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사에 가장 큰 사건 중의 하나인 기축옥사와 정여립
올해 들어 서울과 전주를 비룻 여러 곳에서 정여립과 기축옥사 강연을 요청하고 있다. 어제는 전북일보 리더스 포럼에서 <정여립과 대동사상>을 주제로 강연을 했는데, 조선 5백 년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인 기축옥사가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는 증거일까?
전북 완주군 상관면 월암마을의 파쏘봉은 사람의 얼굴 형상을 한 커다란 바위에 덮혀 있다. 여러 사람의 증언과 한글학회에서 나온 《한국지명총람》을 토대로 그 터를 확인한 나는 몇 년 전부터 여러 차례 그곳을 찾아갔었다. 그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그 터 못 미처의 주말농장에는 사람들이 상추며 아욱이며 온갖 채소들을 가꾸느라 분주하고, 가끔은 낭만처럼 굉음을 울리며 기차가 지나간다. 나는 그곳에 앉아 역사 속을 거슬러 오르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어디 그런 느낌이 그렇게 쉽게 오는가?
월암교 아래 흐르는 수정처럼 맑은 물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가운데, 파쏘봉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은 제방둑을 걸어갔다. 무수히 날아다니는 잠자리 떼들의 군무에 맞추어, 멀리서 매미들의 울음소리와 이름 모를 풀벌레 울음소리가 뒤섞여 들려오고, 무심히 흘러가는 만경강을 바라보며 피어 있는 꽃들이 눈이 부시다. 붉은 패랭이꽃들과 푸른 달개비꽃들을 내려다보는 노란 달맞이꽃들은 100여 년 전에 이 땅에 들어왔음에도 전혀 낯설지 않고, 늦게야 꽃을 피우는 산딸기꽃과 나팔꽃을 닮은 메꽃 사이로 누군가 따먹은 산딸기의 잔해가 선명하다. 푸른 강물에는 왜가리 몇 마리 그림처럼 서 있고 또 다른 몇 마리는 꺄륵꺄륵 날아오른다.
어느새 파쏘봉이 눈앞에 다가와 있고 월암(月岩)이라고 쓰여진 오래된 다리가 나타났다. 그 다리 위로는 만경강 상류의 푸른 물줄기를 바라보며 전라선 열차가 지나간다. 길이 225미터의 ‘신리’라는 이름을 가진 기차 굴을 미처 못간 곳에 위치한 월암다리 아래에는 몇 십년 전만 해도 파쏘라는 못이 있었다. 정여립은 그 못이 있던 자리에서 태어났다고도 하고 그곳에 있던 서당을 다녔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 터는 정여립이 기축옥사(己丑獄死)때 죽은 뒤 수난의 터널 속으로 들어간다. 집터는 숯불로 지져버리고 흔적도 없이 파헤쳐졌으며 인공의 못이 만들어졌다 하여 파쏘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진동규 시인은 “댁 건너 대수리를 잡습니다.”라는 시에서 파쏘를 이렇게 노래했다.
“살던 집은 텃자리까지 파버렸습니다. 그 이웃까지 뒤집어 파서 앞내 끌어 휘돌아 가게 하였습니다. 깊고 깊은 소를 만들어버렸지만 그때 그 집 주인이 반역했다고, 그래서 전주천 물이 거꾸로 흐른다고, 북으로 흐른다고 소문내고 그런 속셈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댁건너 마을 사람들은 上竹陰 下竹陰하면서, 구름처럼 모여들었던 선비들의 죽음 그 떼죽음을, 서방바우 각시바우, 애기바우, 그 피울음을, 상댁건너 하댁건너 점잖던 자기 마을 이름 위에 불러보기도 해보지만, 어떻게 변명 말씀 한번 엄두를 못 내고 죽어 지내왔습니다.
그 집 뒷산 월암에 달이 뜨면 댁 건너 사람들은 월암 아래 소에 들어 대수리를 잡는답니다. 관솔불들을 밝히고, 주춧돌 기둥뿌리 항아리 깨진 것, 뭐 그 집주인 뱃속까지 빨아먹고 자란 대수리들을 잡는답니다. 일삼아 잡아내고 그런 답니다.”
그렇다. 그 땅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라게 해서는 안 되는 땅이었다. 행여 고삐 풀린 망아지라도 염소라도, 아니 병아리라도 뜯어먹으면 역모를 한다는 것이다. 해마다 그곳에선 사람들이 빠져 죽었고, 기축옥사 때 죽음 당했다는 뜻인지 건너편 마을들 이름은 상죽음리 하죽음리라고 부르고 있다,. 한자로야 대나무 죽(竹)에 그늘 음(陰)이니 대 그늘이지만, 아무래도 그 말은 사람의 운명이 끝나는 죽음리라고 불렸던 듯하다.
기축옥사가 일어나기 전만 해도 달을 맞는 바위라서 월암이라고 불려졌을 자그마한 산 이름이 7~80년대에는 부르기도 섬찟했던 파쑈가 아닌 파쏘봉이 되었고, 파쏘봉 앞에 펼쳐진 들판은 파쏘들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파쏘도 이곳에 기찻길이 새로 놓이면서 메워졌고 그저 근처에 사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400여 년 전에 살았던 정여립이라는 사내의 신화 같은 이야기만 전해지고 있을 따름이다.
그때 죽은 사람들이 유성룡이 <운암잡록>에 의하면 천여 명에 이르렀고, 수많은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기축옥사 당시 우의정이었던 정언신은 정여립과 구촌 간이었다, 그의 아들 정율과 교분이 있었던 백사 이항복은 정율이 억욱하게 죽자 그를 추모하는 글 한 편을 지어 무덤 속에 넣었다. 그후 정율의 아들 정세규가 장성한 후에 묘를 이장하며 만장을 꺼냈는데 거기에 쓰여 진 내용은 이러했다.
“대저 사람은 본래 잠깐 우거하는 것과 같으니, 오래고 빠른 것을 누가 논하랴. 이 세상에 오는 것은 곧 또 돌아감을 뜻함이니 이 이치를 내 이미 밝게 아나 자네를 위하여 슬퍼하노니, 내 아직 속됨을 면하지 못하여 입이 있으나 말할 수 없고 눈물이 쏟아져도 소리 내어 울 수도 없네. 베개를 어루만지며 남이 엿볼까 두려워서 소리를 삼켜가며 가만히 울고 있네. 어느 누가 잘 드는 칼날로 내 슬픈 마음을 도려내어 주리.”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했던 금구현은 폐현을 시켰고, 전주에서는 동래정씨들을 다 쫒아내버렸다. 동래정씨들의 시조 묘는 파가지고 뼈를 갈아 바람에 날려버렸고 호남지역 사대부들의 벼슬길이 막혀버렸고, 결국 1894 동학농민혁명으로 분출되었으며. 전주의 초입엔 정여립로와 정언신로가 들어섰으니,
2024년 5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