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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나 |
나 |
과거 |
현재 |
미래 |
현재의 나가 있고, 부모로부터 몸받기 전 전생의 나가 있습니다.
또 내생의 나가 있습니다. 아까 이 전생에 심신 작용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됩니까? 과거의 내 심신작용은 내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내 자유입니다. 그래서 현재 나의 결과가 어떻게 되죠?
진급과 강급. 육도윤회로써 또는 은생어해로 해생어은으로…
과거의 내가 심신작용을 내 마음대로 했지만, 사은님께서는 결과를
현재의 나에게 필연으로 줍니다. 좀 전의 ‘~을 따라.. ‘는 그대로라는
소리입니다. ‘~ 육도로 변화를 시켜’ 시키는 주체는 사은입니다.
이것이 진리다. 내 마음대로 심신 작용을 했지만 사은님의 필연적으로
현재의 나의 결과를 지어줍니다.
그럼 또 미래는 어떻게 되느냐? 내가 또 내 마음대로 짓죠.
오늘도 온 사람도 있고, 안 온 사람도 있고, 건성으로 듣는 사람,
열심히 듣는 사람, 딴 생각 하는 사람, 목숨 걸고 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양합니다. 다 자기의 마음입니다. 자기 맘대로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다시 사은님을 통해서 내생에 몸 받을 때 필연에
의해서 여기 앉은 사람이 어떤 사람은 불보살이 되고 큰 스승이 된
사람이 있는 반면에 내생에 개가 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있을 수 있다.
교당에 왔다고 다 사람 되는 것 아닙니다.
이 현재의 나는 과거의 수많은 생애를 통해서 축적된 나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합니다. 그러나 가장 효과적인 것은 이것 같습니다.
그래프로 그리면
-동영상 참조-
현재 내가 어떤 노력을 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그렇지만 현재의 나만
존재한 게 아니고 나는 것은 과거 수많은 생을 통해서 내가 쌓은 것이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과거보다 현재가 더 큰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생에서 공부 열심히 하면 공부 잘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생에 열심히 공부하면 공부 잘 하는 것입니다.
전생에 공부를 잘 안 했으면, 이생에 출발할 때 늦습니다.
전생에 공부를 잘해서 똘똘해. 그러나 이생에 나태해서 공부를 별로 안
했습니다. 토끼 같이 놀았단 말입니다. 설사 태어날 때에는 전생에 많이
해서 받았다 할 지라도 이생에 내가 힘을 못 받습니다. 그렇지만 과거의
영향력은 무시를 못합니다. 그것도 전생에 한 번뿐이 아니라 수 많은
과거로부터 닦아진 것입니다.
과거 서가모니 부처님은 수기를 받은 후 오백 생 후에 대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수억 생을 닦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 앉아계신 분들도 천차만별이다. 부잣집에 태어난
사람. 인물 좋게 태어난 사람. 어떤 사람은 찢어지게 가난하게 태어나서,
인물도 빈티, 촌티, 박티 난 사람도 있습니다. 왜 그러냐? 미안하지만
자기가 자기 맘대로 지은 결과인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아셔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대종사님이 어떻게 설명
하셨냐면.. 저는 이 일원상 서원문 보고 환장했습니다.
서원문을 여러분들은 외우기만 하는데..
지금 내가 변하는 자리로 보면 어떻냐?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은 진급으로 혹은 강급으로 혹은 은생어해로
혹은 해생어은으로
은생어해 - 恩生於害
해생어은 - 害生於恩
자. 결과가 의외인 경우가 있습니다. 은생어해 - 은혜는 해에서 생긴다.
이렇게 한자를 해석합니다. 하다 보면 거꾸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맨 앞이 주어입니다. 해생어은 - 해는 은혜에서 생긴다.
‘육도로 변화를 시켜 혹은 진급으로 혹은 강급으로
혹은 은생어해로 혹은 해생어은으로 ‘
해는 은혜에서 생기고 다시 은혜에서 해가 생긴다 이 말이죠.
여기서 잘 보세요. 해에서 은혜가 생기다니. 얼른 납득이 안 가죠?
아니 생기려면 은혜에서 은혜가 생겨야 맞죠? 은행에도 부동산이 많은
사람은 대출을 많이 해줍니다.
해에서 해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은행에 갔더니 교무는 안
빌려주었습니다. ‘네가 아무리 성직자여도 가진 것이 없으면 안 해준다.’
나에게 대출 안 해줍니다. 왜? 가진 것이 없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게 있습니다.
네 가지 인생의 방식 중에서 생략된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은혜에서 은혜로 사는 사람이다. 태어날 때 인물 좋고 지혜 있고
부잣집에 아주 건강하게 태어났고 부모 잘 만났습니다. 이 사람은
은혜입니다. 그 덕에 공부 열심히 하고 계속 진급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물도 없고 가난한데다 건강도 안 좋습니다. 그 해를 더
원망해서 더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독에서 해독인 것입니다.
이것을 둘을 앞에서 생략한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은 변화는 되지만 큰 변화가 아닙니다.
다들 인정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요.
예전에... 강남에서 외제차 타는 사람들 칼로 찌르고 다닌 사람이
있었죠?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잘산 놈 보니까 배 아프더라.’
자기가 태어날 때 심신 작용 자기 맘대로 해서 가난하게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인과는 모르니까? 저 사람들 나쁜 사람들이라며 칼로 찌르고
다닌 것입니다. 이것이 또 강급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 생에는
사람으로 못 태어나는 것입니다. 악순환입니다. 악순환..
그래서 우리가 선순환 할 것이냐 악순환 할 것이냐?
여기서 대종사님께서 두 가지 말씀하신 것은 선변 악변이다.
선이 악으로 악이 선으로..
해는 뭘까요? 쉽게 말하면, 고통이다. 죄고다. 빈천이다.
죄고와 빈천..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은혜가 되더라.
은혜는 해에서 생긴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옛날에 가난한 집 아들이
성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가 되는 사람이 마쓰시다
고노스케입니다. 그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지구 상에 몇 명 안됩니다.
초등학교도 못 나오고 집안 형제 다 죽었고 어릴 때 폐결핵 걸려서 죽을
뻔했고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됐어요? 빈천 이였어요.. 근데 그것을 통해서 가난했기
때문에 근검절약 했고 건강이 안 좋았기 때문에 조심했고 못 배웠기
떄문에 열린 마음으로 배웠습니다.
그랬더니 일본 제일의 갑부가 되었습니다.
가난했지만 그렇게 잘 되었다는 것입니다. 은생어해의 해는 정당한
고통을 말한다. 정당한 고통은 은혜가 된다. 이것은 역류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아주 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해생어은이다.
이건 아주 쉽습니다. 돈 쓰기 쉽잖아요. 은생어해의 경우는 고생해서
돈을 버는 것이고, 해생어은의 경우는 돈 있는 사람이 돈 쓰기가 아주
쉬운 것입니다. 돈 있는 사람이 돈 쓰기가 아주 쉽죠. 이것을 순류라고
합니다. 배 타고 내려 가듯이 쉽게 되는 것입니다.
돈 있는 사람이 타락하고 돈 있는 사람이 팍팍 쓰고 다니고
잘생긴 얼굴로 뻘짓거리 하고 똑똑한 머리로 둘러먹고 다니고..
이것이 좋은 것으로써 방탕해서 오히려 해독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를 하는 것이다.
무엇을 따라서 이렇게 변화하는 것입니까? 심신작용을 따라서 이렇게
변화하는 것입니다. 내가 심신작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여러분의 현재 처지를 생각해 봅시다.
나 자신은 과거에 어땠을 것 같습니까? 현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대로.. 그대로 드러납니다.
여러분의 인연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생에 심신작용으로 내 주위
사람들에게 인연을 어떻게 짓느냐? 중생들은 가까운 인연일수록 전부
악연으로 끝난다. 친구간에 사업해 보세요? 98%가 싸움합니다.
청년들 방 같이 쓴다고 같이 살아보세요. 90%가 나중에 안 좋게
헤어진다. 왜 그러냐? 중생들은 심신작용을 제대로 쓸 줄 모릅니다.
그래서 뒤에 나오는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 사리를 아는 공부,
심신을 원만하게 쓰는 공부가 필요한 것입니다.
모두들 열심히 산다고 하지만, 각자 원이 다 있잖아요? 돈 벌고 싶고,
봉사도 학교도 세우고 싶고, 교당도 세우고 싶고, 학사도 세우고 싶고,
아들 합격시키고 싶고 별거 다 하고 싶어도, 그것이 서원에 바탕하고
신앙에 바탕 한 수행이 함께 하는가 안 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운명이다. 또는 바깥에서 누가 준다. 재수다.
꿈자리다. 조상 탓이다. 별 소리를 다하는데, 알고 보면 전생에 쌓인
것에 더하여 내가 현재 어떻게 심신 작용.. 즉 신구의 3업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아무리 회사에 좋은 성적으로 들어 갔어도. 내가 몸을 똑바로 썼는가?
말을 주위에 은혜가 되게 하는가? 내가 마음을 공익심으로 쓰는지,
이기심과 사심으로 쓰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 아무리 좋게 들어 갔어도
그것이 멍에가 될 수 있고, 설사 어렵게 들어갔어도 내가 심신작용을
잘하면 묘하게 풀린다.
물리는 것도 바로 풀리는 것도 있지만, 꼬아서 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위력은 다이렉트로 잘 안줍니다. 한번 꼬아서 한 다리 걸쳐서 준다.
내가 바로 못 받아 먹어. 다른 사람이 소개해 줍니다.
제 친구가 다니는 대주건설 망했습니다. 직원이 수만 명이었는데 망해서
다 잘렸습니다. 그런데 핵심인력 30명은 남겨 놓았답니다. 그 사람들은
안 잘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평소에 심신작용을 잘 하지
못했으면 우선순위로 다 잘립니다. 어떤 사람이 잘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잘렸더라도 사장이 미안해서 다른 회사에 소개해 줍니다. ‘이 사람은
쓸만하네 자네가 데려다 쓰소.’ 위력이라는 것은 그렇게 온다.
위력은 그때 그때 내가 얼마나 심신작용을 잘 했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
많은 사람들이 그 회사에서 환영 받지 못하고 그 집에서 환영 받지
못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환영 받지 못하면서 다른데 가서 환영 받고
웃고 다니고 다른 데다 불공 잘하고 백날 해보세요? 여기서 새는 쪽박이
저기 가면 안 샙니까? 서울에서 영어 못하는 사람이 부산으로 이사가면
영어를 잘 합니까? 몸을 바꾸거나 군대를 갔다 오면 영어를 잘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어디 가서나 현재 내가 심신작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진급이 되냐
강급이 되냐 위력이 있어지냐 없어지냐 거기에 있다. 그래서 사람은
심법이 좋아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해독이 오면 어떻게 해요? 약 먹고 죽을까? 옥상에
떨어질까? 한강 다리에 떨어질까? 마지못해 산다 합니다. 이것은
심신작용을 따라서 은혜에서 해로 갈 수도 있고 다시 반대로 해에서
은혜로 갈 수도 있습니다. 변화하는 것입니다.
진급과 강급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진급하고 강급합니다. 직선으로
진급. 강급하지 않습니다. 은혜와 해독도 마찬가집니다. 은혜가 온 듯
하다가 해가 오고 해독이 온 듯 하다가 은혜가 오기도 합니다.
사업도 흥망성쇠를 합니다. 육신은 생로병사합니다. 더 중요한 건
변하지 않는 우리 참 마음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변화를 지켜보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 대산 종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불변不變으로 응만변應萬變하라
불변으로 응만변하라. 이것이 바로 유상, 무상이다. 불변이 유상이라고
했습니다. 뒤의 변이 무상이다. 유상과 무상을 아우르는 공부가 있다.
나라는 존재는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 없다. 그러기 때문에 유상으로
즉, 불변하는 마음으로 변화되지 않는 그 본래 그 마음에 바탕 해서
만변, 수많은 변화를 가져다 응해서 써라.
예를 들면, 내가 갑자기 회사가 안됐습니다. 갑자기 몸이 좀 아팠습니다.
갑자기 일이 꼬였습니다. 그 변화된 마음에 속지 말고, 불변하는 본래
마음 즉, 변하지 않는 그 마음. 흥망성쇠가 없는 본래 그 마음에 바탕
해서 응용해서 쓰라는 말이다. 이 얼마나 좋은 법문입니까?
그 자칫 불변에만 빠져있고, 아니면 변에만 빠져있다. 그게 아니라
일원상 자체가 유상으로 보면, 무상으로 보면 그런 것이지..
유상의 세계와 무상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자세히
들어가 보면 유상을 공부해보면 그것이 무상이다. 무상을 들어가보면
그것이 유상이다.
설명방식이 유상, 무상 이렇게 설명한 것이지 변, 불변이 따로 있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변, 불변 두 가지를 잘 응용해서
써야 한다. 사업이 망하면 본래 흥망이 없는 본래 자리를 보면서 망한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자 죽음의 길에 들어왔다. 내가 죽을 때가 되면
본래 죽지 않는 여여자연 한 불변의 바탕 해서 죽음을 딱 지켜본다.
‘아 갈 대가 되었구나.’ 갔으면 또 온다. 이 말이다.
몸도 항상 아파요. 진짜 아프면 죽어버리고. 또 죽으면 다시 나오면
되고. 또 아프면 며칠 끙끙하고 앓다 보면 회복되지 않습니까? 변화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변화 속에 빠져버리면.. 마음이 막…
저는 이것을 시소를 탄다고 합니다.
유상은, 내가 시소의 가운데 지렛대에 있는 것과 같다. 내가 혹시
진급하고 돈이 벌리고 잘 살아도… 유상은 변화가 없습니다.
설사 내가 강급을 해서 사업 망하고 몸이 아프고 자식들이 말 안 듣고
해도 나는 여여하다.
이 두 가지를 잘 활용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시소의 가운데 지렛대에
앉아 있지 못한다. 시소의 끝에 앉게 된다. 오늘은 좋아서 죽겠고
내일은 슬퍼서 죽겠고... 게임에 있으니까 한잔, 졌으니까 한잔, 비겼으니
한잔. 계속 퍼먹습니다. 중생들은 핑계만 찾습니다. 결국 술 먹겠다는 것
아닙니까? 계속 오르락 내리락 거리면서 사는 것이다.
그렇지만 원불교 신앙을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면? 무상의 세계..
변하는 것이 없는 게 아니라 있다. 그렇지만 가운데에서… 불변에 바탕
해서… 유상의 세계에 바탕 해서… 아 내가 좀 풀리는구나.. 아 내가 좀
안됐구나.. 그러면 내가 심신작용을 어떻게 쓸 것인가? 그래서 삼학
공부가 나오는 것입니다. 신앙과 수행공부가 여기서 나옵니다.
아이구. 자기가 명예가 있고 돈 좀 벌면 뱀 같이 목에 힘을 주고
다닙니다. 흥망성쇠 명예라는 것은 변화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길흉화복 흥망성쇠가.. 다 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가 말해도
나도 흥망성쇠가 오면 그 속에 쏙 들어갑니다. 그것이 그렇습니다…
무상, 변하는 것이 환경입니다. 이 환경에 놀아나면 안 됩니다. 환경을
뛰어넘는 어떤 신심, 서원, 성품자리가 딱 가운데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습관의 힘.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습관의 힘입니다. 습관의 힘을 어떻게
들일 것이냐?
제 일의 천성이 성품이요. 제 이의 천성이 습관이요. 제 삼의 천성이
환경이라 합니다. 이것이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환경보다 중요한 것이
습관이고 습관보다 중요한 것은 성품이다. 성품자리를 깨쳐서 온전한
정신을 회복해서 습관을 내가 길들여 나가고 그러면 환경은 알아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습관을 고치지도 않고 성품을 깨치지도 못하고 환경을
바꾸겠다고 죽어라 달립니다. 오늘도 내일도 교당에도 못 오면서
이 환경을 고치고자 달려 다닙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되느냐 말이죠.
그런 환경은 마음에 있는 것이고, 그 사람의 운명은 습관에 있는 것이다.
더 들어가면 그 습관을 뛰어넘는 우리 법신불 자리를 공부할 것 같으면
습관을 다스리는 것도 근원적으로 녹일 수 있고, 환경도 초월해서
맘대로 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이 환경만 좇아가면 계속 좋았다 싫었다 좋았다 싫었다.
반복합니다. 좀 풀리면 자만하고 안 풀리면 죽겠다 살겠다 하고
자포자기하고 자학합니다.
그리고 매번 와서 상담합니다. ‘교무님 저 죽겠어요.’ 그럼 난 뭐라고
해줘요. 습관과 성품으로 해 주어야 하는데 그냥 같이 울어만 줘요?
‘그래 슬프지??’ 그렇게 내가 보내야 합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게 해결이 되냐? 여러분 술 먹는다고 해결돼요? 놀러 간다고
해결돼요? 자면 해결돼요? 누구한테 수다를 떨면 해결돼?
절대로 환경을 바뀐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 회사에서 욕 얻어 먹는 사람이 저 회사에서 이쁨 받을 거 같아요?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입니다. 환경은 그 다음에 있는 것이죠.
물론 너무나 환경이 안 맞으면 바꿀 수는 있어요. 대게 보면 첫 직장에
직장 탓 하면서 나와요. 이직률이 제일 높습니다. 본인이 환경 탓을
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판단이 안 됩니다.
직장을 몇 번 옮겨보고 사회생활 해본 사람은 어떤 생각이 들어요?
‘아 세상이 이런 것이구나. 아. 환경이 이런 것이구나 바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이 환경을 초월해서 내가 환경을 좋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내가 환경에 지배만 받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내가
환경을 개선합니다. 그게 바로 은생어해 해생어은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무엇에 따라서 내 심신작용에 따라서…
누구나 개선하고 싶어합니다.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그 다음이
‘우리 어리석은 중생.. ‘부터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
본래가 부처라고 해 놓고는 중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이랬다 저랬다
합니까? 네? 먼저 우리부터 풀겠습니다.
앞에 ‘이와 같이 무량세계를 전개하였나니’까지는 유상과 무상의
세계로써 벌어진 변•불변의 세계, 특히 변하는 세계는 인과의 세계로써
자기 심신 작용을 따라서 진급도 강급으로, 은생어해로 해생어은으로
얼마든지 변화한다. 그러니 나는 심신 작용을 어떻게 인과로 만들어
나갈 것이냐? 지금 내가 받고 있는 인과가 있다면 그것은 달게 받아라.
왜? 내가 과거에 지은 것이니까. 그리고 운명 탓하고 부모 탓하고 조상
탓하지 말아라. 내가 심신 작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또
바뀌지 않느냐?
그런데 이 바뀌는 것이 옛날보다 빠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 경식이가 백정 아들로 조선시대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해봤자
백정 아들 이거든.. 옛날에는 계급제도가 있어서 심신 작용을 잘 해도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현대 시대는 계층은 있지만 그런 계급은
없습니다. 얼마든지 내가 노력해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돈 없고 빽 없는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과거제도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공무원 시험과 같습니다. 집안에 재산
없다고 공무원 시험 못 보는 것 보았어요? 내가 어떻게 심신 작용을
하느냐에 따라서 지금은 과거보다 훨씬 좋은 여건이다. 얼마든지 내가
선변으로.. 좋게.. 진급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얼마나 많이 있느냐?
옛날에는 가난한 집 자식이 하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지금은 생각,
가치만 잘 가지고 있어도 좋은 아이디어만 갖고 있어도 대단하다.
옛날에는 부와 재산, 부동산을 많이 가진 사람이 부자다. 지금 세계에서
제일 부자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IT 머리가 좋은..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세계에서 제일 부자이다. 땅 많이 가진 사람도 부자지만
앞으로 세계는 어떻게 제대로 하느냐에 따라서 진•강급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우리’ 우리는 나다. 같이 두리뭉실 몰아서 생각하지
말고 나라고 생각하세요. 나 어리석은 중생은… 어리석은 중생은
누굽니까? 저 똥개. 저 말 안 듣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나라는 존재는 제불제성의 성품을 가진 부처님의 존재라면서 왜 우리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합니까? 그렇지만 과거의 업력에 의해서 쌓여온
습관의 힘이라든지. 때로는 현실의 경계 속에.. 때로는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나라는 것에 집착해서 생기는 온갖 집착과 상, 명예욕,
욕심. 현실 속에서 기독교의 원죄설이 맞잖아요?
기독교가 원래 죄인이다. 그 소리입니다. 우리는 원래는 아니다. 경계
따라 욕심 따라 업력 따라 어리석음에 의해서 내가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화요공부방이나 토요일 일요일 법회에 올 때
뭘 가지고 오라는 거에요? 교만함만 가지고, 돈만 가지고 오라는 게
아니라 한 주일간 심신작용을 하면서 지었던 업을 가지고 와서 법신불
앞에 다 녹여 버려라 그 말입니다. 전부다 녹여버려라..
사람들은 그것을 안 녹입니다. 그래서 쌓이고 쌓여 그것이 업력이 된다.
그것을 매주 풀어 버려야 한다. 녹여 버려야 한다.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이것은 나라는 존재가 실지 경계 속에서 본래
그러지 않지만 경계 속에서 우리가 실수를 합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저도 법문 할 때는 겁나게 잘하는 것 같지만,
현실 경계에서는 화가 막 납니다.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깨치고 안 깨치고의 차이도 있지만 심신 작용을
할 때 어떻게 처리하느냐? 그래서 우리는 일기에 심신작용의 처리 건을
기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처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심신작용을 어떤 사람은 빨리 하고 어떤 사람은 늦게 하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처리하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처리한다. 몸과 입과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 거기에 차이가 있다.
깨친 사람, 삼대력에 공을 들이고 습관을 잘 들인 사람은 좋은 쪽으로
잘 쓰겠죠. 그러나 깨치지 못한 사람 습관이 안 좋게 들인 사람, 욕심이
치성하고 서원이 없는 사람은 그 쪽으로 쓸 것입니다. 결국은 그 처리가
어떤 사람은 진급할 행동을 하고 어떤 사람은 강급 할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와 중생은 한 경계에서 때로는 부처가 중생이
되기도 하고 중생이 부처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래위도 중생심 내면 중생이다. 그러나 여래위가 중생심을 내겠습니까?
설사 나와도 금방 처리해버린다. 어린이들은 싸워도 금방 풀립니다.
제가 딸이 둘이 있는데 둘이 티격태격 싸워요. 그러다가도 언니하고
보듬고 그래요.
근데 말이죠. 나이 30, 40. 50 먹은 사람들은 한 번 싸우면 전화도 안
합니다. 아이들보다 못합니다. 그 처리가 빨리 원상 복귀를 못한다
이 말입니다. 그 알량한 자존심, 그 알량한 아만심 말이죠. 상처는
흔적도 없는데 상처 받았다고 하고 말이죠. 상처가 어디 있습니까?
내놔보세요? 있지도 않은 상처를 받았다고.. 육신엔 상처가 있는
것이지만 마음엔 상처가 없는 것이다. 상처 있으면 내놔봐?
없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 독경을 들으면 나는.. 경계 따라 좀
실수한 나는,,, 그렇게 해야 된다. 우리가 정전 뒤로 가면 기도와 참회를
배운다. 우리 어리 석은 중생은- 내가 욕심 따라 경계 따라 지은 실수들,
아픔들, 잘못들을 내가 참회하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달라. 기독교의 원죄인은 본래 죄인이라고 해서 죽어라 울고
불고 하고, ‘오 주여.’하면서 울어도 다르다. 우리가 우는 거랑 그
사람들이 우는 것은 다르다. 어떻게 달라? 우리는 근원적인 것은
부처이지만 경계 따라 지은 잘못을 정말 참회하면서 우는 것이고.
기독교는 본래 하느님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본래 못된 놈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본래 죄인’이라고 합니다.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 체받는다’는 것은 뭐죠?
온통 받는다. 글씨를 쓸려면 체본을 받고 그림을 그려도 체본을
받습니다. 무엇을 먼저 체받는다는 것이죠? 체받는다는 것은 그대로
온통 받는 다는 것이다. 본 받는다. 체받는다는 것은 본 받는 것과
같습니다.
선행을 체받는다.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는다. 아니면 악행을 체받는다.
옛날에
그것이 영화로 만든 것이 요새 나오는, <거북이 달린다>라는 영화랍니다.
거기에 보면,
삼아가지고, 등에도 똑같이 사슴을 그리고
뭘 체받았어요? 도둑놈을 체받은 거죠. 또 어떤 사람은 대단히 수행을
잘한다. 밥을 안 먹고 철야정진을 해서 깨달음을 얻었다더라. 수행을
체받고 선행을 체받는다. 누구는 순천향 총장 했던 사람 마흔한 살에
총장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서울대 의대 나와가지고 순천향
총장하고 7, 8년하고 다 내줬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내 논 재산이
650억 인데 실질적 가치는 2000억 원이 넘어요. 이것을 다 내
놓았습니다. 학교도 내 놓고 병원 의료재단도 4개가 있는데 재단에다
다 내놓았어요.
그런 선행을 본받을 것이냐? 여기서는 일원상을 체받으라는 것이다.
선행을 본 받으면 어떻게 되죠? 내가 선행을 했을 때는 교만해진다.
자부심을 갖고, 선행을 못했을 때는 내가 7일 정진을 하다가 자버렸으면
‘역시 난 안 되는구만.’ 그렇게 되는 거죠. 하고 나면 못하는 사람들
보고는 ‘너는 그것도 못하냐?’ 이렇게 됩니다.
근데 일원상을 체받으라는 것은 이것은 진리 자체 원리를 체받으라는
것입니다. 법신불 일원상은 텅 비어서 우주만유가 하나이면서
언어도단의 입정처요. 유무초월의 생사문인 그 일원상을 체받아라.
이것은 상대의 세계를 넘어서서 절대의 세계를 주물딱 주물딱 하는
것이다. 불변의 세계로써 변을 주물딱 주물딱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원상을 체받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선과 악. 좋은 것과 안 좋은 것. 잘한 것과 못한
것. 이런 상대적 세계를 체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의 세계에
빠져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법신불 일원상. 이 법신불은 뭐냐? 여러분이 제
목소리를 듣고 아는 이 마음. 이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으라는 말입니다.
교당에 걸려진 일원상을 체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마음에
갖춰진 그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라.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체받으라는 말인가? 모르는 사람은 신앙으로써
체받아야 합니다. 아는 사람은 그대로 체받으면 된다. 이것은 진리의
절대 자리를 그대로 체받는 것을 말하는데, 법신불 일원상을 모르는
사람은 신앙으로 신심으로 체받는 것이다. 신심도 없으면? 그럼 어떻게
해요? 삼학 공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라는 것은, 정이라고 했다.
정(定)해져야 정(靜)이 된다.
딱 어떤 기준을 잡아야 한다. 특단을 잡아야 한다. 아 이것이 진리구나
이 말씀이 맞는 말이구나. 우리 스승님이 바로 이런 것을 깨치신
분이구나. 이 회상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이 법이야 말로 만고의
대법이라는 것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만 비로소 그 사람이 고요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요해져야 행복합니다. 고요해지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세상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고요해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전부 둥둥 떠서 심장병 다 걸립니다. 화기는 다 올라오고..
왜 고요하지 못해? 포기를 못하니까. 욕심을 꽉 차가지고..
‘교무님 영육쌍전이 너무 힘들어요.’ 이것은 포기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루 일과를 잡아도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욕심 것 잡아 놓고
여기서 미안하다고 하고 저기서 미안하다고 하고…
그 사람은 고요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고요해지지 못하냐?
정(定)에 신심이 없기 때문이다. 먼저 딱 정(定)하면 그 하라는 것을
제시해준다. 그걸로 하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고요해진다.
스승님이 정해주고 진리가 정해준 방향이 아니라 자기 맘대로 정합니다.
그래서 고요해지지 않습니다. 왜 욕심의 방향으로 정했거든.. 그러니까
고요해지기는커녕 요란해 집니다. 여기 저기서 미안하다고 다니고, 정신
없다고 하고, ‘바빠 죽겠는데 교무님은 교당만 오라고 해요?’
포기 하나도 안 하면서...
그렇게 해서 행복하다면 교당에 안 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착각하지
마세요? 뭐냐? 고요해야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승님은 그것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고요 하려면 놔야 한다. 큰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수호가 된다.
심신을 수호하려면 말이죠. 믿음이 있어야 한다. 알지도 못하는 것이
일원상을 체 안받잖아요. 믿음도 안 가지니 정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요해지지 않고 요란합니다. 그러고는 ‘교무님 어떻게 사는 것이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바쁘다는 것입니다. 의외로 진리는 간단한 것이다.
악착같이 못 놓고 다 잡으려고 하니까, 다 놓쳐 버린다.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
수호하는 것은 지킨다는 것입니다. 지킬 수, 보호할 호자 입니다.
외부 경계로부터 지켜내고 내 안에서 참마음을 지키는 것. 외부 수많은
경계에 내 마음을 다 뺏기고 산다는 것이다. 외부가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에서 일어난 욕심이지. 놓지 못한 욕심과 집착 아닙니까?
적군이 어디에 있어요? 이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는 가득 찬 욕심과
밖으로는 외부 경계에..
부앙부앙한 사람이 부앙부앙한 사람 만납니다. 속았다 하는 사람들
있죠? 그럴 줄 몰랐네 나를 속였다. 사기 당했다는 사람들은
유유상종이다. 일확천금을 바란 사람들이 전부 사기 당하는 것입니다.
인연도 그런 사람을 만들고 자기가 그걸 원하니까 그런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정당히 벌려고 하지 않고.. 확.. ‘다단계 하면 떼돈
번다더라..’ 어쩜 그렇게 귀가 얇은지 몰라. 왜? 내 마음에 이미 사심이
가득 차니까 그것이 잘 보여요.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이 말한 대로
그 땅이 돈이 되면, 기업이 가만 있겠어요? 머리 좋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왜 놔두겠어요? 아니니까 그렇지?
이 돈을 넣어 놓으면 이자를 매달 주고 나중에 이자만 30~40% 돈이
쏟아진다고 합니다. 100% 안 믿으면 됩니다. 여러분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선생님이 당첨됐습니다. ~’, 옛날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아저씨들이 버스에 올라와서 ‘몇 번, 몇 번 손목 시계 당첨됐다고
단 돈 3만원만 내고 시계 50만 원짜리 가져가지시요’ 라고 합니다.
아이고~. 별소리 다 합니다. 내 안에 욕심이 있으면 그 당첨 되었다는
말에 판단력을 잃어버립니다.
나는 옛날에 어릴 때부터 그 버스에서 다니는 사람들 보면서
저 사람들이 어떻게 밥 먹고 사는지 궁금했어요? 저 사람들한테 속아서
사는 사람들이 있나? 아 그런데 사람들이 사는 것입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저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가 차에 올라와서 시계
싸게 줄려고 봉사 차원에서 돌아다닙니까? 자기 전화비 들면서 도와
줄려고 당첨되었다고 전화합니까?
그런 허무맹랑한 것에 속아 넘어간 것은 첫째 욕심이 있어서 그런
것이고, 둘째는 사리를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일과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아 버리는 것이다.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두 군데 세 군데 가서 물어 봐야 하고 부동산
하나 계약 할 때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고 가게 하나 낼 때도
그 근방에 비슷한 가게가 있는가? 없는가? 그 땅의 부동산 평가는
어쩐가? 그쪽 사람들은 어떻게 거주하는가?
교무들이 군에 가서 발령 받아도 군민이 몇 명이고 종교의 특색이 뭔가?
근방에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가? 불교가 강센가? 기독교가 강센가?
다 분석을 해야 합니다. 내가 그 동안에 모은 돈을 대출까지 받아서
투자했는데 대충하면 되겠어요? 한 번 투자하면 여기서 30, 40년 계속
할 것이다. 나중에 분점을 내거나 증축을 하거나 더 크게 하려면 처음에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철저하게 분석해야죠.
여러분 신문에서 부동산 싸다고 급매하면 98%가 거짓입니다.
싸면 자기가 갖고 있지 왜 내놔? 그렇게 갑갑합니까?... 자기 동생 주지.
왜 내 놓았겠어요? 갑갑합니다. 별소리 다 하네…
현실과 이치, 이치의 세계 이 두 가지를 다 봐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현실을 잘해요.. 이것도 잘 못하는데.. 현실과 이치를 아우르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나중에 삼학 공부하면서 사리 연구 설명할 때
하겠습니다.
사실 이것도 5시간이 필요하다. 이 안에 기가 막힌 이치가 들어있습니다.
저는 이치의 대소유무, 일의 시비이해 관계를 공부하면서 진짜 무릎치고
통곡을 했습니다. 대종사님은 어떻게 이치를 대소유무로 풀어 주셨고
일을 시비이해로 풀어서 이렇게 해 주셨을까?
제가 팔짝 팔짝 뛰었습니다.
현실을 과학이고 이치를 도학이라고 얘기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현실만 보고 살아갈 수 없다. 이 현실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이치가 다 운용하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도 이 마음이 운용하는
것이고 이 우주의 현실도 알고 보면 보이지 않는 진리의 기운, 이치에
의해서 현실에 춘하추동이 있고 흥망성쇠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쏙 빠지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치만 빠져도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혜가 있어야 하고,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같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지혜는 비우고 지식은 채우고.. 지혜는 혜가 되고, 지식은
복이 됩니다. 일과 이치만 가지고도 몇 시간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지…
세상 사람들은 일과 이치 사리 연구에 대해서 모릅니다. 사람들은
징그럽게 미리 준비 안 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번개 모임하고.. 월산님
이게 뭔 줄 아세요? 몰라도 되는데.. 갑자기 전화 날려서 모이는
것입니다. 갑자기 전화해서 놀러 가고 영화 보러 가고.. 밥 먹으러
가고… 쉽게 말 해서 일과 이치를 미리 연구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전화해서 모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시험 공부 안하고 번개 불에 콩 구워 먹듯이 벼락
공부해서 시험 잘 보겠다고 하면 그게 되겠어요? 강연 하나
시켜놓으니까 놀다가 전날 강연 준비 죽어라 하면서 교무님 욕하고
있고.. 내가 살다 보면 이쁨도 받고 욕도 많이 받습니다.
자기가 안 해가지고 놓고는.. 나는 철저히 미리 준비 합니다. 내가 작년
말에 내년 1월치까지 강연 제목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아.
달력에 그 제목을 써 놓고 연마해봐. 참고 안 해도 됩니다. 내 안에
지혜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연마해서 이런 예도 있고 저런 예도
있고.. 교무님 법문을 들어도 연마가 되고 전철 속에서 누가 지나가다
말만 해도 연마가 되고 그것 하나 잡고 사통오달로 연결되는 것이다.
내 안에 지혜가 솟아나서 내것화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있다. 컴퓨터로 찾고 있고, 누구 꺼 따다가 갖다 내놓고..
그것 하라고 강연 주었겠어요? 강연 잘하라고 강연 주었어요? 연마한 것
모아서 강연하라고 한 것 아닙니다. 연마해서 잘 하라고 강연 준 것이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다른 사람 것 갖다가 참고도 하지만
내 안에서 내것화 되지 않으면 아무런 힘이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지식 모아서 조금씩 풀어서 써먹고 살았습니다.
이제는 인터넷 치면은 더 잘 나와 있다. 내 안에서 무궁무진하게 일과
이치에 연구해서 조합해서 얼마든지 창조적으로 만들어 내놓아야 돼.
그 안에서 아이디어가 탁탁 나와야 한다.
그러려면 내 안에 지혜 광명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먼저 믿고
꾸준히 연마해야 합니다. 글하나 잘 쓰려면 책도 많이 읽어야지만,
습작을 해야 돼요. 그대로 베껴야 한다. 좋은 시, 좋은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베껴야 합니다. 베끼다 보면 달라진다. 그렇게 하면서 내가
문학가, 소설가, 시인이 되는 것이지.. 자기가 좀 감각 있으니까 책
안보고 자기의 머리로만 한다면 될 것 같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과 이치를 다 알고 싶잖아요. 안 그래요? 그러면 사리 연구를
하셔야 한다. 우리가 심신을 수호하는 공부는 정신 수양 과목으로써
동정간 과목이 많이 있죠?
정말 고요해지려면 원불교 식구들 제발 선 좀 하세요. 무엇이 바빠요?
욕심 못 놓아서 포기 못해서 바쁘지.. 직업상 어쩔 수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로는 옛날보다 시간 많아요. 기계가 밥하고 기계가
빨래하고 다 태워다 줍니다.
옛날에는 내가 직접 다 해야 했습니다. 요즘은 기계가 다해 줍니다.
그런데 왜 바빠요? 포기 못하니까 바쁩니다. 심신 수양 할 시간도 없고,
경전 사경 좀 하라니까 팔뚝 아프다고 하고, 바쁘다고 합니다.
그래가지고 사리 연구 되겠습니까?
사리 연구를 잘 한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또는 해독 속에서도
은혜를 찾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리연구가 부족한 사람은 은혜
속에서도 해독만 발견합니다. 묘합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나는 어려움 속에서도 은혜를 발견하는가? 좋은 환경 속에서도 원망
생활을 하고 해독만 발견하고 있는가?
여러분 이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각자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저대로 특징이 있고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각자 특징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그 특징을 잘 이해 해주어야지. 전부 내 잣대로
대고 미워하면 그것이 어떻게 되겠어요? 그것은 일과 이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항하사 모래가 그렇게 많지만 똑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답니다. 다 다릅니다. 왜 그래? 흘러오면서 수많은 경계가 다 각각
다릅니다. 일과 이치 속에서도 사람의 관계에서도 다 다르다.
그 다름을 알아야죠.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를 하며
혜경교우가 이야기를 잘 했는데, 살 빼면서 마구 퍼먹으면 살이
빠집니까? 안 빠지잖아요. 잘 먹는 사람들이 운동 이야기를 합니다.
운동이 두 번째 세 번째입니다. 살 찌는 원인의 첫째가 먹는 것이랍니다.
너무나 아쉬운 것은 미국에서도 잘사는 사람들은 살찐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못사는 흑인들 못사는 남미 계통은 다 뚱뚱해..
우리 나라도 옛날에는 잘 사는 사람들이 뚱뚱했지만, 지금은 어려운
사람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먹는 것으로 해소하고 쌓여서
뚱뚱해집니다. 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럴 때는 타력도 필요합니다.
의지만으로 되는 것 아닙니다. 운동 하려 해도 어느 정도 선이 넘으면
지쳐가지고 운동할 마음도 없습니다. 습관과 업력의 힘이라는 것이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그럴 때는 자•타력 병진을 해야 한다.
취사 관계도 일기를 기재한다던가. 아니면 우리가 계문을 대조한다던가.
솔성요론을 활용 하는 것이다. 한 번에 다 하려면 힘드니까. 하나씩
잡아서 처리해야 합니다. 내가 계문 중에서 제일 처리 하고 싶은 것
하나를 유념으로 잡아서 계속 대조하고 포커스를 맞추면 해결이
점진적으로 됩니다. 묘하게 하나 해결하면 자신감이 붙습니다.
그것이 체험입니다. 오, 되네?
그런데 두리뭉실 하게. ‘탐심을 내지 말며’. 탐심을 탁 유무념으로 잡아
놓았습니다. 될 것 같아요? 탐심은 나는 것이고, 다른 것부터 먼저
기초적인 습관부터 처리해야죠. 문을 안 닫는 것. 이를 안 닦는 것.
몇 시에 일어나는 것. 이런 간단한 것부터 내가 유무념을 잡아서 처리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아 되네? 하면서 확신이 붙고 자신감이
붙습니다. 그러면서 영역이 확대되는 것이다.
대종사님은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시키지 않으셨어요. 다 근기에 따라서
하도록 보통급은 조금 주고. 좀 괜찮네 열 개 더 가져라. 응 괜찮네
하나 더 가져라. 그렇게 다르다.
지금 어디까지 갔어요? 사용하는 공부죠. 하는 것입니다.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지성으로 하여
지성이라는 것은 성자에 지를 넣었다. 지극하고, 지원지성이라고 한다.
그 원이 지극하면 정성이 지극하면 이루어진다. 저는 대종사님이 대단한
것 중에 하나가 어린 7살짜리가 삼밭재를 비가오나 눈이 오나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계속 올라갔잖아요. 몇 년간?
5년을 올라 다녔습니다. 그것이 지성 아닙니까?
저는 거기서 우리 대종사님이 힘이 쌓였다고 봅니다.
그 삼밭재를 나는 한 번 올라 가도 숨차서 죽겠던데.. 그런데 우리는
삼밭재 올라가라고도 안하고, 다섯 시 반. 아침 좌선에 오라고 해도
못 옵니다. 그것도 길어 봤자 1년, 2년. 삼밭재도 아닌데..
지성이 아니죠. 뭐가 되겠어요?
성자들은 다른 것이 있는데 지성이다. 요새 젊은이들로 말하면 고집이다.
한번 물면 안 놓습니다. 서원을 놓지 않은 고집. 수양에 대한 목표를
잡고 그걸 놓지 않는 고집. 이 고집은 정말 좋은 고집입니다. 그때는
관계형 같이 우유부단하면 안 됩니다. 한 번 잡으면 끝까지 놓지 않는
고집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루어 집니다.
여러분 옛날에 부싯돌을 불을 지피잖아요? 여러분들에게 해보라고
할까요? 막 하다가 ‘아이고 죽겠다 좀 쉬다가 하자.’ 또 막 하다가 좀
쉬다가 하면 되겠어요? 백날 해도 불 안 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해?
북미원주민이 비 올 때까지 기도하듯이 불이 붙을 때까지 비벼야지.
그래야 불이 붙죠.
정성이라는 것은 하다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정성이다. 그 속에서 조화가 일어나고, 감동이 일어나고,
감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범마상전급은 사람들이 착하다고 박수 쳐줍니다. 항마위가 되면
누구한테 박수 받겠어요? 진리로부터.. 큰 스승들로부터 박수 받는다.
그런데 항마위를 넘어서면 천인 아수라가 다 옹호해 줍니다. 위력도
다르다. 법마상전급이 받는 위력하고 항마위가 받는 위력하고 출가위,
여래위가 받는 위력 자체가 다릅니다. 여러분 법마상전급만 되도
사람들한테 칭찬 엄청 받습니다. 그것이 위력이다.
우리가 정성으로 하다 보면 내가 나한테 먼저 감동합니다.
그러면, 설사 어떤 것이 잘못되더라도 ‘나 할 만큼 했다.’고 합니다.
사실 어중간한 것은 일이 됩니다. 근데 자기가 생각해도 자기가 아닌 것
같아. 하다가 만 것 같아. 그러면 누가 됩니까? 내가 나를 예뻐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예뻐해? 내가 나한테 감동하지 않는데
누가 나한테 감동해? 안 하지요.
지성이라는 것은 내가 나한테 감동하고 더 나아가서 내 주위가 감동하고
더 나아가서는 진리가 감동하는 것 그것이 지성이라는 것이다.
참.. 삼밭재 안 올라와도 좋으니까? 선 좀 나와요. 선 좀.. 기도도 하고
저녁에 일기도 쓰고.. TV는 몇 시간씩 보면서
그 일기와 헌배는 바빠서 못합니다.
언제 지성으로 해요? 일상 수행에서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당 내왕시
상시 응용 주의 사항을 쭉 하는 것. 그것이 지성이다. 신앙 생활도
지성으로 해보세요. 부싯돌을 계속 비벼대면 불이 붙듯이.. 나무를 계속
때다 보면 물이 끓듯이.. 분명히 되는 이치가 있다. 분명히 됩니다.
그것이 위력을 얻는 것이다. 그것이 위력이지 뭐에요.
우리가 위력을 얻는 것은 언제 얻느냐? 때로는 순간 순간 얻고 때로는
경계 속에서 위력을 얻는 것이 좋다. 때로는 스스로 얻고 때로는 타력을
통해서 얻기도 한다.
위력을 얻는 길을 우리 대산종사님은 간단하게 말씀하셨다.
‘사사’가 끊어지면 위력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사사의 반대말은 바르냐? 공적이냐? 사사는 바르지 않고 삿 되냐?
사적이냐? 사실은 자기를 넘어서지 못하면 위력이 없는 거에요. 나라는
것만 놓으면 그것 자체가 위력이다. 나를 어떻게 놓으라는 것이냐? 본래
내가 없거든..? 나라는 것이 어디 있냐? 그 말이다. 나라는 것이 본래
없다. 그러기 때문에 본래 없는 것은 이미 그대로 위력이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체성은 뭐라고 했느냐? 망념이 끊어지면 된다고 했다.
망념만 끊어지면 체성에 합한다. 망념이 끊어진다는 것은.. 우리 심지가
본래 요란하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고 그르지도 않습니다. 경계 따라
잠깐 그른 것이다. 그것이 끊어진 그 자리에 갈 것 같으면 그것이 바로
체성을 얻는 길이요. 하나가 되는 길이다.
원불교 만나가지고 나를 놓아버리고 내가 없는 상태에서 우주와
합일하는 경지를 최소한 한 번씩은 맛 봐야지. 그냥 믿고만 다니고
설교만 들을 것입니까?
그래서 위력을 얻는 것은 신앙을 통해서 타력을 입는 것이고,
또 체성에 합하는 것은 자력을 통해서, 수행을 통해서,
내가 얻어가는 길이다.
언제? 언제?
그때 그때. 경계에서….
합하도록 까지 서원함.
함이라는 것은 머금은 것이고 다짐하는 것이다.
일원상 서원문을 외우시거나 하실 때, 이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
하면 어떻게 해야 해요? 그래... 체받아서.. 그래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 그래 수호하자. 놓친 경계에서.. 포기할 것 포기하고
본래 자리를 수호해 나가자. 그리고 사리를 원만하게 알고.. 그래 내가
이 알음알이 공부를 해보자. 그리고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를
하자. 그래서 내가 진급이 되고 은혜를 입자. 그럴지언정 강급 되고
해독을 입지 아니하기로써 위력을 얻도록 까지 또는 체성에 합하도록
까지 나는 그 일원상의 서원을 놓지 않겠습니다. 그것을 서원합니다.
그것이 일원상의 서원이다.
독경을 하실 때 그렇게 하면 일원상 서원문 한 번만 해도 위력이
대단합니다. 너는 해라. 나는 피곤하다. 나는 가만히 있겠다.
여러분 독경할 때 같이 하세요. 개성을 중요시하고 안하고 싶은 사람은
안 해도 되지 않느냐? 그런 사람은 복을 못 받아요. 같이 복 받을 때 복
받으려면 독경 할 때 같이 하세요.
아침 좌선 끝나고, 또는 법회 때 독경 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에요?
실지 마음을 대조하는 거에요. ‘일원상 서원문..’ 그래 일원상 서원인데
그 서원이 얼마나 거룩하고 이 세상 보물 중에 보물이에요. ‘일원은
언어도단의 입정처요.’ 내 참마음은 언어도단의 입정처다. ‘체성에
합하도록 서원함.’ 그러면 힘이 나는 것이죠.
법회 때도 그렇게 하면 아주 좋아요.
제가 부산에 가니까 상광사라고 있습니다.
독경을 해요. 천 명이 독경을 하면 그 소리가 진짜 하늘의 소리 같아요.
아침에 예불을 해도, 얼마나 법당이 크던지..
그 속에서도 ‘천명이 있으니까 나는 소리 안 해도 되겠지’,
‘나는 피곤하니까’, ‘나는 독경 잘 못하니까’, 이런 사심을 먹으면
안됩니다. 독경을 할 때는 같이 독경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일심이다. 그래야 위력이 있어진다.
다음주에는 일원상 법어입니다.
일원상 법어는 깨달음의 표준, 각행의 표준, 행위의 표준에 대한
법문입니다. 일원상 법어를 보고 탁탁 해득이 되면 내가 견성을 했구나.
알 수 있고 이게 뭔 소리냐 하면 아직 멀었구나 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타이핑:
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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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양이 많지만 여러분들도 이제는 적응 하셨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서원이 충만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v
감사합니다~! 법문의 위력...정리의 위력이... 눈에 보이는 자기력의 움직임처럼 확연하여, 이~ 맑은 아침... 이~ 마음... 웅혼한 참기운으로 일렁입니다.
맑은 아침에 법문을 읽는 맑은 눈동자... ^^ 천숙교도님 고맙습니다.
교무님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이 떠오르네요.. "우리가 이런 은혜속에 삽니다." ^^ 감사합니다~ 혜민, 정원 교우님~!!!
사은님의 상큼한 꽃내음이 우리 모두에게 널리 퍼지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
항상 고맙습니다. ^^
열강 고맙습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다시 보니, 정말 좋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