 신앙체험, 즉 신학이다. 그리스도교 문화 속에서 살면서 신을 체험적으로 몸으로써 배우는 것이 동방정교신학이다. 정교에서는, 신학이 논문으로서보다도 성가(聖歌)·이콘·교회규칙 또는 주교들의 서한이나 설교형태 등으로 제출된다. 정적주의(靜寂主義)는 아토스산(山) 출신의 성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가 주장한, 정적 속에서 <주기도문>을 외며 하느님을 명상하는 수도법(修道法)으로서, 이는 비잔티움 신학을 대표하고 있다.
조직
교회의 조직에서도 동방정교회는 가톨릭 교회보다 덜 권위주의적이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교황무류설(敎皇無謬說)을 펴며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형(型)이며, 일반신도를 평신도라고 부른다. 그러나 정교에서는 교황무류설 대신 교회무류설을 펴고, 주교나 사제는 개인적 권위를 지니지 않으며 일반 신도를 평신도라고는 일컫지 않는다. 동방정교의 성직자로는 주교·사제·보제직(輔祭職)이 있다. 사제·보제에는 수도와 재속(在俗)의 구별이 있고, 수도사제·수도보제는 결혼하지 않는다. 주교 이상은 수도사제가 아니면 될 수가 없고, 주교 위로는 대주교·부주교(府主敎)·총주교(總主敎)가 있다.
전례(典禮)
동방정교회에서, 교회생활의 기준을 가르치는 것을 성전승(聖傳承)이라 한다. 성전승에는 성서, 공의회(公議會)의 결정, 성사부(聖師父)의 저서, 전례, 성가(聖歌), 이콘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전례(리토르기아·奉神禮·公祈禱라고도 한다)가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의 의무이고, 신도가 평생 그리스도의 삶을 스스로의 삶으로 삼기 위한 것이며, 신도에게 생활의 지혜와 신조(信條;마음가짐)를 제공한다. 전례에는 입회예의(세례), 성체예의(포도주와 빵을 먹음으로써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같이 나눈다), 생활예의, 시기적(時機的)인 예의 등이 있다. 전례에 참가하는 사람은 성서가 경전(經典)임과 동시에 성가의 책임을 의식한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성가를 부를 때 악기를 전혀 쓰지 않는데, 이는 성가는 마음 속으로부터의 기도이므로 악기가 필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이콘은 그리스도·마리아·성인(聖人)들의 성화상(聖畵像)으로서, 신자는 이콘에 그려져 있는 내용을 숭배한다. 정교에서는 죄보다도 구원, 십자가보다도 부활을 중요시하고, 축일로는 성탄제(크리스마스)보다 부활제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파스하·과월제(過越祭;유월제)라고도 한다. 신자는 이 축제에 참가함으로써, 이 세상의 종말로부터 내세(來世)의 생명으로 이어져 가는 인간의 과정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기억한다. 대체로 동방정교회 의식은 서방 그리스도교에 비해 동양적 색채가 짙다.
오늘날의 동방 정교회
고래(古來)의 4개 총주교 관구(Patriarchate)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관구: 고대 전승에 따르면 1세기경 사도 안드레아에 의해 비잔티움 지역이 선교되었으며 사도 안드레아가 사도 스타키스를 비잔티움의 주교로 임명하면서 주교구가 세워졌다고 한다. 콘스탄티노플 총주교는 세계총주교의 명예를 지니며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제 2차 세계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은 '새로운 로마'로서 구(舊) 로마에 이어 두 번째 서열을 지니게 되었고 후에 세계총주교는 동방 정교회에서 '동등함 중에서 첫 번째(primus inter pares)'의 지위를 얻었다. 현재 세계총주교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구 뿐만 아니라 서유럽 대관구, 남북미 대관구, 호주 대주교구, 뉴질랜드 대주교구 등을 모교회(母敎會)의 영적 지도자로서 관할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총주교 관구: 알렉산드리아의 총주교는 아프리카에 있는 정교회의 영적 지도자로서 교황(Pope)이란 호칭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에 이어 세 번째 서열을 지닌다. 알렉산드리아는 69년에 사도 마르코에 의해 선교되었으며 사도 마르코에 의해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세워졌다.
안티오키아 총주교 관구 : 안티오키아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에 의해 선교되었으며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처음 일컬어진 곳이다. 안티오키아의 총주교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로부터 이어지는 사도계승을 지니며 안티오키아와 주변의 중 근동 지역 교회를 관할하는 네 번째 서열을 지닌다.
예루살렘 총주교 관구 : 예루살렘 교회는 가시적인 교회의 출발지로서 사도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를 관할하였다. 451년 칼케돈에서 개최된 제 4차 세계공의회에서 5대 총주교 관구(Pentarchy) 중 안티오키아에 이어 다섯 번째 서열을 지닌 총주교구로 설정되었다.
10개의 독립교회(Autocephalous churches)
독립교회란 초대교회 시대에 역사적 기원을 둔 고래(古來)의 총주교 관구에 속하지 않고 자립적인 지역공의회를 인정받은 지역정교회이다.
러시아 정교회 : 전승에 의하면 사도 안드레아에 의해 후에 러시아가 되는 스키티아 지역이 선교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러시아 민족이 그리스도교화한 것은 988년 당시 키예프 공국의 블라디미르 대공이 세례를 받으면서부터였다. 초기 러시아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관구에 소속되어 있다가 1589년 자립적인 총주교구로 승격되었다.
그루지아 정교회: 그루지아 지역은 사도 안드레아에 의해 선교되었으며, 이미 4세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다. 초기 그루지아 정교회는 안티오키아 총주교 관구에 소속되어 있다가 5세기에 자립적인 카톨릭코스(Catholicos) 지위를 얻은 후 11세기에 총주교구로 승격되었다.
세르비아 정교회: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의 슬라브인 선교 이래 메토디우스의 후계자들에 의해 세르비아 지역이 선교되었다. 세르비아는 역사적으로 9세기경 당시 무투미르 왕자가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으면서 정교회 국가가 되었는데 초기 세르비아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관구에 소속되어 있다가 사바 대주교의 영적 지도 아래 부분적인 자치권을 얻은 후 1346년에 세르비아의 총주교구로 승격하였고, 1375년에 자립적인 총주교구 지위가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청에 의해 인준되었다.
루마니아 정교회: 전승에 의하면 사도 안드레아가 2 세기경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다뉴브강 하류에 도착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그 사실의 신빙성 있는 발굴은 당시 다뉴브강 하류 지역에 최초 루마니아인들의 조상인 다키아인들의 도시들이 발굴됨으로 알 수 있다. 사도 안드레아가 전한 복음은 다뉴브강 북쪽에 전파되었고 4 세기에 첫 주교좌가 루마니아에 설립되었다. 루마니아 정교회는 슬라브 민족이 아니라 라틴 민족의 동방 정교회라는 특색을 지니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의 슬라브인 선교의 깊은 영향을 받았다. 루마니아 정교회는 1885년에 독립 교회 지위를 얻었고 1925년에 총주교구로 승격하였다.
불가리아 정교회: 불가리아 지역은 이미 1세기에 발칸반도에 분포되어 있던 그리스도인들 공동체와 접해 있었고 6세기 이래 불가리아인들은 당시 동로마제국과 빈번하게 접촉하면서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알게 되었고 865년 당시 보리스 1세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불가리아 정교회는 다른 슬라브 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의 슬라브인 선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초기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구 관구에 소속되어 있다가 자치권을 얻은 후 927년에 총주교구의 지위로 승격하였다.
키프로스 정교회: 키프로스 지역은 이미 초대교회 시대에 사도 바르나바에 의해 선교되었으며 일찍부터 독립교회의 지위의 영예를 지녔다. 키프로스 정교회는 431년 에페소스에서 개최된 제 3차 세계 공의회에서 자립적인 대주교구의 지위를 승인받았다.
그리스 정교회: 그리스 지역은 사도 바울로에 의해 선교되었으며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관구에 소속되어 있었다. 현재는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를 영적 지도자로 하여 1852년 승인된 지위에 따라 그리스 정교회 주교들로 구성된 성의회(聖議會; Holy Synod)에 의해 관할되는 자립적인 독립교회이다.
알바니아 정교회: 그리스도교는 4세기 이전에 알바니아 지역에 전해졌으며 북부 지역은 서방교회에 의해, 남부지역은 동방 교회에 의해 주도적으로 선교되었다. 그러나 15세기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정복된 후로는 알바니아인의 다수가 이슬람교인이 되었고 남은 정교회 신자들은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관구에 소속되었다. 알바니아 정교회는 1937년에 자립적인 대주교구로 승인되었다.
폴란드 정교회: 폴란드가 제 1차 세계대전 후에 독립하면서 새로운 국경선 지역에 약 4백만 명의 정교회 신자들이 폴란드로 편입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벨로루시 민족이거나 우크라니아 민족이었다. 초기에 폴란드 정교회는 모스크바의 총주교 관구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1927년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청에 의해 자립적인 대주교구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체코-슬로바키아 정교회 :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로마 카톨릭이 우세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단의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정교회로 돌아왔다. 그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마태 파블릭 신부였는데 그는 후에 세르비아 정교회에 의해 고라즈드라는 이름으로 주교 서품을 받았다. 또한 당시 로마 카톨릭에 소속되어 있던 동방 전례 교회들이 정교회에 재 일치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정교회는 빠르게 확장해 갔다. 그리하여 1951년 모스크바의 총주교청은 체코-슬로바키아 정교회에 독립교회의 지위를 인정하였고 1998년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청이 자립적인 체코-슬로바키아의 대주교구 지위를 승인하였다. 한편 1987년 체코-슬로바키아 정교회는 고라즈드 주교를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미국 정교회 : 정교회의 선교가 북미 대륙에서 이뤄진 것은 1794년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던 알라스카에 발람 수도원의 정교 선교단이 도착하면서이다. 북미 대륙에서의 첫 번째 정교회는 코디악 섬에 세워졌으며 당시 일단의 알라스카 원주민들이 세례를 받았다. 1840년 시트카의 주교구로 승격하였고 이노센트가 첫 번째 주교로 임명받았다. 1867년 알라스카 지역이 미국에 팔린 이후에 주교좌는 시트카에서 샌프란시코로 옮겼다가 다시 1905년 뉴욕으로 옮겼다. 당시 미국정교회는 대주교구로 승격되어 티혼(후에 모스크바의 총주교) 대주교가 관할하였으며 미국으로 이민 온 수많은 동유럽 지역의 정교회 신자들과 함께 나날이 교회는 확장해갔다. 한편, 1970년 모스크바 총주교청은 미국정교회의 독립교회 지위를 인정하였지만 아직까지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청으로부터 자립적인 대주교구 지위를 승인받지는 못한 상태이다. 현재 미국정교회는 이러한 과도기적인 상태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관구에 소속된 남북미 대관구와 미국 지역의 다른 정교회 지체들과 함께 SCOBA (Standing Conference of Canonical Orthodox Bishops in the Americas)라는 주교협의회를 운영하고 있다.
6개의 자치교회(Autonomous Churches)
자치교회란 해당 지역 교회를 자치적으로 관장하지만 자립적인 지역공의회를 소집하지 못하고 모교회(母敎會)의 공의회에 소속되어 있는 지역 정교회를 말한다.
시나이 정교회 : 시나이 산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를 내리신 곳으로 매우 중요한 성지였고 3세기 경에 이미 그 지역에 은둔자들이 기거하며 수행에 힘쓰고 있었다. 4세기 경에는 수도자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7세기에는 성 요한 클리마쿠스와 같은 유명한 수도원장이 있었다. 이런 중요한 위치 때문에 초기 예루살렘의 총주교 관구에 소속되어 있던 시나이 산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은 후에 시나이 반도를 관할하는 대주교좌 수도원이 되었고 1575년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청에 의해 자치교회의 지위를 승인 받았다. 현재 시나이 정교회는 예루살렘의 총주교에 의해 서품되는 자치교회이다.
핀란드 정교회 : 핀란드 지역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비잔티움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핀란드의 대부분 지역은 서방교회의 영향을 받았다. 다만 핀란드 동부지방인 카렐리아 지방은 라도가 호수에 위치한 고대 발람 수도원에서 파송된 수도자들에 의해 선교되었고 러시아 교회의 관할 하에 있었다. 1917년 핀란드가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후 1921년 당시 러시아 총주교였던 티혼 총주교는 핀란드 정교회의 자치교회의 지위를 인정하였고 1923년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청에 의해 자치적인 대주교구를 승인 받았다. 현재 핀란드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의 영적 지도 하에 있는 자치교회이다.
중국 정교회 : 중국 정교회의 기원은 1686년 당시 중국의 황제가 일단의 러시아인 카자크 병사들을 그의 호위병으로 임명하면서부터이다. 후에 카자크 병사들의 후손들은 완전히 중국 문화에 동화되었지만 신앙만은 정교회 신앙으로 남아 있었고 그들이 중국에서의 정교회 공동체의 핵심이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본격적인 중국 선교는 19세기 말부터이며 1914년에는 중국인 성직자를 포함하여 5000명 정도의 중국 정교회 신도들과 베이징에 정교신학교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1917년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 이후엔 중국에 러시아인과 중국인을 포함하여 약 100,000 명 정도의 신자들이 분포해 있었으며 1939년에는 5명의 주교와 하얼빈에 정교회 대학이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공산 혁명으로 인해 많은 정교회 신자들이 서방으로 이주하거나 러시아에 송환되어 현재는 하얼빈에 한 성당만이 운영되고 있을 뿐이다. 중국 정교회는 1956년 러시아 총주교청에 의해 자치교회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일본 정교회 : 일본 지역은 1861년 러시아의 젊은 선교사였던 니콜라이 카사트킨 수사신부(후에 일본의 대주교)가 일본에 도착하여 선교를 개시하면서 정교회가 세워졌다. 1912년 안식하기까지 그는 약 20,000명에 이르는 일본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신약성서와 많은 전례서적을 일본어로 번역하였다. 한편, 1970년 일본 정교회 선교의 공을 인정하여 니콜라이 대주교는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모스크바의 총주교청은 1970년 일본 정교회를 모스크바 총주교의 영적 지도 하에 있는 자치교회의 지위로 인정하였고 1972년에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데오도시 대주교가 자치적인 일본의 대주교에 착좌하였다. 그러나 아직 일본 정교회의 자치적인 대주교구 지위가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청에 의해 승인되지는 않은 상태이다.
에스토니아 정교회 : 에스토니아 지역은 16세기 말에 스웨덴의 통치 하에 있었고 루터파 개신교의 영향 하에 있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에 의해 정복되면서 19세기 경 일단의 에스토니아인들이 정교회 신자가 되었고 러시아인들이 본토에서 에스토니아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정교회 공동체가 확장되었다. 1917년 에스토니아가 독립을 선언한 후 에스토니아 정교회는 192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멜레티오스 4세에 의해 자치교회의 지위를 승인받았으며, 1991년 에스토니아가 구소련연방으로부터 독립하면서 1996년에 재차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의 영적 지도 하에 있는 자치적인 지위를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청 성의회(聖議會; Holy Synod)에서 공식적으로 추인받았다.
우크라이나 정교회 : 키예프 러시아 시대부터 러시아 정교회와 역사를 같이 해온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1991년 우크라이나가 구 소련연방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최근에 모스크바의 총주교청으로부터 모스크바 총주교의 영적 지도 하에 있는 자치교회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그 밖의 선교 도상에 있는 지역 교회(Missions)
한국, 우간다와 케냐,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 타이, 싱가포르 등 아시아와 중앙아프리카, 남북미 대륙 및 기타 지역들이 현재 고래(古來)의 총주교구를 모교회(母敎會)로 하여 근세기에 확장되어 가는 선교 도상의 신생 지역 교회가 세워진 곳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