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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15일 토요일 성모 승천 대축일
제1독서 : 묵시 11,19ㄱ; 12,1-6ㄱㄷ.10ㄱㄴㄷ
제2독서 : 1코린 15,20-27ㄱ
복 음 : 루카 1,39-56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영적 승리와 축복의 원천
-찬미, 겸손, 우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요즘은 뉴스 보기가 두렵습니다.
대부분 국민들이 어두운 분위기에서 힘겹게 지내고 있습니다.
전례 없던 코로나19 펜데믹 감염병과 홍수피해로
참으로 심신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스크를 쓰는 것이 일상화되었으니 노래도 못하고 운동도 못하니 보통 재앙이 아닙니다.
이런 와중에 맞이하는 성모승천 대축일이 참 고맙습니다.
희망과 기쁨의 태양이 세상의 어둠을 환히 밝히는 느낌입니다.
우리 믿는 모두의 영원한 삶의 모범인 성모 마리아입니다.
말 그대로 성모님의 영적 승리의 삶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구약의 에녹, 모세, 엘리야에 이어 신약의 예수님에 이은 성모님의 승천입니다.
믿는 이들의 영적 승리의 삶을 상징하는 성모님의 승천입니다.
바로 우리의 미래에 대한 희망의 표지가 성모님의 승천이요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 모두 승천의 삶을, 영적 승리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분발케 합니다.
영적 승리의 삶은 그대로 하느님의 승리를 뜻합니다.
성모승천 대축일 새벽 성무일도시 초대송 후렴과 찬미가로 하루를 시작한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참 아름다운 전례가 우리 영혼에 활력을 줍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모친 마리아 하늘에 오르셨으니 어서와 우리 주께 조배 드리세”-초대송 후렴
-“태양의 빛 입으신 동정녀시여 열두 별 머리위에 꾸미신이여
저 달을 발판삼아 우뚝 서시니 환하게 빛 나도다 당신의 광휘
죽음과 지옥권세 쳐부순 이여 우리를 마음 여겨 보살피시니
주님의 곁에 앉은 당신 우러러 모두가 여왕으로 찬양 드리네”-
바로 제1독서 묵시록을 근거한, 성모님의 영적 승리의 삶을 경축하는 찬미가입니다.
2절까지만 소개했지만 5절까지 내용이 참 깊고 풍부합니다.
방금 미사 중 흥겹게 부른, “왕후가 당신 우편에 서 있나이다.” 화답송 후렴도
우리를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채우는 느낌입니다.
이번 8월16일자 카톨릭 평화신문은 온통 지난 8월2일 선종한 후
8월8일 죽림동 주교좌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봉헌한
제6대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님 기사로 가득했습니다.
그대로 영적 승리의 삶을 신자들에게 선물로 남기고 떠나신 향기로운 주교님입니다.
마지막 유언인 시편과 남기신 말씀도 아름답고 감동스럽습니다.
-“나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내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를
구원의 잔 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네.”-(시편116,12-13)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반세기 이상을 부당한 사제로 살도록 허락하신
과분한 은총을 입은 주님의 종, 죄인 장익 십자가의 요한
저는 그저 더없이 고맙고 송구한 마음뿐입니다.”-
아, 어떻게 성모님처럼, 장익 주교님처럼 영적 승리의 삶으로 인생을 마감할 수 있을런지요.
어떻게 하면 희망과 기쁨으로 빛나는 영적 승천의 삶을 살 수 있을런지요.
첫째, 찬미입니다.
참으로 살아있는 삶은 찬미의 삶입니다. 찬미의 삶이 영적 승리의 삶의 기초입니다.
삶과 죽음의 차이는 무엇이겠는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요즘 골똘히 묵상하는 주제입니다. 먹고 자고 일하고 숨 쉰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존재감 없는 삶도 많습니다.
바로 하느님 찬미가 진짜 살아있음에 대한 생생한 증거입니다.
사랑의 찬미가 삶의 의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하느님 찬미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찬미의 승리,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입니다. 하느님 찬미의 맛으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우리의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내는 찬미의 빛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는 성모님의 영적 승리의 삶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찬미가입니다.
2천년 동안 가톨릭교회가 저녁 성무일도 때 마다
성모님과 함께 영적 승리의 삶을 간원하며 부른 찬미가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나이다.”로 시작하여,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로 끝나는
마니피캇 찬미가는 말 그대로 찬미의 절정입니다.
샘솟는 희망과 기쁨으로 영적 승리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는 찬미의 은총입니다.
둘째, 겸손입니다.
바로 겸손이 영적 승리의 삶의 빛나는 표지입니다.
온유와 겸손으로 요약되는 예수 성심이 바로 영적 승리의 삶을 입증합니다.
죽어서가 아닌 이미 살아서 영적 승리의 삶을 살게 하는 겸손입니다.
회개의 열매가 겸손입니다. 끈임 없는 회개와 함께 깊어가는 겸손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이 겸손과 더불어 영적 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다음 행복기도 내용 그대로입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삶 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온유와 겸손,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성모님에게 겸손의 절정은 태중의 예수님과 함께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입니다.
겸손 자체가 이미 축복입니다.
성모님의 겸손한 방문에 감격한 엘리사벳이요 성모님의 겸손을 통해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엘리사벳입니다.
셋째, 우정입니다.
홀로의 여정이 아니라 홀로와 더불어의 여정중의 영적 승리의 삶입니다.
영적 승리의 삶에 결정적인 요소가 도반과의 영적 우정입니다.
성모님께서 수태예고 후 즉시 찾은 것이 영적 도반 엘리사벳이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만난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성모님을 격려합니다.
성모님의 내면의 어둠을 환히 밝힌 엘리사벳의 고백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평생 영적 승리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영원히 잊지 못할 엘리사벳 도반의 위로와 격려였을 것입니다.
도대체 영적 도반 엘리사벳이 없었다면 어디서 이런 은혜로운 축복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런지요.
참으로 두 분 어머니의 우정이 얼마나 아름답고 깊은지 깨닫게 됩니다.
두 분의 영적 우정에 필히 전제되는 바, 영원한 평생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정입니다.
참으로 두 분이 주님과 우정이 깊은 주님의 종, 성령의 사람이었기에
이런 서로간의 우정도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서로간의 우정의 성장과 성숙과 함께 가는 것이 영원한 도반 주님과의 우정임을 깨닫습니다.
영적승리의 삶에 결정적 요소가 수직적 차원의 주님과의 우정,
수평적 차원의 인간 도반과의 우정입니다.
부전자전이란 말도 있지만 영적 삶에서 모전자전이 더 어울립니다.
성모 마리아 어머니에 예수님이요, 엘리사벳 어머니에 세례자 요한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성모 승천 대축일, 꼭 우리 어머니들 축일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알게 모르게 영적 승리의 삶을 사셨던 어머니들이 있기에 오늘의 우리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영적 승리의 삶의 빛나는 표지는 성모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제2독서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적 승리의 삶에게 큰 격려와 힘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됩니다.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찬미와 겸손, 우정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함으로 영적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농장을 운영하던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농장은 점점 커졌고, 이제 더는 혼자 운영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지요.
그래서 관리인을 공개 모집했지만, 워낙 일이 많은 농장 일이기에
관리인을 해보겠다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 뒤에 드디어 한 명의 지원자가 나타났습니다.
농장 주인이 그에게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를 묻자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태풍이 몰아치든, 눈보라가 몰아치든 아주 편안하게 잠을 잘 잡니다.”
이게 무슨 장점인가 싶었지만, 다른 지원자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 사람을 채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이 사람은 아주 성실했고, 이 모습에 농장 주인은 만족스러웠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이 농장에 커다란 폭풍이 덮쳤습니다.
폭우와 거센 바람에 놀란 농장 주인은 서둘러 농장에 가서 관리인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관리인은 너무 편안하게 자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너무 화가 나서 흔들어 깨웠지만, 관리인은 잠에 취해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이 농장 주인 혼자서 걱정되는 축사와 밭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축사 지붕은 단단하게 묶여 있었고, 밭 주변은 배수로를 넓게 파서
태풍으로부터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면접 당시에 태풍, 눈보라에도 편안하게 잠을 잘 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만큼 철저하게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걱정과 불안으로 힘들어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철저한 준비가 아닐까요?
준비 없이 걱정과 불안으로 지금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는 지상 생애를 마치신 다음 하늘로 불려 올라가신 성모님의 승천을 기념합니다.
성모님께서 이런 영광을 얻으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단순히 하느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이것도 이유가 되기는 하겠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하느님과 함께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도, 예수님을 낳았을 때도, 에집트로 피난 갔을 때도,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렸을 때도, 사랑하는 아들의 수난과 죽음을 목격할 때도…….
그의 기준은 늘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이것만큼 이 세상을 잘 사는 길이 있을까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가장 크고 철저한 준비였습니다.
우리 역시 바라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성모님의 모범을 본받아 철저히 하느님과 함께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
류해욱 요셉 신부
성모 승천 대축일은 4대 축일이며, 의무 축일이기도 합니다.
요즈음 장마다 코로나 19로 매우 힘듭니다. 모두 이 위기를 잘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성모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분명 성모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아, 오늘을 참되게 기리기 위해 성모님이 누구이신 지를
다시 한 번 새롭게 인식하며 우리의 신앙의 길에서 선도자이시며 모범이시며 어머니이신
그분의 전구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마리아가 지니고 있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의미는
그분이 바로 우리 신앙의 선도자이시며 모범이시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늘 그리스도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을 믿으며
신앙의 순례의 길을 계속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신앙의 순례의 길에서 이 길을 앞서 가신 어머니 마리아를 믿음과 사랑으로 바라보면서
격려와 힘을 얻는 것입니다.
성모님 축일 중에 오늘을 제외하고 가장 큰 축일, 의무 축일이 뭐가 있지요?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지요.
이름이 바뀌었는데, 전에는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었어요.
교회는 어머니 마리아가 우리의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천명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의 고백에서 나오는 교리이지요.
천사의 전갈을 받고 하느님의 위대한 뜻과 계획을 알게 된 마리아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믿음을 지니고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겨 드림으로서
‘주님의 어머니’시며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 맡김, ‘피앗’ (이루어지이다)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이루시려는 신비,
곧 강생의 신비가 이루어지는데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고백했을 때
하느님이 인간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시는 강생의 신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물론 마리아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지녔던 분이 아니라 믿음을 더 깊여나가기 위해 겪어야 하는
어떤 과정을 거친 우리와 똑같은 인간입니다.
마리아는 인간으로서 “이 몸은 처녀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라는 논리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에 대해 가브리엘 천사는 엘리자벳의 예를 들어가며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설명을 해줍니다.
성서에서 만나는 성모님은 진정 용기 있고 결단력 있는 분,
생명 바쳐 주님의 구원사업에 협력하는 분, 다른 아무도 하지 못할 일을 해낼 수 있는 분이었고
시대의 사고의 틀을 뛰어넘어 하느님의 비전을 볼 수 있는 열려있는 분이었습니다.
주님이신 아기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하고
마리아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하는 그 말은 사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그분의 말씀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되다.’는 의미는 단순히 기쁨과 평화 안에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의인 시므온은 구세주를 자기의 눈으로 뵈옵는 기쁨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마리아가 겪어야 하는 신앙의 시련을 예고해 줍니다.
즉, ‘많은 사람들의 반대 받는 표적’이 될 것이라고 들려주는 그 말은
마리아께서 겪으셔야 하는 고통을 앞서서 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마리아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우리 모두의 신앙인으로서 길에 대한 예고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신앙의 여정을 걷는 것은 분명 기쁨이지만 거기 따르는 고통도 있기 마련입니다.
마리아께서 당신이 다 헤아릴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을 단지 하느님에 대한 신뢰 안에서 받아들이면서
매일의 삶을 믿음 안에서 사셨던 것이고 때로는 불빛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길,
곧 신앙의 여정을 묵묵히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십자가가 죽음으로 끝장이 난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문이 되었던 것처럼
마리아가 겪어야 했던 그 신앙의 여정은
아드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으로 완성되게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지내는 축제 바로 성모 마리아의 승천인 것입니다.
마리아께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믿음은 오랫동안 교회의 역사 안에서 두루 퍼져 있었습니다.
전례적으로 가장 오래된 마리아 축일은 순교자들의 천상 탄일과 상응한 마리아의 기념일이었습니다.
이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이자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이
이승의 삶을 하직하고 천상에 드셨음을 경축하는 축일이었습니다.
후에 이 축제는 예수 성탄 축일 전례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마리아의 육신이 하늘로 옮겨졌다는 가르침이
하나의 교의로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었지만 그 믿음이 계속해서 교회 안에 전해져 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비교적 최근세인 1950년 8월 15일 교황 비오 12세께서
‘지상의 생애가 끝나자 죄에 물들지 않은 하느님의 어머니요 항상 처녀인 마리아는
영혼이 육신과 함께 천상 영광 속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성모 승천을 하나의 믿을 교리로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밀레도스에서 마지막 고별연설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하느님과 그의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성모님께서 승천하시기 위해 지상을 떠나시면서 교우들,
함께 머물던 에페소의 교우들에게 마지막으로 어떤 말씀을 들려주셨을까요?
자기가 돌보던 공동체를 떠나면서 바오로는 자기가 뽑은 공동체 원로들이
어떻게 공동체를 꾸려 나갈 지에 대해 염려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인간적인 연민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하느님께 맡겼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손안에 달려 있고 궁극적으로 그분이 선으로 이끄시는 분이심을 알았기에
하느님에 대한 신뢰로 공동체를 떠났던 것입니다.
성모님도 아마 비슷한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당신이 사신 삶이 온전한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삶이었기에
굳이 말씀이 필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별은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승천은 기쁨이고 영광인 동시에 공동체 사람들과는 이별인 것입니다.
이렇듯 삶은 늘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 승천 대축일을 지내며 신앙인의 길을 묵묵히 걸으심으로서
천상 영광에 들었던 어머니 마리아를 생각하며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신앙의 여정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어머니의 도우심을 청하며 용기를 지니고 걸어 나갑시다.
추신으로 하나만 더 보태면, 묵주 기도입니다.
교회는 성모님에 대한 여러 가지 좋은 신심 행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묵주기도입니다.
묵주기도는 성서적 묵상이며 복음에 충실에 복음 기도입니다.
묵주기도가 어떻게 교회 안에 들어와서 자리 잡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성 도미니코가 프랑스의 어느 숲속에서 3 일 동안 계속 기도를 드리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모님께서 성 도미니코에게 발현하셨고,
그에게 묵주를 주시면서 이것을 잘 이용하면
이단을 물리치고 진리의 교회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래서 성 도미니코가 이것을 실천했답니다.
그런데 정말 이 묵주기도를 통해 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교회가 이단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답니다.
그때부터 묵주기도가 교회 안에서 아주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성 도미니코를 통해 세우진 도미니코 수도회를 통해
묵주기도는 점점 세상 안에 널리 전파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알고 있는 보편적인 묵주기도에 대한 유래입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성모승천 대축일임과 동시에 우리 민족의 기쁨인 광복절이기도 합니다.
1950년 11월 1일, 한국에서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고 있을 때,
교회는 “성모님의 승천” 교리를 선포함으로써, 인간의 미래가 하느님 안에 있음을 천명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성모송>에 언급되고 있듯이, “은총이 가득 하신 분”, 곧 참으로 복되신 분이셨습니다.
‘은총이 가득하다는 것’은 축복의 풍요로움과 구원의 완성을 말해줍니다.
사실, 마리아는 구세주를 낳아 인류를 구원하는 계기를 마련하셨으며,
그러기에 하느님의 가장 완전한 구원의 도구가 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단순히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라는 혈연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이 칭송하고 있듯이,
“하느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신앙의 여인이었기에 행복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성모님은 우리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와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구원을 노래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혁명의 노래입니다.
곧 성모님 승천은 보잘 것 없는 한 여인이
인류 최고의 영예를 얻을 수 있다는 혁명적인 가르침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승천과 함께 우리 민족에게 베풀어진 기쁨인 광복을 기념합니다.
이 광복이 바로 우리에게 베풀어진 성모님을 통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마치 제1차 세계대전이 파티마 성모님의 전구로 종결되었듯이,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동란 역시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승천대축일에 종결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우리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와 축복을 찬미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날은 해방의 기쁜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북이 분단된 불행한 날이기도 합니다.
사실, 올해(2020년)는 해방 76주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분단 76주년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여전히 편협하고 경직된 사고로, 아직도 형제적 화해와 평화를 이루지 못한 채,
많은 이들이 동포요 형제를 적으로 여기고 대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교회는 광복 50주년인 1995년 성림강림대축일에 <한국천주교 사목지침서>를 통해,
북한선교의 진정한 뜻이
“분단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형제적 나눔을 실현하면서 민족의 평화통일을 대비”(제 200조)
하는데 있음을 밝히고,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한국을 방문하여 첫 날 청와대에서 공직자들에게
지난 70년이란 세월을 두고 높이 쌓아온 대결의 장벽을 허무는 작업부터 시작하자고 하셨고,
마지막 날 명동성당 미사에서
“남북으로 대결하고 있는 한민족의 화해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평화를 원하고, 연대와 협력과 대화의 시대를 열어가야 할 때입니다.
상대방을 굴복시키려 하거나 내 편으로 변화시키려하기 보다,
상대방의 고통과 어려움에 공감하고 연민으로 다가가야 할 때입니다.
대화에는 상대방의 처지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그동안의 유리한 위치 점령을 위한 ‘기 싸움’과 ‘힘겨루기’를 내려놓아야 하고,
서로의 대립과 긴장의 이기적인 ‘줄다리기’를 멈추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에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
특별히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루카 1,54)
주님!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찬미합니다.
제 안에 베푸신 측량할 수 없이 큰,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당신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여 찬미하는 일이 제 삶의 전부가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자비의 노래 외엔 아무 것도 아니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끌림과 떨림’은 비슷한 면도 있고, 다른 면이 있습니다.
처음 본 사람인데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처럼 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격이나 취미가 비슷하면 더 끌리기도 합니다.
음식도 그렇습니다. 맛이 있는 음식도 있지만 입맛에 끌리는 음식도 있습니다.
술도 비싼 술이 좋지만 입맛에 끌리는 술이 있습니다. 저는 해산물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예수님께 마음이 끌린 사람이 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쳤던 소경, 깨끗해지기를 바랐던 나병환자,
부하의 병을 고쳐달라고 찾아왔던 백인대장, 딸의 병을 위해 찾아왔던 여인,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했던 자캐오, 예수님께 시중들던 마르타,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던 마리아가 있습니다.
세상의 욕망과 권력에 끌리기보다는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끌리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청혼하는 연인은 마음이 떨릴 것입니다.
서품식에서 바닥에 엎드려 성인호칭기도를 듣는 서품자의 마음도 떨릴 것입니다.
둥지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하늘을 나는 새도 떨릴 것 같습니다.
드디어 새집을 마련해서 입주하는 아내의 마음도 떨릴 것입니다.
처음 무대에서 노래하는 가수의 마음도 떨릴 것입니다.
저도 첫미사를 봉헌할 때 무척 떨렸습니다.
무서워서 떨리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벅차서 떨리는 것입니다.
하혈이 멈추었던 여인의 마음도 떨렸을 것 같습니다.
들것을 들고 걸을 수 있었던 중풍병자도 떨렸을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던 막달라 마리아도 떨렸을 것 같습니다.
다락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도 떨렸을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도 떨렸다고 합니다.
익숙함으로 소중함을 잊어버리기보다는
처음 성체를 모셨던 그 설렘과 순수함으로 신앙을 간직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성모승천 대축일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모님께서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느님께로 가셨다고 믿었습니다.
교리적으로는 성모님께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셨기 때문에
원죄의 결과인 죽음을 맞이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신학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인간이면서 하느님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성모님은 이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성모님께 대한 이 모든 찬사와 공경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우리는 그것을 천사 가브리엘과 성모님의 대화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께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이끄심이며 하느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면서
성모님께 대한 찬사와 공경은 시작된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들 모두 언젠가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의 표징입니다.
누군가 이야기 했습니다.
영원한 것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영원한 것은 채워짐이라고 했습니다.
희망이 채워지고, 사랑이 채워지고, 믿음이 채워지는 것이 바로 영원함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서 우리 모두는 사랑으로 채워 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 신앙인이 가야할 미래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충실한 응답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삶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자신보다는 이웃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다면
이 세상에 더 많은 평화가 이룩될 것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와 어려움들이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지혜롭게 극복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루카 1, 5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어머니의 이름을
다시 불러봅니다.
어머니의 사랑에서
진실로
아름다운 사람의 삶을 만납니다.
하늘을 닮은 사랑입니다.
하늘과 땅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을 낳으셨고
예수님과 함께
끝까지 낮아지신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에서
산다는 것이
견디며 또 견디는
기도임을 배웁니다.
아픔이 아픔을 일으켜 세우고
비천함이 비천함을 달래어줍니다.
간절한 사랑이
하늘과 땅을 이어줍니다.
애달픈 사랑이
애타는 십자가의
절절한 봉헌이 됩니다.
올바른 사랑만이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가게 합니다.
참된 사랑은
모든 벽을 허물고
하늘로 오릅니다.
하늘을 품은 사람에겐
모든 것이 기적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
그 길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 길이 삶의 승천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모든 여정
모든 삶이
하늘로 오르십니다.
지극한 사랑이
지극한 승천의
기쁨이며 승리임을 믿습니다.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 아는 방법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성모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날을 기념합니다.
예수님이야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다시 아버지께 승천하시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모 마리아는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이십니다.
그런데도 당신 아드님처럼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사실은,
우리 또한 성모님처럼 하늘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줍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그 순간에만 하늘로 오르셨던 것일까요?
성모님은 살아계셨을 때부터 하늘로 향하고 계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하늘로 향하지 않으면 마지막에도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하늘이라는 말은 땅이라는 말이 떠오르게 합니다.
우리는 모두 지금 하늘로 향하든, 땅으로 향하든 그 길을 열심히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죽음과 함께 그 방향의 끝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하늘로 걷고 있는지, 땅으로 걷고 있는지 반드시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려면 내가 어떠한 추진력을 사용하는지 알면 됩니다.
모든 발사체는 뒤로 뿜는 추진력이 있습니다.
내게서 뿜어 나오는 추진력이 나의 속도와 방향을 알 수 있게 합니다.
만약 나를 통해 물이 끊임없이 흘러나가고 있다면 나는 분명히 물의 원천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노를 저으며 물줄기를 거슬러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올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 홍주연 작가의 『더 해빙』입니다.
홍주연 작가는 사업 실패로 돈에 대한 트라우마가 심했던 아버지 밑에서 컸습니다.
아버지는 자린고비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굴비였습니다.
아버지가 췌장암에 걸렸다고 하여 홍주연 작가가
마지막에 굴비라도 실컷 드시고 가시라고 10마리 보내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것도 아껴 드시다 5마리를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병원도 굳이 6인실을 선택하여 죽을 때까지 돈을 아끼셨습니다.
그러나 홍주연 작가는 ‘그렇게 돈을 아끼면서도 왜 아버지는 평생 가난하셨을까?’를 궁금해하였습니다.
물론 자신도 돈을 쓰는 것에서 항상 불안하고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어렸을 때부터 비범하였고,
지금은 전 세계 재벌들의 컨설팅을 해 주고 있는 이서윤 선생을 만납니다.
그녀는 수십만 명의 부자들을 연구하여 ‘해빙’(Having)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인물입니다.
그녀는 홍주연 작가에게 돈을 많이 벌고 싶다면 기쁘게 쓰라고 말해줍니다.
돈을 낭비하라는 말이 아니라, 돈을 쓰면서 기쁜 마음이 들 때만 쓰라는 것입니다.
꼭 필요했던 것, 혹은 누군가를 도와줄 때는 돈을 쓸 때 마음이 기쁩니다.
그렇게 무언가를 기쁘게 내어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원천으로 향하게 됩니다.
원천으로 향할수록 더 많이 받게 됩니다. 원천은 그것이 솟아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돈도 물처럼 흐름이 있는데 기쁘게 흐르는 그 흐름에 자신을 맡길 때 부족함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무언가를 기쁘게 내어줄 때,
그것이 무엇이든 그 기쁘게 내어주는 것의 원천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내가 용서를 기쁘게 하고 있다면 자비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향하고 있는 것이고,
내가 말씀을 전하고 있다면 진리이신 주님께 향하고 있는 것이고,
내가 사랑하고 있다면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누군가를 쉽게 미워하거나 질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미움의 원천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빨리 회개하지 않으면 되돌아올 수 없는 만큼 가버리고 맙니다.
구약에 하늘로 승천한 사람이 두 명 나옵니다. 에녹과 엘리야입니다.
에녹이 하늘로 승천한 이유는 ‘하느님과 함께 걸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걷는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의 존재가 나와 함께 있다면 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뜻이 계속 나를 괴롭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함께 있다면 하느님의 뜻이 나를 괴롭힐 것이고,
그 뜻을 받아들여 실행한다면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늘에서 온 가브리엘 천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모 마리아는 신약의 에녹이셨던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자 하느님의 아드님을 세상에 내어주셨으니
그 추진력으로 말씀의 고향으로 향하신 것입니다.
그다음에 엘리야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늘로 오르며 자신의 제자 엘리사에게 자신의 망토를 떨어뜨렸습니다.
엘리사가 그 망토로 강을 치니 강이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이는 마치 홍해를 가를 때 모세가 들었던 지팡이와 같은 힘을 지닌 것입니다.
바로 ‘성령’이고 ‘은총’을 상징합니다.
누군가에게 은총을 주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은총의 원천으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눈치 채십니다.
포도주는 은총입니다. 교회에 은총이 부족한 것을 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총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갑니다. 그리고 그 은총을 내려주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렇게 성모님은 교회에 은총을 중개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 가셨습니다.
하늘로 오르는 방법은 지금부터라도 하늘에게서 오는 것을
기쁘게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말씀과 은총의 중개자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쫓겨났던 에덴동산에
어떻게 다시 오르는지 보여주신 최초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오르시도다 오, 마리아 하늘로 오르시네 하늘바라기 ‘오르시도다’ 중
김 연희마리아수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감탄하게 되었던 부분은
두 여인의 '확신' 이었습니다.
확신이 없었더라면
마리아는
발걸음을 떼기에 앞서
수도 없이 주춤하고 쭈뼛하고 머뭇거렸을 터이나
그녀는
거침없이 길을 나섰고
목적지를 향한 발걸음에는
서두름이 있었습니다.
이는, 행동에 대한 의지가
분명하고 강렬할 때 가능한 움직임입니다.
이에 뒤질 새라
엘리사벳은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당신은 복되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다는
강한 확신이 없었다면 아마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우물쭈물 입안에서 옹알거리기만 했겠지요.
그러나 엘리사벳은
온 세상에 공표라도 하듯
큰 소리로 외치며 인사를 전하였습니다.
이 역시 확신에 찼기에
가능한 외침이었습니다.
이에 마리아는
세상의 온갖 좋은 표현을
다 끌어올려 주님을 찬미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확신이 없었더라면
무슨 말을 내뱉어야 할지 몰라
말을 만들어내느라 머리를 쥐어짜며 애 쓰다가
대충 얼버무리고 짧게 끝냈을지도 모릅니다만
마리아는 확신이 넘쳐흘러
입 밖으로 흘러나오듯
주님을 찬미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
고민하고 머뭇거리며 주춤하고 쭈뼛거리는지요?
한번 뿐인 나의 인생을 좌지우지하게 될
매 순간의 선택들 앞에서
이리 재고 저리 재다가
이도저도 아닌 미적지근한 결정들로
나의 삶을 채워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바르고
아름답고
선한 것을
선탁해가다보면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가야 할 지
분명한 확신이 생길 것이고
사랑의 주님께서는 나의 그 확신에
축복으로 함께 해 주시며
전적으로 내 편이 되어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부터는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주님 뜻 안에서 확신에 찬 결정을 하는
그 날이 오겠지요.
모쪼록
확신에 찬 믿음으로
천상에 오른 성모님이 누리신 그 기쁨을
지상에서 미리 맛보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