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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10일 월요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제1독서 : 2코린 9,6ㄴ-10
복 음 : 요한 12,24-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비움의 여정
-참나(眞我)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아침 성무일도 성 라우렌시오 축일 찬미가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대로 성인의 삶을 요약합니다.
“승리의 순교자를 경축하오니 사라질 재물일랑 아예 등지고
헐벗고 가난한 이 돌아보시며 양식과 재물로써 도와 주시네.
혹심한 불의 고문 받았었건만 견고한 마음이사 변함이 없어
튀기는 불꽃 속에 협박 견디며 넘치는 사랑으로 이겨냈도다.”
얼마 전 선종하신 바오로 수사님이 수도복이 단정히 입혀진 시신의 관을 보며
스치듯 떠오른 생각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 수도복은 수의壽衣이구나!”
죽음을 입고 생명을, 파스카의 삶을 살아가는 수도자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죽어야 하나?’ 물음은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는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누구나 때로 심각하게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특히 주변에서 계속 이어지는 죽음을 대할 때 마다 떠오르는 물음입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노 사제에 대한 일화도 때때로 생각납니다.
“4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4개월만 더 살았으면, 4일만 더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말한 후 다음 날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살아도 죽음에 직면해선 너무 짧은 인생인듯 생각되어
더 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며칠 전 장익 주교님 장례미사에 참석했던 수도형제와 주고받은 대화입니다.
-“은퇴 주교님은 물론 여러 노 사제들이 참석했는데
얼마 남지 않은 자신들의 삶에 대해, 또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겠네요. 나이 순으로 서있는 모습들이 흡사 죽음을 향해 줄을 서 있는 듯이 생각되네요.
오늘은 너, 내일은 나, 이런 순서로 말입니다.
장례미사에 참례한 분들은 숙연한 분위기에서 죽음 준비에 대해 많이 생각했겠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베네딕도 성인 말씀대로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사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날마다 비움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비워가는 삶이 참 나의 삶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비워가는 ‘무아無我의 삶’이 역설적으로 바로 ‘진아眞我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무아의 삶이자 진아의 삶이겠습니다. 하루하루 모든 삶을 ‘비움의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비워도 비워도 끝없는 비움의 여정은 비움의 주님을 닮아 참나가 되어가는 여정입니다.
결국은 내 문제로 직결되며 답은 자기 비움에 있음을 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바로 오늘 복음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답입니다.
언젠가 갑자기의 선종이 아니라 날마다 비우는 삶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삶, 나누는 삶, 주는 삶, 보살피는 삶, 섬기는 삶 등
모두가 자기를 비우는 ‘이타적利他的 삶’으로 모아집니다.
부단히 모으고 쌓는 집착의 삶이 아니라 부단히 버리고 비우는 ‘이탈離脫의 삶’입니다.
바로 이래야 진아의 삶이요 무지의 삶에서 지혜의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줄 것이다.”
주님을 섬김이 바로 주님을 따름입니다.
막연한 섬김이 아니라 한 결 같이 주고 나누고 버리면서
비움의 여정에 충실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비움의 여정을 통해 주님을 섬기면서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필리비서 찬미가 한 대목이 비움의 모범이신 주님의 참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2,7-8).
비움(케노시스)의 여정은 그대로 순종의 여점, 섬김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섬김과 순종의 삶을 통해 자기를 비워가는 삶입니다. 성인들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오늘은 258년경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입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란 말도 있듯이
죽어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어 교회를 참으로 깊고 풍요롭게 한 순교 성인들입니다.
성인에 대한 감동적인 일화를 소개합니다.
로마의 집정관이 교회의 보물을 바치라 했을 때
보물 모두를 처리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후 이들을,
즉 병자와 고아와 과부들을 데리고 집정과 앞에 선 다음,
“이 사람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 말했다는 일화입니다.
이어 석쇠 위에 눞혀져 불에 구워져 순교했다 합니다.
성인은 로마와 여러 도시의 수호성인이면서 가난한 사람, 요리사, 소방관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교회 미술에서 성인을 상징하는 문장은 순교 도구였던 석쇠입니다.
성 암브로시오가 성인을 찬양했고 성 아우구스티노도 성인의 순교에 대해 다음같이 언급합니다.
“그는 주님의 식탁에서 주님을 받았기에 그 보답으로 자기 자신을 주님께 제물로 바쳐 드렸습니다.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죽음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더욱 주고 나누고 버리고 비우는
섬김의 삶에 항구함으로 주님을 닮게 합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그러니 씨 뿌리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나눔과 비움의 삶에 항구하며 충실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주님과 형제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코린토 서간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결국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우리가 나눔과 줌의 섬김의 삶에, 비움의 삶에 항구할 수 있음도 주님의 넘치는 은총 덕분입니다.
주님은 참으로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아버지께서도 그를 존중하고 사랑하십니다.
저에겐 ‘비움의 찬가’처럼 산책때 마다 흥겹게 부르는 노래가 또 하나 있습니다.
‘금강’대신 ‘수도원’이나 ‘불암산’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금강에 살으리랐다 금강에 살으리랐다 운무 더불고 금강에 살으리랐다
홍진에 썩은 명리야 아는 체나 하리오.
이 몸이 스러진 뒤에 혼이 정녕 있을진대 혼이나마 길이길이 금강에 살으리랐다.
생전에 더럽힌 마음 명경같이 하고자.”-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비움의 여정에,
끊임없이 나누고 주는 씨 뿌리는 삶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게 하십니다.
하여 우리 모두 참 나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래야 마지막 비움인 죽음도 아름답게, 품위있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삽질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삽으로 땅을 파거나 흙을 떠내는 것을 ‘삽질하다’라고 말하지만,
아마 다른 의미로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헛된 일을 한다는 의미로, 별 성과가 없이 삽으로 땅만 힘들게 팠다는 데서 유래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미인 헛된 일을 의미하는 삽질을 참 많이 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저 역시 삽질을 참 많이 했습니다. 야구선수가 되겠다고 야구부에 들어갔던 적이 있고,
기타리스트가 되어 보겠다고 방학 내내 기타만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 바리스타 등등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노력했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새로운 것에 쏟아 부은 돈과 노력을 생각하면 분명히 삽질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삽질로 끝난 것일까요?
별 성과가 없는 것 같지만 분명히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재미난 일을 하면서 재미난 인생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이 분야에 대한 지식을 갖추게 된 것도 내 삶에 또 다른 의미가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어떤 것도 의미 없는 삽질은 없습니다.
실패에도 큰 의미가 있는 것처럼 의미를 찾아가는 삶 안에서 나의 소중한 삶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씨앗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땅에서 새 생명으로 싹이 터,
본디 그것을 낳은 식물의 본성을 드러낸다는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실제로 당신의 몸으로 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교회가 무수한 밀알로 싹이 터서
성체라는 생명의 빵으로 구워졌으며, 그 빵을 받아 모시는 우리 안에서 몇 곱으로 늘어났습니다.
죽음 자체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음을 교회의 역사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죽음으로 이제까지의 모든 일이 의미 없음으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이 생명을 잃고 얻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스어에서 ‘생명’이라는 낱말은 영혼을 가리킵니다.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는 옳은 방법과 그른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 안에서 자기 영혼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그른 방법이고,
하느님의 모습 안에 있는 영혼을 사랑한다면 제대로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결국,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삶,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섬김의 길은 우리를 영광의 길로 이끌어줍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삽질’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삽질’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영광을 드러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연일 장마 비가 계속 옵니다.
김수환추기경의 “우산”이란 글을 떠올려봅니다.
삶이란 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하는 일이요.
죽음이란 우산을 더 이상 펼치지 않는 일이다.
성공이란 우산을 많이 소유하는 일이요.
행복이란 우산을 많이 빌려주는 일이고, 불행이란 아무도 우산을 빌려주지 않는 일이다.
사랑이란 한쪽 어깨가 젖는데도 하나의 우산을 둘이 함께 쓰는 것이요.
이별이란 하나의 우산 속에서 빠져나와 각자의 우산을 펼치는 일이다.
연인이란 비오는 날 우산 속 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요.
부부란 비오는 날 정류장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갈 줄 알면 인생의 멋을 아는 사람이요.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가는 사람에게 우산을 내밀 줄 알면 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비요.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우산이다.
한 사람이 또 한사람의 우산이 되어줄 때, 한사람은 또 한사람의 마른 가슴에 단비가 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헬라인들이 예수님 뵙기를 청합니다.
그러자 이를 알리는 필립보와 안드레아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왔음을, 곧
“인자가 영광스럽게 될 시간이 왔습니다.”(요한 12,23)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대체 어떤 힘이 이 밀알을 죽음으로 밀어붙일 수 있을까?
묘하게도 죽음으로 밀어붙이는 그 힘은 생명력입니다.
생명의 힘이야말로 밀알을 죽게 할 수 있는 힘입니다.
‘죽을 수 있는 힘’, 그것은 살리기 위해 죽을 수 있는 힘입니다. 죽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살리기 위해 죽을 수 있는 힘이 생명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밀알이 땅에 떨어져야 하고, 죽어 묻혀야 하고,
묻혀 사라져 자신이 없어져야 하고, 그러고서야 비로소 생명의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 죽음의 고통은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곧 죽음의 고통은 자기를 벗게 하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요, 새 생명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여기에서, 셈족의 언어관습에서 “미워하다”라는 단어는 “사랑하다”라는 말과 관련하여 쓰여서
“덜 사랑하다”, “지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다”라는 의미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 대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당위성을 말해줍니다.
곧 땅에서의 ‘죽음’이 생명의 끝이 아니라, ‘참된 생명’(“영원한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바로 참된 실재를 보존하는 길이며, 미래에 대한 신뢰와 의탁,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개방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요한 12,26)
이는 ‘섬긴다는 것’과 ‘따른다는 것’의 긴밀한 연관성을 말해줍니다.
누군가가 따른다고 말하면서 따르는 그를 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따름이 아닐 것입니다.
또 섬긴다고 말하면서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도 진정한 섬김이 아닐 것입니다.
곧 그분을 따라나섰다고 해서 그분을 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따라 나서서 그분을 섬길 때라야 진정 따르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의 성소의 길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따라 나서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분을 섬기지 않고
여전히 ‘따라 나선 자신’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집과 가족을 떠나는 왔지만 ‘떠나온 자기’를 아직 떠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영광스럽게 될 시간이 왔다.”(요한 12,23)고 알립니다.
그리고 ‘당신을 섬기는 사람은 당신을 영광스럽게 할 그 죽음의 길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분의 죽음의 길에 함께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당신을 따르는 것’이 됩니다.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께서
여러분에게도 씨앗을 마련해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러 곱절로 늘려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2코린 9,10).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
주님!
함께 있는 이를 존중하게 하소서!
함께 있는 이를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함께 있는 저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듯,
저 역시 곁에 있는 형제를 종중하고, 함께 있는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신앙 안에서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생에서의 모든 것이 끝나고 단순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에게 죽음은 하나의 문을 통과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 사람, 이웃을 사랑한 사람,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던 사람은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분들을 성인과 성녀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영광만을 위해서 산 사람, 이웃에게 상처를 준 사람, 회개하지 않았던 사람은
어둠의 세상에 머물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 또한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전구하고 있습니다.
한 달 전입니다. 평생 군인으로 살았던 분이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최장수 시장이었던 분이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삶의 길이 언제나 영광과 행복이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때로 양심을 속이기도 했고, 때로 갈등과 번민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 생에서의 공과 허물은 묻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생에서 가장 뛰어났다는 사람도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보다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될 수 있도록 주어진 하루에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교회는 성 라우렌시오 부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박해자들이 교회의 보물을 바치라고 하자
라우렌시오 부제는 교회의 재산을 남몰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
그들을 박해자들 앞에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들이 교회의 재산입니다.” 이에 분노한 박해자들은 라우렌시오 부제를 불살라 처형하였습니다.
라우렌시오 부제는 순교하였지만 교회는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그의 죽음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라우렌시오 부제에게 교회의 보물은 화려한 건물, 진귀한 그림, 황금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외로운 사람, 병든 사람이 교회의 보물이었습니다.
후배 신부님도 비슷한 일을 하였습니다.
코로나19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우들에게 1,000불씩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취지에 공감한 교우들 중에서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지금 굶주리고, 지금 헐벗고, 지금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주님께 해 드린 것이라는 가르침을 실천하였습니다.
‘울지마 톤즈’에 이어서 ‘부활’이 개봉하였습니다.
울지마 톤즈는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기억하는 영화였습니다.
아프리카로 건너가서 복음을 전한 이야기입니다.
나병환자들의 발에 맞게 신발을 만들어 주었고,
꿈이 없는 아이들에게 음악을 통해서 희망을 전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건강이 악화되어서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고,
톤즈의 아이들과 교우들은 신부님을 기억하며 고마워하였습니다.
부활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썩었지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영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신부님의 강론을 들었던 학생들, 신부님과 음악을 함께 했던
학생들, 신부님과 정이 들었던 학생들의 이야기입니다.
신부님과 함께 했던 학생 중에는 의사, 약사, 공무원이 많았습니다.
지금 의대에 다니는 학생도 4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남수단의 교과서에도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비록 신부님은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180여명의 제자들은 신부님의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제자들 모두 이태석 신부님께서 보여주신 희생의 길, 사랑의 길, 나눔의 길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께서
여러분에게도 씨앗을 마련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러 곱절로 늘려 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
참된 부활의 삶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병든 이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살아가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밀알 하나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
생명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죽어야 살고
죽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낮아져야 행복하고
낮아져야 비울 수 있습니다.
밀알이 죽지 않고서는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생명의 역설입니다.
하나의
죽는 밀알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삶을
기억합시다.
열매는
언제나 새로운 삶의
변화이며 실천입니다.
이기적인 자아가
죽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뜻을
결코 행할 수 없습니다.
실천하지 않고서는
믿음의 길이 될 순 없습니다.
죽고 비우고
내려놓는 것이
신앙의 기초이며
생명의 신비입니다.
생명의 신비는
하느님께 바치는 겸손으로
더욱 풍요롭습니다.
순교는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진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임을 믿습니다.
열매와 십자가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임을 믿기에
십자가와 함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생명은
십자가와 함께
사랑하는 것입니다.
고행과 자기 학대의 차이점
전삼용 요셉 신부
신자 중에서 가끔은 용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성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찾아가, 기도도 청하고 예언도 듣고 치유와 가르침도 받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분들은 대부분 외모가 비슷합니다.
생김새가 비슷하다기보다는 풍기는 이미지가 비슷합니다.
일단 화장을 하지 않습니다. 예쁘게 보이려는 마음까지 주님께 봉헌했다는 것입니다.
머리는 흰머리와 검은 머리가 반반 섞여 있습니다.
전혀 꾸미지 않고 그냥 고무줄 하나로 묶고 다닙니다.
옷도 생활 한복과 같은 멋을 낼 필요 없는 수수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성당에 앉아 있거나 엄청난 시간을 기도와 성경 필사 등에 투자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분들이 가치 있는 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학대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행은 좋은 것일까요?
예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세속-육신-마귀와 싸우기 위해 단식하시며 고행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고행은 좋은 것이고 꼭 필요한 것입니다.
고행이 없는 종교는 없습니다. 그런데 고행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자기 학대일 뿐입니다.
인도에 70년 이상 음식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프라흘라드 자니’입니다. 그는 하늘의 기운을 마시며 산다고 말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 여신의 축복을 받아 신비한 능력을 갖추게 된 이후로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살아왔다고 주장합니다.
여신 때문인지 그는 여성의 모습처럼 분장하고 다닙니다.
그가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자 인도 국방연구개발기구(ORDO)는
2010년 15일 동안 병원에서 그를 관찰하였습니다.
사람이 15일 동안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30명의 의료진이 카메라와 CCTV를 통해 그를 살펴본 결과
정말 그는 음식과 물을 먹고 마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화장실에도 간 적이 없습니다.
놀란 의료진은 15일 뒤, 자니의 장기와 뇌, 혈관 등을 검사했으나
그 수치가 모두 정상인의 안전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뇌의 상태는 25세 젊은이의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밝혔습니다.
DRDO는 그를 더 연구하면 군인들이 전장에서 음식물 없이 견디거나 재난 상황에서 고립된 사람들이
오래 버틸 수 있도록 하는데 보탬이 되는 의학적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가능하더라도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이런 수행은 그저 자기 학대에 불과합니다.
고매한 스승 밑에서 수행하던 제자가 스승에게 달려왔습니다.
“스승님, 드디어 제가 물 위를 걸어서 강을 건널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습니다.
“애 많이 썼구나. 그런데 이 강을 건너는 뱃삯이 얼마더냐?”
“20루피입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너는 20년 동안 그 고생을 하고 20루피를 번 것이니라.”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거의 경지에 오른 제자 하나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어떻게 하면 하늘을 날 수 있습니까?” 스승이 답했습니다.
“하늘을 나는 일은 새들에게나 맡겨 두세나.”
왜 스승들은 이런 시도를 하는 제자들을 칭찬해주지 않을까요?
그런 일을 하려는 목적이 자기 영광을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유학 가서 신학생 때 고행을 한답시고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잤습니다.
그러나 결국 음식을 먹을 때는 폭식을 할 때도 있었고, 잠은 수업시간에 잤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그저 고행 자체로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끼려고 하는 자기 학대에 불과합니다.
자기 학대는 자기만족을 위함입니다.
그러나 고행은 사랑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고생을 말합니다.
마치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으면 반드시 거쳐서 가야 하는 길이 있는데,
그 목적지가 사랑이라면 그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길이 고행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를 죽이는 일은 고행입니다.
그러나 그 고행이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 아니면 자기 학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오히려 얼굴을 예쁘게 꾸미고 머리도 예쁘게 단장하고 슬픈 일이 있더라도
웃는 모습을 보여주며 배가 불러도 필요하면 더 먹어주기 위해 당하는 고통이 바로 고행입니다.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맛있는 반찬을 만드는 것이 고행인 것입니다.
한국의 방송국이 ‘프라흘라드 자니’를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15일 단식 당시의 기록을 상세하게 살폈습니다.
그랬더니 샤워하러 들어가기 전에는 방광에 소변이 가득 차 있다가 샤워한 후에는
그 소변이 싹 빠져버린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샤워 물을 마시고 그때 소변을 보았던 것입니다.
훈련되면 음식 없이 40일 이상 사는 것은 어렵지는 않다고 합니다.
자니씨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고생한 자기 학대의 삶을 산 것뿐입니다.
반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라우렌시오 부제는
황제가 원하는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그 덕분으로 자신은 불로 달궈진 석쇠에 구워지는 고생을 하였으니 그것은 정말 고행입니다.
그것은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몸을 조금 괴롭히는 것도
그것이 이웃을 더 사랑하기 위한 열매의 목적이 아니면
상은커녕 평생을 자기에게 자기가 속은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밀알은 썩어야 하지만 반드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썩어야 합니다.
그 열매란 나의 고생으로 이웃이 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 예수 말씀
김 루미나수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서의 배경을 이루는 셈족의 언어 관습에 따르면,
‘미워하다’가 ‘사랑하다’와 관련해서 쓰일 때에는 흔히 ‘덜 사랑하다’,
‘지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다’를 뜻하고,
또 관계가 끊긴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자기 목숨에 대한 의미 중 지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다. 라는 의미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자신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으므로 인해
마음을 나누고 이웃을 제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겠지요.
더 나아간다면 이웃사랑은 나와의 관계를 끊으므로
즉 새로운 관계가 시작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보아야 하겠습니다.
매일을 새롭게 다시 보려고 애씀으로써
라우렌시오부제 순교자가 얻어 누렸던 영원한 생명
즉 부활에 대한 희망과 기쁨을 일상 안에서 체험하는 나날이 되길 빌어봅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