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7년 1월30일, 조선 역사에 큰 변고(辨告)일이다. 남한산성 일대에는 눈보라가 크게 일고 산자락에는 깊이 쌓인 눈이 살을 에는 정월의 추위와 함께 몰아쳤다. 남한산성에서 멀지 않은 삼전도(三田渡)에 급거 마련된 수항단(受降檀) 아래 수많은 장졸이 창검을 높이 치켜들고 멸시의 눈초리가 번득이는 사이로 500여 명 긴 인파의 행렬이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그렇게 들어섰다.
인조임금과 소현세자, 왕실 종친과 조정 대신 문무백관 들이었다. 인조임금은 남한산성으로 몽진(蒙塵)한 지 47일 만에 성에서 내려와 삼전도(지금의 서울 송파구 일대)에 항복의례를 받기 위해 높이 쌓아놓은 단 위에서 계단 아래를 굽어보고 있는 청나라 칸 앞에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이미 용포(龍袍)는 벗은 지 오래였다. 무명의 청의(靑衣) 차림이었다. 머리에 쓴 갓을 벗은 채 두 손을 모아 쥐고 양국의 중신과 군졸이 지켜보는 앞에서 허리를 굽히기 시작했다. 적장(敵將)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삼배구고두(三拜九臯頭 - 세 번 엎드려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바닥에 부딪치는)예(禮)를 올렸다. 1392년 8월5일 태조 이성계의 조선 개국 이래 맞은 최고 최대의 치욕이었다.
그 들이 흩뿌린 뜨거운 눈물의 의미
▲ 두 남자, 예조판서 김상헌과 이조판서 최명길. 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청나라 수도 심양에서 포로 신세로 옥중에서 서로의 처지를 확인케 된다. ⓒ 영화 '남한산성' 포스터 캡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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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이 장면을 지켜본 두 남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삼전도에서, 또 한 사람은 남한산성 성책(城柵)에서다. 요즘 잘 나가는 배우 이병헌과 김윤식(영화 <남한산성의 주연배우> 이다. 아니 그에 앞서 한 사람은 나라와 만백성의 안위를 위해 청과의 화친(和親)을 강력히 주장해 ‘적과의 내통자’ ‘반역자’로 몰리면서까지 항복문서를 자진해서 썼을 뿐 아니라 임금을 모시고 삼전도로 내려와 치욕의 현장을 지켜봐야 했던 주화(主和)파의 대표 격 최명길 이조판서였고, 또 한 사람은 최명길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며 “‘죽으면 죽었지’ 어찌 오랑캐 앞에 일국의 국왕이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올릴 수 있느냐”며 척화(斥和)의 기치를 꺾지 않은 김상헌 예조판서였다.
두 사람 다 당대 조선의 충신이요, 명 문장가들이었다. 영화 <남한산성. 2017.10.4. 추석개봉>에서 김상헌은 남한산성 성책 그가 기거하던, 적의 화력공격으로 다 부서져가는 집안에서 임금에게 올리는 마지막 하직 인사를 한 후 검을 쥐어 잡는다. 진한 눈물이 양 볼로 흐르는 가운데 검을 잡은 두 손에 힘을 가한다. 그리고 쓰러진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필자는 영화에 몰입되던 그 순간 가슴이 먹먹해 짐을 느꼈다. 국왕으로 하여금 적장에게 항복(降伏)할 것을 권유하고, 그로 인해 항복의 예를 다하고 있는 나라의 지존이자 지엄한 국왕의 흐트러진 모습을 바라보면서 죽음보다 더 가혹한 아픔을 씹으며 피보다 더 붉고 굵은 눈물을 흘리는 최명길과 오늘의 이 처절한 순간이 되기까지 군왕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함으로써 죽음보다 더한 참담함을 안기게 한 자신을 탄(嘆)하며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 김상헌의 충정정이 그대로 전달된 때문이었다.
그게 어디 필자만의 느낌이었겠는가? 지인 한 분이 그랬다. “두 남자의 뜨거운 두 줄기 눈물을 보면서 가슴 찡해져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히는 걸 알았다”고. 관객 몇 몇 사람만의 생각은 아니었으리라.
실제 현실에서 예조판서 김상헌은 스스로 목을 매 자진(自盡)을 시도한다. 하지만 곧 발견돼 자살은 미수에 그치고 말지만 그에겐 그보다 더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음을 그 때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척화(斥和)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강골(强骨)의 그 답게 병자호란 이후 스스로 조정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낙향한 후에도 계속해서 청에의 출병을 반대하며 반청대열에 앞장선다.
승자도 패자도 되지 못한 두 남자, 김상헌과 최명길
결국 청의 명나라 정벌 파병 요청을 반대하는 상소문 등으로 인해 1640년(인조 18) 11월 그는 청의 수도 심양으로 압송돼 4년 동안 붙잡혀 있다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한다. 하지만 척화신을 달갑지 않게 여기던 인조 등의 배척을 받다가 정치권에서 은퇴해 은거한다. 강직한 성품에 주관이 누구보다 뚜렷하고 오직 나라의 안위만을 염려했던 조선의 한 충신은 그렇게 남한산성의 비극을 안은 채 역사의 현장에서 스러져 갔다.
이조판서 최명길은 현대에 이르러 그 평가가 달라지고 있음을 본다. 이 또한 오늘날 우리가 처한 시대적 상황과도 크게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 스스로가 말한 것처럼 “후대에 만고의 역적으로 불리어진다 해도 제가 (항복문서를) 쓰겠습니다”며 자청해서 태종이 최후 통첩한 ‘보름달이 뜨는 날’까지의 말미를 넘기지 않게 항복문서를 작성해 청군 진영으로 직접 말을 몬다.
인조실록은 최명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남한산성의 변란 때에는 척화(斥和)를 주장한 대신을 협박하여 보냄으로써 사감(私感)을 풀었고, 환도한 뒤에는 그른 사람을 등용하여 사류와 알력이 생겼는데 모두들 소인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라고.
지금도 회자되는 당시의 시(詩) 한수
가노라 삼각산(三角山 - 오늘의 북한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漢江水)야
고국산천(故國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殊常)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1640년 11월 김상헌이 청나라에 포로로 압송돼 한양을 뒤로한 채 북한산을 바라보며 언제 정든 고국산천을 다시 밟게 될지 모를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면서 남긴 ‘가노라 삼각산아’ 시다. 한때는 조선을 받들어 모신 오랑캐에 불과한 여진족에게 나라를 도륙당해 청나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된 자신과 고국 조선을 생각하며 힘이 없어 당해야만 했던 민족의 설움과 안타까움이 알알이 배기며 비분강개해 하는 70세 노 정객의 마음이 어떻게 휘몰아치고 있는가를 그대로 다가오는 내용이다.
역사에 과거는 없다, 오직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그가 남한산성에서 화친이냐, 항전이냐로 끝까지 날카로운 대결을 벌였던 ‘화평’ 주창자, 주화파의 최명길도 영어(囹圄)의 몸이 된 채 심양 옥중에서 같은 포로 신세로 함께 대해야 했다는 사실을.
결과적으로 전쟁으로 패배한 나라, 민족 개개인에게는 그가 ‘어떤 역’을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운전대를 쥐고 있느냐’에 따라 승자도 패자도 동일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일깨우고 있다는 점이다.
그 날 역사의 교훈은 또 이렇게 전하는 것만 같다. 항복한 나라의 현실 앞에서 피보다 더 참혹한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 380년 전 두 남자. 그러나 그 눈물은 결코 흘러간 과거사만의 얘기가 아니다. 바로 ‘지금 현재도 이어지고 앞으로도 전개될 수 있는 진행형일 뿐이다’라고.(konas)
이현오 / 코나스 편집장. 수필가(holeekva@hanmail.net)
첫댓글 고맙습니다 반가워요 믿을만한 애국지사
회장님, 존체 건안하시지요. 이렇게 뵙게 되서 반갑고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요, 오늘도 내일도 좋은일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