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3. 23. 수요일
mahatmamauri
일전에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복권 논의가 한창일 때,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한 이들이 바로 제주 도민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주 4.3사건(아직 까지는 광주민주화운동처럼 공식명칭이 부여되지 않아 부득이 이렇게 부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당시 더 많은 희생자를 내고도 보상은커녕 피해 사실마저도 숨기고 살아야 했던 반세기를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기도 하다.
로버트 카파, 스페인 내전에서 어느 병사의 죽음 1936
제주 4.3사건은 스페인 내전과 여러 모로 닮아 있다. 둘다 2차 대전 시기를 전후해 근대 국가 성립과정에서 벌어진 비극이며 결국엔 어두운 독재의 터널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었다.‘인류 양심의 전쟁’으로도 불리는 스페인 내전이 70만의 희생자를 내고 독일 나치스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군의 승리로 끝나자 파시즘의 대두, 프랑코의 독재, 2차 대전이 몰려왔다.‘세계최초의 반미운동’으로 일컬어질 제주 4.3사건이 군경에 의해 3만명(공식추정치. 유가족 추정치 5만에서 8만. 당시 제주도 인구 30만)의 희생자를 내고 끝나자 분단 고착화, 이승만 독재의 시작이 되었다. 이렇게 큰 사건들을 학교에서 배울 수 없었다는 사실까지 닮았다.
학교에선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두 사건을 나는 20대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스페인 내전은 군복무 시절 중대 행정반에 돌아다니던‘20세기 극적 결전’이라는 책을 통해서, 일종의 전쟁사적 측면으로 알게 되었다. 제주 4.3 사건은 20대 후반이 다 되어서야 김석범의‘화산도’와 단편‘까마귀의 죽음’같은 소설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는 나 자신의 역사의식 결여에 1차적인 책임이 있지만, 한국의 시대적 특수성내지는 구조적 모순의 책임또한 크다고 생각한다. 동시대를 관통하는 이 두 사건에는 공히 사회주의라는 화두가 깔려 있다.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광적인 ‘레드 콤플렉스’는 이 두 사건에 대해 의도적으로 철저히 함구해왔다.
스페인 내전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공화국군의 든든한 지원 세력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헤밍웨이의 소설‘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주인공 역시 이 공화국 편에 서서 싸우고 있다. 적합한 절차를 통해 탄생한 공화국 정부를 전복하려는 프랑코일당(그리고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는 스페인의 독재자가 된다.)은 독일 나치스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았고, 이에 맞서 사회주의 세력(소비에트 공화국)의 지원이 공화국에 이어졌다. 그리고‘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의 주인공처럼 자기 양심에 따라 움직인 젊은이들의 투신이 공화군 진영에 이어졌다. 심지어 나치가 프랑코 반군의 가장 강력한 지원자였음에도 불구하고,‘모든 독일인이 반군 편은 아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두 명의 독일 청년이 공화군 편에 서서 참전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전 세계에서 수많은 지식인들이 공화군을 위하여 싸웠던 ‘인류 양심의 전쟁’이 바로 이 스페인 내전이었다. 이를 ‘반공’을 내세워 가르치지 않고 심지어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고발한 피카소의 걸작 ‘게르니카’를 미술책에서 지운 나라가 대한민국 이었다. 피카소를 찬양했다는 이유만으로 곽규석씨가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던 대한민국에서 이를 사실 대로 가르칠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피카소, 게르니카
제주 4.3사건은 어떤가? 당시 내무부장관이라는 사람(조병옥)의 입에서 나온 지시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제주도민 30 만을 모두 죽여서라도 진압하라’말에 따라 전체 인구의 10%이상이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참혹한 일이었다. 당시 제주 도민이 당한 고통은 광주시민이 받은 고통 이상이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더욱 슬픈 것은 민주화된 정부가 들어서기 전 까지는 숨기기에만 급급하여, 2003년 참여정부에서 수구언론을 비롯한 극우반공환자들의 병적인 반발을 무릅쓰고 ‘국가에 의한 희생’으로 인정하기 전 까지는 언급조차 금기시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제58주년 제주4.3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하여
분향 하고 있다. (2006. 4. 3. 제주4.3평화공원)
나만 하더라도 한 소년이 폐허가 된 우물 옆에 쭈그려 앉아 있는 사회책 속의 ‘여순사건’ 사진은 공산당의 만행으로만 알았다. 우표 수집이 취미라고 이승만 생일을 기념하는 우표를 자랑스럽게 모았다. 어린 시절 동네 누나 들이 고무줄 놀이에 맞춰 부르는 이승만 대통령 찬가 따위를 들으면서 줄곧 자랐다. 스무 살이 넘어서야 ‘말’지 등을 통해서 여순사건은 제주4.3 사건에서 비롯된 일이었음을 알았던 것이다.
1947년 3.1절 기념행사 후 관덕정까지 이어지던 평화 시위에 경찰이 발포, 이로 인한 사망자 발생이 4.3사건의 시작이라는 사실은 이제 관심만 가지면 누구나 다 알 수 있게 되었다. 국민의 정부의 노력과 참여정부의 사과도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뉴라이트와 수구언론을 중심으로 한 매도와 비난이 끊이질 않는다. 그들이 내뱉는 비난의 근거는 4.3사건의 원인이 남로당을 비롯한 사회주의자들(그러나 그들은 정작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구분할 줄 모른다!)에 의해 조직된 반란이라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는 무조건 타도해야할 사회의 악이고 자신들과 다른 의견을 말하고자 하면 ‘북한에 가서 살라 !’며 우기는 선에서 한 치의 발전도 없다.
하지만, 일제 치하에서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경찰과 군인이 미군정의 용인 하에 그대로 한국 군경으로 탈바꿈해 무고한 시민과 독립 운동가들을 “빨갱이”로 몰아 죽이던 세상에서, 지금의 뉴라이트와 수구언론들의 논리가 통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런 정부에 맞서 싸운 이들은 지극히 양심적인 지식인들과 평균적인 시민들이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작고하신 리영희 선생님의 회고록,‘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해 본다.
“이미 6.25전쟁 전후시기에 진정한 애국자들과 양심적 지도자들이 남한을 버리고 북한으로 갔어요. 흔히 남한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납북자’라고 불리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승만 정권 치하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진해서 북한으로 넘어간 거예요.”
친일파와 매판 자본에 뿌리를 두고 지금도 병적인 반공 증세를 보이는 수구 언론과 뉴라이트들은 만에 하나 한반도가 공산화가 되었다면 그 밑에 빌붙어 민주화투사나 양심적인 시민들을 핍박했을 기회주의자들이라는 데 내 양 눈썹을 건다.
[제주의 소리] 4.3학살 책임자 이승만에게 기념관이라니...(클릭)
이러한 4.3사건에 대한 무지와 오해 속에서 최근‘이승만 기념관’을 제주도에 짓는다는 보도가 있었다. 광주에‘전두환 기념관’을 세운다고 생각해보자. 수만, 아니 수십만의 희생자 및 유가족의 인격을 송두리째 짓밟는 작태다.‘역사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배우는 것은, 우리가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 한다는 사실이다’는 누군가의 금언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짓이다. 단순히 씁쓸함을 넘어 뉴 라이트와 수구언론이 주도해온 이승만 우상화 작업이 실현 되는 것 같아 아주 참담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4.3 희생자 유가족들과 관련단체들의 노력으로 일단 백지화 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관심의 끈을 놓으면 언제든 다시 고개들 일이라고 생각한다. 4월 3일을 앞두고 청산되지 않은 한국 현대사속의 아픔과 제주에 관심을 가질 때라 생각한다. 4.3사건의 경우 누구 하나가 책임 질 수 있는 시기도 아니고, 그런다고 덮어질 잘못도 아니다. 그러나 5.18이 그러했던 것처럼 명확한 진상파악과 희생자 복권운동을 통해 그들의 넋에 작은 위로가 될 수 있으리라.
http://www.ddanzi.com/news/6053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