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1독서
<탈출기의 말씀 17,8-13>
그 무렵
8 아말렉족이 몰려와 르피딤에서 이스라엘과 싸움을 벌였다.
9 그러자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너는 우리를 위하여 장정들을 뽑아 아말렉과 싸우러 나가거라.
내일 내가 하느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언덕 꼭대기에 서 있겠다.”
10 여호수아는 모세가 말한 대로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후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우세하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우세하였다.
12 모세의 손이 무거워지자, 그들은 돌을 가져다 그의 발 아래 놓고 그를 그 위에 앉혔다.
그런 다음 아론과 후르가 한 사람은 이쪽에서, 다른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두 손을 받쳐 주니, 그의 손이 해가 질 때까지 처지지 않았다.
13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그의 백성을 칼로 무찔렀다.
▥ 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 3,14─4,2>
사랑하는 그대여,
14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확실히 믿는 것을 지키십시오.
그대는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15 또한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16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17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4,1 나는 하느님 앞에서, 또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리고 그분의 나타나심과 다스리심을 걸고 그대에게 엄숙히 지시합니다.
2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8,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가을이 익어갑니다.
가을이 익어가듯, 형제자매님들의 가슴에도 주님의 자비가 익어가고, 사랑이 익어가고, 신앙이 익어가고, 기도가 익어가길 빕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기도’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모세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복음에서는 기도에 관한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들려줍니다.
복음의 이 비유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비유입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기도하라'(루카 18,1)는 이 말씀은 대체 어떤 기도를 말할까요?
흔히 기도의 황금률이라 불리는 이 기도를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 ‘항구한 기도’, ‘지속적인 기도’, ‘중단 없는 기도’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교회 전승 안에서, 서방교회에서는 주로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라는 형태로, 동방교회에서는 주로 '예수기도(εύχη Ιησοû)'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어 전승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일까?
그것은 우선 ‘끊임없이 주 하느님을 향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여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도가 주님을 향하여 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의 넋두리요, 하소연이요, 자기 한탄이요, 독백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는 언제나 그분과 대면하고 있는 면전에서 벌어지며, 그분을 향하여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그 어떤 누군가가 아닌, 바로 우리 주님과 관계 안에 머무는 일이요, 현존하신 그분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기도의 본질적 특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그것은 주님을 믿고 주님께 희망을 두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항상 우리는 주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향하여 있지는 않는지, 또 주님 아닌 다른 것에 희망을 두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 하느님이 아닌 자기 자신이나 세상의 재물이나 그 어떤 우상들에 희망을 두고 그것을 향하여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는다면 하느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향하게 되기에, 예언자 사무엘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1사무 12,23)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말한 대로,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방향 지워진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보다 앞서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루가 18,1) 기도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그분이 계시기에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일입니다.
희망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일입니다.
마치 제1독서에서 모세가 강력한 아멜렉 군사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듯이 말입니다.
또 복음에서 과부가 판결해주지 않는 재판관 앞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간청하기를 포기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사실 이처럼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음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온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의 믿음을 찾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루카 12,8)
다시 말하면, 이토록 '사람의 아들이 올 때'까지 믿음으로 우리 주님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며 유대와 연대의 관계를 맺고 희망으로 그분을 향하여 있는 것, 이것이 곧 '끊임없는 기도'의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끊임없는 기도'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까지의 과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루카복음의 소묵시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을 향하여 있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물러 있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위대하다”는 말이 있듯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살아있는 증거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누군가가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하여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는 표징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수도원은 이 세상에서 이렇게 하느님을 향하여 있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물러 있음을 드러내주는 곳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루가 18,1)
주님!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의혹과 조바심에도 몰려오 때에는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항구하게 하소서.
어둔 밤일지라도 그 밤마저 몰아가는 당신을 믿게 하시고, 희망에 대한 믿음으로 항구히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바라기>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은 낙심하지 말고 하느님께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비유를 들려주신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을 드러내시는 말씀으로 가르침을 끝내시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의구심을 보이시는데 주님의 의구심은 우리의 의심 때문이겠지요.
그러니까 주님께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는지 의구심이 있으시고,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과연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는지 의심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근본적인 의심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계시는가?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이 계시는가?
그런 하느님이 계시는지 알고 싶고 믿고 싶어서 한번 기도를 해봤는데 안 들어주시니 역시 안 계신다고 믿어버립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두 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있다고 믿는 것과 하느님은 없다고 믿는 것.
없다고 믿는 것은 한번 기도해보고는 낙심한 결과이고, 있다고 믿는 것은 한 번의 기도로 낙심치 않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계신다고는 믿지만, 기도를 들어주시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또한 두 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안 들어주신다고 믿는 경우, 하느님 존재에 대한 의심은 없지만 다만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믿음이 아직 없고, 다른 사람은 사랑하시지만 나도 사랑하시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아직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 하느님의 존재와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전에 자기를 의심하고, 자기의 믿음을 먼저 의심해봐야 할 것입니다.
나는 청할 것을 청하고 있나? 들어주실 수 없는 것을 청하는 것은 아닌지.
간절히 청하고 있나? ‘아니면 말고’ 식으로 청하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 때를 믿고 기다리는가? 나의 때를 고집하고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
끈질기게 그리고 끊임없이 청하라는 말씀은 생떼를 쓰라는 뜻이 아닙니다.
들어주실 수 없는 것과 들어주셔서는 안 되는 것을 들어달라고 하는 것은 마치 부모에게 마약을 달라고 하고 청산가리를 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기를 지극히 사랑하는 엄마는 라면을 끓여달라고 졸라도 안 끓여 줍니다.
라면도 안 끓여주는데 마약과 청산가리를 계속 조르는 것은 엄마에겐 생떼지요.
우리 인간은 아이와도 같이 당장 좋은 것을 원하고, 당장 달라고 조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장에는 좋지만 나중에 나쁜 것은 안 주시고, 나쁘지 않고 좋을지라도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좋은 것은 당장 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그리고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말씀은 횟수나 때를 내가 정하지 말고 들어주시는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한두 번 해보고, 또 언제까지 해보고 그만두는 그런 기도는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떼를 쓰는 기도와 끈질긴 기도의 차이는 사랑에 대한 믿음의 차이입니다.
떼를 쓰는 기도는 하느님 사랑을 믿지 않는 기도이고, 끈질긴 기도는 하느님 사랑을 믿는 기도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기에 사랑의 하느님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고 외면하지 않는 것, 외면치 않을 뿐 아니라 하느님 바라기를 계속하는 것, 그런 기도가 낙심하지 않는 끈질긴 기도가 아닐까요?
- 작은형제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마지막 심판 때 믿음이 있다고 인정받으려면?>
다큐멘터리 작가 박지현의 <참 괜찮은 태도>에서 소개된 사연입니다.
2008년 청주 여자교도소로 촬영하러 갔을 때였습니다.
교도관이 말했습니다.
딱 한 사람만 조심하면 된다고.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그녀는 어느 날 남편이 외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불륜 상대자는 바로 그녀의 친구였습니다.
충격을 받은 그녀는 남편을 죽이고 자수했습니다.
교도소에 들어온 그녀는 모범적이고 성실한 사람으로 통했고 몇 년 후 가석방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유를 얻은 첫 날 그녀는 남편의 외도 상대였던 친구를 죽이고 다시 자수했습니다.
문득 그녀를 다시 떠올리게 된 건 한참 후인 2020년 장동익을 인터뷰하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는 부산 낙동강 변사 살인사건의 범인이라는 누명을 쓰고 22년간 억울하게 옥살이해야만 했습니다.
이 사건은 1990년 1월 부산 낙동강 근처에서 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특진에 눈이 먼 경찰은 무고한 시민 두 명을 용의자로 추정해 무자비한 고문 끝에 허위자백을 받아냅니다.
두 명은 사건 당일 현장에 없었지만 계속되는 고문과 폭행을 견디다 못해 허위자백을 했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들은 복역하던 중에 모범수로 감형되어 21년 5개월을 살고 출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2019년 뒤늦게 사건이 주목받으며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고문으로 범인이 조작되었다고 인정했고 부산고등법원에서 재심이 열렸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장동익입니다.
살인 누명을 쓰고 20년 넘게 감옥살이를 한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딸은 어느덧 커서 어른이 되었고 멋진 아빠가 되기를 꿈꾸었던 서른셋의 그는 어느덧 50세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가 무죄판결을 받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왜 하필 나일까?'라는 생각을 수천 번도 더 했다는 그는 재심이 결정되었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용서해야겠다. 마음속에 품고 있어 봐야 나 자신이 힘드니까 놓아야겠다.'
박 작가가 처음 그를 봤을 때 몇 분동안 말을 잇지 못했던 것은 그의 평온한 표정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억울하다고 내 과거를 망가뜨린 사람을 원망해봐야 이미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않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나를 괴롭힌 사람을 위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저지른 짓에 면죄부를 쓰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장동익의 말처럼 마음속에 품고 있어 봐야 나 자신이 힘드니까 나를 위해 용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용서하되 잊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박지현 작가가 처음 만났던 남편과 친구를 살해한 여성은 자신이 심판관이었습니다.
자신이 심판관이 되면 판사는 의미 없어집니다.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 때 그 사람을 역시 무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장동익씨는 심판을 심판관에게 넘겼습니다.
심판관이 그의 피해를 다 보상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자신이 심판관의 지휘에 서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래도 판사와 하늘이 올바른 심판을 내려줄 거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불의한 재판관에게 과부가 끊임없이 올바르게 판결해달라고 청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지치지 않고 청하면 불의한 재판관도 올바르게 판결해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칫 믿음이 어떤 것을 들어줄 때까지 청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믿음이기는 하지만 오늘 복음은 그런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은 '심판'에 관한 내용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 바로 앞에는 노아의 홍수와 소돔의 멸망과 같은 심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무언가를 얻을 때까지 꾸준히 청하면 믿음이 있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나의 심판을 심판관에게 맡겨야만 믿음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입니다.
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서 이미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 심판해 놓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의미 없는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세리는 자기 심판을 주님께 맡깁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으로 심판받는 사람은 세리가 되는 것입니다.
<개는 훌륭하다>에서 강형욱 조련사가 역대급 분노를 표출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 반려견끼리 싸우는데 보고만 있는 보호자가 있었기때문입니다.
보호자는 개들끼리 싸워서 서열을 정리하기를 바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개들끼리 서로 판사가 되라는 의미이고 이는 자기가 판사의 권위를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개가 주인 앞에서 서로 싸우면 주인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심판하면 하느님을 심판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심판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음을 증명합니다.
다시 말해 이웃을 판단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심판관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이웃을 심판하는 사람이 될 때 종말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끝맺으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루카 18,8)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제발 저를 위한 기도를 중단하지 마십시오. 저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와 관련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가르침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코로나19 바이러스 여파로 힘겹게 지내고 있는 우리를 향해 다른 무엇에 앞서 기도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이 어려운 시대 우리는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란 핑계 대지 않고 나를 정당화하지도 않으며, 가식 없이 하느님께서 나의 내면을 바라보시도록 내어놓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알게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 느낄 수 있는 확연한 분위기 하나가 있습니다.
교황님은 기도의 힘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수시로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제발 저를 위한 기도를 중단하지 마십시오.
저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교황님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교황님의 기도에 대한 우선권은 놀랄 정도랍니다.
교황님은 잠이 별로 없는 편이라십니다.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 주무시지 않는답니다.
매일 새벽 하루의 첫 시간은 당연히 성체조배와 묵상입니다.
교황님의 하루 일상을 주도하는 기도는 성무일도입니다.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바치십니다.
그 가운데 묵주기도를 바치시는데, 교황님께서 개인적으로 매듭을 푸는 성모님에 대한 깊은 신심을 지니고 계십니다.
교황님은 기도가 일상이요 일상이 기도인 분이라고 주변 사람들이 증언합니다.
교황님의 성향상 자신의 충실한 기도 생활을 드러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사는 사람들의 눈은 속일 수가 없겠죠.
교황님은 하루 온 종일을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 안에 머물려고 노력하십니다.
무엇보다도 교황님께서는 침묵이 사라져가는 이 세상에 침묵의 중요성, 침묵의 가치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여러분들도 침묵을 사랑하십시오.
반드시 침묵을 찾도록 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사목 활동 중에도 침묵하는 기회를 꼭 가지십시오.”
교리교사들과의 만남 때 교황님께서는 성체조배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리교사 여러분들,
성체조배를 하기 위해 감실 앞에 앉을 때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저는 침묵도 하지만, 주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도 드립니다.
이런저런 생각도 하고, 주님과 대화도 나눕니다.
그리고 묵상하고 느끼면서 그렇게 주님 앞에 머뭅니다.
성체조배 때 주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시도록 여러분 자신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여러분이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나 그분이 여러분을 바라보시는 것이나 모두 같은 일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주님과의 우정이 불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분이 정말로 여러분을 바라보고 계시며 여러분 가까이 계시고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교황님께서는 사람들을 기도로 초대하신 후, 그걸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기도는 이웃 사랑의 실천, 특별히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사심없는 봉사라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 그 심장은 언제나 수축과 이완 운동을 계속해야 합니다.
여기서 수축은 예수님과의 일치를, 이완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의미합니다.
필요한 것은 이 두 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일치하고 다른 사람과 만나기 위해 나가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움직임 가운데 어느 한쪽이 부족하면 심장이 멈추어 더 이상 살 수 없습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영적승리의 삶 - 기도하십시오, 공부하십시오, 싸우십시오>
아빌라의 데레사의 기도를 바탕으로 만든 <아무것도 너를> 이라는 성가는 언제 들어도 감동입니다.
참으로 수도자는 물론 많은 신자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성가입니다.
언젠가 수녀원 피정지도를 마칠 때, 수녀님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불러줬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새삼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함이 영적승리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엊그제 피정지도시 강의 끝무렵에 드린 결론 말씀이 생각납니다.
피정 오신 스무명 남짓자매들 대부분이 일년사계로 헤아려 보니 거의 모두가 가을 인생에 해당된다 싶어 '희망의 여정' 강의 결론으로 드린 말씀입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요, 기도의 계절이요, 수확의 계절입니다.
여러분 대부분이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하면 오후 3-4시, 일년사계로 하면 가을철에 해당됩니다.
사실 주로 피정 많이 오는 연령대가 가을 인생입니다.
여러분의 가을 삶의 열매는 잘 익어가고 있는지요?
참으로 많이 기도하고, 많이 공부해야 하는 가을철에 가을인생입니다.”
요즘 피정 때마다 '희망의 여정' 강의 시 맨먼저 <바다>라는 동요를 부를 때, 금방 흥겹게 부르는 자매들의 모습에서 가을 인생들임을 실감합니다.
30-40대 자매들은 전혀 모르는 노래이니 세대 차를 실감합니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희망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입니다.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망은 영혼의 죽음입니다.
궁극의 희망은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궁극의 희망이자 삶의 중심인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오늘은 영적승리의 삶에 대한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기도하십시오.
오늘 복음이 가르쳐 주는 진리입니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끝까지, 집요하게, 물러서지 않고 졸라대는 것입니다.
마침내 과부의 끝없는 간청에 항복하는 불의한 재판관의 고백입니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불의한 재판관이 이럴진대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느님이야말로 얼마나 잘 들어주시겠는지요.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큰 힘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비에 절대로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와 믿음은,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는 간절해야 합니다.
결코 포기해선 안됩니다.
기도는 절박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기도는 한결같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살기 위해서 기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철석같이 신뢰하고 사랑하기에 이런 기도가 가능합니다.
기도는 감정도 마음도 기분도 아닙니다.
항구한 의식적, 의지적 분투의 노력이요 훈련입니다.
죽는 순간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기도의 끈, 희망의 끈, 하느님 끈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놓는 순간 무너집니다. 죽습니다.
주님을 꼭 붙잡고 있으면, 주님 친히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당신 품에 안아 주십니다.
다음 복음 말미 예수님 말씀은 다시 우리 기도와 믿음을 성찰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도 증발되어 사라집니다.
믿음의 뿌리인 기도가 한결같고 간절하고 항구해야 튼튼한 믿음의 나무입니다.
저절로 자라는 믿음의 나무가 아니라 기도의 거름이 끊임없이 제공되어야 튼튼하게 성장하는 믿음의 나무입니다.
정말 늘 기도한다 해도 늘 부족한 것이 기도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공부하십시오.
세상 지식이나 정보를 얻기 위한 세상 공부가 아니라, 하느님 공부, 성경 공부, 말씀공부, 참나의 공부입니다.
지식보다는 지혜를 주는 공부입니다.
깨달음을 주는 공부요, 마음을 새롭게 하고, 깨끗하게 하고, 궁극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공부입니다.
우리 영혼에 빛과 생명을 주는 공부, 하느님 공부요 구체적으로 성경 공부, 말씀 공부입니다.
하느님 공부와 참나의 공부는 함께 갑니다.
하느님 공부를 통해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께 가까워질수록 단순하고 순수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지혜롭고 자비로운 참나의 실현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성경공부의 필요성을 역설하십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이어지는 사도의 말씀은 사목자들에게 주로 해당됩니다만 믿는 모든이들에게도 말씀공부와 실천에 대한 각오를 새로이 하게 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기도도 살아 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해야 되듯이 공부도, 하느님 공부, 말씀 공부, 참나의 공부도 그러합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공부해야 비로소 사람이, 성인이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공부하지 않으면 육적 욕망만 남는 짐승이, 괴물이, 폐인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셋째, 싸우십시오.
삶은 전쟁입니다.
영적전쟁입니다.
결국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평생 영적전쟁입니다.
보십시오.
평범한 일상이 영적전쟁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싸움이 삶은 영적전쟁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마찬가지 복음의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 역시 삶은 영적전쟁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평생 공부해야 하는 주님의 평생 학인이듯이, 평생 싸워야 하는 주님의 평생 전사인 우리들의 신원입니다.
오늘 탈출기의 모세는 주님의 전사, 기도의 전사임을 봅니다.
혼자서의 고군분투의 싸움이 아니라 전우들과 함께 일심동체가 된 전투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영적전쟁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사는 기도의 전사임을 깨닫습니다.
모세가 불세출의 주님의 전사이지만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물론 아론과 후르 역시 훌륭한 주님의 전사요, 모세의 전우들입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우세하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우세합니다.
막상막하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쟁입니다.
모세와 아론 후르, 여호수아의 일심동체의 전우애가 감동적입니다.
다음 숭고한 전우애의 그림같은 장면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영적전쟁에, 전우애에 마음이 하나된 공동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모세의 손이 무거워지자 모세를 돌판에 앉힌 다음, 아론과 후론이 양쪽에서 모세의 두 손을 받쳐주니, 그의 손은 해가 질 때까지 처지지 않았고.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그의 백성을 칼로 무찌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진인사대천명입니다.
주님의 전사, 기도의 전사인 모세. 여호수아, 아론, 후르의 넷이 일심동체가 되어 힘껏 싸우니 하느님도 감동하여 도와 주시어 이스라엘의 승리입니다.
영적전우들의 영적 전우애가 참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하느님께서 개입하시니 결국 영적승리는 이들의 승리이자 궁극엔 하느님의 승리임을 깨닫습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영적전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입니다.
영적승리의 삶을 바라십니까?
참으로 고귀한 성인이 되시길 바라십니까?
방법은 셋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1. 기도하십시오.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로 평생, “주님의 신비가”가로 사십시오.
사랑의 신비가로!
2. 공부하십시오.
하느님 공부, 예수님 공부, 성경 공부, 말씀 공부, 참나의 공부로 평생, “주님의 학인”으로 사십시오.
사랑의 학인으로!
3. 싸우십시오.
죽어야 끝나는 영적 싸움입니다.
이기적인 나와의 싸움, 세상 악마들과의 싸움에 평생, “주님의 전사”로 사십시오.
사랑의 전사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았습니다.
변호사는 강도상해죄로 기소된 탈북민을 변호하게 되었습니다.
변호하는 과정에서 피고인의 형량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피해자의 상처는 피고인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남편이 폭행한 것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피해자의 상해에 대한 진단서를 발급한 의사가 탈북민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밝혀냈습니다.
피고인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다는 것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방법을 찾아서 피고인의 형량을 감량시키려 했지만 배심원들은 피고인의 유죄를 인정하였고, 징역 4년을 만장일치로 선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재판관은 피고인에게 징역 1년 6개월과 집행 유예 3년 4개월을 선고하였습니다.
판결 이유는 탈북민이기에 대한민국의 법을 잘 모르고, 처음 범죄행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피고인이 5년간 숨어 있다가 스스로 경찰서로 찾아와서 자수하였다는 것입니다.
형량의 감량에 가장 크게 영향을 주는 것은 ‘자수’였습니다.
변호사들은 형량 감량의 이유를 외부에서 찾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피고인 본인의 자수에 있었습니다.
저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면서 언젠가 하느님 앞에 서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실까요?
제가 사제로 살았던 저의 성과와 업적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했던 봉사활동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양파 한 뿌리>라는 소설에서 아주 작은 선행만으로도 하느님께로 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평생 인색하게 살았던 할머니가 지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수호천사는 할머니가 젊은 과부에게 양파 한 뿌리를 주었던 것을 찾아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할머니에게 양파 한 뿌리를 주었고, 할머니는 양파의 뿌리를 잡고서 하느님 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지옥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할머니의 다리를 잡고 같이 가려고 하였습니다.
양파의 뿌리가 끊어질 것 같아서 할머니는 다리를 잡고 있던 사람을 걷어찼습니다.
그러자 그만 양파 뿌리가 끊어졌고 할머니는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능력과 업적 그리고 선행과 봉사만으로는 하느님께 가는 것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잘못도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우리는 하느님 품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요?
드라마에서 피고인이 자수했던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십니다.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하였던 다윗의 죄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고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 사도에게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성한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 때문에 더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비유입니다.
우리가 욕심이 가득하고, 자신 밖에 모르지만 자녀들의 청을 기꺼이 들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언제든지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자캐오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빚진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와 그 가족들이 구원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있으면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믿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고,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십니다.
물을 마시면 갈증이 풀린다는 것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관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생활이고, 실천입니다.
모세는 손을 들어 기도하였고,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예전에 ‘자수하여 광명 찾자.’라는 표어가 있었습니다.
어둠 속 그늘에 살기보다는 자수하여 희망의 빛 속에서 살라는 표어였습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받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한한 힘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힘을 가지고만 있을 뿐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어렸을 때 성당 신부님의 강론을 통해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더 큰 일을 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우리가 자주 하는 이 말을 멈춰야 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여기서 더 하는 것은 욕심이야.’, ‘남들 정도만 하면 되지.’ 등의 말은 우리가 할 일을 더 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돈을 많이 벌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또 높은 지위에 오르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중요한 것은 많이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이 될 수도 있지만, 봉사, 희생, 사랑도 그렇습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 할 수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은 계속해야 합니다.
쉽게 포기하고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그 모든 것을 하지 않고 소홀히 한다면, 분명히 직무 유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일을 더 우선시하면서 우리는 이 직무 유기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하느님에 관해 관심도 없고 인정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이 자기만 생각하는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 재판관에게 올바른 판결을 요구하는 보잘것없는 과부는 재산관리에 있어서 억울한 상황에 있습니다.
물론 고약한 재판관이 일 처리를 피합니다.
이 과부가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 또 재판관이 왜 자기 임무를 유기했는지, 그 과부를 억울하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이러한 것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약한 재판관도 끊임없이 성가시게 졸라대는 바람에 그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가시게 구는 과부의 요청은 난관을 극복하는 신앙생활의 집요한 노력으로 상징합니다.
기도는 늘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께 의지하고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끈질긴 요청에 굴복한다면 진실되고 의로우신 하느님이 신자들의 기도를 안 들어 주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말하는 기도는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나중으로 미뤄서도 안 됩니다.
이렇게 포기하고 미루다가는 하느님으로부터 은총과 사랑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일 역시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