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뒷길
김성조
반짝이는 햇살 아래 저 그늘의 깊이는
슬픔이 얼마나 큰 힘을 지니는지 아는 사람만이
걸어갈 수 있는 통로이리라
이를테면
몇 생을 걸어야 만날 수 있는
그런 인연의 한끝에서나
열리는 숨결이라고 할까
이번 생은 여기까지야
저문 들녘에나 필 그런 풀잎 하나 정도는
옷깃 스치는 가랑비 같은 거야
꿈을 꿈으로 피우지 못한 날들은
내 그릇의 비좁은 소관일 뿐
사내들의 간이탁자가 붉게 저물어간다
그런 풀잎 하나 정도의
벼랑 끝 같은 황홀이 어디라고,
날 안아 줄 이 나밖에 없는
노점상 여인이 아직은 초록인 별빛을 안고
늦은 골목길을 걸어간다
시집『신화의 푸른 골목길을 걷다』 2024. 역락
맨 처음의 신화
김성조
언제나 없는 너와
언제나 그리워하는 나 사이에
천 년 전에 새겨두었던 약속은
그리 믿을 것이 못 된다
바람은 어제처럼 빌딩 몇 채의 불빛을
강물 속에 부려놓고 다리 저 끝으로 멀어진다
거꾸로 선 불빛들은 젖은 채로
하늘의 별빛을 출렁이면서 세상
온갖 이야기를 다 흐를 듯하다
지친 다리를 끌며 오후를 건너는 동안
나무는 초록과 단풍을 번갈아 입으며
다시는 꿈꾸지 않으리라던
어느 적막한 날의 울음을 떠올린다
너 없는 봄을 기다리고
너 없는 가을을 작별하고
오늘은 나를 만나기 위해
오랜 누각에 빗발치는
맨 처음의 신화를 채록한다
시집『신화의 푸른 골목길을 걷다』 2024. 역락
김성조 시인
한양대학교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1993년 『자유문학』 신인상 등단. 시집 『그늘이 깊어야 향기도 그윽하다』, 『새들은 길을 버리고』, 『영웅을 기다리며』. 시선집 『흔적』. 학술 저서 『부재와 존재의 시학-김종삼의 시간과 공간』, 『한국 근현대 장시사長詩史의 변전과 위상』(2019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선정). 평론집 『詩의 시간 시작의 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