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류의 보편적 삶과 한민족 ♡
철학자 니체는 미쳐서 죽었습니다.
그의 말년 모습은 강렬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1889년 겨울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휴가를 보내던
니체는 집을 나선다.
우체국으로 편지를 부치러 가다 광장에서 매를
맞는 늙은 말을 발견합니다. 무거운 짐마차를
끌고 가던 말은 미끄러운 빙판길에서 그만 발이 얼어붙고 맙니다. 겁먹은 말은 마부가 아무리
채찍을 휘둘러도 움직이지 않고, 마부는 화가
나서 더욱 세차게 채찍질을 한다.
그 광경을 본 니체는 갑자기 마차로 뛰어들어
말의 목에 팔을 감고 흐느낌니다.
이웃이 그를 집으로 데려갔고, 그는 침대에서
이틀을 꼬박 누워 있다가 몇 마디 말을 웅얼거립니다.
“어머니, 전 바보였어요."
그 후로 11년 동안 정신 나간 상태로 침대에
누워 죽음을 맞는다. 니체가 늙은 말을 부둥켜안은 것은 존재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을 것이다.
짐마차를 끌고 가는 말과 삶의 등짐을 지고 가는
자신을 같은 처지로 여기고 감정이입을 했는지도
모른다.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지도 못한 채 채찍을 맞아야
하는 삶이라면 얼마나 고달픈가 그것이 가죽의
채찍이든, 세파의 채찍이든 말이다. 니체가 눈물
샘이 터져 울부짖은 것이 바로 그 지점이다.
1960년 방한한 미국 소설가 펄벅은 니체와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한다.
그녀는 늦가을에 군용 지프를 개조한 차를 타고 경주로 향해 달렸다. 노랗게 물든 들판에선 농부들이 추수하느라 바쁜 일손을 놀리고 있었다.
차가 경주 안강 부근을 지날 무렵, 볏가리를 가득 실은 소달구지가 보였다. 그 옆에는 지게에 볏짐을 짊어진 농부가 소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차에서 내려 신기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펄벅이 길을 안내하는 통역에게 물었다.
“아니, 저 농부는 왜 힘들게 볏단을 지고 갑니까?
달구지에 싣고 가면 되잖아요”
“소가 너무 힘들까 봐 농부가 짐을 나누어지는 것 입니다
펄벅은 그때의 감동을 글로 옮겼다.
"이제 한국의 나머지 다른 것은 더 보지 않아도 알겠다.
볏가리 짐을 지고 가는 저 농부의 마음이 바로
한국인의 마음이자, 오늘 인류가 되찾아야 할
인간의 원초적인 마음이다.
내 조국, 내 고향, 미국의 농부라면 저렇게 힘들게 짐을 나누어 지지 않고, 온 가족이 달구지 위에 올라타고 채찍질하면서 노래를 부르며 갔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농부는 짐승과도 짐을 나누어지고 한 식구처럼 살아가지 않는가.”
동물이든, 사람이든 모든 생명체는 자기 삶의
무게를 지고 간다. 험난한 생을 견뎌내는 그 일만으로도 충분히 위로받을 자격이 있다.
하물며 같은 종의 인간끼리라면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런 마당에 SNS에는 오늘도 비수 같은 말들이 홍수를 이룬다.
우리 모두는 늙은 말에 채찍질하는 마부이기
보다는 등짐을 나눠지는
인정의 샘물이 넘쳐나는
농부였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