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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10일 수요일 새벽기도회 ♣
성경:욥기38:12-24(구799P)
제목:하나님의 활동
12.네가 너의 날에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일러 주었느냐/
13.그것으로 땅 끝을 붙잡고 악한 자들을 그 땅에서 떨쳐 버린 일이 있었느냐/
14.땅이 변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이 되었고 그들은 옷 같이 나타나되/
15.악인에게는 그 빛이 차단되고 그들의 높이 든 팔이 꺾이느니라/
16.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
17.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느냐/
18.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네가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
19.어느 것이 광명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어느 것이 흑암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20.너는 그의 지경으로 그를 데려갈 수 있느냐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느냐/
21.네가 아마도 알리라 네가 그 때에 태어났으리니 너의 햇수가 많음이니라 /
22.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23.내가 환난 때와 교전과 전쟁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남겨 두었노라/
24.광명이 어느 길로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땅에 흩어지느냐.
예배의부름:욥38:4-11
신앙고백:(사도신경)
찬 송:180장(통168장)
성경봉독:욥기38:12-24
말씀선포:하나님의 활동
합심기도:주기도:찬양:(나같은 죄인 살리신 )
할렐루야!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으시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크고놀 놀라운 비밀의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제목}***“하나님의 활동”
<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실패하는 사람은 삶이 항상 어둡고, 삶의 의욕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공할 수 없고, 혹시 성공해도 공허할 뿐입니다. 반면에 성공하는 사람은 삶이 항상 기쁩니다. 그처럼 기쁘게 살면 그 사람이 가는 곳마다 활기가 넘치게 되고, 성공도 자연스럽게 주어집니다.
지금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십시오. 우리가 기쁘게 살 때는 우리 인생에 큰 진보와 발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공하고 싶으면 먼저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물론 살면서 전혀 슬픔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슬퍼할 때는 슬퍼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슬퍼하고, 친구의 슬픔에 같이 슬퍼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말고 곧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십자가만 바라보지 말고 부활까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쁨이 없으면 언제나 부정적이고, 패배적이고, 비판적이 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왜 문제가 생깁니까? 어떤 분은 “목사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라고 해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는 이유를 듭니다.
물론 그 중에는 수긍할만한 이유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 안에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도 여러 가지 싸움의 이유를 대지만 자세히 보면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 안에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 안에 기쁨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렇다면 억제할 수 없는 기쁨과 ‘큰 웃음’이 있어야 합니다.
잠시 슬픔을 당해도 금방 그 슬픔을 극복하고 다시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이 아침에 다시 한번 말씀을 체험하고 기쁨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이렇게 힘들고, 이런 일을 당했는데 어떻게 기뻐합니까?” 그러나 성경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사실상 “힘들 때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기쁠 때는 기뻐하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제가 이런 말을 듣고 어떻게 기뻐합니까?” 정말 사람 중에는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너무 말도 안 되는 비인격적인 말을 합니다.
그래도 기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상처가 되는 어떤 말을 들으면 “입 가진 사람이 그런 말도 할 수 있지.”라고 생각하고 그 영혼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안타깝게 생각하고 오히려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곧 마음의 기쁨이 회복될 것입니다.
서울에 사는 어떤 집사님은 언제나 밝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집사님에게는 아무 근심거리가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분에게는 날 때부터 엄마의 도움 없이는 하루도 스스로 살기 힘든 심각한 장애를 가진 딸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 집사님은 결코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주위를 기쁘게 해주며 즐겁게 삽니다.
교우들이 가끔 위로해주었습니다. “집사님! 얼마나 고생이 많아요?” 그러면 그 집사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물론 마음이 힘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힘든 중에 때때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저는 저의 딸아이를 통해 주님의 마음과 사랑을 배우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삶에서 진짜 귀한 것은 고난을 통해 주어지고 발견됩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속에서 우리를 정금같이 만드시고, 값진 보화를 얻게 하십니다. 장인이 돌 속에 숨은 옥을 찾아내어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고 갈아서 찬란한 옥을 만들 듯이 하나님은 우리 속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성품과 자질을 끌어내기 위해서 때로는 고난도 허락하십니다.
베드로나 바울도 다 그런 과정을 통해 반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숨겨진 주옥을 잘 몰라도 주님은 우리 안에 숨겨진 주옥을 아십니다. 그래서 고난을 숫돌로 삼아 우리를 최상의 주옥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런 확신을 잃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면 우리는 더욱 정금 같은 신앙을 얻게 될 것이고, 그때 주님은 우리와 더욱 가까이 하시면서 넘치는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 기쁨과 평안이 삶에 항상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활동"(욥기 38:12-24)
여호와께서는 계속해서 욥에게 쩔쩔매게 하는 많은 질문을 퍼부으시는데, 이것은 욥으로 하여금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고자 한 자신의 어리석은 짓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우리도 이와 같은 물음으로 스스로를 시험해 보기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과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곧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욥은 여섯 가지 일에 관해 설명하도록 요구당합니다.
Ⅰ. 아침의 근원. 즉 위로 높은 데서 오는 새벽에 대하여(12-15절).
우리가 존재의 확실성을 인정하는 것 중에서 빛보다 더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가시적 존재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존재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빛보다도 더 까다로운 것은 없으며, 그것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데 있어서도 빛보다 더 의심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아침을 환영하며 새벽을 반깁니다.
1.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나던 날부터 명한 것이 아니며, 현재 상태의 아침은 우리가 태어나기 오래 전에 있었던 것이기에 그것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우리만을 위해 제작되지도 않았지만, 우리는 우리 보다 앞서 간 많은 세대들이 그러했듯이 우리가 새벽을 보는 대로 그것을 맞습니다.
새벽은 우리가 우리의 처소를 알기 보다 먼저 자기 처소를 알았습니다. 우리는 단지 어제 생겨 났기 때문입니다.
2. 아침 빛을 처음으로 명하고 그 일어남과 그 빛남과 그 시간을 지정한 자는 우리도 아니며 그 어느 사람도 아닙니다.
밤과 낮의 항구적이고도 규칙적인 계승은 우리의 고안물이 아닙니다.
밤과 낮이 나타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며 또한 그의 솜씨있는 작품이라는 것을 나타내지, 우리의 일을 드러내는 게 아닙니다(시 19:1, 2).
3. 이 진로를 바꾸는 것은 전혀 우리의 능력 밖입니다.
"너는 네가 나던 날부터 아침을 명하였느냐? 네가 어느 때든지 아침 빛을 그 정한 시각보다 일찍 들어 올린 적이 있느냐? 네가 아침이 기다려질 때 네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아침 빛을 앞당기며, 네 편리를 위해 새벽에게 명령하여 자기 처소 이외의 곳에 오도록 한 적이 있으냐?
결코 없다. 천부당 만부당하다. 그런데 왜 너는 하나님의 계획에 지령을 내리겠다고 나서며, 섭리의 방법을 네게 유리하도록 변경시키기를 기대하느냐?"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 중 어느 부분이라도 특히 이 말 즉 "내가 사람의 매로 그들을 단련시키겠다"고 하신 말씀의 약속을 파기하느니 보다는 차라리 낮과 밤의 계약을 파약하는 게 낫겠습니다.
4. 새벽을 명하여 땅에 찾아오게 정하시고 아침 빛이 공중을 통하여 확산되도록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공중이 그 빛을 제 때에 받아들이는 것은 마치 진흙이 도장을 맞는 것과 흡사하여(14절), 그 표시가 즉각 나타나게 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마치 밀랍 위에 도장을 찍어 남는 표상처럼 갑자기 도처에 환하도록 빛을 비춥니다.
"그래서 그들은 옷처럼 나타납니다." 혹은 그들은 흡사 화려한 의복으로 옷 입힌 것 같습니다.
땅은 매일 아침 면모를 일신하며 우리가 하듯 몸차림을 하고 빛을 의복으로서 입고서 나타납니다.
5. 이것은 악인에게 공포가 됩니다.
아침의 햇살보다 인류에게 더 유쾌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보
기에 즐거울뿐더러 인생과 인생의 사업에 유용하며, 그 아침 햇살의 은총은 예외없이 미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땅 끝까지 비취기" 때문입니다(13절).
그래서 우리는 땅에 내리는 그 이득을 인하여 빛을 찬미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이 관찰하시는 것은 그것이 악을 행하는 자들에겐 얼마나 달갑지 않은 것이란 사실과 따라서 그들이 빛을 싫어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빛을 자기의 긍휼과 자비의 사자로 삼으실 뿐만 아니라, 공의의 사자로도 삼으십니다.
"그 빛은 악인을 땅에서 구축하도록" 고안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하여 "빛은 땅 끝에 비취는 데," 이는 우리가 먼지와 좀 벌레를 떨어 버리기 위해 의복의 가장 자리를 붙잡는 것과 같습니다.
욥은 아침 광명이 죄인에게는 얼마나 공포가 되는가 하는 것을 관찰하였습니다(24:13 이하).
이는 광명이 그들의 행실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에서 그 관찰을 도와 주면서 세상이 그 친절하심 때문에 자기에게 은혜를 입었는지 입지 않았는지 욥에게 물으십니다.
이 세상의 크신 심판자께서는 범인을 탐색하는 그의 사자로서 아침 광명의 햇살을 보내십니다. 이는 저들로 그 악의가 좌절당하여 수치당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온당한 벌을 받도록 하시고자(15절) 함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빛을 그들에게 주지 않으시사,(즉 저들로 하여금 위로와 신뢰와 자유와 생명을 상실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사람을 대항하여 지켜든 그들의 "높은 팔이" 꺾이도록 하시며, 화를 끼치는 그들의 능력을 빼앗아 버리시도록 하고자 하셨습니다.
빛은 확실히 두 가지의 찬미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그 하나는 복음의 샛별이 돋는 바로 그 때에 사가랴가 그의 "베네딕투스"(Benedictus) 송축가에서 복음에 바친 찬미입니다[눅 1: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를 찾아 오셨으니 이는 어두움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빛을 주기 위함이며 그들의 마음은 "진흙이 도장에게 하듯" 그 빛을 향해 돌아선다(고후 4:6)].
또 다른 하나의 동정녀 마리아에 의한 "마그니피카트"(Magnificat) 송가인데(눅 1:51) 이 찬미는 하나님이 그의 복음 안에서 "자기의 팔로 힘을 보이시고 교만한자들을 흩으셨으며 권세 있는 자들을 끌어 내리셨음"이 이 빛에 의해 말미암았음을 나타내 줍니다.
이 빛에 의해 그는 악인들을 떨어뜨리려고 의도하시며, 악 그 자체를 지상에서 떨어내사 그 악의 높은 팔을 꺾어 버리시려고 계획하고 계십니다.
Ⅱ. 바다의 근원에 대하여(16절).
"네가 바다 근원에 들어 갔었느냐? 혹은 네가 깊음을 찾아서 걸어 다녔느냐? 네가 바다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모래 속에 묻혀 있는 보물들을 아느냐? 너는 바다 물결의 일어남과 그 근본이 무엇인지 설명하겠는가?
바다는 수증기를 끊임없이 토해내고 있다. 너는 끊임없이 공급되는 새 물결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아느냐? 강물은 쉬지 않고 바다로 흘러 들어 간다. 너는 그들이 어떻게 지상에 넘치지 않도록 끊임없이 방출되는지 아느냐? 너는 물결이 순환하는 해저의 은밀한 통로를 잘 아느냐?"
세계의 지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길은 "바다에"도 있고 "큰 물에"도 있다고 일컬어지는데(시 77:19), 이 말씀은 바다가 우리에게서 감추어져 있으며, 우리가 파고 들 수가 없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Ⅲ. 사망의 문에 대하여.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었느냐?"(17절)
죽음은 큰 비밀입니다.
1. 우리는 우리와 딴 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무슨 방법에 의하여 죽음에 처하게 될지 미리 알지 못합니다.
무슨 도로를 통하여 우리가 돌아 오지 못할 길을 가야만 하는지 알지 못하며, 무슨 질병과 무슨 재난이 모든 생물에게 지정된 집으로 들어 가게 하는 문이 될지 모릅니다.
"인간은 자기의 시간을 알지 못합니다."
2. 우리는 죽음이 무엇인지, 육체와 영혼간의 매듭이 어떻게 풀리는지 묘사할 수가 없으며, 또 "사람의 혼이" 어떻게 "위로 올라가는 지도" 알지 못하고(전 3:21),무엇이 될는지, 어떻게 사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영혼은 얼마나 두려운 호기심을 가지고 영원의 광막한 바다로 진수하며, 겪어 보지 못한 실연에 몸을 맡기는가!
우리는 죽음 저편에 있는 하늘 문이 우리에게 열릴 것을 확실히 믿읍시다. 그리하면 비록 그것이 우리가 단 한 번 가야할 길일지라도 우리는 사망의 문들이 입을 벌리고 있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3. 우리는 개개의 영혼과 전혀 통신을 하지도 못하고 그들의 상태를 조금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미지의, 발견되지 않는 지역이며, 그들은 그런 곳으로 옮겨져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소식을 듣지도 못하고, 그들에게 소식을 전하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감각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영적 세계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마치 맹인이 색깔에 대해 논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그리로 옮겨 가게 되면 우리가 얼마나 그릇 이해하고 있었는지 알고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Ⅳ. 땅의 넓이에 대하여(18절).
"네가 그것을 알았느냐?" 이 땅의 넓이에 대한 지식은 그에게 아주 평탄한 것 같이 보이며, 그의 지식권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할 수만 있다면 명백히 말해 보라는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구 위에 우리의 거주지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은 그 지구를 인간의 자손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태껏 누가 그것을 측량해 본 적이 있으며, 몇 에이커가 되는지 설명할 자가 있었느냐? 그것은 우주에 비하면 점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것이 작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그 치수를 밝히는 데에 정확할 수가 없습니다.
욥은 세계 일주의 항해를 한 적도 없었으며, 그보다 앞서 산 자도 마찬가지였었습니다. 지구의 넓이를 알고 있는 자는 거의 없었고, 광대한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된 것은 수년 전의 일이었으며, 그 미주 대륙은 인간의 생각 밖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은 지구보다 더 길이가 길며, 바다보다 넓이가 더 넓습니다. 그러므로 지구의 넓이를 깨달아 알지 못하던 우리로서 하나님의 이치의 깊이 속으로 잠수해 보겠다는 것은 억지입니다.
Ⅴ. 광명과 암흑의 처소와 길에 대하여.
새벽에 대해서는 그가 이전에 말한 적이 있는데(12절), 그는 다시 그것에 대해 말하려고 돌아옵니다(19절).
"광명의 처소는 어느 길로 가느냐? 또 다시(24절), 광명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뻗치는가?" 그는 다음과 같은 일들을 묘사하도록 요구받습니다.
1. 광명과 암흑이 태초에 어떻게 조성되었느냐?
하나님이 태초에 맨 먼저 깊음이 표면 위에 흑암을 펼치시사 그 뒤에는 "빛이 있으라!"는 그 위력 있는 말씀으로 빛에게 명하시사, 흑암 중에서 나와 비취게 하셨을 때, 욥은 그 명령과 그 운영을 직접 본 목격자였는가?
빛과 어두움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그를 권세 있는 왕들이 단 하나의 세계에서 번갈아 가며 통치하며 어디에 자기의 조정을 분명히 베푸는지 그가 말할 수 있느냐?
비록 우리가 아침의 빛남이나 저녁의 그림자를 그토록 동경한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어디로 가야 그들을 데려올 수 있는지 알지 못하며, "그 집으로 가는 길"도 알 수 없습니다(20절).
그 때는 우리가 태어나지도 않았고, 우리가 난 날 수도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시적으로 창조된 첫 피조물의 탄생을 묘사할 수가 없습니다(21절).
그것 가지고서 우리가 영원 전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의향에 말참견을 하려고 하거나, 그 집에 이르는 길을 찾아 내겠다고 나서거나, 그것들의 변경을 탄원해 보겠다고 나설 것인가?
하나님은 자기가 광명을 형성하시고 흑암을 창조하시는 일에서 영광을 얻으십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들을 보는대로 받아들여야 되며, 그들이 오는 때는 그것들을 용납해야 하며, 그 어느 것과도 다투지 않아야 하고,
그 두 가지를 다 최선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하면, 우리는 마찬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평안과 환난을 다 용납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사 45:7).
2. 그들이 어떻게 그들의 순번을 상호불변하게 계속 교대해 나가는지?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도록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시 65:8).
왜냐하면 새벽 빛이 나오며 동시에 밤의 어두움이 사라지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지 우리의 명령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24절).
"광명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뻗치느냐?"
아침에는 빛이 흡사 동풍의 날개를 타고 나르듯 지평선 너머 공중의 산지 사방으로 순식간에 자신을 쏘아 대며, 너무나 신속하게, 너무도 강렬히 움직이면서 밤의 어두움을 흩어지게 하는데, 이것은 마치 동풍이 구름을 몰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새벽 날개에 관해서는 시편 139편 9절에서 읽는데, 빛은 새벽 날개를 타고 "바다의 끝까지 가며 지상에 부는 동풍과 같이 흩어진다."
광명이 돌아옴으로 말미암아 아침이 매일 우리에게 나아오며 어둠이 돌아옴으로 인하여 매일 밤이 우리를 지나쳐 가게 된다는 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침과 저녁을 기대하며, 따라서 그들은 우리에게 경악을 주거나 불안을 주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외면적인 형편의 변화를 같은 방법으로, 즉 아침과 저녁을 기다리듯, 생각한다면 우리는 가장 밝은 정오라고 해서 계속 낮이기를 기대해서도 아니 되겠고, 칠흙같이 어두운 야밤 중이라 해서 아침이 오리라는 것을 절망해서도 아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가지 일을 세우셔서 다른 한 가지에 대립시키심으로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신다. 낮과 밤은 그 표본이다. 그래서 우리도 그래야만 합니다(전 7:14).
Ⅵ. "눈과 우박의 창고에 관하여"(22, 23절).
"네가 눈 곳간에 들어 갔었으며, 우박 창고를 보았으냐?"
구름 속에서 눈과 우박이 생산되고 있으며, 거기서 그들이 너무나 풍부히 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눈이나 우박이 창고에 저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반하여 실제로는 그들의 생산이 extempore-즉 갑자기 또 pro re nat-즉 필요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눈이나 우박이 하나님께서 자기 대적이 자기 백성의 원수들인 자들과 대항하며,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실 때에 자기 섭리의 목적에 소용이 되도록 안성맞춤으로 적시에 오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들이 "전쟁의 격투의 날" 곧 환난 때를 대비하여 화약이나 무기와 탄약과 양식처럼 창고에 저장된 줄로 생각합니다.
그 환난의 때 곧 전쟁의 날에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 일반과 싸우시거나(하늘과 전쟁을 시작했던 사악한 세상을 물로 망하게 하기 위하여 하늘의 창들을 열고 이 곳간에서 물을 꺼내 왔던 대홍수 때와 같이), 혹은 가나안 사람들에게 대항하여 싸우시는 데 쓰려고 하나님이 큰 우박을 이 곳간에서 꺼내 왔던 때와 같이, 몇몇 특정 개인들이나 단체와 하나님은 투쟁하실 것입니다(수 10:11).
이와 같이 싸움과 전쟁을 위해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과 투쟁을 벌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며, 우리가 그와 화해하고 우리가 그의 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을 유지하면 그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이로운지를 살펴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기만 한다면 뇌성 벽력이나 천사의 검으로 하는 것보다 못지 아니하게, 눈과 우박으로 효과적인 싸움을 하실 수 있습니다.
***{결론}***
계속 침묵하고 계시던 하나님께서 드디어 욥의 고난이 현장에 나타나셨습니다.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차이를 강조하시고, 욥의 무지하고 한탄한 자기 변호를 일축시키시 위해 온 우주를 조성하신 창조주는 과연 누구인가? 를 욥에게 물으셨습니다.
실로 하나님은 이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시요, 역사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관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분의 거룩한 섭리와 경륜을 회의하고 도전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분의 거룩한 섭리와 경륜을 회의하고 도전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그분 앞에서 침묵하며, 그 분의 뜻을 묻고, 그 뜻을 온전히 따르는 겸손과 순종만이 요구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욥기38:12-15절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묵상하시고 순종하며 하루를 사시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삶이 일치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