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고 준비한 위대한 예언자이다. 그는 헤로데 임금의 불륜을 질책하다가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의 간계로 순교하였다(마르 6,17-29 참조).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한 것은 4세기 무렵 그의 유해가 있던 사마리아의 지하 경당에서 비롯되었다.
본기도
하느님,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복된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성자의 탄생과 죽음을 미리 알려 주셨으니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를 본받아
저희도 끝까지 하느님의 진리를 믿고 증언하게 하소서.
제1독서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1,17-19
그 무렵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17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18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19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복음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7-29
그때에 17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떠해야 할까?
오늘은 요한 세례자가 수난당하고 죽임을 당한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헤로데는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춘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요한을 죽여야 했습니다. 그는 죽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했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습니다. 헤로데는 왕이 아니라 노예였습니다. 세상의 시선 때문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방식대로 행동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살로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춤을 잘 추고 자신의 상품을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 헤로디아도 노예였습니다. 쾌락과 돈과 권력의 노예였습니다. 헤로데에게 붙어있기 위해 그것을 비판하는 요한을 죽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들은 다 가진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세상에 속한 이들이었습니다. 오직 요한만이 세상 것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 뜻에 봉헌하였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죽음을 면하기 위해 발버둥 치지도 않았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다 이루는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것이 믿는 이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죽음을 대하는 자세는 크게 세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은 죽지 않을 것처럼 죽음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기 직전 유일한 혈육인 동생이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을 때 숨넘어가는 소리로 “내 돈 2억 갚아, 임마!”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끝까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모두가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이들은 죽음을 삶과 완전히 별개로 여깁니다. 두 번째는 체념하는 것입니다. 그때 가서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라 여깁니다. 저희 할머니는 임종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가 성당 나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란 이름으로 대세를 받으셨습니다. 저희 고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불교를 믿으셨고 끝까지 하느님을 믿기를 거부하셨지만, 마지막 순간 대세를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죽음이 삶의 일부가 된 경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은 죽음을 삶과 별개가 아닌 것으로 여깁니다. 삶에서 실천해오던 하느님 뜻을 죽음과 연결합니다. 부활이 보장되어 있기에 죽음도 삶의 일부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도구로 죽음을 이용합니다. 요한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가면서도 며칠 동안이나 설교했다고 합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라이언을 구하러 왔던 주인공은 죽어가면서 라이언에게 “잘 살아야 해!”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라이언은 평생 자신을 위해 죽은 사람들 때문에 못 살 수가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그들의 무덤 앞에서 아내에게 묻습니다.
“여보, 나 잘 살았지?”
이런 이들은 죽음을 삶으로 받아들이고 이용할 줄 안 사람들입니다. 전태일도 근로기준법전을 끌어안고 자신의 몸을 불태우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마라! 내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라며 죽었습니다. 누구는 자살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떤 관점에서는 자기 죽음을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이용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보았던 가장 감동적인 죽음은 어떤 자매님이었습니다. 신학생 때 방학 동안에 이태리 본당에 실습을 나갔는데 어떤 분들이 한 자매님을 가리키며 저분이 말기 암 환자라는 것입니다. 저는 잘못 알아들은 것 같아 귀여겨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해의 여름에 다시 갔는데 그분이 병원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이라는 것입니다. 본당 신부님과 함께 가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왠지 저를 기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장례식 때는 시골 본당이 가득 찼습니다. 그분은 3개월 산다고 암 선고를 받았는데 3년을 사셨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아픔을 호소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그분은 항상 오늘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이웃에게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분이 죽기 직전이라는 것을 안 사람들은 그 자매에게 모두 감동하였습니다. 그분에게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죽음을 이용한 분입니다. 죽음이 삶의 일부였고 그래서 그분의 삶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먼저 자신이 왕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왕이 아닌 하느님 자녀인 것입니다. 하느님 자녀는 이 세상이 멸망해도 영원히 삽니다. 그러니 왕은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영향은 주지만 세상의 영향을 받지는 않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영향을 받으면 어떻게 자녀를 교육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예언자의 면모가 있어야 합니다. 요한의 죽음은 이 지상의 노예로 사는 이들의 민낯이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죽음으로 세상이 진리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이렇듯 누군가에게는 교육적이어야 합니다. 또한 사제임이 드러나야 합니다. 헤로데는 나중에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죽인 요한이 아니냐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죽음으로 헤로데를 그리스도께 오게 하였습니다. 물론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자기 선택입니다. 그러나 돌아가시면서 자녀들에게 꼭 성당 다니라고 한 마디는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난주에 있었던 휴가 때, 경상도에 있는 수목원을 방문했습니다. 모든 것이 예약제였는데, 입장이나 그 안에서의 식사도 예약해야 가능한 곳이었습니다. 가격도 상당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책에서 소개한 내용을 보고는 관심이 갔고, 올해 첫 휴가인데 그동안 쉼 없이 달려온 것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다녀오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날짜가 가까워지면서 약간의 걱정이 생겼습니다. ‘이런 곳을 혼자 가는 사람이 있을까?’, ‘다들 누군가와 함께 올 텐데 나만 혼자 가면 어색하지 않을까?’, ‘식사 가격도 상당하던데, 나 혼자 가는데 이렇게 비싼 식사를 하면 사람들이 흉보지 않을까?’ 등의 생각들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
저를 바라보는 사람에게 저는 대단하지도 또 중요하지도 않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제게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 좋은 곳에서 굳이 대단하지도 않은 사람까지 신경 쓸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이 점을 생각하니 그저 저에게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나’에게만 대단하고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아주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고, 힘들어도 그곳에서 멋진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남 눈치보다 내 눈치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눈치는 주님 눈치입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남 눈치 보느라고 정작 주님 눈치를 신경 쓰지 않는 어리석은 우리의 삶을 반성해야 합니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그는 헤로데 임금의 불륜을 질책하다가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의 간계로 순교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몇 명의 사람들을 묵상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서 요한 세례자의 참수를 명하는 헤로데 임금, 잘못된 자기 행동을 질책하는 요한 세례자를 제거하려는 헤로디아, 그리고 잘못된 행동임을 알면서도 어머니의 명령이라면서 따르는 헤로디아의 딸, 마지막으로 죽음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외치는 요한 세례자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요한 세례자가 가장 불행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럴까요? 그 어떤 사람도 헤로데, 헤로디아, 헤로디아의 딸이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치만 보았을 뿐, 주님 눈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 눈치 보느라 정작 주님 눈치는 신경 쓰지 못하는 어리석은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그리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치를 보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될 때, 하늘 나라에서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변화는 당신으로부터 시작된다(앤디 워홀).
성 요한 세례자의 순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