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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호와의 역사 원문보기 글쓴이: Junction Arirang
한국 현대사 악의축 김기춘
악마 중의 악마..
파시즘, 메카시즘으로 국정을 농락하며
한국 현대사를 짓밟은 괴물..
2013.08~2015.02 대통령비서실 비서실장
'기춘대원군' 김기춘
* 정수장학회 1기 장학생
* 박정희정권 당시 검사, 중앙정보부 법률자문관, 대통령 비서관
* 유신헌법 초안 작성 (박정희에게 대한민국헌법을 초월하는 권한 부여. 체육관에서 친정부 당원들만 모아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을 대통령이 임명, 대통령이 국회 해산 결정 등 반민주적 내용 다수)
* 초원복집 사건 (1992년 대선 직전, 경남-부산의 기관장들을 모아 놓고 지역감정 조장 지시)
* 노무현 대통령 탄핵 (한나라당 법제사법위원장으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주도)
*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재직하던 2013년. 통진당 해산 청구를 이끔. 대선후보 TV토론에서 통진당 이정희 대표가 박근혜에게 수모를 줬다는 이유로 보복 당했다는 설이 유력)
*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1991년 5월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자살한 김기설씨의 유서를 '강기훈씨가 대신 써줬다'며 자살방조 혐의로 구속. 2015년 대법원 재심에서 '사건 조작, 무죄 확정' 판결 받음)
* 김지하 필화 사건 (비리에 찌든 권력층을 을사오적에 빗댄 시로 6년 넘게 옥살이.. 2015년 서울고법, '국가는 김지하에게 15억 원 배상하라' 판결)
* 민청학련 사건 (민주당 이철, 유인태 전 의원, 시인 김지하 등 수많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멤버들이 '국가전복 시도' 혐의로 구속됨. 1960~70년대 민주화운동의 거목이었던 유인태는 사형 선고 받고 옥살이하다 박정희 사망 후 풀려남)
* 2차 인혁당 사건 (당시 김기춘은 중앙정보부 법률보좌관으로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을 보좌. 중앙정보부는 유신독재 반대 투쟁을 벌였던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 소속 대학생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고 사건을 조작. 주동자로 지목된 언론사 사장 등 8명은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집행됨. 2007년 재심에서 사건 조작 판결 나옴.. 대법원장이 직접 사과)
* 육영수 저격 사건 (당시 김기춘은 중앙정보부 5국의 파견 검사로 사건을 맡았고, 묵비권 행사하던 문세광을 하루 만에 설득해 범행 과정 일체를 자백 받아 기소. 문세광은 바로 사형 당함)
*장준하 의문사 (독립운동가 출신에다 '재야의 대통령'으로 불리며 박정희를 떨게 만들었던 장준하 선생, 산 아래 쪽에서 변사체로 발견. 머리에는 대형 해머로 내리친 구멍이 발견됨. 중앙정보부 "실족사"로 발표.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신직수. 신직수의 혈맹동질로 불린 김기춘은 중정 5부장으로 재직)
*최종길 의문사 (유신독재 반대 투쟁을 이끌었던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가 중앙정보부에서 조사 받다 추락사. 중앙정보부는 자살로 발표. 2006년 국가배상 판결)
외 다수
현재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 당시 수많은 사람을 고문으로 죽게했음.
본인(검사장,검찰총장,법사위원회 위원장.법무부장장관,법률 전문 사무소),
장인(변호사),아내(서울법대),사위(김앤장)
법률분야에 있어서 경험치와 지식으로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으며 이를 부정부패에 이용해
세력이 위기에 처할때마다 최소한의 피해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줌.
정적 ,세력에 위협이 되는 자 '자살'로 위장하여 살해,
종북프레임,
유신헌법 설계,
지역감정 설계,
정재계에 최순실을 소개하고 이용한 진정한 몸통.
70년간 얼굴을 바꿔가며 이어져 내려온
친일매국 기득권세력의 시나리오 작성자이자 설계자.
대한민국 민주주의 최대의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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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김기춘은 2013년 8월부터 청와대비서실장을 지내고 있다. 역대 최고령 청와대비서실장이다.
1939년 11월 25일 경상남도 거제에서 태어났다. 유신헌법 마련을 위한 실무작업에 참여했고, 육영수 여사 저격범 문세광과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등 굵직한 사건들을 수사했다. 초원복집 사건을 통해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을 남겼다.
마산중학교, 경남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1958년 입학해 1960년에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40여 년 동안 공직생활을 하며 요직을 두루 거쳤다.
광주지검 검사를 시작으로 서울지검 공안부장을 거친 공안통 출신으로 검찰의 꽃으로 불리는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1996년 신한국당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3선 의원을 지냈고 대한야구위원회(KBO) 총재도 역임했다. 정수장학회 출신으로 정수장학범동창회 상청회 회장을 지냈으며, 2007년 박근혜 후보 경선 선거대책본부 법률자문위원장을 맡았다.
최근 부산의 BN그룹 시원공익재단 이사장과 한국에너지재단 이사장, 한일친선협회 중앙회 부회장, 한국기원 부회장 등을 맡아왔다.
34세 때 육영수 여사 살해범인 문세광 사건을 조사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도운 대표적 원로그룹인 ‘7인회’ 소속으로 박 대통령의 정치철학을 잘 아는 최측근으로 평가받는다.
◆ 가족관계
서울법대 동기동창의 동생이자 박찬일 변호사의 딸인 박화자와 결혼해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아들 김성원은 의사이고 첫째 사위는 변호사이며, 둘째 사위는 대통령직인수위 고용복지분과 위원으로 활동한 안상훈 서울대 교수이다.
김성원은 2013년 말 불의의 사고를 당해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그의 최근 근황에 대해 공식적으로 알려진 게 없다.
◆ 학력
1958년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해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1967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형사법 석사과정을 밟았고 1984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형사법 박사학위를 받았다.
◆ 경력
1958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 3학년 때인 1960년 말에 제1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1963년과 1964년 해군 해병대 법무관으로 근무하면서 서울대 대학원을 다닐 때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5·16장학회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 이 때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인연이 시작됐다.
그뒤 1991년부터 1997년까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이름을 따서 만든 ‘정수장학회’의 장학금을 받은 졸업생 모임인 ‘상청회’ 회장을 지냈다.
군복무를 마친 뒤 광주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장인이 된 박찬일 변호사가 김기춘을 사위로 삼기 위해 김기춘의 첫 부임지가 광주가 되게 만들었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김기춘은 서울법대 동창의 동생이자 지금의 부인인 박화자에게 반해 결혼하려고 스스로 광주를 선택했다고 말한다.
그 뒤 1967년 부산지검 검사, 1969년 서울지검 검사를 거쳐 1971년 8월 법무부 법무과 검사로 발령이 났다. 법무부 장관을 지낸 신직수와 인연이 깊다. 신직수가 지금의 김기춘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군인 시절부터 측근에 있던 신직수를 매우 아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신직수는 법무부장관, 중앙정보부장, 대통령 특보 등 요직을 두루 지냈다. 신직수는 김기춘에 대한 신임이 매우 두터워 자리를 옮길 때마다 김기춘을 데리고 다녔다.
1972년 유신헌법 제정 실무팀의 일원으로 참여해 핵심적 역할을 했다. 김기춘은 긴급조치권·국회해산권 등 핵심조항이 담긴 유신헌법 초안작업을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법대 헌법학 교수로 유신헌법 제정에 참여했던 한태연은 유신헌법 제정 과정에서 김기춘의 역할에 대해 “유신헌법은 박정희가 구상하고 신직수, 김기춘이 안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김기춘은 그 뒤 유신헌법 홍보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TV에 나와 유신헌법을 설명해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1973년 유신헌법 등 법률개정작업의 공로를 인정받아 법무부 인권옹호과 과장으로 특진했다. 당시 법무부 과장(부장검사급)으로 승진한 사람들이 주로 사법고시 8회였던 것을 보면 김기춘(사법고시 2회)의 승진이 매우 이례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후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의 보좌관으로 발탁됐다.
1974년부터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 중앙정보부장 비서관,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을 지냈다. 이 시절 정권과 관련된 여러 공안사건을 담당하며 공안통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는 1974년 일어난 육영수 저격 사건 당시 담당검사였다. 묵비권을 행사하는 문세광을 하루 만에 설득해 범행과정 일체를 자백받아 기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기춘은 스스로 “묵비권을 행사하던 문세광의 입을 연 건 자칼의 날이라는 소설책 한 권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문세광을 첫 신문할 때 자칼의 날이라는 소설을 읽어봤느냐고 묻자 그가 선생님도 읽었느냐고 말문을 열면서 진술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자칼의 날’은 자칼이라는 테러리스트가 드골 프랑스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그린 첩보소설이다.
그는 문세광 사건 수사에서 세운 공으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승진했다.
1979년 청와대 법률 비서관을 지냈다. 이 때 박근혜 대통령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2년 뒤 법무부 검찰국장이 됐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직을 전전했다. 박정희 정부 말기에 중앙정보부 소속으로 육군보안사령부를 위축시킨 사건을 맡아 권력 실세들에게 밉보인 게 요직에서 쫓겨난 원인이라고 전해진다.
검찰을 그만둬야할 상황까지 왔지만 청와대 비서관으로 있던 대학 후배 박철언을 통해 당시 대통령 보좌관 등을 지낸 허화평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자리를 지켰다. 그 뒤 검사장으로 승진했지만 보직은 검사장급 중에서도 한직으로 취급받는 법무부 출입국관리국장을 맡았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뒤 1988년 12월 검찰총장이 됐다. 49세의 나이로 신직수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젊은 검찰총장이다. 1990년 2년 임기를 마치고 총장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다시 등장해 1991년에서 이듬해까지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당시 법무부 장관으로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을 총지휘했다. 이 사건이 조작됐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고 이 사건은 2014년 무죄판결을 받았다.
1992년 12월 부산지역 기관장들을 모아 지역감정을 조장해 여당 후보를 지원하는 내용을 의논했던 초원복집 사건으로 기소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김기춘이 부산에서 부산시장, 검사장, 경찰청장, 안기부지부장 등 기관장을 모아놓고 지역감정을 부추겨 민자당 김영삼 후보를 지원할 것을 모의한 것이 드러난 것이다.
검찰은 초원복집에 모인 기관장들을 무혐의 처분하고 모임을 주재한 김기춘만 불구속 기소했다. 선거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된 김기춘은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법원에 위헌제청을 신청했다. 1994년 여름 헌법재판소는 이 조항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1993년 김기춘법률사무소를 개소하여 변호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96년 신한국당의 공천을 받아 고향 거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2000년과 2004년 선거에서 당선되며 3선 의원이 됐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법제사법위원장으로서 탄핵심판 때 검사 역할을 했다.
2008년 국회의원 공천에서 떨어졌다.
2009년 한국에너지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2012년 제3대 이사장으로 재선임됐다.
◆ 사건/사고
초원복집 사건으로 유명하다. 초원복집 사건은 제 14대 대통령선거를 3일 앞둔 1992년 12월 11일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김기춘 의원이 박일용 부산지방경찰청장, 이규삼 국가안전기획부 부산지부장 등과 함께 부산에 있는 초원복집 식당에서 대선 관련 대책회의를 했던 것을 말한다.
당시 이들은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우리가 남이가’라며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정주영 국민당 후보, 김대중 민주당 후보를 비방하는 내용을 유포하자는 대책을 논의했다.
청와대비서실장으로 임명된 이후 박근혜 대통령이 여러 차례 인사문제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김기춘도 도마에 올랐다. 그의 인사검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2014년 12월 세계일보 보도를 통해 정윤회를 비롯한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들이 김기춘 비서실장 교체설 등을 유포했다는 의혹이 퍼졌다. 이러한 내용이 담긴 보고서에 정윤회가 "김기춘 비서실장은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가 대통령께 추천해 비서실장이 됐다", "하지만 7인회 원로인 김용환도 최근 김기춘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 내용도 들어있다. 청와대는 이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김기춘은 자신이 2014년 초 자신의 '교체설' 유포 경위를 조사하라고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에 지시했다는 일부 언론보도에 대해 '사실 무근'이라고 반박하며 해당 언론사를 상대로 한 법적 대응에 나섰다.
◆ 상훈
1973년 홍조근정훈장, 1976년 보국훈장 천수장, 1987년 황조근정훈장을 받았다.
1990년 청조근정훈장과 5.16민족상 안보부문을 받았다.
◆ 어록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 되면 모두 영도다리에 빠져죽자” (1992년 초원복집에서 대선을 앞두고 지역 유력인사들과 자리에서)
“유신헌법은 우리의 현실에 가장 알맞은 민주주의 제도를 이 땅 위에 뿌리박아 토착화하는 일대 유신적 개혁의 시발점이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구국영단을 강력히 지지하는 우리 국민의 정치적 결단에 의하여 확정을 보게 됐다.”(1972년 유신헌법이 제정됐을 때 대검찰청이 발행한 <검찰> 48호에 '유신헌법 해설'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더 많은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보안법 등 피의자의 변호인 접견권에 일시적 제한·금지가 필요하며 이는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검찰총장이던 1989년 기자회견에서)
“대공 수사 기능은 남북 화해와 협력이 이뤄지는 요즘 더 필요하다”(2000년 국정감사에서)
“현 정권은 공산당이 합법화돼야 민주주의가 완성된다고 하고 인공기를 훼손했다고 북측에 사죄하고 친북활동가를 민주인사로 둔갑시키는 등 친북적이고 좌파적인 정권” “노 대통령은 더 이상 나라와 국민을 혼란과 불안에 몰아넣지 말고 하야해야 한다”(국회 법사위원장 시절인 2003년 10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몸을 파는 여성은 생존을 위해 하는 것인데도 국가가 이들을 구제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단속만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2004년 10월12일 경북지방경찰청 국정감사에서 성매매특별법 제정과 관련)
“(노 대통령은) 사이코다. 자기감정도 조절하지 못하고 자제력이 없다. 그러니 나라가 이 꼬라지” (2006년 12월 한나라당 의원총회 자리에서)
“(대통령이) 어디서나 보고 받고 지시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있습니다. 대통령 계시는 곳이 바로 대통령 집무실입니다. 비서실장이나 저희 직원들은 집에서 사무실로 출근하지만, 대통령께서 아침에 일어나시면 그것이 출근이고 주무시면 그것이 퇴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 종일 근무하고 계십니다.”(2013년 국정감사에서)
◆ 평가
한국의 근현대사의 굴곡을 직접 겪은 인물로 주위의 평가가 엇갈린다. 여권 인사들은 그의 살아 있는 현장경험과 지식을 높게 사는 반면, 야권 인사들은 유신회귀나 귄위주의 인사의 대표로 취급한다.
1992년 12월 동아일보는 초원복집 사건의 당사자인 김기춘 당시 전 법무부장관을 소개하면서 “검찰 일각에서조차 권력에 눈이 먼 이중인격의 소유자라고 혹평까지 받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평검사부터 검찰총장, 법무장관에 이르기까지 권력지향적인 그의 행적은 이력을 살펴보면 잘 드러난다”고 덧붙였다.
머리가 매우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대희 전 대법관이 “나는 김기춘에 비하면 발바닥”이라며 “그의 아이큐는 170대일 것”이라 말했다.
청와대비서실장 취임 뒤 외부일정을 모두 접고 하루 24시간을 일에만 집중한다고 알려졌다. 정부부처와 국회에 대한 강력한 장악력을 바탕으로 여야 정치권과의 창구역할까지 자임하며 청와대 중심의 국정운영을 안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춘대원군’이나 ‘왕실장’이란 호칭은 이런 스타일에서 비롯됐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23일 만에 터진 ‘통합진보당 사태’가 빠른 속도로 정리된 점이나 취임 당시 논란이 됐던 ‘경제민주화’ 등의 문제가 정리되고 안정적 국정운영이 가능해진 데 대해 공안검사 출신인 ‘김기춘 효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박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과 조직을 이끄는 카리스마를 갖췄다는 평가가 나온다. 만사가 정확하고 꼼꼼하다.
딱딱한 이미지와 달리 유머감각은 물론 감성적 면모를 종종 보여준다. 비서실장 주재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자주 우스갯소리를 하며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한다.
◆ 기타
주위에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을 만큼 철저한 자기관리로 유명하다. 자신의 집무실에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70세에 이뤄졌고,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 벽화를 90세에 완성했으며, 괴테는 파우스트를 82세에 마쳤다’는 영어 문구를 걸어 놓았다.
잠시 모든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 할 일이 없음에도 옷을 다 차려입고 부인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건넨 뒤 2층 서재로 올라가 독서, 글쓰기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김똘똘’이라는 별명을 지어준 적도 있다.
취임 1주년을 맞아 지난 2월 청와대 참모들이 박 대통령에게 보낸 각오의 글에 ‘멸사봉공(滅私奉公·나를 버리고 공을 위해 일함)’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침)’라고 썼다.
http://www.ddanzi.com/index.php?mid=free&bm=hot&page=8&document_srl=143112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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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호와의 역사 원문보기 글쓴이: Junction Arir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