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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列國志 제137회
진애공(陳哀公)의 이름은 익(溺)인데, 그 원비(元妃) 정희(鄭姬)가 아들 언사(偃師)를 낳자 세자로 세웠다. 차비(次妃)는 공자 유(留)를 낳았고, 삼비(三妃)는 공자 승(勝)을 낳았다. 차비는 애교가 많아 총애를 받았는데, 아들 유를 낳자 애공이 극진히 사랑하였다. 애공은 유를 세자로 삼고 싶었으나, 언사를 이미 세자로 세웠기 때문에 폐할 명분이 없었다.
애공은 자신의 아우인 사도(司徒) 공자 초(招)를 유의 태부(太傅)로 임명하고 공자 과(過)를 소부(少傅)로 임명하여, 두 사람에게 부탁하였다.
“훗날 언사가 죽으면 공자 유에게 군위가 전해지도록 해 주게.”
주경왕(周景王) 11년, 진애공은 병석에 누워 오랫동안 조정에 나가지 못하였다. 공자 초가 공자 과에게 말했다.
“세자 언사의 아들인 공손 오(吳)가 이미 장성했으니, 만약 세자 언사가 즉위하면 필시 공손 오를 세자로 세울 것이니, 어찌 공자 유에게 군위가 전해질 수 있겠소? 그러면 우리는 주군의 부탁을 저버리게 되오. 지금 주군이 병석에 누운 지 오래되어 정사가 우리 손아귀에 들어 있소. 주군이 아직 세상을 떠나지 않았으니, 군명을 핑계 대고 언사를 죽이고 유를 세자로 세우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될 것이오.”
공자 과도 찬성하였다.
두 사람이 대부 진공환(陳孔奐)과 상의하자, 진공환이 말했다.
“세자가 매일 입궁하여 세 번씩 병문안을 하면서 밤낮으로 주군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으니, 군명을 핑계 댈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무사를 궁궐 안에 매복시켜 놓고, 세자가 출입할 때 기회를 봐서 죽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건 한 사람의 힘만으로도 가능합니다.”
공자 초와 공자 과는 그렇게 의논을 정하고, 그 일을 진공환에게 부탁하고, 공자 유가 즉위하면 큰 읍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진공환은 은밀히 심복 역사(力士)를 불러, 궁문을 지키는 군사들 속에 섞여 궁궐 안으로 잠입하게 하였다. 군사들은 그가 세자를 따라온 종자인 줄 알고 의심하지 않았다. 세자 언사가 병문안을 마치고 밤중에 궁문을 나섰을 때, 역사가 뛰쳐나와 등잔불을 끄고 칼로 찔러 죽였다. 궁문에서는 큰 혼란이 벌어졌다.
잠시 후, 공자 초와 공자 과가 궁문에 당도하여, 거짓으로 놀라는 척하면서, 한편으로 도적을 수색하라고 이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말을 퍼뜨렸다.
“陳侯의 병이 위독하니, 마땅히 차자 유를 군위에 옹립해야 한다.”
진애공은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분노하여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다.
사관(史官)이 시를 읊었다.
嫡長宜君國本安 적장자가 군위를 잇는 것이 나라 안정의 근본인데
如何寵庶起爭端 어찌 총애하는 서자를 세우려고 분란의 단서를 만들었나?
古今多少偏心父 자식을 편애하는 고금의 수많은 아비 된 자들이여
請把陳哀仔細看 진애공의 경우를 자세히 살펴보시라.
사도 공자 초는 공자 유를 받들어 국상을 주관하게 하고 군위에 즉위하게 하였다. 그리고 대부 우징사(于徵師)를 楚나라에 보내 陳侯가 병으로 훙거했다고 부고를 전하게 하였다.
그때 오거(伍舉)가 초영왕(楚靈王)을 곁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陳나라가 공자 유를 군위에 옹립했다는 말을 듣고, 세자 언사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어 의심하였다. 홀연 보고가 들어왔다.
“陳侯의 셋째 아들 공자 승과 세자 언사의 아들 공손 오가 와서, 알현을 청하고 있습니다.”
초영왕이 불러들여 찾아온 까닭을 묻자, 두 사람은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통곡하였다. 이윽고 공자 승이 말했다.
“저의 형인 세자 언사가 사도 공자 초와 공자 과의 음모로 피살되고, 부군께서는 스스로 목을 매고 자결하셨습니다. 그 두 사람은 멋대로 공자 유를 군위에 옹립하였으며, 저희들은 해를 입을까 두려워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영왕이 우징사에게 힐문하자, 우징사는 처음에는 완강히 부인하였다. 하지만 공자 승이 하나하나 따지며 사실을 밝히자, 우징사는 더 이상 대답할 말이 없게 되었다. 영왕이 노하여 말했다.
“너도 초와 과의 일당이로구나!”
영왕은 도부수(刀斧手)들에게 명하여, 우징사를 끌어내 참형에 처하게 하였다.
오거가 영왕에게 아뢰었다.
“왕께서 이제 역신(逆臣)의 사자를 처형하셨으니, 마땅히 공손 오를 받들어 초와 과의 죄를 토벌하십시오. 명분이 바르고 말이 이치에 맞으니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陳나라를 평정한 후 蔡나라를 정벌하시면. 선군이신 장왕(莊王)의 업적에 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왕은 크게 기뻐하며, 군대를 일으켜 陳나라를 토벌한다는 명을 내렸다.
공자 유는 우징사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닥칠 것이 두려워 군위를 버리고 鄭나라로 달아났다. 누군가가 사도 초에게 말했다.
“왜 함께 가지 않습니까?”
사도 초가 말했다.
“楚軍이 오더라도, 나에게 물리칠 계책이 있소.”
한편, 초영왕의 대군이 陳나라에 당도하자, 언사의 죽음을 가엽게 여기고 있던 陳나라 사람들은 공손 오가 楚나라 군중에 있는 것을 보고 모두 기뻐하면서 밥과 음료를 가지고 와서 楚軍을 환영하였다.
사도 초는 일이 급해지자, 의논할 일이 있다고 공자 과를 불렀다. 좌정하고서 공자 과가 물었다.
“사도께서는 楚軍을 물리칠 계책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 계책이 무엇입니까?”
사도 초가 말했다.
“楚軍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물건이 필요한데, 그걸 그대에게 빌리고자 하오.”
“무슨 물건입니까?”
“너의 머리다!”
공자 과가 크게 놀라 일어나려는 순간, 사도 초는 곁에 있던 채찍을 들어 마구 휘둘러 공자 과를 쓰러뜨리고 검을 뽑아 머리를 베었다.
사도 초는 공자 과의 수급을 가지고 친히 楚軍 진영으로 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호소하였다.
“세자를 죽이고 유를 군위에 옹립한 것은 모두 공자 과의 소행입니다. 제가 대왕의 위세에 의지하여 과를 참하여 그 수급을 바칩니다. 군왕께서는 신의 불민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초영왕은 사도 초의 말이 아주 겸손한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사도 초는 무릎걸음으로 나아가 왕좌에 다가가 은밀히 아뢰었다.
“예전에 장왕(莊王)께서 陳나라의 변란을 평정하시고 陳을 현(縣)으로 만드셨다가, 후에 다시 복원시켜 주셨기 때문에 그 공을 잃으셨습니다. 지금 공자 유는 죄가 두려워 타국으로 달아났으니, 陳나라에는 주인이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이 기회에 陳을 거두어 군현(郡縣)으로 만드시고, 결코 타성(他姓)이 소유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제105회에, 하징서는 자신의 모친 하희와 놀아난 진영공(陳靈公)을 시해하였고, 초장왕은 陳나라를 정벌하고 하징서를 죽였다. 제106회에, 초장왕은 陳나라를 멸하고 초나라의 한 현으로 만들었는데, 신숙시가 ‘혜전탈우(蹊田奪牛)’ 얘기를 하여 다시 진성공(陳成公)을 복위시켜 주었었다.]
영왕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그대의 말이 내 뜻과 같소. 그대는 일단 도성으로 돌아가 과인을 위하여 궁실을 소제하고, 과인의 순행(巡幸)을 기다리시오.”
사도 초는 머리를 조아려 사은하고 돌아갔다.
[‘순행(巡幸)’은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보살피며 돌아다니는 것을 말한다.]
공자 승은 영왕이 사도 초를 도성으로 돌려보냈다는 말을 듣고, 영왕을 다시 알현하고 울면서 호소하였다.
“본래 음모는 사도 초에게서 나왔고, 일을 시행할 때에 공자 과가 대부 진공환을 시켰던 것입니다. 지금 사도 초가 모든 죄를 공자 과에게 미루고 자신은 빠져나가려고 하니, 선군과 선세자는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공자 승은 말을 마치자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楚나라 군사들도 모두 감동하였다. 영왕이 공자 승을 위로하며 말했다.
“공자는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과인이 알아서 처분하겠소.”
다음 날, 사도 초는 어가를 준비하고 와서 楚王을 영접하여 도성으로 들어갔다. 영왕이 조당에 좌정하자, 陳나라 백관이 모두 나와 알현하였다. 영왕은 진공환을 앞으로 불러내어 꾸짖었다.
“세자를 죽인 것은 너의 소행이다. 너를 죽이지 않으면, 어떻게 사람들을 경계할 수 있겠느냐!”
영왕은 좌우에 명하여, 진공환을 끌어내 참형에 처하게 하고, 공자 과의 수급과 함께 국문(國門)에 내걸게 하였다. 그리고 사도 초를 꾸짖어 말했다.
“과인이 본래 그대를 용서하려고 했는데, 공론이 용납하지 않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이제 그대의 목숨은 살려줄 테니, 가족을 데리고 멀리 동해(東海)로 가서 숨어 살도록 하라.”
사도 초는 감히 변명도 하지 못하고 사은하고 물러났다. 영왕은 명을 내려, 사도 초와 그 가족을 越나라로 압송하게 하였다.
공자 승이 공손 오와 함께 와서 영왕을 알현하고, 역적들을 토벌한 것에 대해 사은하였다. 영왕이 공손 오에게 말했다.
“과인이 본래 그대를 군위에 세워 호공(胡公)의 제사를 잇게 하려고 했지만, 아직 초와 과의 도당들이 많이 남아 있어 그대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으니, 그대를 해칠까 두렵소. 그대는 잠시 과인을 따라 楚나라로 가도록 하시오.”
[호공(胡公)은 陳나라의 초대 군주로서, 이름은 규만(嬀滿)이며 순(舜)임금의 후손이다. 주무왕(周武王)이 장녀 태희(太姬)를 그에게 시집보내고 陳나라에 봉했다.]
영왕은 명을 내려, 陳나라의 종묘를 헐게 하고 陳나라를 楚나라의 현으로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鄭나라 장수 황힐(皇頡)을 사로잡았을 때 자신에게 아첨하지 않고 공을 다투었던 천봉술(穿封戍)을 진공(陳公)에 임명하여 陳나라를 지키게 하였다. 陳나라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였다.
[제132회에, 초나라 장수 천봉술이 정나라 장수 황힐을 생포했는데, 당시 공자 신분이었던 초영왕이 황힐을 빼앗으려 하자 천봉술은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공을 주장했었다.]
염옹(髯翁)이 시를 지어 탄식하였다.
本興義旅誅殘賊 본래 의군을 일으킨 것은 역적을 죽이기 위함이었는데
卻愛山河立縣封 陳나라 산하(山河)를 탐하여 현으로 만들어 버렸구나!
記得蹊田奪牛語 ‘혜전탈우’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는데
恨無忠諫似申公 신숙시 같이 충간을 하는 신하가 없음을 한탄하노라!
영왕은 공손 오를 데리고 귀국하였으며, 1년 간 군사들을 쉬게 한 후 蔡나라를 정벌하기로 하였다. 오거가 계책을 내놓았다.
“蔡侯 반(般)은 자신이 저지른 악행이 이미 오래되어 자신의 죄를 잊고 있을 것이므로, 만약 우리가 蔡나라를 토벌하러 간다면 그는 오히려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차라리 그를 유인하여 죽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영왕은 그 계책을 따르기로 하고, 지방을 순행한다는 핑계를 대고 신(申) 땅에 주둔하였다. 사신으로 하여금 예물을 가지고 蔡나라로 가서 신 땅에서 만나자고 전하게 하였다.
楚나라 사신이 蔡나라로 가서 국서를 바쳤다. 채영공(蔡靈公)이 읽어보니,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과인이 군후의 얼굴을 보고 싶으니, 신 땅으로 왕림해 주시기 바랍니다. 많지 않은 예물이지만, 호송하는 신하들을 위로하는 데 사용하십시오.
채영공이 병거를 준비하여 떠나려 하자, 대부 공손 귀생(歸生)이 간하였다.
“楚王은 사람됨이 탐욕하고 신의가 없습니다. 지금 사신이 와서 많은 예물을 바치고 겸손하게 말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우리를 유인하려는 것 같습니다. 주군께서는 가시면 안 됩니다!”
채영공이 말했다.
“蔡나라의 영토는 楚나라의 일개 현(縣)보다 작소. 그런데 楚王이 부르는데 가지 않았다가, 저들이 군대를 동원하여 쳐들어오면 어떻게 대항할 수 있겠소?”
“그렇다면 세자를 세운 후에 가십시오.”
채영공은 그 말에 따라, 아들 유(有)를 세자로 새우고 귀생으로 하여금 세자를 보좌하여 나라를 지키게 하였다.
채영공은 어가를 타고 신 땅으로 가서 영왕을 알현하였다. 영왕이 말했다.
“우리가 이곳에서 작별한 지 8년이 지났는데, 군후의 건강한 모습이 예전과 다를 바 없어 기쁩니다.”
채영공이 대답했다.
“제가 상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군왕의 위엄 덕분에 폐읍을 잘 다스릴 수 있었으니, 그 은혜가 깊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군왕께서 陳나라를 정벌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하 드리러 오려고 했었는데, 사신을 보내 부르시니 어찌 감히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영왕은 신 땅의 행궁(行宮)에서 연회를 열어 채영공을 대접하였다. 가무(歌舞)를 즐기면서 주인과 손님이 함께 통음(痛飲)하였다. 날이 저물자 자리를 침전(寢殿)으로 옮기고, 오거로 하여금 蔡侯를 수행해 온 신하들을 바깥 관사로 안내하여 대접하게 하였다.
채영공은 기분 좋게 술을 마시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크게 취했다. 그때 벽 뒤에는 무사들이 매복해 있었다. 영왕이 술잔을 던져 신호하자, 무사들이 뛰쳐나와 채영공을 결박하였다. 채영공은 술에 취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영왕은 사람을 시켜 蔡나라 신하들에게 전하게 하였다.
“蔡侯 반(般)은 군부(君父)를 시해하였으므로, 과인이 하늘을 대신하여 처벌하노라. 수행해 온 자들은 죄가 없으니, 항복하는 자는 상을 내릴 것이고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는 돌려보내 줄 것이다.”
원래 채영공은 아랫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수행해 온 신하들 가운데 한 사람도 항복하지 않았다. 영왕이 명을 내리자, 楚軍이 蔡나라 신하들을 포위하여 모조리 사로잡아 버렸다.
채영공은 술이 깨어 자신이 결박되어 있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뜨고 영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영왕이 말했다.
“너는 부친을 시해하여 천리(天理)를 어겼으니, 오늘 죽는 것도 오히려 늦은 것이다.”
채영공이 탄식하였다.
“귀생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구나!”
영왕은 채영공을 책형(磔刑)에 처하고, 수행해 온 蔡나라 신하 70명과 수레를 모는 천한 자들까지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리고 채영공의 시역한 죄를 판자에 크게 써서 蔡나라 안에 널리 알리게 하였다. 그리고 공자 기질(棄疾)로 하여금 대군을 거느리고 蔡나라 도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책형(磔刑)’은 시체를 저자에서 찢어 죽이는 형벌이다.]
훗날 宋나라 유학자가 논하기를, 채영공의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유인하여 죽이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고 하였다.
염옹(髯翁)이 시를 읊었다.
蔡般無父亦無君 채후 반은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없는 자였으니
鳴鼓方能正大倫 북을 울려 큰 인륜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莫怪誘誅非法典 유인하여 죽인 것이 법도에 어긋난다고 말하지 말라.
楚靈原是弒君人 초영왕도 원래 그 임금을 죽인 자였도다.
한편, 蔡나라 세자 유는 부친의 어가가 떠난 후 첩자를 보내 밤낮으로 정탐하게 하였는데, 홀연 채영공이 피살되고 楚軍이 곧 쳐들어올 것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세자 유는 즉시 군사들을 소집하여 성 위로 올라갔다. 楚軍이 당도하여 성을 포위하자, 공손 귀생이 말했다.
“蔡나라가 비록 오랫동안 楚나라를 섬겼지만, 지난번에 晉과 楚가 화평을 맺을 때 저도 참여하여 서명을 했었습니다. 사신을 晉에 보내 구원을 청하면, 혹 그때의 맹약을 기억하고 구원하러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자 유는 그 말에 따라, 晉나라에 사신으로 갈 사람을 모집하였다. 채유(蔡洧)의 부친 채략(蔡略)은 채영공을 따라 신 땅으로 갔다가 피살된 70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채유는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사신으로 가겠다고 자원하였다. 채유는 국서를 수령하고, 밤중에 성 위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와 북쪽으로 달려 晉나라에 당도하였다.
채유가 진소공(晉昭公)을 알현하고 구원을 호소하자, 소공은 신하들을 소집하여 물었다. 순오(荀吳)가 아뢰었다.
“晉은 맹주로서, 제후들이 우리를 의지하여 안정을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陳나라도 구원하지 못했는데 또 蔡나라도 구원하지 못한다면, 맹주의 위업이 무너질 것입니다.”
소공이 말했다.
“楚王 웅건(熊虔)은 횡포하고 우리의 병력은 楚軍에 미치지 못하니, 어찌하겠소?”
한기(韓起)가 대답했다.
“우리 병력이 楚軍에 미치지 못함을 알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좌시(坐視)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제후들을 소집하여 의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공은 한기에게 명하여, 궐은(厥憖) 땅에 열국을 소집하게 하였다.
宋·齊·魯·衛·鄭·曹에서 대부들을 궐은 땅으로 보내, 晉侯의 명을 받게 하였다. 한기가 蔡나라를 구원하는 일에 대해 얘기하자, 각국 대부들은 혀를 내두르고 고개를 흔들면서 아무도 나서서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기가 말했다.
“여러분이 이처럼 楚나라를 두려워하니, 장차 楚나라가 중원을 잠식하지 않겠소? 만약 楚軍이 陳·蔡로부터 시작해서 여러분의 나라까지 침공해 가더라도, 과군께서는 못 들은 척하실 것이오.”
그래도 대부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아무도 응답하는 자가 없었다. 그때 宋나라 우사(右師) 화해(華亥)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한기가 화해에게 말했다.
“지난날 宋나라에서 회맹했을 때 그대의 선친께서 주창하셔서, 남북이 전쟁을 하지 않기로 하고 먼저 용병하는 자는 각국이 함께 정벌하기로 약속했었소. 지금 楚나라가 먼저 약속을 깨고 陳·蔡를 침략했는데, 그대는 팔짱을 낀 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으니, 楚나라만 신의가 없는 것이 아니라 宋나라도 우리를 속인 것이오.”
[제131회에, 송나라 좌사(左師) 상수(向戍)는 송나라 땅에서 晉나라 조무(趙武)와 초나라 굴건(屈建) 및 열국의 대부들을 모아 미병지회(弭兵之會)를 개최하여 전쟁을 멈추기로 맹약을 맺었었다. 남북 간의 화평은 제110회에 송나라 우사(右師) 화원(華元)이 처음 주창했었다. 화해는 화원의 아들이다.]
화해는 두려워하면서 대답하였다.
“하국(下國)이 어찌 감히 맹주를 속임으로써 죄를 얻겠습니까? 다만 만이(蠻夷)가 신의를 돌아보지 않으니, 하국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을 뿐입니다. 지금 각국이 오랫동안 군비(軍備)에 느슨해 왔기 때문에,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승부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사신을 楚軍에 보내 전쟁을 멈추기로 한 약속을 지켜 蔡나라를 용서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楚王도 필시 거절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기는 각국의 대부들이 모두 楚나라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보고, 蔡나라를 구원하는 일에 그들을 동원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대부들과 상의하여 서신을 써서 대부 호보(狐父)로 하여금 신성(申城)으로 가서 楚王에게 바치게 하였다. 채유는 각국이 蔡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물러났다.
호보가 신성으로 가서 서신을 바쳤다. 초영왕이 서신을 열어 보니,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지난날 宋나라에서의 회맹 때 남북이 서로 만나 전쟁을 멈추자는 약속을 했었으며, 다시 괵(虢) 땅에서의 회맹 때 지난 약속을 확인하고 천지신명께 맹세하였습니다. 과군께서는 그 약속을 지켜 한 번도 군대를 일으킨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陳·蔡가 죄를 지어 상국에서 진노하여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러 오셨는데, 의분(義憤)한 것은 명분이 뚜렷하나 이미 죄인을 처형하고서도 군대를 물리지 않는 것은 어떻게 해명하시겠습니까?
열국의 집정(執政) 대부들이 모두 폐읍으로 달려와, 물에 빠진 자를 건져주고 분란을 해결해 주어야 하는 맹주의 책무를 들어 과군을 꾸짖고 있습니다. 과군께서는 몹시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군대를 일으키는 것은 스스로 맹약을 어기는 일이므로, 신으로 하여금 각국의 대부들을 소집하여 蔡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서신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상국이 지난날의 우호를 돌아보아 蔡나라의 종묘를 보존해 주신다면, 蔡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과군과 동맹국들도 모두 군후의 덕에 감사할 것입니다.
[제134회에, 晉나라 조무와 초나라 공자 위(초영왕)가 괵 땅에서 만나 송나라 땅에서 맺은 ‘미병지회’의 약속을 다시 확인했었다.]
서신 말미에는 宋·齊를 비롯한 각국 대부들의 서명이 있었다. 영왕은 서신을 보고 나서 웃으며 호보에게 말했다.
“蔡나라 도성은 조만간에 함락될 것인데, 너희들은 헛된 말로 포위를 풀라고 하니, 과인을 삼척동자(三尺童子)로 여기는 것이냐? 너는 돌아가서 너의 주군에게 전해라. 陳·蔡는 우리나라의 속국으로, 너희 북방 나라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니,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지 말라고.”
호보가 다시 간청하려 했지만, 영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회신도 주지 않았다. 호보는 어쩔 수 없이 그냥 돌아갔다. 晉나라 君臣은 楚나라에 원한을 품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다음과 같은 상황이었다.
有力無心空負力 힘은 있으나 마음이 없으면 그 힘을 쓸 수가 없고
有心無力枉勞心 마음이 있다 한들 힘이 없으면 그 마음 씀이 헛된다.
若還心力齊齊到 만약에 마음과 힘을 다 갖추고 있다면
涸海移山孰敢禁 바다를 마르게 하고 산을 옮긴들 누가 금할 수 있겠는가?
채유는 蔡나라로 돌아가다가 순시하던 楚軍에 붙잡혀 공자 기질(棄疾) 앞으로 끌려갔다. 기질이 투항하라고 협박했지만 채유는 끝내 듣지 않았다. 기질은 채유를 군중에 감금하였다. 기질은 晉나라 구원병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蔡나라 도성을 더욱 맹렬히 공격하였다.
귀생이 세자 유에게 말했다.
“일이 급박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목숨을 걸고 楚軍 진영으로 가서 군대를 물려 달라고 설득하겠습니다. 만일 楚王이 제 말을 들어준다면, 백성을 도탄(塗炭)에서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자 유가 말했다.
“성중의 일을 모두 대부에게 의지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나를 버리고 떠나려 하십니까?”
“전하께서 저를 보내고 싶지 않으시면, 신의 아들 조오(朝吳)를 보내십시오.”
세자 유는 조오를 불러, 눈물을 흘리며 楚軍 진영으로 보냈다.
조오가 성을 나가 기질을 찾아가자, 기질은 예로써 맞이하였다. 조오가 말했다.
“공자께서 대군을 거느리고 蔡나라를 공격하시니, 이제 蔡나라는 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저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선군 반(般)이 덕을 잃었다면, 그는 이미 죽음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세자는 무슨 죄가 있으며, 蔡나라의 종묘사직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공자께서는 가련히 여기시어 살펴주십시오.”
기질이 말했다.
“나 역시 蔡나라가 왜 멸망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성을 공격하라는 군명을 받았으니, 아무런 공도 없이 돌아가면 반드시 벌을 받을 것입니다.”
“제가 따로 드릴 말씀이 있으니, 좌우를 물리쳐 주십시오.”
“할 말이 있으면 하시오. 내 좌우에 있는 사람들은 들어도 무방합니다.”
“楚王이 부정한 방법으로 나라를 얻었다는 것을 공자께서도 모르시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마음속에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또 안으로는 토목공사를 벌여 백성의 고혈을 짜내고, 밖으로는 전쟁을 일으켜 백성의 뼛골을 빠지게 하고 있습니다. 백성을 부리기만 할 뿐 긍휼히 여기지 않으며, 탐욕이 끝이 없습니다. 작년에는 陳나라를 멸망시키고, 금년에는 또 蔡侯를 유인하여 죽였습니다.
공자께서는 부군(父君)의 원수를 갚을 생각은 않고, 도리어 원수를 섬겨 남의 원한을 살 욕된 일을 하고 계시니, 공자께도 절반의 책임이 있습니다. 공자께서는 현명하시고 명예를 중시하는 분이시며, 또 ‘당벽(當璧)’의 징조가 있었기 때문에, 楚나라 사람들은 모두 공자께서 군위에 오르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참으로 창끝을 안으로 돌려 주군을 시해하고 백성을 학대하는 자를 죽인다면, 인심이 호응할 것이니, 누가 공자께 저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무도한 군주를 섬겨 만민의 원한을 사는 일을 하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만약 저의 어리석은 계책을 들어주신다면, 제가 죽음이 목전에 닥친 蔡나라 사람들을 이끌고 공자를 위하여 앞장서겠습니다.”
기질이 노하여 말했다.
“필부가 감히 간교한 말로 우리 君臣을 이간시키려 하는구나! 본래 너를 참수해야 마땅하지만, 잠시 네 머리를 목에 붙여둘 테니, 세자에게 가서 빨리 항복하여 남은 목숨이라도 보전하라고 전해라!”
기질은 좌우에 명하여 조오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게 하였다.
원래 초공왕(楚共王)에게는 총애하는 첩이 낳은 아들이 다섯 있었다. 첫째는 웅소(熊昭) 즉 강왕(康王)이고, 둘째는 위(圍) 즉 영왕(靈王) 건(虔)이다. 셋째는 비(比)인데 字는 자간(子干)이고, 넷째는 흑굉(黑肱)인데 字가 자석(子晳)이다. 막내가 바로 공자 기질이다.
[제134회에, 영왕이 강왕의 아들 웅균(熊麇)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을 때, 웅비는 晉나라로 달아나고 웅흑굉은 정나라로 달아났다.]
공왕은 다섯 아들 가운데 한 명을 세자로 세우려고 했지만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상신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 벽(璧; 둥근 옥)을 손으로 받들고 마음속으로 기도하였다.
“다섯 아들 중 현명하고 복 있는 자를 택하여 사직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기도를 마치고 공왕은 벽옥을 아무도 몰래 태실(太室) 뜰 가운데 묻고, 그곳을 기억해 두었다. 다섯 아들들로 하여금 사흘간 재계(齋戒)한 후 새벽에 태묘에 들어와 차례대로 조상에게 참배하게 하였다. 벽옥이 묻혀 있는 곳에서 절을 올리는 자가, 곧 조상이 선택한 자로 인정하고자 하였다.
강왕 웅소가 먼저 들어왔는데, 벽옥이 묻힌 곳을 지나서 앞으로 나아가 절을 올렸다. 다음에 영왕 웅건은 절을 할 때 팔꿈치가 벽옥이 묻힌 곳에 닿았다. 비와 흑굉은 벽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절을 올렸다. 그때 기질은 나이가 아직 어려 보모가 안고 와서 절을 올렸는데, 바로 벽옥 위에서 절을 올렸다. 공왕은 마음속으로 조상신들이 기질을 돕고 있다고 생각하여 더욱 총애하였다.
[과연 기질은 훌륭한 왕이 될 것인가?]
공왕이 훙거할 당시 기질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강왕이 즉위하게 되었지만, 공왕이 벽옥을 묻은 일에 대해서 알고 있는 楚나라 대부들은 모두 기질이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조오가 ‘당벽(當璧)’의 징조를 얘기하자, 기질은 그 말이 퍼져나가 영왕이 자신을 시기하게 될까 봐 두려워 거짓으로 진노 한척하며 그를 쫓아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