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가 하염없이 쏟아지던 2004년 6월 20일 일요일, 폭우(暴雨)에 가까운 비를 맞으며
관동(關東) 제일의
고장인 강릉을 찾아갔다. ~~~
솔직히 그 날처럼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에는 그냥 집에 가만히 들어앉아 빗소리를 듣는 것이 제일 편하다.
나는 그 날 비가 올 것을 전혀 예상치 못하고 다른 모임의 강릉 답사를 신청하였는데, 결국 그 벌을 받은
것인지 19일부터 요란하게 비가 쏟아지기 시작, 20일 아침까지 비는 계속되었다. 마침 강원도와 몇몇
지역은 호우주의보까지 발표된 상황이라서 과연 가는 것이 좋은가? 안가는 것이 좋은가를 두고 심히 갈등을
하였다. 그러나 안가면 늦게 취소 또는 불참했다는 미명아래 회비 전액 환불이 안될 것으로 생각이 들어
결국 우산 하나 짊어들며 졸린 토끼 마냥 눈을 비비며 약속장소인 양재역(7:30분까지
집합)으로 찾아갔다.
모임 장소인 양재역에 이르니 약 10여대의 관광버스들이 지방으로 놀러가는 사람들을 태우고 있었는데,
내가 탈 차는 그 중에서 제일 앞쪽(양재역 기준 성남방향)에
있었다.
엄청난 비의 압박임에도 불구하고 안온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대신 늦게 온 사람들이 많아서 지정된
시간보다 40분이 늦은 8:10분이 되서야 양재역을 출발하게 되었다.
시원하게 뚫린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를 지나 운무(雲霧)로 가득한 대관령(大關嶺) 신도로를 경유
11시에 강릉시내에 자리한 객사문에 도착하였다.
* 배경음악 : 잔잔한 피아노 연주곡..
◆ 1.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전각 - 강릉 객사문(客舍門)
옛 강릉경찰서 앞에는 강릉의 오랜 내력(來歷)을 말해주는 귀중한 존재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객사문..
이 문은 원래 강릉객사에 딸린 정문이었으나 객사인 83칸 규모의 임영관(臨瀛館)은 어둠의 시절 당시 동쪽
나라 애들이 파괴하여 터만 겨우 남아있던 것을 근래에 들어와 복원공사를 하고 있다. 아마 가을 정도면
수술중인 객사문과 함께 완벽한 모습의 임영관을 보게 될 것이다. 참고로 임영(臨瀛)이란 "바다에
임한다", "바다에 접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바다에 접해있는 강릉 고을의 특징을 말해주고 있다.
이 문은 고려 태조 18년인 936년에 임영관과 함께 세워진 것으로, 객사(客舍)란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관리의 숙식을 제공하고 한달에 2번씩 군주(君主)를 상징하는 전패(殿牌, 또는 궐패(闕牌)에게 예를
올리던 전각이다.
936년 당시 강릉에 이런 전각이 세워진 것은 단순히 객사를 세우고 그런 것이 아니라 한때 고려 태조
왕건에게 반기를 들며 저항했던 강릉지역의 세력가 김순식(金順式)이 진심으로 그에게 귀부(歸附)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객사를 세운 주체가 고려 정부인지 강릉김씨 세력(김순식)인지는 기록이 없어 모르겠으나,
그 당시 정황으로 봐서는 김순식이 그에 대한 충성의 표현으로 세우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 객사문은 내가 찾아갔을 당시는 유감스럽게도 대 수술중이었다.
그래서 문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려웠고, 대신 문 앞으로 다가서서 문의 기둥을 비롯한
웅장한 규모의 삼문(三門)과 넓직한 문짝(널판문), 인(人)자 모양으로 펼쳐진 맞배지붕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전각이자 강릉의 오랜 내력이 담겨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객사문,
지금까지 1000년 이상 살아온 것도 대단하지만, 나무로 만들었다는 단점으로 가끔씩 이렇게 대 수술을
받아야 되는 처지가 안타까울 뿐이다. 아무쪼록 수술이 잘 끝나기를 기원해본다.
객사문은 국보 51호, 임영관터는 사적 388호,
◆ 2. 우리나라의 영원한 성역 오죽헌(烏竹軒) -
보물 165호
객사문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오죽헌(烏竹軒), 오죽헌이야 워낙 유명하니 따로 설명은 필요 없을 듯하다.
이 곳은 우리나라 여인상의 표본인 신사임당(申師任堂)이 살던 곳이며, 동양 최대의 정치가, 철학가라
할 수 있는 율곡 이이(李珥)가 태어난 곳으로 은근히 신성시 되고 있는 곳이다.
신사임당과 이이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사임당의 남편이자 이이의 부친인 이원수는 그들의 유명세에
밀려나 거의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버린 것 같다.
오죽헌은 조선 초기 문신이었던 최치운이 15세기 초반에 만들었으며, 그 이후 계속 딸과 사위에게
상속되면서 신씨 집안 소유가 되었으며, 여기서 신사임당(본명: 신인선)이 태어났던 것. 그녀는 덕수 이씨
집안의 이원수(李元秀)에게 시집간 이후 한동안 친정인 이곳에 머물면서 이이(이율곡)을 낳았다.
* 참고로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출가한 딸에게도 공평하게 재산을 상속하였으며, 제사(祭事)역시 아들, 딸
모두 서로 돌아가면서 지냈다. 또한 장가간 남자는 신부(아내)집에서 거의
살았으며, 이런 풍속은 17세기
이후 성리학의 원칙에 의해 모두 사라지거나 뒤바뀌게 된다.
한 집에서 이렇게 휼륭한 모자(母子)가 태어난 것도 참 대단하려니와 이 곳도 대단한 명당(明堂) 자리인
모양이다. 그래서 이 곳을 5000원짜리 지폐의 배경으로 삼았던 것인데, 그러면 경복궁 경회루(慶會樓)는
천하 제일의 명당자리란 말인가??
오죽헌에는 오죽(烏竹)이라 불리는 대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이 대나무는 여기서만 자란다고 하는데
겉 모습은 일반 대나무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오죽으로 가득한 오죽헌의 모습을 보니
대나무처럼 곧게 살아간 그들 모자의 정신이 담겨져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이 곳에는 오죽 외에도 "나도밤나무"라는 밤나무(밤만 열리지 않을뿐, 모습은 밤나무와 같음)도
있었다고 한다. 울릉도(鬱陵島)에 "너도밤나무"란 나무가 있는데, 여기는 또 "나도밤나무"인가.
이 오죽헌 나두밤나무에는 다음과 같은 거짓말같은 전설이 서려있다..
* 1536~1537년당시 신사임당은 아들 율곡을 안고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그때 탁발승(托鉢僧)이 찾아와
시주를 청하면서 왈 "이 아기는 나중에 동양의
위인이 될 상인데 3살때 호환(虎患)의 액이 있으니 안타깝다"
이에 신사임당이 그 대처 방법을 물으니 승려가 "뒷산에 밤나무 100그루를
심으시오" 이에 100그루를 심으니
이율곡이 3살이 된 어느날 승려 한 명이 찾아와 갑자기 큰 호랑이로 둔갑하더니만 아기를 데려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사임당이 크게 꾸짖으며
"밤나무 100그루가 있는데 뭔 헛소리냐"
그래서 사임당은 호랑이와 함께 뒷산에 올라가 밤나무를 세어보았다. 그러나 1그루가 이미 말라 죽고
딱 99그루만 남은지라, 호랑이는 크게 기뻐하며 아기를 내놓으라고 협박을 하였는데, 그때 마침 나무
1그루가 벌떡 일어나 "나도 밤나무다~~!!"를
외치며 나머지 1그루를 채운 것이다. 이에 호랑이는 다시
승려로 둔갑하여 줄행랑을 쳤다는 믿거나 말거나하는 거짓말이 전설로 전해 온다.
이 전설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신사임당의 이이에 대한 지극한 모성애, 호랑이와 함께 뒷산에
올라가 밤나무를 셀 만큼의 대단한 기개와 담대함, 사서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이이가 3살 적에 큰 병이나
큰 위험으로 자칫 생명을 잃을 뻔 했다는 것을 호환(虎患)으로 비유한 것 등등.. 그외에 밤나무 100그루는
아마도 풍수지리나 지기(地氣) 때문에 심은 것으로 생각된다.
비가 내리는 오죽헌의 모습.. 정말 정겨운 풍경이다.
비가 내림에도 많은 사람들이 오죽헌을 관람하고 있었다. 간혹 수백년 된 매화나무 등이 나오면
사람들은 탄성을 자아내며, 일부는 그 매화(梅花)를 따서 먹으며 "나 600년된 매화 먹었다"하고 자랑하는
모습이 마치 철이 들다만 어린애들 같다.
오죽헌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측에 속하는 주택 건물로 그에 속한 사랑채, 안채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들 건물의 마루 밑을 보면 모두 시멘트 같은 것으로 메꾸어져 있어 이를 수상히
여겼던 바, 마침 오죽헌 가이드(문화유산해설사)가 그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목조전각의 보호를
위해 시멘트로 메꾸었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그 외에도 1992년 수학여행으로 이 곳을 찾아왔을 때는
분명히 몇백년 묵은 재래식 변소가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꾸 거기서 볼일을 보고 장난을 피워 결국
천덕꾸러기가 되버린 그것을 철거, 지금은 빈 공간만 허전하게 남아 있다.
오죽헌 한쪽 구석에는 정조(正祖) 임금의 칙령(勅令)으로 만든 어제각(御製閣)이 있다. 그 내(內)에는
정조가 내린 제서(制書)와 함께 이이가 사용했다는 매화나무가 새겨진 벼루가 500년 가까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 벼루는 5000원짜리 지폐 앞쪽에 나와 있으니 각자들 보기 바람..
오죽헌 서쪽에는 다른 신성시 되는 곳과 마찬가지로 전시관(展示館)이 있다.
이 전시관에는 이이와 신사임당의 유물과 서화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사임당의 곱고 정교한 손길을
거친 과일 그림과 곤충 그림, 나무 그림, 꽃 그림의 수법은 가히 지금의 미술가들도 놀라워 하는 신의
솜씨이다.
그녀는 매일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남겼는데, 그녀의 이런 풍부한 감성과 재능은 아들인 이율곡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죽헌을 둘러보며 마지막으로 5000원짜리 지폐의 배경을 찍었다는 장소에서 단체사진을 찍으며
너도 나도 돈 벼락을 기원해 본다..
오죽헌에 대한 내용은 이정도로 마친다.
◆ 3. 술잔과 달을
벗삼아.. 경포대와 경포호
오죽헌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관동8경의 한 곳인 경포대(鏡浦臺)..
참고로 관동8경이란 고성의 삼일포(三日浦)와 총석정(叢石亭), 청간정(淸澗亭, 92년 방문), 양양의 낙산사
(洛山寺, 2번 찾아옴),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2번 찾아옴),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2번 찾아감),
울진의 망양정(望洋亭)과 월송정(越松亭)등의 동해 제일의 명소 8곳을 일컫는다.
경포대는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고 조화롭게 배치하여 만든 정자이다.
옛날 선조들은 자연에 동화되어 정신적인 수양을 쌓는 것을 매우 중시 여겼다. 그래서 그들이 세운
정자, 누각, 정원 등등.. 그들의 자연을 소중히 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으며, 섬나라 애들이나
엉터리 분유나 만드는 되넘들과는 달리 자연을 망가뜨리거나 개조하지 않는다. 거의 자연 그대로의
공간 속에 정자나 별장 등을 지어 자연과 벗삼아 살고자 했던 것이다.
경포대는 1326년에 지금의 방해정(放海亭) 뒷산 인월사터에 세운 것을 1508년에 강릉부사 한급(韓汲)이
지금의 장소로 이전하여 강릉부(江陵府) 관아의 별장으로 사용하였다.
그 이후 강릉에 부임한 부사(府使)는 강릉지역에 연고를 둔 향리(鄕吏), 선비들과 어울려 이 곳에서 달을
벗삼아 술을 마시며, 시도 읊고 기생들과도 얼씨구 하는 등, 신선(神仙)놀음을 즐겼다.
그러나 그 시간 백성들은 엄청난 조세(租稅),공납(貢納),역(役)에 시달려 밤시간도 모자를 형편이었는데,
위정자라는 것들이 가끔도 아니고 종종 이곳에서 술판을 벌여 얼씨구 한 것은 국민들을 괴롭히며 밥그릇
보존에만 급급한 지금의 고위층 벌레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결국 자연에 동화되어 풍류를
즐기고자 그 사상은 모두 여유가 있는 양반층들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었다. 상당수 백성들은 그런
것을 즐길 겨를도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
경포대에 앉아 팔자좋게 놀던 선비들은 이곳에서 4개의 달을 보았다고 한다. 지금은 안보이지만, 예전에는
여기서도 동해바다가 보였는데, 그 바다 수면에 비친 달, 그리고 예전보다 규모가 많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그 명성을 날리고 있는 경포호수 바닥에 비친 달, 그리고 술잔에 비친 달, 그리고 사람 눈에
비친 달, 총 4개의 달이 뜬다는 것, 그외에 달기둥, 달탑(月塔), 달의 물결이 생기는 곳이며, 이 곳의
일출과 월출의 광경이 가히 절경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지금은 문화재 보존 때문에 정자 내부로의 진입이 금지되어 있어 옛날의 그들처럼 따라 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이제는 1개의 달 밖에는 남아 있지 않다. 바로 경포호에 비친 달... 다음 언젠가 밤 시간에
와보게 된다면 반드시 호수에 뜬 달을 바라보며 부근 정자에 앉아 술 한잔 하리다..
언덕 꼭대기에 자리한 경포대에 오르면 석호(潟湖)인 경포호의 전체적인 모습과 함께 경포관광지가 한 눈에
보인다. 그러나 바다까지는 보이지 않음..
정자 내부에는 가운데에는 큼직막한 글씨로 "第一江山(제일강산)"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어보니 그 것이 명나라에서 건너온 것이라 하는데, 글씨의 모습이 가히 힘이 넘쳐 보인다.
그런데 이 "第一江山"이란 현판이 평양 모란정(牡丹亭)에 걸려있는 것과 이 것, 달랑 2개 밖에 없다고
한다. "第一江山" 말그대로 제일의 강과 산, 제일의 풍경을 뜻하는 것으로 그만큼 천하 제일의 명소에만
부여되는 영광스러운 칭호라 할 것이다.
경포대는 강원도지방유형문화재 6호로 지정되었다.
◆
4. 남항진에서의 점심..
경포대를 둘러보고 경포관광지, 강문, 송정을 지나 남대천(南大川)을 건너면서 옛 동해북부선(東海北部線)
의 흔적을 만났다.
동해북부선은 강릉에서 양양,속초,간성,고성을 경유 원산까지 이어지던 철도였으나 한국전쟁 이후 강릉
이북 구간과 강릉 일부구간이 폐선되어 결국 옛 철길의 흔적과 다리 흔적만이 쓸쓸히 남아 남북분단의
슬픈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언젠가 북부선이 복원되어 강릉부터 원산, 함흥, 성진, 길주, 청진, 나진,
웅기까지 동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900km의 동해안 철길을 이용할 그 날이 오기를 염원해 본다.
강릉 동쪽에 조그만 포구 남항진에 이르러 막국수로 유명한 음식점에서 그 유명하다는 동치미 막국수와
함께 쫄깃쫄깃하고 윤기가 흐르는 수육을 열심히 먹었다. 거기에 시원한 막걸리까지 마시고.. 쩝쩝~~
점심을 먹고 비오는 남항진 해변을 잠깐 거닐어 보았다. 비가 무지막지하게 쏟아진 것에 대해 바다가
크게 노해 파도의 높이가 상당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다가서다가 모두 물벼락을 맞는다.
동해바다는 2월달 낙산사 이후 근 4개월 만에, 바다는 5월 중순 보성 율포이후 근 1개월만에 본다.
그러나 이처럼 성질 부리는 바다는 참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나야 샌달에 반바지로 간단하게 무장하여 파도가 밀려와도 별다른 피해는 없었고, 오랜만에 바다에 발을
담구니 시원하고 좋다..
◆ 5.
절은 어디로 가고 논만 남아 있는가..? 세월무상의 굴산사(掘山寺)터
남항진에서의 점심과 바다구경이 끝난 후 구정면에 있는 굴산사터를 찾아갔다.
남항진에서 굴산사까지는 약 20분 정도 소요.
굴산사 입구에 도착하여 물로 가득한 거대한 지뢰밭을 통과하여 논길을 따라 가다보면 거대한 규모의
돌기둥 2개를 만날 수 있으니, 그것이 바로 굴산사 당간지주(幢竿支柱)이다.
이 돌기둥은 우리나라에 있는 당간지주중 제일 큰 것으로, 높이는 왠만한 성인 남자의 3배에 이른다.
다른 돌기둥은 보통 2배 정도로 끝났는데, 여기는 무려 3배. 키가 2m를 넘지 못하는 나를 주눅들게 만든
그 돌기둥, 왜 이렇게 무식하게 크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그만큼 굴산사의 사세(事勢)와 규모가 엄청났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굴산사의 규모가 작았다면 저렇게 큰 당간지주를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거대한 돌기둥을 세울 정도의 저력을 가진 굴산사는 어떤 절인가.. ?
이 절은 신라 문성왕 재위 시절인 851년에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는 여기서 선종(禪宗)
9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파(闍掘山派)를
개창하였다.
선종은 당나라에서 전래된 사상으로 경전을 중심으로 권위적인 경향이 강한 교종(敎宗)과 달리 참선을
중시하였다. 그래서 단순한 지방 세력들과 백성들은 머리아픈 교종 대신 이해하기 훨씬 쉬운 선종을
선호하였으며, 신라 정부에 반기를 들며 나름대로의 세력을 키우던 지방 세력들도 선종과 결탁하면서
많은 선종계열의 사찰들이 그들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하게 된다.
굴산사를 세운 범일국사의 탄생설화에 대해서는 ~~
* 809년 어느날 지금의 굴산사터 부근에 어느 처녀가 살았는데 하루는 석천(石泉)에 물을 길러갔다가 빛이
반짝 거리는 샘물을 보고 그것을 마셨더니만 그 이후 배가 남산만하게 불러와 14개월 만에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처녀의 몸으로 아들을 낳은 것이 부끄러워 아기를 학바위 밑에 버렸으나, 모성애를 이기지 못해
결국 3일 만에 그 곳으로 찾아가 보니 학이 날라와서 아이를 보살펴주며 먹을 것을 입에 물어주고는 이내
사라지는지라, 곧 거두어서 기르니 그가 바로 범일국사라는 믿거나 말거나 ~~
위대한 승려의 탄생설화를 보면 거의 상당수 처녀의 몸을 빌어 이세상에 태어났다는 점, 물이나 오이 같은
자연물을 먹어서 임신을 했다고 점, 애기를 밖에 버리나 짐승들이 와서 그 애기를 보호해 주었다는 점,
애엄마가 곧 그를 거두어 기른다는 것등이 공통적으로 나온다. 이는 위대한 승려의 탄생이 결코 우연이
아닌 하늘의 뜻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후대인들이 윤색(潤色)한 것이다.
범일국사는 경주김씨 출신으로 강릉김씨의 시조인 김주원(金周元)의 일가라고 한다.
그는 당나라에 놀러가 불법을 배우고 귀국(歸國), 강릉 지역에 머물면서 강릉의 세력가인 강릉김씨 세력의
막대한 지원을 받으며 굴산사와 신복사 같은 거대한 절을 세웠다.
지금은 비록 논밭으로 화(化)했지만 엄청난 절터의 규모를 보면 강릉김씨의 세력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를
보여준다. 참고로 강릉김씨 세력은 북쪽으로 원산,고성 남쪽으로 울진,영덕까지 다스렸던 관동(關東) 제일의
세력으로 궁예(弓裔)가 그의 도움으로 고려(태봉,마진)를 세웠고, 태조 왕건 역시 그의 도움을 받아 삼국을
통일할 만큼 막강한 세력과 재력을 자랑했다. 왕건은 그 당시 강릉김씨의 우두머리인 김순식(金順式)에게
왕씨(王氏) 성을 사성(賜姓)하여, 김씨에서 왕씨로 성씨(姓氏)를 고쳤으며, 그 이후 고려가 망하자 다시
김씨로 성을 고쳐 지금에 이른다.
이 거대한 굴산사가 망한 시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는데, 그날 굴산사의 폐사(廢寺)에 대해서
고려왕실이 지방세력을 때려잡는 과정에서 파괴되었을 것이라고 말했으나 이는 전혀 근거도 없을뿐더러
거의 말이 되질 않는다.
불교를 숭상한 고려가 지방세력 때려잡기 명목으로 절을 파괴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고, 또한 그런 기록도
없으며, 강릉김씨 세력은 고려황실에 충성하며 별 탈 없이 지내왔다.
굴산사의 폐사 시기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고려 초,중기 함경도(咸鏡道)와 연해주 쪽에
거주하던 동여진 패거리들이 종종 고려의 동해안을 공격,약탈하였다. 그래서 고려 정부는 여러차례 군사를
보내 동여진을 정벌했는데, 동해에 접해있는 강릉 지역 또한 동여진의 공격을 상당히 받아왔으며, 그때
그들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또 다른 생각으로 고려 후기 한반도와 명나라 해안을
요란하게 설쳐대던 왜구패거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넘들은 한반도의 해안 대부분을 약탈했으며, 심지어는 내륙 깊숙히 들어와 온갖 개짓을 일삼았다.
그 때 강릉을 공격한 왜구 패거리에 의해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 당시의 강릉김씨 세력은
거의 강릉을 대표하는 가문에 지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굴산사를 재건할 여력은 없었을 것이고, 결국
터만 남아 지금까지 전해왔을 것이다.
이런 전쟁이나 외침(外侵) 외에도 자연재해, 화재 등의 이유로 절이 파괴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것이다.
논 가운데 멍청히 서 있는 굴산사 당간지주의 규모를 통해 잠시나마 굴산사의 화려하고 웅장했던 모습을
잠시나마 상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 돌기둥은 자연석을 정교하게 다듬지 않고 거의 꺼칠은 상태에서 올려 세운 것으로, 돌의 감각이 대개
거칠다. 이는 굴산사의 순탄치 않은 내력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돌의 조각 솜씨가 떨어지던 지방세력의
한계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 당간지주는 보물 86호, 참고로 당간지주의 용도는 괘불, 깃발등의 당을 거는 당간을 세우는 용도로
사용하며 보통 절 입구에 세우는 것이 정석이다. 서울에도 상명대 부근 세검정초교 안에 고려시대
당간지주 1쌍이 전해오고 있음.. 두 번 정도 가봤는데..
돌기둥에서 이정표를 따라 200m정도 들어가다보면 농가(農家) 옆에 맞배지붕을 한 보호각(保護閣)이
있고 그 안에 얼굴이 없는 1기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이 불상은 굴산사에 남아 있는 3구의 석불 가운데 하나로 나머지 2구는 굴산사(掘山寺)를 칭하고 있는
조그만 절 내에 모셔져 있는데, 그 절까지는 찾아가지 못했다. 비 때문에..
불상의 모습을 보면 주먹을 위아래로 배치한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어 비로사나불로 생각되며,
얼굴은 심하게 뜯겨져 그 모습을 알 수 없다. 이는 옛날 백성들이 항간에 유행하던 불상 관련 온갖
미신들에 현혹되어 불상의 코를 갈아 먹고, 혹은 뜯어 가고, 등등.. 그래서 결국 얼굴없는 불상이
되어버렸다. 이는 백성들의 무지(無知)가 하나의 불상을 비참한 상태로 만들어 버린 단적인 예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머리 위에는 거대한 모자(冠)를 썼는데 이에 대해서 혹자(或者)는 지붕돌이다 혹자(或者)는
모자이다. 말들이 많으나 모자면 어떻고 지붕돌이면 어떤가..?
이 불상은
강원도지방문화재자료 38호..
불상 주변으로 수많은 자두나무가 그를 호위하고 있고, 땅바닥에는 수백 개의 자두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이 자두는 아마도 불상이 별볼일 없는 자신을 찾아온 고마움으로 법력(法力)으로 떨어뜨린 것이
아닐까 싶다. 덕분에 20여명의 일행들은 너도 나도 자두를 한움큼 주워들며 열심히 먹어대었다. 나도 자두
3~4개 정도 먹었는데, 달콤하고 맛있더군..
◆ 5. 방문객들을 애써 무시하는 석불좌상 - 신복사(神福寺)터
굴산사의 옛 흔적을 둘러보고 그날의 마지막
답사지인 신복사터로 이동하였다.
이 절터는 96년에 한번 가본 가본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내곡동-관동대 도로에서 절터가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절터 앞에 어린이집이 건방지게(?) 자리해 있어 보이질 않는다.
신복사터로 올라가는 오르막길 또한 폭우가 만들어 놓은 지뢰밭이 상당히 많다. 이런 지뢰밭을 조심스레
올라가다보면 3층석탑과 함께 방문객들을 무시한 채 등을 돌려 앉아 있는 석불을 만날 수 있다.
이 신복사(神福寺) 역시 강릉김씨 세력의 지원을 받던 범일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 이후 동여진의 침입 또는 왜구의 공격, 자연재해나 화재 등으로 절이 파괴되어 지금에 이른다.
절터는 남쪽으로 산, 북쪽으로 집들이 들어서 있어 절터의 정확한 규모는 확인하기 어려우며, 단지
지금까지 그곳을 지키고 있는 석탑과 석불을 통해 이 곳에도 옛날 절이 있었음을 확인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석불좌상의 모습이 특이하면서도 매우 쌀쌀맞아 보인다. 그 이유는 방문객들을 향해 서 있지
않고 그 반대의 방향으로 돌아 앉았기 때문에, 보통 절에 있는 불상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데 반해 이 불상은 사람들에게 무슨 원망이 그리도 많은지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애써 무시하며
뒷모습을 보이며 앉아 있으며, 남쪽으로 석탑을 열심히 쳐다보고 있는 모습에서 자신의 보금자리를 파괴하고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함께 오랜 세월 같이 지내온 3층석탑에 대해 "믿을건 너 밖에
없다"는 듯 의지하려는 모습이 참 안타까워 보인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오른쪽 다리는 궤배(跪坐)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왼쪽 다리는
세우고 있다. 마치 부하가 윗 장수나 군주에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하는 모습과 같다.
그리고 두 손은 가슴 앞에 모아 무엇을 잡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마치 중국 고전에 많이 등장하는
두손을 모아 흔들며 인사나 감사의 뜻을 표하는 읍(揖)의 모습과 비슷하다.
이 석불의 조성시기는 고려 초기로 추정되며, 아마도 강릉김씨 세력의 시주로 만들었을 확률이 크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왜 불상을 저렇게 만들었는지는 이를 증명할 사료(史料)과 연구가 부족한 편으로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강릉 지역에는 신복사 외에도 남항진 부근
한송사터에서 발견된
석불(현재 강릉박물관에 있음, 보물 81호)의 모습도 신복사의 그것과 유사하며,
오대산 월정사에 있는
보살상 역시 그와 비슷한 점으로 봐서 고려시대 때 강릉 지방에서만 따로 유행하던 지방 양식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불상의 엉덩이 아랫쪽에는 작게나마 그의 발뒷꿈치가 보인다. 그리고 불상의 머리에는 좌우로 길쭉하고
동그란 모자를 쓰고 있어 비,눈을 피하기는 적당해 보인다. 이 불상은 보물 84호.
불상과 오랜 단짝 친구인 3층석탑 역시 고려 초기때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기존의 탑 형식과는 많이
다르다. 2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웠으며, 탑신에는 여주 신륵사(神勒寺)나 가야산
원당암 석탑 처럼 약간 뾰족 튀어나온 괴임돌을 집어넣어 마치 다층석탑(多層石塔)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이 탑은 보물 87호..
신복사터를 끝으로 강릉지역의 모든 일정은 끝났으며, 폭우에 따른 감속운행과 군데군데의 지체로
인해 서울에는 대략 9:30분에 도착하였다.
-> 이로써 비오는 날의 강릉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본 글에는 사진을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디지털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아서,ㅋㅋㅋ
* 본 글은 : 2004년 6월 24일에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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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4월 5일 내장산에서
찍은 내장산 벚꽃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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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답사때는 한 마디의 말도 안 하더니 눈은 무지하게 밝네 내가 못 본것도 많이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