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 2024년 겨울호
선한 노동자의 연대기
― 정세훈 장편소설 『훈이 엉아』(시와에세이, 2024)
맹문재
1.
정세훈의 장편소설 『훈이 엉아』는 연대기 형식을 띠고 있다. 연대기 소설의 토대이자 외면적인 구성 요소는 시간이다. 시간으로 소설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이야기들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시간을 주관적이고 개별적으로 처리하면서 공간의 실재성과 생명력을 부여한다. 소설가의 의도에 제한받지 않고 진행되는 이야기들은 인과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느슨한 연계성을 갖는다. 감상적이기도 하고 우연적이기도 하고 상대성을 띠기도 한다. 결국 소설의 주인공은 개별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독자에게 선명하게 다가온다.
소설의 주인공인 훈이가 살아온 시간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부터 코로나19가 창궐한 2020년 무렵까지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삶을 영위한 공간은 충청남도 홍성의 닭잘뫼마을부터 안골마을, 서울, 부산, 부평, 김포를 거쳐 다시 주인공의 고향인 홍성까지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그 시간과 공간의 중심에 훈이가 당산나무처럼 떠오른다.
『훈이 엉아』는 자전소설이기에 주인공은 당연히 작가의 자화상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실존 의식을 토대로 자신을 최대한 객관화 내지 취사선택해 주인공의 연대기를 그렸다. 그 결과 훈이의 성격은 고향 집,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한 식구, 중학교, 배고픔, 공단, 공장 동료, 연인, 삶의 동지, 진폐증, 교회, 시집, 연대 활동 등과의 관계 속에서 부각한다. 선한 인간의 표상으로 독자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훈이는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도록 가난한 집안을 원망하지 않았다. 술주정이 심한데다가 어머니를 구타하는 아버지도, 주사를 맞아야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엄마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난한 집안과 동생들을 측은하게 여기고 객지로 나가 돈을 벌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스스로 포기하고 가장의 책임을 기꺼이 진 것이다. 공장의 선임자들이 신참 신고식을 한다며 불러내 구타하려고 하자 맞기로 작심하고 몸과 마음을 내던지자 그들은 폭력 대신 훈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눈을 못 뜬 채 버려진 제비 새끼들을 정성을 다해 살려내기도 했던 훈이의 선한 마음은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 가족과 동료와 이웃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의 불행을 외면하지 않았다. 맹자가 말했듯이 인간의 선한 마음은 본성이라고 볼 수 있지만, 훈이는 삶의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실행했기에 의미가 크다. 가난한 노동자로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항산(恒産)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악을 행하지 않고 도덕적인 덕을 쌓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훈이는 선한 본성을 잃지 않으면서 최선을 다해 항산을 구했기에 감동을 준다.
2.
한국전쟁이 휴전된 뒤 훈이 아버지 정 씨는 탄광에 나갔다. 정 씨는 일제의 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가 탄을 캐다가 해방이 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지만, 경작할 땅이 없었기에 생계 수단으로 탄을 캔 것이다. 정 씨는 평소에는 온순하고 다정다감했지만, 술만 마시면 주사가 심했다. 그 때문에 훈이 엄마 대실댁은 당신의 병환에 더해 남편의 술주정과 폭력, 자식들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훈이는 엄마의 아픈 몸을 간호하고, 땔감을 마련하고, 동생들을 돌보느라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 공부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지만, 가정 형편상 중학교에 진학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담임 선생님의 배려로 입학시험을 치른 결과 수석으로 합격해 중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훈이는 집안의 생활비와 동생들의 학용품 구입비 등을 마련하기 위해 구두닦이를 하며 공부해서 문교부장관상까지 받았다. 그렇지만 집안이 어려워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훈이는 돈 벌러 서울로 갔다. 정부종합청사 지하에서 분식 식당의 주방장으로 있는 외사촌의 주선으로 한식 식당의 그릇 씻는 일을 시작했다. 잠잘 곳이 없어 일하는 식당의 대형 냉동고나 증기 가마솥 안에 숨어서 지냈다. 그러다가 3개월 만에 순찰 요원에 들통나 주방장의 꿈을 접고 쫓겨나고 말았다.
그 뒤 훈이는 한식 식당에서 사귄 동료의 소개로 충무로 2가에 있는 진미식당에서 음식 나르는 일을 했고, 충무로 영화사의 사무실에서 잔심부름하면서 연기 수업도 받고 촬영장에 나가 엑스트가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고향에 보낼 월급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나왔다. 훈이는 서울 생활을 접고 제화 기술을 배우려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술집 웨이터의 보조, 신사복 코너의 점원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은 폭력 사건에 연루되어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3.
훈이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일자리를 구하려고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그동안 일했던 식당이나 술집이 아니라 하찮은 기술이라도 배우고 싶었다. 마침내 중랑천 변에 자리 잡은 에나멜동선 전자석선을 만드는 영세한 공장에 들어갔다. 주야 맞교대로 하루 12시간 일했고, 교대할 동료가 사정이 생기면 36시간 작업도 했다. 건조로에서 발산되는 열기로 40도를 오르내리는 실내 온도에 숨이 막혔고, 동선에 피복을 입히는 도료가 건조되는 과정에서 내뿜는 화공 약품 타는 냄새와 연기에 코가 아팠다. 동선에서 날리는 가루로 말미암아 제대로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열악한 작업 환경 때문인지 동료들의 성격도 과격했다. 몸이 안 좋아 고향으로 내려간 한 동료는 세상을 뜨고 말았고, 또 다른 동료는 안전사고로 현장에서 즉사했다. 훈이는 공장 일에 지쳐 언제나 파김치가 되었지만, 고향의 부모님께 월급을 보내드릴 수 있어 마음이 안정되었다.
훈이가 공장에 다니는 동안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아버지 정 씨가 위암으로 세상을 떴다. 가장이 된 훈이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서울로 데리고 왔다. 서울의 유해 업종이 지방으로 이전하는 정부의 정책에 따라 일하는 공장이 인천시 부평으로 옮겨가게 되어 훈이는 따라갔다. 그곳에서 펜팔을 통해 삶의 동지를 얻어 부평 청천동 공단마을에서 단칸방 사글세로 신혼살림을 차렸다. 아내도 공단에 일하러 나갔으므로 근무 조건이 맞지 않은 날은 서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훈이는 아내와 함께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독학으로 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해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훈이는 야간 일을 마치고 퇴근해서 다세대 주택의 소란스러움 때문에 편하게 잘 수 없을 때마다 억지로 소주를 마시고 취해서 잠들었다. 훈이는 그와 같은 공단 생활을 시로 써서 시집을 출간했다. 방송사, 신문사, 잡지사 등으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고, 영화 제작까지 제안 받았다.
훈이는 주변에서 인정하는 최고의 에나멜동선 제조 전문 숙련공이 되었다. 열악한 환경 조건이었지만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고 체력이 쇠약해져 더 이상 공장에서 일할 수 없어 17살 때부터 일한 공장 생활을 접었다.
4.
훈이는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한때 교육 전도사로 사역했던 목사가 발행하는 기독교계 주간 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훈이에게 기자 일은 만만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기자를 사회의 파수꾼으로 기대했는데, 직접 몸담아 보니 신문사 경영에 이로운 쪽으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어 부끄러움이 들었다. 그리하여 1년 만에 사표를 냈다.
곧이어 출판사의 영업사원으로 근무했다. 서울을 비롯해 수도권과 지방의 도매점 및 서점들을 돌면서 영업과 수금을 맡았다. 하지만 자본이 열악한 출판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다.
훈이는 앞서 근무했던 기독교계 신문사에서 다시 일해 달라고 요청해 와 며칠간 망설였다. 이상과 현실을 놓고 고민하다가 점점 가세가 어려워지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쇠약해진 몸으로 공장에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훈이는 정말 그 와중에서 할 수만 있다면 선한 것을 캐어내고 싶었다.”(188쪽)
그러는 동안 훈이의 몸이 아주 쇠약해져 몸무게가 45킬로그램으로 빠졌다.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은 결과 진폐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에나멜동선 제조 공장에서 오랫동안 흡입해 온 석면 가루가 그 원인이었다. 훈이는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하는 게 좋겠다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김포평야의 풍무동으로 이사했다. 사회 활동을 중지하고 투병에 전념했다. “긍정적 마인드는 모든 고난을 압도한다.”, “긍정적 마인드는 어떠한 의술과 의약을 능가한다.”(103쪽)라는 자세로 희망을 가졌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려고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을 젊게 바꾸었고, 시집 준비도 했다. 그런데 진폐증에 합병증까지 생겨 나을 가망성이 아주 희박해졌다. 훈이는 다시 생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수술을 받았다. 그 결과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훈이는 그 일을 계기로 3년간 복용해온 수면제와 안정제를 끊었다. 오른쪽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지만 노력해서 회복했다.
훈이가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고령이 된 어머니는 치매와 뇌경색으로 쓰러져 전문 병원에 입원했다. 치매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훈이의 이름을 기억했고, “우리 아들 시인이유.”(203쪽)라고 간병인에게 자랑스레 소개했다. 어머니의 지극한 자식 사랑 앞에 저절로 고개가 숙연해진다. 어머니 대실댁은 85세로 숨을 거두었다.
훈이는 몸 상태가 좋아지자 타인과 이웃과 사회에 보다 더 헌신하며 살겠다고 다짐하고 현장 투쟁에 나섰다.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고공 투쟁 현장에 가서 시를 낭송했고,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투쟁 현장에도 갔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외쳤고, 박근혜 국정 농단에 시국 선언을 했으며, 촛불 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어느덧 훈이의 나이는 육십 중반을 넘었다. 노동자들을 위한 연대 활동에도 한계를 실감했다. 그리하여 후대에 노동과 노동문학의 참된 가치를 전해주고 심어주는 일이 절실하다고 생각하고 문화예술계, 종교계, 법조계 등 100여 명의 도움을 받아 충남 홍성군에 노동문학관을 건립했다. 광부의 아들인 훈이는 49년 만에 선한 노동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정세훈의 『훈이 엉아』는 작가의 자화상을 그린 장편소설이다.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살아온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의 생애를 고스란히 담은 인물이다. 작가의 의도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역사와 시대와 사회와 함께한 증인이다. 그 많은 장소와 사람들과 함께한 주인공은 당산나무처럼 그지없이 선하고 당당하다.
<맹문재 약력>
시론 및 비평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지식인 시의 대상애』 『현대시의 성숙과 지향』 『시학의 변주』 『만인보의 시학』 『여성시의 대문자』 『여성성의 시론』 『시와 정치』 『현대시의 가족애』 등이 있음. mmunja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