檜山甘氏(회산감씨)
본관(本貫): 회산(檜山)
시조(始祖): 감규(甘揆)
유래(由來):
본관(本貫)인 회산(檜山)은 지금의 경상남도(慶尙南道) 창원(昌原)의 옛이름으로서 신라 경덕왕 때는 義安郡(의안군)이라 하였는데,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6가야(伽倻) 중 금관가야(金官伽倻)에 속했었다.
감씨(甘氏)는 본래 중국(中國) 발해(渤海) 주왕(周王)의 셋째 아들 숙대(叔帶)가 감후(甘侯)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을 하사(下賜)받았으므로, 그 땅이름을 따서 감씨(甘氏)의 성(姓)을 삼았다고 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감씨(甘氏)의 본관(本貫)은 회산(檜山), 합포(合浦), 거창(居昌), 창녕(昌寧), 충주(忠州), 부령(富寧) 등 6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상고(詳考)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으며 다만 우리나라 감씨(甘氏) 모두가 동원분파(同源分派)임에는 틀림이 없다.
<회산감씨대동보(檜山甘氏大同譜)>에 시조(始祖) 감규(甘揆 : 자는 양원, 호는 연강)는 원(元)나라 성종조(成宗朝 : 서기 1295 ~ 1307)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1351년(충정왕 3) 공민왕(恭愍王)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행(陪行)하고 고려(高麗)에 들어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으며, 후에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15대(代) 수화(受和)에 이르기까지 본관(本貫)을 연릉(延陵)으로 삼아오다가, 16대 철(喆)이 북벌(北伐)을 간(諫)하여 중지케 한 공(功)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에 오르고 회산군(檜山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회산(檜山)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의 대표적 인물(人物)
회산 감씨(檜山甘氏)는 시조(始祖) 감규(甘揆)로부터 고려조(高麗朝)에서 훌륭한 인물(人物)을 많이 배출시켜
세도가문(勢道家門)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감흥협(甘興鋏)
시조 감규(甘揆)의 선자로서 평장사(平章事)를 지냄.
감소연(甘紹延)
고려조(高麗朝)에서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냄.
감진요(甘震曜)
고려조(高麗朝)에서 중추부사(中樞府使)를 지냄.
감침(甘鍼)
고려조(高麗朝)에서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냄.
감전형(甘全亨)
고려조(高麗朝)에서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냄.
감원한(甘元漢)
회산군(檜山君) 감철(甘喆)의 손자(孫子)로서 조선조(朝鮮朝)에서 예부승지(禮部承旨)를 지냈다.
감익한(甘益漢)
조선조(朝鮮朝)에서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올랐다. 특히 감익한은 1455년(단종 3)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端宗)을 노산군(魯山君)으로 봉하자 성삼문(成三問)을 비롯한 사육신과 함께
단종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화(禍)를 입은 충신(忠臣)이다.
감경인(甘景仁), 감경륜(甘景倫) 형제
임진왜란 때 무공(武功)을 세워 가문을 더욱 빛냈다.
甘箕(감기)
諡號(시호)는 貞彗(정혜). 고려조에서 평장사를 역임하고 延陵君(연릉군)에 봉해졌다.
甘興鋏(감흥협)
고려 때 平章事(평장사)를 지냈다.
甘熙(감희)
고려조에서 평장사를 역임했다.
甘鐵顗(감철의)
고려에서 이부 상서를 역임했다.
甘紹延(감소연)
고려 때 密直提學(밀직제학)을 지냄.
甘震曜(감진요)
고려조에 中樞副使(중추부사)를 역임.
甘全亨(감전형)
고려에서 吏部侍郞(이부시랑)을 지냈다.
甘鍼(감침)
고려 때 吏部侍郞(이부시랑)을 역임.
甘棚垕(감붕후)
자는 文淵(연) 호는 龜亭(귀정) 諡號(시호)는 忠敬(충경).
고려 때 편장사를 역임.
甘受和(감수화)
자는 仁汝(인여) 호는 道隱(도은)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司僕侍丞(사복시승)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했다.
甘喆(감철)
자는 善卿(선경). 호는 檜庵(회암). 조선조에서 북벌을 간하여 중지하게한 공으로 회산군에 봉해지고 田宅(전택)을 하사 받았다.
甘蘋(감빈)
자는 華聖(화성) 호는 修堂(수당). 조선 때 工曹參議(공조참의)를 지냈다.
甘葂(감면)
자는 華國(화국) 호는 守軒(수헌). 조선 때 主簿(주부) 지냈다.
甘麒鉉(감기현)
자는 英八(영팔), 호는 東湄(동미). 조선 때 府使(부사)를 지냈다.
甘濟鉉(감제현)
자)는 聖檣(성장), 호는 直齋(직재). 조선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중추원 議官(의관)을 지냈다.
甘泰旭(감태욱)
자는 德一(덕일), 호는 農啞(농아), 조선 때 덕망 높은 학자로 하였다.
甘泰烋(감태휴)
자는 華守(화수), 호는 晩惺(만성). 조선 때 학자였다.
甘阜(감부)
자는 春殷(춘은), 호는 省齋(성재). 조선 때 舍人(사인)을 지냈다.
甘元漢(감원한)
자는 大振(대진), 호는 浦隱(포은) . 조선 때 禮部承旨(예부승지)를 지냈다.
甘益漢(감익한)
자는 道俊(도준), 호는 秋潭(추담). 조선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 승지 를 거쳐
이조 참의에 이르렀다.
1455년(단종 3)에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노산군에봉하자,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화를 입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甘漂(감표)
자는 處塋(처영). 조선 때 檜山君(회산군)에 봉해 졌다.
甘德八(감덕팔)
자는 乃善(내선), 호는 南溪(남계). 조선 때 敎授(교수)를 지냈다.
甘禮從(감예종)
자는 亨淑(형숙), 호는 自怡堂(자이당). 조선 때 학자로 유명하였다.
甘昕(감흔)
자는 明仲(명중), 호는 謙齋(겸재). 조선조에 참봉을 역임하였다.
甘尙中(감상중)
조선 때 典籍(전적)을 지냈다.
甘景仁(감경인)
자는 汝一(여일), 호는 觀術亭(관술정). 조선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僉節制使(첨절제사)를 지내고,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수하에서 공을 세웠다.
甘景倫(감경륜)
자는 汝五(여오), 호는 晴岡(청강), 1591년(선조 24)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공을 세웠다. 三烈祠(삼렬사)에 제향 되었다.
甘景茂(감경무)
자는 希秀(희수) 호는 敦庵(돈암) 조선 때 성균관진사를 지냈다.
甘景卓(감경탁)
자는 希管(희관) 호는 琴溪(금계). 1592년 인진왜란 때 공을 세워 軍資監正(군자감정)을 지냈다.
무술에 뛰어 났다.
출전 <한민족 대성보>
항렬(行列)
세 항렬자 세 항렬자 세 항렬자
36 泳, 植, 柱 39 東(동) 42 錫(석)
37 相, 炅, 40 熙(희) 43 浩(호)
38 炳, 圭, 垠 41 埰(채) 44 根(근)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회산 감씨(檜山甘氏)는 남한(南韓)에 총 1,227가구, 5,01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檜山甘氏(회산감씨)
▣ 由來
始祖 : 甘揆(감규)
始祖(시조)甘揆(감규)(甘 王+癸)의 字는 養元(양원),號는 延岡(연강)이다.
始祖(시조) 甘揆(감규)는 元(원)나라 사람으로 1349年(忠定王 1年) 恭愍王(공민왕)과 魯國大長公主[(노국대장공주:元(원)나라 皇族(황족)魏王(위왕)의 딸,恭愍王妃)]를 따라 翰林學士(한림학사)로서 高麗(고려)에 들어와 門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으며,後(후)에 延陵君(연릉군)에 封(봉)해졌다.
15世孫(세손)甘受和(감수화)때 까지 本貫(본관)을 延陵(연릉)으로삼아오다가, 16世孫(세손)甘喆(감철)이 北伐(북벌)을 諫(간)하여 中止(중지)하게 한 功(공)으로 金紫光祿大夫(금자광록대부)에 오르고 檜山君(회산군)에 封(봉)해진 것을 契機(계기)로 本貫(본관)을 檜山(회산)으로 하고있다.
墓所(묘소)는 忠淸道(충청도) 公母山(공모산)에 있었고 御題(어제)한 神道碑(신도비)가 茂德曲(무덕곡)에 있었다고 하나 없어져 後孫(후손)들이 世居地(세거지)인 昌原市(창원시)內里洞(내리동)에 祭壇(제단)과 神道碑(신도비)를 設置(설치)하고 每年(매년) 陰曆(음력)4月15日 享祀(향사)한다.
▣ 人物
甘揆(감규)의 孫子(손자)인 平章事(평장사) 甘興鋏(감흥협)을 비롯하여 密直提學(밀직제학) 甘紹延(감소연), 中樞府使(중추부사) 甘震曜(감진요), 吏部侍郞(이부시랑) 甘鍼(감침) 等이 있다.
▣ 世居地
- 慶南 馬山市 內洞
- 慶南 咸安郡 漆北面 花川里
- 慶南 義昌郡 東面 南山里.北面 茂谷里
- 慶南 密陽市 上南面 坪村里
- 慶南 金海市 進永邑 左坤里
- 慶南 鎭海市 二洞
- 慶南 南海郡 南海面 南面洞
▣ 本貫 沿革
本貫所在地 : 慶尙南道 昌原
檜山(회산)은 只今(지금)의 慶尙南道(경상남도) 昌原市(창원시)一圓(일원)의 다른 이름이다.
新羅(신라)때에는 歃良州(삽량주)屈自郡(굴자군)이었다가,757年(新羅 景德王 16)에 屈自郡(굴자군)을 義安郡(의안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合浦縣(합포현:馬山)·熊神縣(웅신현:熊川)·漆隄縣(칠제현:漆原)을 管轄(관할)하였다. 1018年(高麗 顯宗 9)에 金州(금주:金海)로 倂合(병합)되었다가뒤에 監務(감무)가 派遣(파견)되면서 獨立(독립)하였다.1274年(元宗 15)과 1281年(忠烈王 7)에 元(원)나라와 高麗(고려) 聯合軍(연합군)의 日本(일본) 征伐(정벌)때 昌原地方(창원지방)은 合浦(합포)를 中心으로 聯合軍(연합군)의 基地(기지)가 되었으며, 1282年에 義安郡(의안군)이 義昌縣(의창현)으로, 合浦縣(합포군)이 會原縣(회원현)으로 改稱(개칭)되었다.1408年(太宗 8)에 會原縣(회원현)을 倂合(병합)하여 昌原府(창원부)로 昇格(승격)하고 慶尙右道兵馬節都使營(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이 設置(설치)되었으며, 1413年에는 昌原都護府(창원도호부)가 되었다. 1601年(宣祖 34)에 昌原大都護府(창원대도호부)로 昇格(승격)되었고, 1603年에 慶尙右道兵馬節都使營(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이晉州(진주)로 옮겨갔으며 顯宗 (현종)무렵에는 縣(현)으로 降等(당등)되기도 하였다. 昌原(창원)의 別號(별호)는 檜山(회산)·還珠(환주)였다.1895年(高宗32)에 地方制度(지방제도) 改正(개정)으로 晉州府(진주부)昌原郡(창원군)이 되었다가, 1896年 慶尙南道(경상남도) 昌原郡(창원군)이 되었다.1906年에 昌原郡(창원군)을 府(부)로 昇格(승격)하고,漆原郡(칠원군)의 九山面(구산면)과 金海郡(김해군)의 大山面(대산면)이 編入(편입)되었다. 1908年에 鎭海郡(진해군)과 熊川郡(웅진군)을 昌原府(창원군)에 合倂(합병)였으나 1910年 馬山府(마산부)가 新設(신설)되면서 많은地域(지역)이 馬山府(마산부)로 分離(분리)되었다.1914年 郡面(군면)廢合(폐합)으로 昌原郡(창원군)에 다시 還元(환원)되었다. 1980年에 昌原市(창원시)로 昇格(승격)되었고, 1995年 昌原郡(창원군)의 東面(동면)·北面(북면)·大山面(대산면)이 昌原市(창원시)에 編入(편입)되었다.
▣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檜山甘氏(회산감씨)는
1985年에는 摠 769家口 3,172名,
2000年에는 摠 679家口 2,113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
▣ 參考事項
朝鮮氏族統譜(조선씨족통보)에 依(의)하면,甘氏(감씨)는 周(주)나라 武王(무왕)의 셋째 아들 叔帶(숙대)가 甘侯(감후)에 封(봉)해지고 그곳을 食邑(식읍)으로 下賜(하사)받은 事實(사실)에서 緣由(연유)하여 그 땅 이름을 甘氏(감씨)의 姓(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本貫(본관)은 檜山(회산), 合浦(합포), 忠州(충주), 居昌(거창), 昌寧(창녕),富寧(부령) 等(등) 6個(개) 이다.그러나 6個(개) 모두 檜山(회산)甘氏(감씨)에서 分離(분리)된 同源分派(동원분파)들로서 各(각)本貫名(본관명)은 世居地名(세거지명)에 不過(불과)하다는 것이 統說(통설)이다.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편집 인용한 것임.
[출처] 檜山甘氏(회산감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