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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카페에 글을 올리고 있을때 입니다
어느날 윤영일 동지가 카페에'평화운동 협정 본부 '의 투쟁과정을 올리고 있었고
저는 그것을 보고 너무 깜짝 놀랬습니다 아니, 이런 분들이 있었다고?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바로 광화문 미대사관앞에서 투쟁하는 동지들에게 힘을 보태고 싶어서
토요 집회 시간을 맞추어 잡채를 한솥 준비해 나갔습니다 일일이 만나 접시에 잡채를 담아 주며
이야기가 시작 되었습니다
그당시 협정본부를 이끄는 이적목사는 감옥에 있었고 임택인이가 안학섭 선생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집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윤동지가 반가히 맞이하면서 (이미 카페에서 친숙했습니다 )그 동지가 나를반기면서 "내가 당골레다 "하니까
윤동지가" 당골레라면 사족을 못쓰는 기자를 알고 있다고 해서 반가움에 그 기자분 전번을 주라했고
전번을 밭아든 나는 곧 바로 집에와 그당시 자주일보에 글을 올리고 계시던 이용섭 기자분께 전화를 했습니다
"저 당골레 인데요" 했더니 반가히 전화를 받아 주셨습니다 그렇게 자주일보기자로 글을 올리는 이용섭기자와
인연이 이어집니다 그당시 코로나 시절이었고 그분은 자주일보에 매일 글을 올리고 계셨습니다
저는 자주일보에 선생이 올리는 글을 퍼올려 우리 카폐에 올렸습니다
그러면서 매일 이용섭 기자분과 개인적 통화를 하면서 그를 돕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운영하기가 힘들다고 하셔서 카페지기 직필님께 모금을 올리고 십다니까 허락 하셔서
자주일보 운영의 자금난을 위해 모금함의 게시글을 올렸습니다
우리 회원분께서는 십시일반 성의를 표현해주셨고 저는 기자님께 충분하냐고 묻자 고맙다고 하셨지요
그러면서 계속해서 기자님의 기사를 복사해 우리카폐에 올렸습니다
이용섭 기자분은 그당시 조선에서 ' 노동신문에 크게 이름이 나실 때입니다'이미 옥고 6개월을 치르고 나오셨고
선생말씀으로는 옥중에 최고의 대접을 받으셨답니다
이용섭기자분은 처음에 자주시보에 온갖 사상을 올리고 계셨나 봅니다
무슨까닭으로 거기서 탈퇴해 자주일보를 만들어 계속 그분의 사상을 올리고 있었고 그때 그 신문을 운영하시기 위해
경영난을 겪고 계셨습니다 저는 바로 정론직필님께 사정을 이야기 하고 게시글에 올려도 되냐고 묻고 직필님은 바로
허락하셨습니다 모금은 우리 회원님의 십시일반이 되어 선생께 이만 하면 좋냐고 물으니 고맙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제가 혼자 그분의 집에 방문했지요 저를 맞이 하시기 위해서 점심으로 국수를 준비해주셨지요
제 몸에 맞는 그맛은 너무 황홀했지요 ㅎ 그리고 집안을 둘러보니 한 티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집은 전세 임대였지만 (연립) 너무 청결했습니다 화분 하나를 기르시고 계셨는데 그분은 그 꽃나무에 의지하고 계셨습니다
자신의 병마와 싸우시면서 꽃화분을 통해 공명을 전하고 계셨습니다,당시 폐암을 겪으시면서 그꽃에 생명을 보시며 희망을
잃지않으셧지요 그런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그당시 기초수급자 형편이라 제가 도울 수 없었지요
너무 안타 까웠습니다 ,이어 그분의 희망은 좌절이었습니다 이어 병원 중환자에 입원하셨고 그분들 가정은 너무 형편없어서
병원비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분에게는 형제가 3분 계시지요 모두 통일 운동가 이십니다
큰형은 조선에 詩를 공모하셔서 최고상을 받으셨고 동생 이정섭은 유전병으로 자리에서 못일어났지만 통일 운동가였고
이미 통일운동가 사이에 널리 그분 가족의 활동을 알고 있었나 봐요
마지막 운명하시기 전에 병원비를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다시 직필님께 허락받고 그분의 병원비 모금의 게시글을 올렸습니다
우리 회원분들의 십시일반이 그분께 이세상을 가시면서 사랑을 전하셨고 선생은 흡족해 하셨습니다
계좌번호는 선생 조카분의 계좌였고 잘 활용하셨나 봅니다 선생장례식에서는 직필님이 와계셨고 그분 큰형분이 장례 주관하시며
많은 이야기로 그분을 추모하고 왔습니다.
그당시 후원을 해주신 회원님께 福을드립니다.
그분은 단군께서 좋은 자리에 모셨을 겁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ㅎ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