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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비잔티움 제국에서 형성.전개된 문화. 1000년 간에 걸쳐 당시 가장 빛나는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그리스 고전문화의 전통 위에 그리스도교적 요소가 더하여 진 것이 이 문화의 본질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성쇠와 함께 전개되었으나, 특히 6세기 중엽, 9-10세기, 14세기에 융성하였다. 특색은 일반적으로 보수적이며 신비적 색채가 짙으며, 비잔티움인은 미(美)라는 것을 외면적.가시적(可視的)인 면보다도 오히려 정신적인 가치에 의해서 의식하였다. 발칸, 소아시아, 북 이탈리아 및 시칠리아 등지에서 이 문화가 전개되었으며, 그것은 중세유럽에서 서유럽의 라틴-게르만계의 문화권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의 세력을 가지게 되어 소위 비잔티움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비잔티움 문화의 유력한 분야인 미술은 궁정과 교회에서 발전하였다. 교회건축은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중앙에 대원개(大圓蓋;크고 둥근 지붕, 돔)를 두고 창문이 적은 벽을 둘러쳐서 외계와 차단한 내부공간에 신비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회화에서는 초기, 중기에 모자이크가 시공되었는데,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그리스의 다프니 수도원에 있는 [그리스도]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말기에는 모자이크를 대신하여 프레스코 벽화와 이콘이 성행하였다. 조각은 일상용품인 식기 등에 부조(浮彫)가 가하여 질 정도여서 발달하지 못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번영을 과시하는 기운이 싹 터 역사서술이 성하였는데,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위업을 찬양한 프로코피우스의 저작인 [전기(戰記)] [건축기] 등이 있다. 그리스인의 정조(情操)는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에 의해서 높아졌지만, 10세기 말에는 문학의 대표작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는 서사시 [디게리스 아크리타스]가 나왔다. 또, 그리스 고전문학에의 관심이 높아졌는데, 9세기에 포티우스는 자신의 장서(藏書) 중에서 그리스어 수사본(手寫本) 280점을 선정하여 해설하고, 그것을 [미리오비블리온]이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그리스 고전과 나란히 신학(神學)도 발달하였으나, 그 사고방법은 플라톤 철학에 의거한 바가 많았다. 또 7세기에 막시무스 콘페소르가 주장한 신비사상이, 그 뒤 신학논쟁을 통하여 강화되어 비잔티움 사상계의 한 조류(潮流)를 이루기도 하였다. 비잔티움 문화는 그리스 고전문화를 계승하여 중세를 통하여 유지하였으며, 근세유럽에 그리스 정신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발칸과 러시아에 거주하는 슬라브계 민족에게는 그들의 문화적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공헌한 바가 컸다. 이처럼 비잔티움 제국은 정치, 경제, 군사 면으로는 때에 따라 불안하였지만, 문화적으로는 그 주위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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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그리스어 Byzantine Greek language
비잔티움 또는 동로마 제국 시대, 특히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인들에게 함락당한 1453년까지 행정 언어 및 일반 문어(文語)로 썼던 고체(古體) 그리스어. 비잔티움 제국 시대의 구어(口語)는 문어처럼 고체를 쓰려는 경향을 띠지 않고 계속 발전했다. 비잔티움 그리스어는 아직도 그리스 정교회의 예배의식에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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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문학 Byzantine Literature
4세기에 로마로부터 분리하여 성립된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의 문학. 실질적으로 헬레니즘 문화를 이어받은 그리스 제국과 비등했다. 따라서 그 곳에서 태어난 문학(비잔티움 문학)은 고대 그리스 문학의 연장선 위에 있었고, 그 언어도 옛 그리스어를 표본으로 하였다. 그러나 내용은 그리스, 로마적(的) 기조(基調)에 그리스도교적 색채가 짙게 더해져 있고, 동방의 영향이 가미되어 있는 것이었다. 비잔티움 문학은 다음의 3기로 나누어진다. 제1기(4세기-7세기 초엽)는 고대형의 문학을 대신해서 새로운 그리스도교적인 형식이 탄생한 시기이다. 제2기(7세기 중엽-9세기 중엽)는 여러 이민족(異民族)과의 항쟁으로 인해 문학활동이 침체되었던 시기이며, 제3기(9세기 후반에서 14 53년 비잔티움 제국 멸망까지)는 문운부흥(文運復興)의 시기이며, 문학의 소재와 언어에 민중적 요소가 나타난 시대이다. 비잔티움 문학에는 이와 같은 시대적 구분 외에, 종교문학과 세속문학, 순정어(純正語, 學者語) 문학과 민중어(民衆語, 俗語) 문학 등의 분류방식도 있지만, 보통 형식상 분류인 산문과 시로 나눈다. 산문으로는 우선 방대한 양의 신학서(성서해석, 교의론, 종교논쟁, 설교 등을 포함)가 있다. 특히 4-5 세기는 아타나시우스, 바실리우스 등을 위시한 신학자들이 활동한 시기였다. 교부문학(敎父文學)에는, 그 표현과 사변(思辯)의 경향에 헬레니즘 시대의 수사법(修辭法)과 철학의 영향이 엿보이며, 또 동방의 금욕주의 영향도 찾아볼 수 있다. 이것들을 모범으로 해서 그 뒤 많은 신학서가 쓰여졌는데, 6세기 이후에는 성상파괴논쟁(聖像破壞論爭,이코노클라즘)과 신비주의의 발전 외에 그다지 독창적인 것은 보이지 않는다. 비잔티움 문학 가운데서도 특히 두드러진 부문 중 하나는 역사서이다. 에우세비우스(4세기),프로코피우스(6세기) 등과 기타 많은 역사가의 손으로 쓰여진 궁정사(宮廷史), 정치.외교사, 연대기, 자서전 등으로 비잔티움 역사를 속속들이 알 수 가 있다. 그 중에서도 알렉시우스 1세의 딸 안나 콤네나가 부황(父皇)의 사적을 기록한 [알렉시아드(Alexaid, 전5권)](12세기)와 비잔티움의 멸망을 기록한 역사가 4명의 사서(史書) 등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또 비잔티움의 역사서는 이 제국과 접촉을 가진 수많은 민족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데도 가치가 있다. 전기(傳記)로는 [성(聖) 안토니우스전(傳)](4세기)이 성도전(聖徒傳)의 모델이 되었다. 성도전과 각종 전기에는 성도의 행적에 관한 정확한 기술에서, 공상담·모험담까지 여러 종류가 있다. 그 대부분이 민중어로 쓰여져 대중의 교화역할을 하였으며 동시에 오락으로 제공되기도 했다. 성서 중의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만든 성서 이야기와 헬레니즘 시대의 연애 이야기를 모방한 것 등도 있다. 이색작품으로는 사제 요아네스의 [발람과 여호사밧]이 있는데, 이것은 석가전을 그리스도교 풍으로 번안한 것이다. 산문학에는 이 밖에 루키아노스를 모방한 풍자문학과 수사학적 작품, 서간집 등이 있다. 한편 시 부문에서는 교훈시.풍자시.기타 여러 가지가 있다. 처음에는 형식, 내용면에서 고대문학을 모방한 것이 많았으나, 나중에는 일상생활의 모든 일들을 소재로 했다. 빈곤과 서민감정을 읊은 T. 프로드로무스와 같은 특이한 작가도 있다. 예배의식용의 종교찬가가 발달하였는데, 거기에는 고전적인 운율(韻律)에 대신해서 강약 엑센트에 기초를 둔 운율이 일찍부터 도입된 것이 특징이다. 설화시(說話詩)는 헬레니즘 소설을 토대로 한 허술한 것에서, 13세기가 되면 십자군에 의한 서유럽의 영향을 받은 기사도와 사랑의 시가 나타난다. 서사시 가운데 백미(白眉)는 [디게니스 아크리타스 Digenis Akritas](11∼12세기경)이다. 아랍의 태수(太守)와 비잔티움 명문가 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디게니스 아크리타스의 무훈과 사랑, 그리고 유프라테스 강변에서의 평화스런 만년과 죽음을 노래한 것이다. 서정시와 극은 보잘 것이 없었다. 약간의 극이 만들어졌으나, 고전극과 마찬가지로 실연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그리스 정교가 가지는 비현세적인 자세와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비잔티움 문학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궁정인, 학자, 성직자의 손으로 이루어진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전통을 존중하고, 고전을 보전한 공적은 매우 크며, 서유럽 르네상스도 그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고전의 전통에서 벗어난 서민의 일상어에 의한 문학, 특히 문중시가 지방에서 발생하여, 근대 그리스 문학과 연결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비잔티움 문학은 동부 유럽의 여러 민족, 특히 슬라브 인(人)의 문화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Digenis Akritas Basileios라고도 하며, 디게니스 아크리타스의 혈통과 소년시절의 모험, 성년시절, 죽음을 다룬 서사시와 민속 발라드(아크리타스 발라드). 이 비잔티움 서사시는 788년경에 죽은 한 역사적 실제인물을 토대로 한 작품으로 그리스·비잔티움·동양의 요소가 섞여 있으며, 11∼12세기경 비잔티움 제국의 소아시아의 한 지방에서 성립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본(異本)이 여럿 있으나, 용어는 당시의 구어(口語)를 반영하는 그리스어(語)이고, 내용도 에피소드 형식의 민화류(民話類)가 많이 섞여 있다. 언어나 내용 면에서 비잔틴 문학 중에서도 특이한 위치에 있으며, 중세 그리스 민간전승의 보고(寶庫)라는 점에서 문학사적 가치가 그만큼 크다. 디게니스 아크리타스는 중세 그리스의 이상적인 영웅이며, 유프라테스 강 변경의 용감한 군인이다. 디게니스는 '이중혈통(二重血統)의'라는 뜻인데, 아랍인(人) 아버지와 그리스인 어머니를 가진 것을 나타내며, 아크리타스란 '국경 경비자'라는 뜻으로, 그의 아버지는 사라센의 군 지휘관으로 한 비잔티움 장군의 딸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이다.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디게니스가 이슬람 세계와 인접한 비잔티움 제국의 변경에서 이교도의 침략을 격퇴하고 많은 공훈을 세우는 이야기이다. 9∼10세기 비잔티움의 긴박한 대외관계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이 서사시에 스며 있는 자연에 대한 감수성과 가족 간의 강한 사랑은 나중에 비첸초스 코르나로스가 쓴 크레타의 위대한 민족적 로맨스인 〈에로토크리토스 Erotokritos〉와 그리스 현대 대중시의 모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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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제국의 이름은 원래 그리스의 번영한 도시국가였던 비잔티움(Byzantium)에서 유래된 것으로 동로마 제국을 의미한다. 비잔티움은 중세의 파리라고 일컬을 만큼 중세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다. 수도인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은 동, 서양의 접속점으로서 상업상, 군사상 요지였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정치적, 지리적 여건으로 문화가 발달하고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국가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문화 특징은 로마의 정치적 전통과 그리스 문화를 토대로, 그리스도교적인 요소와 동양의 문화가 융합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한 것이다. 모자이크에 나타난 비잔티움 미술은 이러한 특징을 잘 반영해 주고 있는데, 그리스의 현세적 아름다움이 동방의 신비로움, 밝은 색채, 풍부한 장식성과 융합되고 종교적 관념과 결부되어 나타난 독특한 양식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주된 종교인 그리스도교의 영향에 의해, 초기에는 정숙 및 금욕의 풍조가 생활 전반에 걸쳐 요구되었으나, 제국이 번성해 갈수록 장엄하고 화려한 양식을 띠게 되었으며, 또한 모든 문화에 영향을 미쳐 그리스도교의 정신이 복식에도 그대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도교 사상 등 여러 요소가 복합된 비잔티움 문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동방 문화와의 교류로서, 이것은 비잔티움 제국의 정신적, 물질적인 면을 변화시켰는데, 그 중 페르시아의 화려한 색채 감각과 중국의 견직물은 비잔티움의 조형 문화, 특히 복식의 특징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비잔티움 문화는 당시 유럽뿐만 아니라 동방에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비잔티움 복식은 유럽 제국의 궁정복, 귀족의 축제복, 승복으로서 이끌어져 갔다.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비잔티움 제국의 복식은 그리스와 로마 풍의 스타일에 동양의 영향을 받아 풍부한 색, 화려한 장식, 호화로운 직물을 사용하였다. 그리스 복식이 리드미컬한 음영을 주로 한 조각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낸 데 반해 비잔티움 시대의 것은 스스로 빛을 내고 색채, 광택의 화려함이 강조됨에 따라 모자이크( mosaic)화적인 것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비잔티움 복식으로, 팔루다멘툼(paludamentum)과 달마티카(dalmatica), 그리고 튜닉(tunic)을 들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클라미스(chlamys)가 로마를 거쳐 비잔티움 시대까지 계속 착용된 팔루다멘툼은 남녀 모두 착용한 기본 복식으로서 비잔티움의 대표적인 의복이 되었다. 그러나 후기에는 왕족, 귀족, 사제에 한해 공식복으로 착용되었다. 형태는 사다리꼴 또는 반원형의 천으로 왼쪽 어깨는 완전히 감싸고 오른쪽 어깨는 장식핀으로 고정시켜 오른손의 활동이 자유롭게 하였다. 왕족의 것에는 원( 圓), 양(羊), 비둘기, 십자(十字), 초상화, 종교화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사각형의 타블리온(tab lion)을 붙여 계급 표시를 하였다. 달마티카는 고대 로마 시대 말기에 달마티아(dalmatia)지방에서 소수의 남녀 신자들이 그리스도교를 포교하기 위해 입기 시작한 데서 유래하였고,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인정되면서 왕족, 교황, 사제들뿐 아니라 귀족들도 모두 착용하였다. 달마티카는 4세기 이후 재단법이 변하여, 고대의 드레이퍼리형 의복에서, 진동 둘레와 가슴이 좁혀져 상부가 몸에 맞고 아랫도련이 넓어지는 형태가 되었다. 즉 직사각형을 반으로 접어서 양쪽 팔 밑을 직사각형으로 잘라내고 가운데 一자, T자, U자 또는 원형의 네크라인을 만들었으며, 거기에 풍성한 소매가 달려졌다. 이 옷을 펴 보면 십자가 형태를 이루어 종교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달마티카의 특징은 어깨부터 아랫단까지 그리고 소매 끝 단 에 보라색이나 붉은 색의 클라비스(clavis, clavus)라는 장식 선을 넣은 것이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클라비스나 자수 장식이 없는 간단한 것을 입었으며, 왕족은 종종 클라비스 이외에 전면을 화려하게 수놓기도 하였다. 이 옷의 재료로, 처음에는 린넨(linen)이나 거칠고 성글게 짠 모(毛)를 사용하다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후에는 견으로 만들어져 화려한 의상으로 변하게 되었다. 달마티카는 르네상스 이전까지 중세복의 기본을 이루었고, 현재까지 사용되어 오고 있으며 유고슬라비아의 국민복으로 내려오고 있다. 튜닉은 고대 로마에서 착용했던 튜니카(tunica)가 비잔티움에서 더욱 화려하게 발전한 것으로, 간단 한 T자형의 원피스 드레스이다. 그 형태는 소매가 길고 좁은 형이 주를 이루었고 활동이 편하도록 앞 또는 옆솔기선을 터 놓은 것이 많았으며, 허리에 띠를 매어 입었는데 남자는 허리보다 아래에 여자는 허리보다 위에 매어 입었다. 길이는 무릎까지 오는 짧은 것에서부터 발목까지 오는 긴 것까지 다양했고, 황제의 것은 양 어깨나 소매에 둥근 형이나 사각형의 장식이 있는데 이것을 세그멘티 (segmenti)라 하며, 동, 식물의 문양이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비잔티움 시대의 복식은 독창적인 디자인은 별로 없었고, 대부분 그리스의 복식이 로마로 전해진 것을 그대로 이어 받은 것이었고, 다만 실크와 금, 은 실의 자수, 보석 등을 많이 사용하여 중후하고 화려하게 조화시켜 나간 것이다. 그러나 남녀 구별이 뚜렷하지 않았던 복식이 5세기부터 성별에 따라 의복형태가 구별되기 시작하였으며, 장려한 복식미의 창안과 뛰어난 직물제조 기술의 발달은 서양의 복식발달에 큰 기여를 하였다.
비잔티움인들의 초기 머리형태는 남, 녀 모두 로마인들의 머리형태와 비슷하였으나 6세기형부터는 그들과 다른 형태로 발전하였다. 남자들의 머리는 목덜미를 덮을 정도의 길이였다가 후에는 좀더 짧아지고 앞이마로 머리를 늘어뜨렸다. 여성들도 초기에는 로마인의 머리형태와 같이 머리를 따서 올리는 형태였다가 점차 베일(veil)이나 터번(turban)으로 머리를 감쌌다. 또한 자신들의 머리를 고급스러운 비단이나 진주로 장식한 망으로 씌워 독특한 형상을 이루었다. 이 시기는 머리의 형태보다 머리를 장식하는 헤드 드레스(headdress)에 장식의 초점이 가해진 시기이다. 이 시기의 관은 특징적인 헤드 드레스로 갖가지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하고 금속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황제나 황후의 관은 진귀한 보석으로 장식되었고, 높이가 5인치였다. 이와 같은 관들은 동방과의 교류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바잔티움의 화려한 문화를 나타내주고 있다.
비잔티움인들은 샌달(sandal)과 부츠(boots)를 계속 신었다. 비잔티움인의 샌달은 슬리퍼(slipper)형이 아닌 발등을 덮고 어느 것은 발목까지 덮는 슈즈(shoes)형의 샌달이었다. 이들이 신던 샌달은 발의 형태대로 만들었으며 발의 양옆은 가죽으로 되고 발등은 노출이 되었고 발 양옆 가죽은 가죽끈이나 보석으로 엮어진 줄로 연결되어 있다. 또한 발목부분에서 버클로 채우게 되어 있었다. 부츠 역시 발에 맞게 재단되어 만들어지고 발끝이 뾰족해지기 시작하였으며 부츠의 길이는 발목에서부터 무릎 아래까지로 다양하였다. 군인들은 이러한 부츠를 신었다. 비잔티움인들의 신발재료는 하류계급이 비교적 단순한데 비해 상류계급은 화려하게 염색한 부드러운 가죽이나 값비싼 비단이 사용되었고 금사나 은사로 자수를 놓고 보석으로 장식하였다. 색상은 붉은색이나 밝은색이 주로 쓰여졌다. 황제나 황후는 자색의 고급스러운 비단으로 만들고 금·은사로 자수를 놓았으며 진주나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을하여 더욱 화려한 신발을 신었다.
비잔티움인의 장신구는 비잔티움 시대를 특징지우는 중요한 요소이다. 무엇보다 장식을 중요시 여겼고 장신구는 상류계급의 상징물로서 존재하였다. 비잔티움 시대에는 직물 이외 금, 은 세공 기술과 유리 세공 기술이 발달하였으며 그 기법도 매우 정교하였다. 또한 재료가 풍부한 여건에서 동방으로부터 진귀한 보석과 장신구들이 수입되어 함께 사용되었으므로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였다. 당시 비잔티움의 장신구로서 중요한 것은 진귀한 보석으로 된 관 외에 정교하게 디자인된 반지, 팔지, 브로치, 귀걸이 등이 사용되었다. 브로치는 로마의 피브라 대신 사용된 것으로 형태가 다양하였고 반지는 장신구로서 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나 결혼식 등에서도 사용되었다. 장신구에 사용된 보석들은 진주, 다이아몬드, 유리, 에메랄드, 사파이어, 루비 등의 값비싼 보석들이었다. 이 외에도 수입품인 상아를 재료로 하여 정교한 세공기술로 만든 장신구들은 중요한 유행품목이었다. 비잔티움인의 장신구는 매우 예술적이고 화려하였으며, 장신구의 전체적인 모양은 보석을 많이 사용하여 색이 다채롭고 규모도 비교적 컸다. 종교적 색채는 양식화되어 성서에 나오는 장면을 전면적인 문양으로 나타내었다. 사용한 문양으로 원(圓)은 영원한 안녕을, 양(羊)은 그리스도를, 비둘기는 성경을, 십자형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상징하는 등 모두가 그리스도교에 관계된 것이었다. 색상도 종교적 의미를 포함하여 백색은 순결, 청색은 신 성함, 적색은 신의 사랑, 녹색은 영원한 젊음, 황금색은 선행, 밝은 황색은 풍성함의 의미를 지녔는데, 이러한 풍부한 색 철학은 현대 의장(意匠)에 이르기까지 기본적 감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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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에 비잔티움 제국(중심지는 콘스탄티노플)과 그 세력권에 있던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 건축과 회화 등의 시각예술. 비잔티움 예술의 특징을 나타내는 회화 및 건축의 양식은 6세기에 처음 형성되어 1453년 투르크인들에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부터 마지막으로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거의 변함없이 존속했다. 비잔티움 예술은 거의 다 종교적인 표현, 더 구체적으로는 조심스럽게 통제된 교회 신학을 비 인격적인 예술 용어로 바꾸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비잔티움 양식의 건축과 회화는 이러한 관심사에서 비롯되었으며,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지 않고 엄격한 전통 속에서 완성되어 획일적이며 작가 또한 분명하지 않다. 그 결과 서유럽 예술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된 양식과 영적인 표현을 지녔다. 초기의 비잔티움 건축은 이탈리아에서 발전한 교회 양식인 긴 바실리카 평면을 채용했으나 커다란 돔과 볼트를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구조상, 시각상으로 둥근 돔은 이를 세로로만 받쳐주는 벽의 배치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10세기 무렵에는 하나의 돔을 중심으로 볼트를 갖춘 4개의 구조체가 각각 직각을 이루며 뻗은 방사상 평면이 대부분의 지역에서 채용되기 시작했다. 이 중앙집중적인 방사상 평면은 동방교회에서 강조하는 위계적인 우주관에 잘 들어맞는 것이었다. 이러한 우주관은 건축적, 회화적 양식을 두루 융합하여 교회의 돔, 벽, 천장 등에 꾸며 놓은 프레스코나 이보다 더 흔한 모자이크 같은 교회 장식에 나타난 도상(圖像) 체계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중앙 돔의 꼭대기에는 준엄한 모습의 판토크라토르('우주의 지배자'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가 있다. 그 아래 쪽에는 흔히 돔의 밑 둘레를 돌아가며 천사와 천사장들이 있으며, 벽에는 성인들의 모습이 있다. 성모 마리아는 대개 4개의 날개부를 덮는 반쪽 돔 중 높은 곳의 일부에 그려져 있다. 가장 낮은 부분은 신도들의 집회장소였다. 비잔티움 교회는 이렇게 전체가 하나의 소우주를 이루었다. 도상 체계는 또한 전례(典禮)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스도와 성모의 생애에서 따온 이야기를 그린 장면들이 서유럽 교회에서처럼 벽을 따라 연대 순으로 있지 않고 축일의 비중을 고려하여 신학적인 중요성에 따라 돌아가며 놓여 있다. 이 모자이크와 프레스코 양식은 신과 절대자를 정적, 상징적인 모습으로 나타냈다. 성숙한 비잔티움 양식은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의 후기 고전주의 형태를 양식화, 표준화하면서 발전했지만, 형태보다는 선이나 채색한 평면의 역동성에 기반을 두었다. 개성적인 얼굴형은 억제되고 표준 얼굴형이 채택되었으며, 몸매는 밋밋하고 옷 주름은 소용돌이 치는 선 형태로 만들어졌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현세를 초월한 느낌이어서 3차원적인 개개의 인간상을 강렬한 선과 화려한 색으로 힘차게 표현함으로써 영적 존재로 대체시켰다. 비잔티움 양식의 형상은 대체로 사실적이지 않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상상을 통해 환상적인 해석이 가미되었다고 불신할 여지가 없으므로 자연주의적 고전주의 양식보다 더 간접적이기도 하며 더 직접적이기도 하다. 엄격한 정면 자세와 꿰뚫을 듯 커다란 눈을 그린 비잔티움 양식의 얼굴형, 그리고 외 떨어진 인물의 배경으로 금색을 독특하게 사용하여 그 형상이 보는 이와 벽 중간 어디쯤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 등으로 직접성의 효과가 증대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 조상(彫像)은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조각은 책 표지나 유물함 같은 물건에 곁들여졌는데, 이 경우, 작은 상아부조가 주류를 이루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세련되고 부유한 사회층에서는 자수, 금 세공, 에나멜 세공 등 여러 가지 세밀한 예술이 번성했다. 사본 채식(彩飾) 은 기념비적인 회화나 모자이크만큼 감동적인 효과를 주지는 못하지만 유럽 곳곳에 비잔티움 양식과 도상을 퍼뜨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자체의 수준과는 별도로 비잔티움 미술은 유럽의 종교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비잔티움 양식은 무역과 정복활동을 통해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로 퍼졌고 변형된 형태로 12세기 내내 지속되었으며 결국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비잔티움 양식은 또한 동방정교회의 확산에 힘입어 동유럽의 중심지, 특히 러시아로 퍼졌고 비록 지방에 따라 수정되기도 했지만 17세기에도 원래 형식을 유지했다.
비잔티움 건축가는 토목공사나 궁전건축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며, 콘스탄티노플의 반 비르 딜레크(千一柱)라고 불리는 지하 대저수소(大貯水所) -예레브스탄 궁전(지하 궁전)- 등에서 그 편린이 엿보이나 건축의 주요한 것으로는 성당이다. 성당 건축은 한편으로는 종교의식이라고 하는 기능에 따른 계획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집이라고 하는 강한 상징적 성격을 가진다. 종교의식을 목적으로 하는 집회를 위해서는 사제(司祭)를 위한 제실(祭室) 및 내진(內陳)과, 신도(信徒)를 위한 신랑(信廊)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고대 말기의 공공건축의 종장식(縱長式: 바실리카식) 설계가 채용되었다. 그러나 그 경우, 제실은 거의 언제나 반원상(半圓狀)으로 돌출하고, 반원 모양의 지붕을 덮었다. 이 반원 모양의 지붕은 신의 자리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로는 오히려 원 모양의 지붕이 상징성이 강하다. 원 모양의 지붕을 덮은 집중식 건축은 성스러운 천계(天界)로 덮인 종교적 공간을 구성하고, 그 원형은 고대 로마에도 있으나 5세기부터 세례당(洗禮堂), 묘당(墓 堂), 순교자 기념당 등으로 우선 발달하였고(라벤나의 갈라플라키디아 묘당 등), 그것이 점차 대형화하여 성당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러나 전례(典禮)를 위해서는 제실과 주랑(主廊)을 직선으로 늘어놓고 다시 거기에 전실(前室: 세례 지원자용)과 앞뜰(일반인용)을 추가한 종장식 설계가 편리하므로 집중식의 경우도 대부분 바실리카 구조를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6세기경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건설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성당건축의 상징성은 십자가를 본뜬 평면설계에서도 보인다. 바실리카에서는 제실 앞쪽의 한 구획이 좌우로 뻗어 익랑(翼廊)을 형성하고, 라틴 십자가를 묘사한 것이 보이며(단지 이것은 유럽 쪽에서 특히 현저하다), 집중식에서는 사방에 같은 길이의 가지를 뻗게 하여 그리스 십자가를 본뜬 것이 통례이다. 바실리카식이 비잔티움 중기 이후 차차 쇠퇴한 데 비하여 집중식은 그리스 십자형의 설계를 고집하면서 여러 유형을 발달시켜 나갔다.
장식은 특히 건축 내부에 집중되었다. 이 경우 장식이란 단순한 벽면 미화가 아니라, 조형적 수단에 의하여 공간 내부를 성화(聖化)하여 거기에 초자연적인 세계를 현실에 나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성스러운 것 또는 성스러운 공간은 현세 또는 물질계의 것처럼 나타내면 안된다. 이 초자연스러운 것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은 무엇보다도 빛이며, 빛의 구성요소로서의 색채이다. 이리하여 십자가, 여러 종교 용구, 제단 등이 황금.보석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비단 등을 사용한 호화로운 염직물이 귀하게 여겨졌고, 건축장식으로는 색유리를 많이 사용하는 모자이크 미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 전형적인 것으로는 이탈리아의 라벤나에 풍부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모자이크는 비용과 수고가 드는 것이므로 시대 또는 경우에 따라 벽화가 이를 대신하였다. 어쨌든 그 표현양식을 보면 무엇보다도 색채의 효과가 중시되어 3차원적인 표현에서 입체감이나 원근 표현은 되도록 피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아직도 성스러운 자나 성스러운 장면의 물질화를 두려워한 사람들은 성상(聖像) 표현을 우상숭배라 하여 부정하고 성상파괴운동(아이코노클래즘)을 8-9 세기에 걸쳐 흥륭시켰다. 마케도니아 왕조 이래 성상 미술은 또 다시 흥하지만 그것도 모자이크.벽화.아이콘으로부터 사본 등의 색채 미술의 각 분야에 걸쳐있다. 그러나 유럽과는 달리 3차원적 성격의 강한 조각미술이 끝내 발달하지 못한 것은 유대교 이래의 전통인 우상에 대한 강한 경계심 때문일 것이다. 조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기둥머리, 내진장벽 등) 주제의 대부분은 추상적.상징적이며, 사람의 상을 표현하는 경우에도 거의 평면미술에 가깝다.
비잔티움 문화권은 유럽에서 아시아.북아프리카의 광대한 지역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미술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비잔티움 예술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단정하기 어려우나 적어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大帝: 재위 527-565) 시대에 최초의 황금기(黃金期)를 맞은 것이 확실하다. 고대 말기의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에서는 이미 동.서 지중해 세계의 서로 다른 흐름이 인정되었는데, 동방 그리스도교 미술의 독특한 양식이 분명히 자각된 것은 6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 후 성상파괴운동(聖像破壞運動: iconoclasm)이 종결된 843년까지를 제1기(期), 마케도니아 왕조(867-1 056)와 콤네누스 왕조(1081-1185) 시대인 9-12세기를 제2기, 팔라이올로구스 왕조시대인 13-15세기를 제3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대 로마 제국의 정통적(正統的)인 후계자임을 자처한 비잔티움 제국의 예술은 고대 그리스.로마 미술의 흐름을 이어받은 자연주의 양식과, 시리아.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고대 동방 미술의 엄격한 정신성(精神性)에 뿌리를 내린 추상적 양식과의 융합에서 탄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교회 건축, 모자이크나 프레스코 기법에 의한 벽화, 엔코스틱(encaustic: 蠟畵) 기법의 성화(聖畵) 이콘, 채색 사본 삽화(彩色寫本揷畵), 상아나 금은 세공, 에마유(email: 七寶) 등의 공예품 분야에 화려한 중세 미술을 구축한 이 그리스도교 미술의 본질은 심오한 신학이론(神學理論)을 바탕으로 한 초절적(超絶的)인 신(神)의 영광찬미에 있었다. 그리고 서유럽 중세 의 로마네스크나 고딕 미술과의 근본적인 차이는, 그리스도교 미술의 본질적 명제인 불가시적(不可 視的)인 신의 표현에 대한 시비를 둘러싼 성상논쟁(聖像論爭: 아이코노클레즘)이라는 처절한 시련 끝에 비잔티움 미술이 획득한 깊은 명상적 경지(瞑想的境地)에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부터 성상파괴운동 종결까지 이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 기념물로서는 먼저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들 수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옛 로마 제국을 재현한다는 야심에 찬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수도에 이 성당을 건립하고 537년 화려한 헌당식(獻堂式)을 거행하였다.바실리카식 교회에 돔을 올리는 그리스도교 건축의 꿈을 실현한 것인데, 이 성당의 모자이크 벽화는 일부의 장식무늬 부분을 제외하고는 현재 남아있는 것의 대부분이 9세기 이후의 것이다. 6세기 비잔티움 양식의 모자이크 벽화는 북이탈리아 라벤나의 여러 성당에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다(산 비탈레 성당 등). 또 그리스의 테살로니카의 여러 성당, 시나이 산의 하기아 카타리나 수도원 교회의 모자이크, 이집트의 사카라나 바위트에 있는 수도원들의 프레스코 벽화 등 성상파괴운동의 파괴를 피할 수 있었던 약간의 벽화가 비잔티움 제국 영토 내의 각지에 분산되어 현존하고 있다. 로마의 산타 마리아 안티카 성당에 있는 7-8세기의 프레스코 벽화도 이 시기 비잔티움 회화 양식의 귀중한 작품이다. 비잔티움 회화에서 제2의 중요한 장르인 이콘도 시나이산의 작품과 같이 6세기의 것이 있다. 교회 본당 장벽(障壁)을 장식한 이콘은 비잔티움 미술의 성자숭배과 관련된 독특한 형식의 종교화로서 그 뒤 화려하게 전개되었다. 또 당시 콘스탄티노플 의 미술을 이해하는 데에는 [라블라 복음서] [시노페 복음서] [빈 창세기] 등의 사본삽화도 중요하다. 조각은 신학상의 이유에서 환조(丸彫)가 자취를 감추고 약간의 상아부조(象牙浮彫) 등이 있는 데 불과하였다.
성상의 표현을 우상숭배로서 금지하여 100여년 동안 비잔티움 제국을 뒤흔든 성상파괴운동이 종결된 뒤, 전대(前代)의 미술을 재 흡수하면서 진정한 비잔티움 양식이라고 부르기에 적합한 미술이 확립되었는데 이 시가가 마케도니아 왕조(868-1057)에서 콤네누스 왕조(1057-1185)에 걸친 시대이다. 건축에서는 그리스 십자형 플랜(평면)에 돔을 올린 성당이 9-10세기에 성립되었다. 이에 따라 성당 내의 벽화장식 프로그램이 정비되고 하늘에 보다 가까운 돔의 정점에 자리를 차지하고 판토크라토르(Pantokrator: 만능의 주)인 그리스도, 앱스(apse)의 성모자(聖母子)를 비롯하여 다른 벽면에는 교회력(敎會曆)에 따른 12제례도(祭禮圖) 등의 성서장면, 성자상(聖者像)을 배치하는 도상배치(圖 像配置)가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비잔티움 교회 미술은 바로 신의 영광 찬미에 바쳐진 것이었다. 이 시대의 전형적인 교회 및 벽화는 그리스의 다프니 수도원 교회, 호시오스 루카스 수도원 교회, 키오스 섬의 네아모니 수도원 교회 등에서 볼 수 있다. 또 이 시대는 슬라브 제국(諸國)의 그리스도교 화(化)에 따라 비잔티움 미술양식이 제국 주변으로 확산된 시기로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러시아의 여러 지역, 그리고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시칠리아 섬에는 오늘날에도 훌륭한 벽화가 있는 성당들이 남아 있다. 이콘도 성상파괴운동 이후에 그 절정기에 이르렀는데, 열광적인 이콘 숭배는 성화상(聖畵像)에는 마술적이고 신비로운 효력이 있다고 하는 맹목적인 신앙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양식상의 견지에서 보면 이 시기의 벽화나 이콘, 사본삽화에서도 고대 헬레니즘 미술의 전통인 자연주의적 양식과 추상적인 동방 양식 또는 민족적 지방 양식과의 융합이라는 비잔티움 회화의 일관된 과제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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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철학 Byzantine Philosophy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한 신(新) 플라톤 주의를 표방하는 철학. 로마 제국(帝國)이 동.서로 분립(395)된 후 6-7세기경 비잔티움 제국의 자립과 그리스도교화(化)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서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통해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서방 문화권과는 사상적으로 완연이 그 성격을 달리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나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를 뒤 이은 가자의 교부(敎父) 프로코피우스, 비잔티움의 레온티우스, 다마스쿠스의 요하네스 등을 선구자로 친다. 특히 오리게네스는 [Praeparatio evangelica]에서 그리스 철학에 관한 문제들을 광범위하게 제시.정리한 것으로 유명하며, 요하네스는 동방 교회의 정통 교리 및 신학을 정리 집대성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들은 신 플라톤 주의 철학에 입각,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원용(援用)하여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등을 논증했는데, 레온티우스의 [칼케돈 신조(信條)] 해석 등이 그 좋은 예이다. 그들의 사상은 서방의 신비주의 신학자들이나 스콜라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9-10세기의 포티우스, M. 프셀루스, 네케포로스, 프레미데스 등이었다. 특히 포티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範疇論)]과 그의 학설을 신학에 연관시켜 사용함으로써 크게 주목을 받았다. 이 밖에도 디오니소스적 신비사상도 유행하였고, 아카데미아가 다시 부흥하면서 더 한층 강한 철학적 교리해석의 경향을 띠게 되었는데, 11세기 중엽에는 시므온, 14세기에는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 니콜라우스, 가파시라스 등이 나왔다. 15세기 비잔티움 제국의 쇠퇴와 더불어 많은 신학, 철학 자들이 서방으로 옮겨가, 베사리온, 게오르기오스 플레톤 등에 의해 서방 르네상스가 진행되었다.
비잔티움 음악 Byzantine Music
비잔티움 제국(帝國)의 음악문화. 그 상황 및 음악이론.실천의 여러 상태는 초기에 관해서는 팔레스타인, 그 이후에 관해서는 주로 콘스탄티노플의 여러 교회와 관련된 종교음악 측면의 일부분밖에 판명되어 있지 않으며, 세속음악에서는 합헌적 황제의 취임과 그 밖의 궁정의식에서 합창이나 악기 (관.현.오르간)가 쓰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 중에서도 오르간은 서유럽에 영향을 미친 점에서 중요하다. 교회의 전례용 음악에 관해서는 악보 딸린 전례서가 남아 있으므로 상당히 상세한 점까지 판명되어 있어서, 이 계통에 속하고 또 현존하고 있기도 한 그리스 정교(正敎)나 러시아 정교의 성가와 합쳐 연구되고 있다. 비잔티움 성가는 주로 단선율(모노디)의 성악곡으로, 초기에 는 1음절 1음의 실러빅 가창양식을 바탕으로 성서낭독이 행해지고 있었으나, 9세기경부터는 장식적인 멜리스마를 가하고 솔로와 합창(좌우배치)을 대비시키는 등 연주관주에 있어 다양하게 변화해 갔다. 구조적으로도 정형선율순열(개시나 종결의 패턴 등), 리듬이라든가 음강변화(音强變化) 등이 의도적으로 활용되고 있었던 사실을 네우마보(譜)의 사본에서 읽을 수가 있다. 이론적인 배려는 선법 체계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는데, 정격.변격 각각 4종류, 합계 8종류의 온음계적 선법(옥토에코스)을 구분해 쓰고 있었다. 그 짜임새는 유대교나 초기 그리스도교 음악전통의 흐름을 이어 받았을 뿐만 아니라 로마 카톨릭의 교회선법에도 영향을 미쳤으므로 서양음악사상 의의가 크다. 이처럼 확고한 기반이 음악을 받치고 있었던 데에는 영(靈;네우마.프네우마)을 핵으로 하는 국가이념을 배경으로 갖고 있었던 점을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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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성당건물. 이 지방이 비잔티움 제국(帝國)의 수도로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리던 6세기에 건립되어 1453년 이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이슬람교의 모스크가 되었다. 이때 4기의 미너렛(minaret: 첨탑)이 증축되고 아야소피아(Ayasofya)라 불리게 되었는데, 원래는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이라 불리던 비잔티움 건축의 걸작이다. [하기아 소피아]란, [신성한 예지(叡智)], 즉 성삼위일체의 제2의 페르소나인 로고스,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으로 여겨진다.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 후계자 시대에 건립된 성당(360년 헌당식)이 532년 니카의 폭동으로 파손된 후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재위 527-565)가 새로운 설계로 재건하기 시작했다. 설계는 트랄레스의 안테미오스와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가 맡고, 100명의 감독 아래 1만 명의 인부가 5년 10개월 만에 완공하여 537년 12월 7일에 헌당식이 거행되었다. 기본적으로는 라틴 십자 형 플랜의 삼랑식(三廊式) 바실리카에 대형 원개(圓蓋)가 덮여 있는 원개식 바실리카형 성당인데, 안 길이 77m, 너비 71.7m 이다. 또한 지름 33m, 마룻바닥부터의 높이 56m 되는 대형 원개의 무게를 떠받치기 위해서 4개의 큰 기둥과 대형 아치, 삼각궁우(三角穹隅)를 채용하고, 동서에 원개와 똑같은 너비를 가진 2개의 반원개를 설치하는 등, 독창적인 구조가 발견된다. 헌당식에 참석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깊이 감동하여, "오,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에게 이겼노라!"고 외치고 나서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현재는 박물관이 되어있는데, 20세기에 미국 고고학 조사단의 청소작업으로 인해서 이슬람교 지배하에 회반죽으로 뒤덮여 있던 모자이크 벽화가 차례차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헌당 당시의 것은 장식 모티브 등 몇 가지에 지나지 않으며, 대부분은 이코노클라즘(iconoclasme: 聖像破壞運動)이 끝난 후인 9세기 이후의 것이다. "그와 같이 훌륭한 것은 아담 이래 일찍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돔(Dome)은 놀라운 동시에 무서운 작품이어서, 견고한 석조 건물로 밑받침되어 있느니 보다 차라리 하늘에서 금사슬로 매단 것같이 느껴진다." "그 성당에 기도하러 들어가면, 당장에 그것이 사람의 노력이나 근면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신의 힘으로 이루어진 작품인 것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정신은 하늘에라도 오른 듯하여 신이 여기 바로 가까이 계시고, 신이 스스로 택하신 이 거처를 기뻐하심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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