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기에 취미활동을 한답시고 대학원에서 미술공부를 한 것은 조금 특이하다. 왜냐하면 60대 노인이 20대 젊은이 와 함께 공부하면서, 컴퓨터나 인터넷으로 공부하는 방식이 낯설어서 애를 먹었다. “이동민 님, 미학과 예술문화, 기말고사, 13일 오후 5시 에 시험 시작. 시작 전 모든 준비 완료”라는 문자가 들어왔 다. 그 메시지를 보자 말자 공연히 불안이 스며들었다. 인터 넷 강의를 신청하면서 집에서 자유롭게 시간 내어 공부하 니 얼마나 편안하겠는가, 라는 계산을 하였던 과목이었다. 그것은 잘못된 계산이었다. 낯선 공부 방법이라서 적응하기 가 쉽지 않았다
(2018, 그루).” - 《영감탱이로 살다》 <인터넷 시험을 치다> 부분
이처럼 낯선 경험은 불안을 주었고, 더욱이 컴퓨터나 인 터넷 다루기가 능숙한 젊은이와 함께 공부를 하려니 공연히 기가 죽었다. 젊은이는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이고, 나는 그 태양의 찬란한 빛에 눌려 스러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작은 빛이나마 지키고 싶어서 취미 활동에 온 힘을 쏟는다. 나는 취미 활동으로 미술 공부 하기와 미술 모임을 운영 하였고, 수필문예대학을 관리하였다,
중국 미술을 공부하면 서 한문 실력이 형편없음을 알고 동양 고전 연구소에 나가 영남대 이장우 교수에게 한문 공부를 하였다. 집사람과 꼬 박꼬박 산책을 다니면서 서예며, 미술 이야기를 나누는 등, 여기에 임진수 교수에게 심층 심리학 공부도 하러 다녔으 니, 이러한 취미 생활과 낯선 것을 공부하는 것이 나의 일 상으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하루하루는 오늘도 어제처럼 반 복하였다. 내 일기에 ‘어제와 同’이라고 써도 조금도 이상하 지 않다.
나는 생업에서 은퇴 후에 이런 생활을 하느라 나 름대로 바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내 노후 생활에 만족하 는 이유이다. 나의 수필에서 고향, 어머니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러나 이번 수필집에는 아내, 자녀들 내외 그리고 손자, 손녀를 다룬 가족 이야기가 많아졌다. 가족 이야기를 통해 서 나의 흐뭇한 마음을 토로도 하였지만, 가치관이 충돌하 는 이야기도 하였다. 내 글을 다시 읽으면서 내 가족이 이처 럼 나의 뒷날을 맡아서 대를 이어가는 만큼 나는 생애의 마 지막을 맞이하는구나 싶었다. 나의 길을 돌아보면서 젊은이 는 틀렸고, 내가 과연 옳은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순전히 내 글을 내가 읽어 봄으로 얻은 수확이다.
그러나 나이 들어감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수십 년 동안 익혀온 나의 가치관을 ‘아, 요즘은 세상이 바뀌었더라 면서, 나를 포기해버리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 아닌가. 가족 간의 세대 차이는 그래도 작은 미풍일 뿐이다. 가족 밖의 세 계를 이해하기는 더더욱 어려움을 느낀다. 꼰대 소리를 듣 는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나도 살아온 인생 이 있고, 가치관이 있는데, 세월이 바뀌었다는 이유 하나로 나를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 나의 수필 <벽과 벽>이라 싶어서 여기에 싣는다.
<벽과 벽>
대학에 봉직한 동기까지 정년퇴임을 하였으니 우리도 나 이가 꽤 들었나 보다. 한가해서인지 동기 모임에 전에 보다 많이 출석한다. 60년 대 초반에 고등학교를 다녔으므로 살 기가 무척 어려웠던 때에 대학에 갔다. 자연히 등록금이 쌌 던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에 많이 진학하였다. 그러다 보니 평생을 교직에 있다가 퇴임한 동기들이 많다. 데모 때문에 신문의 지면이 시끄러울 때는 동기회가 이들 의 성토장이 된다. 교육자들이었는데도 목소리는 거칠기 짝 이 없다. ‘밥먹고 살도록 하였더니 빨갱이 짓이나 해. 이런 놈들은 모조리 총살감이야.’ 나는 이들의 분노를 충분히 이 해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내면으로는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우리는 끼니를 떼우기도 어렵던 시절에 오로지 배불리 먹 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꿈이었다. 배고프지 않 는 세상, 이것이 꿈꾸어 온 유토피아이었다. 국가가 요구하 면 몸이 망가지는 한이 있더라도 일을 하였다. 자유니, 민주 니, 독재니 하는 구호는 우리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아니 그럴 겨를이 없었다. ‘민주화 운동’이라는 말을 듣긴 했어도 배가 부르니까 철없는 자들이 하는 사치스러운 놀이쯤으로 생각하였다.
사회에서 역할이 끝나고 노후의 삶을 살아가는 오늘까지 4. 19혁명, 5. 16 군사 정변, 새마을 운동, 박 대통 령 시해, 월남 전쟁, 5. 18 민주화 운동, 민주화 운동, 북한 에 대한 정책의 변화 등 끊임없이 바뀌는 세월 속에서 온갖 풍상을 겪은 것이 우리들이다. 그러나 동기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이념이랄까, 믿 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보수 꼴통’이라는 욕설을 들으 면서도 동기들의 생의 지표는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더러 내심과 다르게 이제는 세상을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 아야 한다고 설득한다. 동기들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지 못 하였을 때는 몇몇 밤을 잠을 이 루지 못 하였다는 동기도 있었다. 친구들을 설득하려 들면 이들은 단박에 얼굴이 험악해진다. ‘모조리 때려 죽어야 한 다.’라는 말도 서슴없이 한다. 많은 희생을 치루면서 곡간에 채워둔 곡식을 아무런 노력도 없이 꺼내 먹는 것이 못마땅 한데, 한 술 더 떠서 정의니 평등이니 하면서 곡간을 마구 풀어헤치려 한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서 분노하고 있다.
나는 이해를 하면서도 스스로가 믿고 있는 사고의 틀 속에 갇혀 있는 그들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본다. 그들이 겹 겹이 쌓은 사고의 벽이 너무 견고하다. 스스로 허물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내가 공부하는 모임이 있다. 3-40대의 젊은 층이 주축을 이룬다. 종강하고 회식을 하는 자리에서 우연히 광우병 사 태가 이야기로 떠 올랐다. 나이 차이가 많다 보니 나는 잠자 코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였다. 그들은 광우병 사태란 정부가 국민을 속이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정상적인 저항이 었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런 이유로 그들이 벌인 항의는 지 극히 정의로운 일이었다고 하였다.
참았어야 했는데…. 듣 기가 거북하여 그들의 이야기에 끼어 들었다. ‘데모의 이유 로 광우병을 핑계 삼는 것은 잘못이다. 2007년에 WHO의 발표에 의하면 전 세계의 60억 인구 중에 광우병으로 사망 한 사람은 한 명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라가 시끄럽도록 데모를 할 사유는 안 된다.’ 라고 하였다. 내 직업도 있고, 내 나이도 있으니까 수긍해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내가 순진하였다. 그들은 목소리를 높이면서 내가 틀렸다고 아주 강하게 말 하였다. 덧 붙이기를 ‘이번 천안함 사건만 보아도 뻔하지 않 습니까. 정부가 국민을 얼마나 속이고 있는지 알 수 있지 않 습니까. 데모를 하여야 정부가 국민을 속이고 있는 실상을 알려 줄 수 있다’고 하였다. 글쎄, 천안함은 내가 전공이 아 니므로 모르는 일이지만, 적어도 광우병은 정부가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지만 내 말을 받아들이려는 기 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만 합시다.’라고 그들의 이야기에서 빠져 나왔다.
옆에 앉아 있던 젊은 엄마뻘쯤 되는 여자는 ‘선생님은 지 적 수준도 꽤 높으신 분인데 어떻게 그런 낡은 사고에 젖어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조금은 가엽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병을 다루는 의사라는 직업인으로서 광우병이 나 의 소관임을 인정받지 못한 것이 슬펐던 것이 아니다. 바위 보다 더 단단하게 굳어 있는 이념의 벽 앞에서 무기력하였 던 내 자신에 절망하였다. 좀 더 벽의 높이를 낮추고 생각이 다른 사람의 말에도 귀 기울여 줄 수는 없을까, 하는 마음이 었다.
내 친구들이 ‘모조리 때려 죽어야 한다.’고 하였듯이, 나이 차이라는, 같이 공부를 하고 있다는 벽이 없었다면 이 들도 또한 꼭 같은 말을 하였으리라 싶었다. 이 세상을 티 하나 없는 깨끗함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얼 마나 좋을까. 누가 말했든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49%의 악 과 51%의 선만으로 채워도 아름다운 세상이 됩니다.’라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우리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 으로 이 세상이 완벽하게 채워지기를 바란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전쟁이 났 던 해의 모심기 때 였다. 하루는 순경 두 명이 찾아와서 들 에서 일을 하고 있는 우리 집 일군을 데려 갔다. 그 다음 날 에 오리재라는 산골자기에서 총살 당하였다고 하였다. 남 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젊은이가 무슨 죽을 죄를 지었을라구. 뭐라더라 빨갱이들이 모이는 모임에 우연히 나갔다 가 순경에게 붙잡힌 일이 있었다더라. 그때는 걱정하지 말 고 집에 가서 일이나 열심히 하라더라 고 하였는데…, 전쟁 이 나니까 느닷없이 잡아가서 죽였다고 하였다. 다음 날에 아버지라는 분이 찾아와서 마루에 맥없이 앉아 있던 모습이 선하다, 라고 하였다.
만약에 지금 전쟁이 일어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을 하니 소름이 끼친다. 6. 25때 겪은 아 픔의 역사가 지금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왜, 스스로가 만든 감옥 속에 자신을 가두어 둘까. 그 벽을 조금만 허물고 다른 사람의 주장도 받아 준다면 ‘모조리 죽일 일’도, 나를 가엾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일도 없 을 것이다. 내가 나를 감옥에 가두어 두고 폭력을 휘두르는 일을 소위 지성인이라는 사람들로부터 나는 소름이 끼치도 록 체험하였다.
- <벽과 벽> 전문全文
이 글을 여기에 가져오는 이유라면, 내가 옳다, 그르다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논리적인 사고를 통하 여 나의 감정을, 나의 사유 세계를 뛰어넘자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신의 지배를 받는 중세가 아니고 개명되고 문명화되었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믿는 가 치를 신으로 모시는 종교에 갇혀 산다고 생각한다. 나는 자녀 세대와도 생각의 차이가 있음을 알았지만, 그는 나의 가족이기 때문에 화해의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 념으로 모여있는 사람들과는 화해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느 꼈다. 이념이 인간을 지배하는 신이 된 사회가 바람직할까. 그러나 나는 이념은 안 된다면서도, 무의식의 지시를 받는 또 다른 허수아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쓴 수필집을 꺼내어 지난 날에 쓴 글들을 읽어보면 서, 어머니를 소재로 한 글은 많은데 아버지를 소재로 한 글은 없다. 임진수 교수에게 심층심리학을 배우면서, 한번은 선생님이 내가 쓴 수필을 강의의 자료로 삼았다. 아버지와 나의 관계를 꼭 집어내어 주었다. 나는 돌을 지난지 얼마가 되지 않아서 작은 댁에 가서 자랐다. 중학교 1학년 때에 나 를 낳은 어머니에게로 돌아왔다. 친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계 시지 않았으므로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면서 자랐다. 그때까지는 삼촌을 아버지로 알고, 아버지로 부르면서 자랐 다.
암진수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삼촌댁에서 보낸 세월이 나에게는 나쁜 기억, 즉 상처로 남았다고 보았다. 아버지, 즉 삼촌에 대한 나쁜 기억은 무의식 속으로 억압해버렸으므 로 기억해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니 글의 소재로 삼지 않았다고 한다. 그 말이 맞을 듯하다. 나를 버렸다는 생각과 작은 댁에 서 자랄 때 삼촌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무의식을 지우 고 삼촌을 이해하는 글을 써보아야 할텐데. 그런 날이 올까. 어린 시절을 돌봐주었으므로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윤리의 식과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나쁜 기억이 충돌함으로, 나 는 아예 아버지를 소재로 하는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259-267 267 밑에서 둘째 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