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매동(江梅洞)
강매동은 행신동의 남쪽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 명칭으로 매화정,은행정,강구산 마을이 있다.
마을 동남쪽 끝으로 창릉천이 흐르고 있고 경의선 강매역이 위치하고 있는 농촌지역이다.
옛 지도읍의 대표적인 마을인 강구산 마을의 '강(江)'자와 매화정 마을의 '매(梅)'자를 따서 강매리라는 법정동
이름이 만들어졌다.
- 고양동(高陽洞)
고양동의 벽제동의 남쪽, 대자동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 명칭으로 벽제관지, 고양향교등의
문화재가 있으며, 마을내에는 읍내,점막,향고돌 등의 마을이 있다.
옛날 고양지역에는 고봉현과 덕양현이라는 두 개의 현이 있어 군 이름을 지을 때 이 두 현의 이름을 따서
고양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고양동에 군수가 머무는 관사,관아 등이 있어 고양의 중심지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관산동(官山洞)
관산동은 대자동의 서쪽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 명칭으로 통일로가 통과하고 있으며, 마을내에는 시묘동,
깊으내,주막거리,넘말,두포동,가장동,고골 등의 자연촌락이 있다.
마을 남서쪽으로는 곡릉천이 흐르고 시민들의 휴식처인 벽제 건전체육공원과, 필리핀 참전탑이 있다.
관산동이란 이름은 조선시대부터 한양에서 평양,개성,의주 그리고 멀리는 중국을 왕래하던 관원들이 숙박을
하던 객사(벽제관)가 이곳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내곡동(內谷洞)
내곡동은 토당동의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능곡역에서 일산 신도시 방향에 위치한 법정동 마을이다.
마을 뒷편으로는 염주산이 있으며 앞쪽의 한강방향에는 드넓은 능곡평야가 펼쳐져 있다.
마을내에는 안골,뒤꾸지(뒷골) 등의 자연촌락이 있다.
내곡동은 멀리 능곡쪽에서 볼 때 염주산 산 기슭의 안쪽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내유동(奈遊洞)
내유동은 관산동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 명칭으로 마을내에는 내산동,응달촌,신성동,유산동 등의
자연촌락이 있다.
내유동은 내산(奈山)과 유산(遊山)의 두 마을 이름에서 첫 글자씩을 따 만든 명칭이라고 한다.
- 대자동(大慈洞)
대자동은 고양동의 서북쪽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 명칭으로 쌍궁말,고골,대적골,빈정동,용복원,한오동,
새원등의 자연촌락이 있다.
고양시 마을중 가장 많은 문화유적이 있는 곳으로 최영장군 묘를 비롯하여 연산군대 금표비 등도 이곳에 있다.
대자동이란 유래설은 다음과 같다.
조선조 태종의 넷째 아들인 성령대군은 총명하고 용모가 단정하여 태종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으나 그만 홍역에 걸려
일찍 죽고 말았다. 이에 상심한 태종은 무덤 근처에 암자를 세워 불공을 드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길이
너무 멀어 임금이 이곳을 자주 왕래하면 혹 나라 일을 소홀히 할까 봐 잦은 행차를 삼가도록 진언하였다.
이에 태종은 무덤 근처에 큰 자비를 내린다는 뜻으로 대자사(大慈寺)라는 절을 지어 성령대군의 명복을 빌었으며
이때부터 이 절의 이름을 따 대자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대장동(大壯洞)
대장동은 내곡동과 토당동 사이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으로 흔히 '대재이'라고 부른다.
마을 중앙으로 교외선이 지나고 마을에 대정역이 위치하고 있으며 화정동과의 사이에 큰 벌판이 형성되어 있다.
대장동은 이 마을 뒷편에 있는 산의 생김새가 마치 '큰 대(大)'자처럼 뻗어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
- 덕은동(德隱洞)
덕은동은 화전동의 남쪽 현천동의 동쪽 마을에 위치한 법정동 명칭이다.
고양시의 가장 끝쪽 마을로 주변에 난지도 쓰레기 매립지가 있다.
마을내에는 국방대학원이 있고 부근 군인아파트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농촌지역으로 마을 내에는 유곽괄,대터,
원골,샛말 등의 자연촌락이 있다.
덕은동이란 이름은 옛날 덕정 선생이라는 분이 덕은리를 둘러싸고 있는 대덕산에 은둔해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다르게는 이분이 대덕산의 큰 은혜를 입고 살았기 때문에 덕은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 도내동(道乃洞)
도내동은 원흥동의 남쪽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 명칭으로 원흥동과 비슷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으며 마을 내에는
석탄촌,서촌,동촌,샛말,은못이,서재동(소죽골) 등의 자연촌락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고양 8현의 한 분이신 이신의 장군이 용두동에 포진하고 있던 왜군과 대치하면서 창릉천을 사이에
두고 지연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왜군의 수가 너무 많아 쉽게 공격 당할 처지에 있었다.
이에 이신의 장군은 왜군에게 아군의 병사가 많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의병 3백명을 이끌고 며칠동안 산을 돌았다 한다.
이런 사연으로 인해 이곳 산이름을 도란산이라 불렀는데, 도내동이라는 고을 이름 역시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 동산동(東山洞)
동산동은 삼송동의 동쪽에 위치한 법정동으로 마을내에는 하촌,바깥말,새말,상촌,뱀골 등의 자연촌락이 있다.
동산동은 이 지명이 생길 당시 고양군청의 위치가 옛 벽제지역에 있어 고양군청에서 볼 때 동쪽 산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 벽제동(碧蹄洞)
벽제동은 고양시의 가장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 명칭으로 파주시,양주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 주위로 개명산,우암산,앵무봉 등의 높은 산들이 있다.
마을내에는 응달촌,목암동,상곡촌,전마을 등의 자연촌락이 있다.
지명 유래설은 첫째, 조선시대 영조가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인 뒤 이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시호를 사도라 하고 세자의 혼을 달래던 중 우연히 이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주위의 숲이 너무도 울창하고 골이 깊어
벽제라 하여, 그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설과 둘째, 옛날에는 고위관리가 길을 지날 때는 이를 큰소리로 알렸는데
이 소리를 내로 도구를 벽제라 하였다.
이곳 벽제는 중국 북부지방과 연결되어 있어 이 벽제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 북한동(北漢洞)
북한동은 북한산 및 산기슭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 명칭으로 고양시에서 해발이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하다.
마을은 대표적인 산촌(山村)마을로 바위나 하천 옆에 입지하고 있다.
마을 내에는 하창,서문안,음짓말,양짓말 등의 촌락이 있다. 북한동은 북한산 안에 있는 동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삼송동(三松洞)
삼송동은 전철3호선 삼송역이 있는 법정동 명칭이다.
이곳은 옛 신도읍의 중심지역으로 신도동사무소,농협,파출소 등이 위치해 있다.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서울에서 가까우면서도 일산,능곡지역에 비해 개발단계가 저조한 편이다.
마을 동쪽으로 창릉천이 흐르고 북쪽으로는 벽제관 전투가 벌어진 숫돌고개가 있다.
삼송동은 세솔리(또는 세수리)라고도 하는데 예전에 세수리 마을에 커다란 소나무 세 그루가 있어 세솔리라
부르던 것을 한자 표기하면서 삼송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선유동(仙遊洞)
선유동은 교외선 벽제역의 동쪽 약 400m∼2Km 내 거리에 있는 마을의 법정동 명칭으로 월촌,성촌,불미지 등의
자연촌락이 있다.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대부분 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으며 동쪽과 남쪽으로 곡릉천이 흐르고 교외선
철로가 마을을 가로질러 관통하고 있다.
선유라는 이름은 예로부터 못이 맑고 경치가 좋아 신선이 내려와 자연을 벗삼아 놀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성사동(星沙洞)
성사동은 흔히들 원당이라 부르는 성사1,2동과 홍도동에 속해 있는 성사동으로 나뉜다.
성사1,2동 지역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어리골,살곶이,용우출이,사근절이,윗배다리,수역이 등의 자연촌락이 있는
농촌지역이었으나 1990년대 초 성사2동이 성사지구란 이름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여 신원당 마을이 되었으며,
이후 전철3호선의 원당역이 들어섰다.
마을 부근에는 복재 기준선생의 묘소를 비롯해 성라산,성래약수터 등이 있다.
옛부터 이 마을에 있는 성라산에 올라가 별을 보면 별이 비단같이 많이 보인다 하여 '별 성(星)', 사근저리 마을의
'모래 사(沙)'자를 따서 성사리라고 하였다고 한다.
- 식사동(食寺洞)
식사동은 주교동에서 서북쪽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 명칭으로 고양 가구공단으로 유명한 곳이다.
마을 뒷편에 견달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마을내에는 영심이,오룡동,동거리,방아고개,오침이,견달,고운마을,능안골
등의 작은 촌락이 있다.
마을 가운데로는 개발제한구역 경계선이 지난다.
식사동의 지명 유래는 다음과 같은 전설과 관계가 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조선 태조 이성계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고, 이들을 피해 개성을 빠져 나와 임진강을
건너 남쪽으로 피신중이었다. 왕이 이곳 식사동에 도착했을 때 더 이상 길을 갈 수가 없을 정도로 날이 어두워
공양왕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곳을 어침(御寢)이라 하였다.
공양왕이 고개를 들어 건너편을 보니 멀리 한줄기 빛이 보여 반가운 마음으로 불빛이 비치는 곳을 찾아가 보니
그곳은 조그만 사찰이었다. 그러나 시국의 어수선함 때문에 사찰에 머물지 못하고 인근 암자에 머물러 있을 때
그 절에서 공양왕에게 매일 밥을 해다 주었다 하여 식사란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아울러 이 절 근처를 박적골(밥절) 또는 박절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식사동(食寺洞)은 밥절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 신원동(新院洞)
신원동은 원당동의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곡릉천과 통일로를 사이에 두고 대자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법정동이다.
관내에 뉴코리아 골프장이 있으며, 마을 내에는 능골,송강마을,안터,조관동,해방촌,새원,한우물,장뜰 등의 마을이 있다.
조선시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옛 신원2리(조관동 마을)에 위치한, 지금의 신원초등학교 앞에 궁을 짓고
살았는데 그때 그 궁의 이름이 신원이었다. 이 신원이라는 궁의 이름이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는 예전 이 마을앞은 한양에서 중국으로 이어지는 관서대로가 지나고 있었는대 이 길가에 새로 원(院)을 만들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 신평동(新坪洞)
신평동은 토당동 삼성당 마을의 서쪽에 있는 마을로 자유로 아래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원래 김포군에 속해 있던 곳이나 1922녀 고양군으로 편입되면서 고양군에서는 새로운 펄이 생겼다 하여
새펄이라 불렀고 이것을 한자 표기하면서 옮긴 것이 신평리(新平里)이다.
- 오금동(梧琴洞)
오금동은 삼송역의 북동쪽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 명칭으로 마을의 남서쪽으로 1번 국도인 통일로가 지나고 있다.
마을은 크게 하촌,중촌,상촌으로 구분되어 있으나 본래는 모장말,큰골,새말,당꼬말,독정,산막골 등의 자연촌락이 있다.
개발제한구역내에 위치하고 있어 비교적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마을의 지명 유래설은 마을의 생긴 모양이 가야금 같다고 하여 오금이라 불렀다는 설과, 옛날 한 선비가 이 마을
큰 오동나무 밑에서 거문고를 탔기에 지나던 백성들이 그곳을 오금이라 불렀다는 설, 정월 대보름날 마을 한가운데
있는 약정산 또는 백토산에 올라 달맞이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어느해 뜻하지 않게 이 산에서 오동나무가 발견되어
오금리라 불렀다 하는 설이 있다. 끝으로 이곳에 아주 옛날부터 오동나무가 매우 많아 이 오동나무로 가야금을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 용두동(龍頭洞)
용두동은 동산동의 남쪽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 명칭으로 일명 용머리로 불리우며 서울시 은평구 구산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관내에 서오릉이 있으며 마을내에는 비선말,아랫말,능말,윗말,가운뎃말,운하리 등의 자연촌락이 있다.
용두동이란 지명은 이곳 마을의 형세가 마치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고양시에서
구전되는 '아기장수와 용마' 전설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 원당동(元堂洞)
원당동은 고양시청이 있는 주교동의 북쪽과 동북쪽에 위치한 법정동 명칭으로 서삼릉,고려 공양왕릉 등이
있는 곳이다. 교외선 기차가 마을을 통과하고 마을 내에는 원당골,섬말,다락골,제청말,청대골,진텃말,왕릉골 등의
마을이 있으며. 비교적 농촌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이곳의 지명유래는 서삼릉과 같은 문화유적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예로부터 이곳에서는 정승이 많이 났고
또 그분들의 묘자리로 널리 쓰이던 명당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서삼릉인데 이곳에 왕릉의
재실이 있어 '으뜸 원(元), 집당(堂)자를 써서 원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원흥동(元興洞)
원흥동은 고양시청으부터 동쪽으로 3∼4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마을의 법정동 명칭으로 마을 내에는
솔개,가시골,나무드머리(육골,구석말,웃말,궁석말)등의 자연 촌락이 있었으며 이곳에는 신라 말, 고려 초기의
청자 도요지등 몇 곳의 문화유적이 있으며 건지산이 있는 농촌지역이다.
이곳은 원래 목흥리(木興里)였는데 조선시대 태종의 여덟 번째 아들인 익녕군이 죽어 이곳에 묻히게 되었을 때
지관이 이르기를 '이곳의 지형은 니구예형(泥龜曳形), 즉 거북이 진흙밭에 있는 형국이니 이곳의 지명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라고 간하여 '흥(興)'자를 '드물 희(稀)'자로 바꾸도록 하였다.
그때부터 이곳을 목희리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고양군지'에도 목희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인조시대 때 인조의 옹립에 공이 컸던 이괄이 난을 일으켰다. 이괄이 반군의 무리를 동원하여 한양으로 진격,
벽제땅에 이르게 되었을 때 성묘를 왔던 심창이 이 급보를 곧장 한양에 고하여 인조로 하여금 공주로 피신하도록
하는 한편 자기 자신은 이귀 휘하에 들어가 반란군과 대적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 인조는 심창에게 나라의 운을 근본적으로 일으키게 한 공이 있다고 치하하고 큰 상을 내렸다.
그때부터 이곳을 근본을 일으켰다는 뜻의 원흥리(元興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여 진다.
- 주교동(舟橋洞)
주교동은 고양시청이 위치한 곳의 법정동 명칭으로 농촌과 도시가 어우러져 있는 곳이다. 마을의 동쪽 끝으로
서울 교외선이 통과하는 등 교통이 매우 편리한 곳이다.
지명에 대해서는 몇가지 유래설이 있는데 첫째는 1920∼1930년대 한강제방이 축조되기 전 이곳 주교동에
(옛지명 배다리)에는 한강으로 흐르는 샛강이 있었는데 이 샛강에 다리가 없어 배를 가지고 다리를 만들어 건넜다
해서 생겨난 지명이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갯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토탄층이 대규모로 출토되고 있다.
두번째 설은 지형과 관련된 유래설로 마을의 모양새가 마치 배 모양처럼 생겼다 해서 배다리라 부르게 불렀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주교동이 되었다는 설이다. 마을에는 박재궁,독곶이,이작골,넘말,능골,장터거리 등의
작은 마을이 있다.
- 지축동(紙축洞)
지축동은 효자동의 남서쪽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 명칭으로 전철3호선 지축역,지축기지등이 있으며 창릉천이 지나간다.
지축동은 마을에 싸리나무가 많아 싸리나무골이라 불리던 옛 지명 축리의 '축'자와 , 닥나무가 많아 종이를 만드는
집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지정동(紙亭洞)의 '지'자를 따서 지축리라 불렀다 한다.
- 토당동(土堂洞)
토당동은 경의선 능곡역이 있는 부근마을의 법정동 명칭으로 사뫼,능골,얼뜰,삼성당 등의 자연촌락이 있으며
시장,상가 등 밀집지역이다. 토당동의 유래는 첫째 이 마을에는 예전부터 치성을 드리던 삼성당이라는 사당이 있어
마을의 중심이 되었는데 이 삼성당에 흙으로 만든 사당, 즉 토당(土堂)이 있어 마을이름을 토당이라 불렀다는 설과
둘째, 삼성당에서 지내던 도당굿, 도당제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로, 도당굿(제)를 지내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도당리
하였는데 이것이 변하여 토당리가 되었다는 설, 셋째, 옛부터 이곳에는 낙향한 선비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들이
가난하여 흙으로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에 토당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 행신동(幸信洞)
행신동은 토당동의 동쪽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 명칭으로 마을내에는 장고뫼,번데뫼.가라뫼,소만이,차장말,무원이,
송장고개,성신마을 등의 자연촌락이 있던 곳으로 현재는 소만마을,무원마을의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행신이라는 이름은 약 300년 전 청주 한씨 후손들이 이곳에 묘자리를 쓰면서 머물러 살게 되었는데, 그 후손들이 이곳에
머물러 사는 것을 다행한 일이라 여기고 서로 믿으며 살라는 뜻으로 행신(幸信)이라는 이름을 썼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 행주 내.외동(幸州 內.外洞)
행주내동은 강매동의 서쪽에 있는 마을로 행주산성 안쪽의 자연촌락 이름이다. 행주산성이 주변에 있으며 자유로가
지나고 있으며 마을 내에는 잣골과 맨돌 마을이 있다.
행주내동은 행주산성의 바깥방향에서 바라보면 산성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본래 행주(幸州)란
이름은 이곳에 살구나무가 많아 행주(杏州)라 하던 것을 후에 한자가 변하여 행주(幸州)가 되었다고 한다.
행주외동에는 행주서원이 있으며 마을내에는 달동네,갬뱃말,서화촌 등의 마을이 있다.
- 향동동(香洞洞)
향동동은 화전동의 동쪽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 명칭으로 많은 지역이 서울시 은평구와 경계를 하고 있으며 마을의
북쪽은 서오릉으로 유명한 용두동이다. 마을내에는 원수골,간절,애기능,묘골 등의 자연촌락이 있다.
향동이란 이름에 대해서는 첫째, 마을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져서 산골 또는 향골로 불리웠는데 봄이 되면
산골짜기로부터 여러 가지 꽃들이 만발하여 온통 꽃향기로 가득 찼기 때문에 꽃향기의 마을이라고 해서 '향동'이라고
불렀다는 설과, 둘째, 이완용의 집안인 우봉 이씨들이 그들의 선산에 여러 가지 좋은 꽃을 많이 심어 그 향내가 가득했다
하여 향동리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 현천동(玄川洞)
현천동은 화전동의 서쪽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 명칭으로 음짓말,아랫말,난점,먹골,봉룡골 등의 마을이 있다.
한강과 가깝고 대부분이 농촌지역으로 남아 있다. 마을의 서쪽 끝으로 한강제방이 있고, 그 위로 자유로가 지나며
마을 앞과 옆으로 대덕산이 있다. 이곳의 원래 명칭은 가무내(거무내,먹골)로 '고양군지'에서는 이곳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옛날 이곳에는 고양 8현의 한 분인 행촌 민순 선생이 사셨는데 너무 가난하여 수학할 당시 종이를 살 돈이 없어
궁리 끝에 큰 가랑잎에 글씨 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봄에 삼각산의 얼음이 녹아 흐를 때가 되면 행촌 선생이 겨우내
글씨를 연습했던 가랑잎들이 그 물에 씻겨 내려가면서 검은 물이 흘렀다고 한다.
이에 이곳을 '검을 현(玄)', '내 천(川)'자를 써서 현천리라고 하였고 한자를 쓰지 않고 '검은내' 또는 '거무내',
'가무내'라고도 하였으며 다르게는 먹물이 흐르는 골짜기라는 뜻으로 먹골이라고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 화전동(花田洞)
화전동은 고양시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마을 중의 한 곳으로 고양시 도내동의 동남쪽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 명칭이다.
경의선 화전역이 있으며 한국항공대가 소재한 곳으로 마을 내에는 안골동네,벌말,밤나무골,대흥관사 등의 마을이 있다.
화전동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첫째, 옛부터 이곳에는 각종 꽃들이 많이 피어나 꽃밭이라는 이름의 뜻으로 화전(花田)이라고
불렀다는 설과 둘째, 이곳 땅이 원래 밭에다 불을 지르고 농사를 지은 화전(火田)이었는데 '불 화(火)'자 대신에
'꽃 화(花)'자를 써서 지금의 화전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 화정동(花井洞)
화정동은 능곡과 원당사이의 39번 국도 우측에 있는 마을로 화수촌(일명 꽃물, 골머리), 냉정(찬우물), 백양동 등의
자연촌락이 있었으나 1990년 초 아파트 택지개발 사업으로 대단위 주거단지로 조성되었다. 화정은 옛 화정1리 화수촌과
화정2리 찬우물(냉정) 두 마을의 '꽃 화(花)'자와 '우물 정(井)'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 효자동(孝子洞)
효자동은 북한동의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구파발에서 의정부로 이어진 도로 우측에 있는 마을의 법정동과 북한,효자,
지축을 합친 마을의 행정동 명칭이다. 마을은 개발제한구역 내에 있어 예전의 자연촌락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조선시대 한양 사대문 안에 살던 박태성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부친상을 당하여 지금의 효자동에 묘를 썼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부친 묘소를 찾았는데, 거리가 멀어 생계가 막막해 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호랑이가 나타나 매일 그를 업고 부친의 묘소를 왕복하니 이에 많은 사람들이 감복하여 그의 효를 기리고자
부친의 묘소가 있는 곳을 효자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