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21일
본문 : 약 2:22, 눅 17:7-10
제목 : 순종의 당위성(무익한 종의 고백)
중심내용 : 대부분의 종교는 행함을 조건부적(보상과 대가)으로 요구하며 강조한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란 속담이 이런 사실을 대표적으로 대변한다. 반면에 기독교 신앙은 행함을 본분과 도리의 개념으로 요구한다. 이는 구원론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타종교는 수도(修道)를 통해 선의 경지에 이르는 자력 구원을 강조한다. 반면에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근거해 이를 믿는 자에게 사죄와 칭의의 구원을 무상으로 베풀어 주시는 타력 구원을 강조한다(엡 2:8-9).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에서 행함의 성격은 죄인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의 발로에 근거해 마땅히 행할 본분과 도리의 성격을 띤다(전 12:13, 눅 17:10).
명제 : 참 믿음은 사랑이 동기유발된 자발적 행함을 동반한다(약 2:22).
설교목적 :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사죄와 칭의의 구원를 받은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었을진대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자(약 1:22). 행함이 없는 믿음은 본질상 죽은 믿음일 뿐이다.
1. 도입
구원을 위한 복음증거와 관련해 제기되는 다섯 가지 원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죄의 원리, 죄책(형벌)의 원리, 속죄의 원리, 믿음의 원리 및 순종의 원리가 그것이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하심으로 세세 무궁토록 영광과 찬송과 존귀를 받기를 원하신다(엡 1:4-6, 사 43:21, 고전 10:31).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죄로부터/죗값인 사망으로부터/죽음 후에 심판으로부터/심판의 결과로 받게 되는 영원한 불못(지옥)의 형벌로부터의 완전한 해방과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오중적인 원리를 통해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한한 특혜를 받은 셈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엄청난 구원을 우리에게 은혜의 선물로 기꺼이 주셨다. 반면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생명이 우리의 죗값으로 대신 지불돼야만 했다. 죄의 삯은 사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롬 6:23). 이런 관점에서 구원의 값은 혹자의 표현대로 '예수님짜리'인 셈이다. 여기서 예수님짜리란 무한대의 값을 일컫는 수사적 표현이다. 결국 구원의 값이 예수님의 생명의 값과 방불하다는 의미가 성립된다. 이런 이유로 구원받은 성도는 영원토록 하나님께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평생 자원하는 심정으로 섬겨야 할 당위성과 필연성이 요구된다.
2. 전개
이런 사실에 근거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약 2:17, 22, 26), 구원의 은혜는 행함의 순종을 당위적으로 동반한다(골 3:1-3)는 주제는 기독교 신앙관 정립의 근간으로 작용한다. 기독교 신앙에서 행함의 순종이 보상과 공로로 평가될 수 없는 이유가 이런 사실로 말미암는다.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은 이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무상으로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과 감동의 반응으로 나타나게 되는바, 결코 조건적인 기복주의, 지성감천주의 및 상급주의 신앙으로 표출될 수 없다. 구원의 사중 적인 의미(죄/사망/심판/불못)와 예수님의 생명이 지불된 무한한 가치를 생각할 때 구원의 성격은 본질상 최고의 복이요 최상의 상급으로 작용한다. 이런 사실을 총체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주제가 다름 아닌 '무익한 종의 고백'이다(눅 17:10). 종에게 수고는 마땅히 행할 본분이며 도리이지 수고에 대한 대가로 지불되는 보상의 개념이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 신앙에서 행함의 성격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예수님의 구속 안에서 죄의 종살이로부터 해방된 구원의 은혜에 따른 감사의 반응으로 마땅히 행할 도리와 본분이지 결코 조건과 대가와 보상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없다. 무익한 종의 경우처럼 "우리가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한 것이라"(눅 17:10)고 고백할 뿐이다.
한편 성경은 지식-믿음-순종을 기독교 신앙의 삼 요소로 제시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는 로마서의 내용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과 다름이 없다"(약 2:17, 22, 26)는 야고보서의 말씀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한국 교회 현장에서 믿음과 행함을 분리시켜 믿음으론 구원을, 행함으론 상급을 기대하게 하는 기복(상급주의)적인 가르침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론적 관점에서 비성경적 복음으로 마땅히 수정돼야 할 왜곡된 신앙관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요구되는 순종(윤리/도덕)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전개시켜 나갈 것인가. 그것은 율법의 요구를 여전히 규범적인 관점을 가지고 문자적으로 지켜야 하는 강제적 삶이 아니다. 성도에게 율법의 요구는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이미 총체적으로 성취됨으로 마침이 되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도 더 이상 문자적으로 강요될 수 없다(마 5:17, 롬 10:4, 13:10, 갈 5:14).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여전히 성도의 삶 속에서 요구되는 윤리적 명령의 성격은 단순한 율법의 문자적 준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내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이 성도로 하여금 사랑이 동기유발 된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삶을 전인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내적 경건의 삶을 의미한다(렘 31:33, 겔 36;26-27, 롬 8:3-4, 13-14, 6:11-14, 13:8-10, 갈 5:16). 이런 삶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와 연합돼 죄에 대해 이미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로 존재하고 있다는 자신들의 영적 정체성을 부단히 상기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롬 6:5, 10-11). 이런 사실의 전제 속에서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나감으로 은혜에 왕노릇하고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었음을 확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롬 8:1-2). 이 과정에서 성경은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함으로 죄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육체의 욕심을 넉넉히 통제시켜 나갈 수 있음을 약속한다(갈 5:16). 이는 사랑이 동기유발 된 실천적 삶을 살아가는 것과 본질상 동의어 적인 표현이다. 성령의 소욕을 좇는다는 의미는 성령의 법에 순종하는 삶을 가리키며 이는 사랑의 법 곧 사랑에 종노릇하는 의미의 다른 표현이다.
물론 그리스도와 연합돼 죄에 대해 이미 죽은 성도라 할지라도 현실적으로 죄를 전혀 짓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성도 안에 내재된 죄성의 발로로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다(요일 1:8-10). 중요한 것은 거듭난 성도라면 죄에 대해 죽었다는 영적 정체성을 부단히 상기함으로 새로운 피조물로서 자기 인식을 새롭게 하고 이를 근거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좇는 윤리적 삶을 살아가는 일에 진력해야 할 것이다. 이는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롬 8:13). 이런 이유로 성도의 현재적인 삶의 현장에서 매 순간마다 순종적 결단이 부단히 요구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함께 연합돼 구원받은 성도들이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당위성이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롬 6:4). 성령의 내주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선의적으로 강권함으로 본질상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대신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시기 때문이다(고후 5:14-15).
3. 결론
이런 관점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자원해 순종하는 심정으로 윤리적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은 대가와 보상을 바라는 조건적인 심정의 발로가 아니다. 구원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표출되는 마땅한 행위로서 본분과 도리의 성격을 띤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언급하셨던 무익한 종의 고백이 성도의 이런 심정을 총체적으로 대변해 준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찌니라"(눅 17:9-10).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사죄와 칭의의 구원를 받은 하나님의 친(親) 백성이 되었을진대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자’(약 1:22).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본질상 죽은 믿음일 뿐이다. 참 구원으로 이끄는 믿음의 진위성 여부는 믿음의 열매인 자발적인 순종 여부로 좌우된다.
첫댓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사죄와 칭의의 구원를 받은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었을진대,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약 1:22). 행함이 없는 믿음은 본질상 죽은 믿음일 뿐이다. 그러므로 참 구원의 믿음은 본질상 믿음의 열매로 행함을 동반한다. 이때의 행함의 성격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 표출되기에 보상과 대가의 개념이 아닌 마땅히 행할 바 본분과 도리의 차원에서 자발적이고 자율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무익한 종(눅 17:10)의 고백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