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홍지훈 목사
마태복음 15:1-9
전통과 계명
텔레비전 드라마 중에 아주 친밀한 조손지간이 나온 적 있습니다. 손자의 나이가 30대 중반이니, 할아버지는 80대 중반의 나이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마치 친구처럼 지냅니다. 서로 말을 놓고 반말을 주고받습니다. 아마 우리도 아주 어렸을 적에는 할아버지와도 그리고 부모님과도 반말로 대화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철이 들면 존댓말을 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을 바꿉니다. 웃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중요한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나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민족입니다. 선배와 후배의식도 매우 강합니다. 학교에서 고학년과 저학년은 엄청난 차이로 다가옵니다. 심지어 계급이 가장 중요한 군대에서도 상대방의 나이를 고려하는 문화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저는 요즈음 학교에서 다시 독일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독일어에도 존댓말과 반말에 해당하는 구분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독일어는 친한 사이에는 “반말”로 대화를 하고, 어렵거나 먼 사이에는 “존댓말”로 대화를 한다는 점입니다. 한 편에서는 어리니까 존댓말을 써야만하고, 상대편에서는 나이 많은 선배라고 해서 반말을 하는 것을 독일어 어법에는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들 뻘인 집주인 아들하고 반말로 주고받고, 어린 우리 아들도 큰 아버지 뻘인 집주인이나, 주인 할머니와 반말로 즐겁게 대화를 합니다.
그런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학교에서 학생들 중 자기가 선배라고 후배들 위에 군림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교수들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서로 반말을 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 문화적 배경이니, 차라리 우리나라는 공적인 관계에서는 무조건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이 낫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는 것은 전통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함입니다. 실상 서로 존댓말을 한다고 해서 정말로 상대방을 존경하고 존중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 반말을 한다고 해서 그를 무시해서 그런 것도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가 젊은 사람은 나이가 더 많은 상대방의 인생경험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고, 반대로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은 나보다 젊은 사람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살고 있다는 생각으로 경청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 관계라면 대화의 형식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나이가 많을수록 “옛날에는 이랬는데”라는 생각을 자주하게 됩니다. 젊은이들은 이것을 “라떼 문화”라고 커피에 비유해서 말합니다. “나 때에는 이랬는데”라는 말과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 그림자도 밟지 않고 자랐고, 선배님들을 정말 깍듯하게 모셨고, 부모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따르고 공경해야한다고 배워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세대는, 요즈음의 젊은이들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며 바라볼지 모릅니다. “내가 했던 것 절반만이라도 좀 하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성세대가 꼭 붙들고 지키려는 것들이 만일 “그 시대적인 상황에서 나온 일시적인 것”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양복에는 언제나 점잖은 구두만 신고 다녔는데, 요즈음은 정장에 운동화를 신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저도 몇 번 그랬더니, 처음에는 어색하다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신고 다닙니다. 청바지는 젊은이들이나 입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요즈음의 어르신 멋쟁이들은 다 청바지를 즐겨 입습니다.
심지어 한국의 유교본산에서도 조상제사에 드리는 음식의 종류와 제사상 차리는 방식에 대해서도 현대적인 수정안을 내 놓았습니다. 과거에 정해진 종류의 음식도 없애고, 가짓수도 바꾸고, 그리고 시장에서 사온 음식도 사용하게 바꾸었습니다.
한국의 가톨릭교회는 엄청난 박해를 받았는데, 모두가 조상제사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황청에서 제사를 허락하는 것으로 변화를 주어서, 가톨릭교회는 과거에 “죄”였던 행위가 이제는 “효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인간이 만든 전통은 시대에 따라서 변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서 바리새파 사람과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170km 거리인데 게네사렛까지 걸어왔으면 33시간 거리입니다. 자전거로 계산하면 10시간가량 걸립니다. 그런 먼 거리를 찾아올 만큼 중요한 질문을 들고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께 와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왜 장로들의 전통을 어깁니까?”라는 항의성 질문입니다. 여기에 “전통”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전통”(παραδοσις)이란 문자적으로 “위에서부터 물려 준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장로들의 전통이란 유대교에서 오랜 세월 중요한 종교적 행위라고 지켜오던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기는 일은 유대교를 배신하는 행동과 같이 취급을 받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지역 전도를 하면서 이방인들과 한 자리에서 식사를 하곤 했습니다.(행11:3, 갈2:2)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정통 유대인들이 그 자리에 들이 닥치니, 베드로는 얼른 그 자리를 피해서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정통 유대교는 이방인들과 같이 한 자리에서 식사하지 말아야한다는 전통을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유대교 율법규정 가운데는 정결법이라는 것이 있는데, 자신을 정결하게 유지하기 위한 몇 가지의 금령들로 레위기 5장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확대되어 손 씻는 전통이 생긴 것입니다. 마태복음보다 더 상세한 내용이 마가복음에 나오는데, 손뿐만 아니라, 몸도 씻고, 그릇과 침대까지 씻어야한다고 합니다.
사실 밖에서 돌아오면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만 있다면 말입니다. 어쩌면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손 씻기를 잊어버리고 음식을 집어 드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통을 어긴 죄가 된다고 바리새파는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십계명에 부모를 공경하라고 쓰여 있는데, 부모를 공경할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로 드렸다고 해버리면, 그것은 잘한 짓이냐?”고 말입니다. 이런 행위를 놓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너희는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
사실 전통이 우선인지 말씀이 우선인지는 조금 모호한 측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려오던 전승과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기록을 통해서 문자로 보존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전전승이나 전통이 문자로 확정되는 순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명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서 안에도 다수의 전통이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전통들까지도 찾아내서 본정신 즉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을 변화시킵니다. 서로 보복하는 일로 분쟁이 더욱 더 커지던 시절에 나온 “눈에는 눈. 이에는 이”(레24:20,신19:21)라는 구약성경의 동태보복법에 대해서 주님은 “보복하지 말라”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라”(마5:38이하)고 뒤엎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본뜻은 똑같이 되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용서하며 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은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이미 낡아버린 전통을 지키느라고 하나님의 본뜻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전혀 드리지 않으면서, 자신은 부모공경이라는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더 심각한 상황이기도하고,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에 손을 댄 것이 큰 범죄인 것처럼 호도하며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전통과 계명>이라는 주제는 신앙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생각해야하는 문제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하던 대로 하는 것이 전통이고, 그 본질적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한국 사회에서 요즈음 드러나는 분열의 상황은 매우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는 서로 다른 전통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문제를 예로 든다면, 같은 기독교끼리도 다른 전통에 있다는 이유로 반목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한국교회 안에서 가톨릭교회에 대한 태도가 그런 경우입니다. 양 교회는 유럽에서 서로 전쟁을 오랫동안 벌인 아픈 역사를 지녔습니다. 그런데 1973년에 신구교 신학자 36인이 모여서 서로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서로가 같은 그리스도교 신앙임을 확인하는 문서를 출판하였고, 1979년에 <하나인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말로도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신구교의 신앙전통 안에는 서로 같은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되지 않는 사소한 차이를 크게 부각시켜서 서로 정죄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이 한 질문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바리새파에게 던진 답변은 구약성경 이사야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고, 입술로는 나를 영화롭게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나를 멀리하고 있다. 그들이 나를 경외한다는 말은, 다만, 들은 말을 흉내 내는 것일 뿐이다.”(사29:13) 마태복음에서 인용한 내용과 약간 다른 표현이 된 것은, 복음서에 인용된 것은 그리스어로 된 구약성경인 70인역 셉투아진타(Septuagint)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친다.”(마15:9)는 표현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사람의 계명(ενταλμα)으로 교훈(διδασκαλια)을 삼아 가르친다.”고 번역하였습니다. “교리” 또는 “교훈”이라고 번역한 디다스칼리아(διδασκαλια)라는 용어는 구약에서 가져온 용어인데, 신약성경에서 사용할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다른 요소가 혼합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명령”으로 대체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속마음이 따르지 않는 형식적인 경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닌 동시에, 인간의 명령을 따르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 줄 착각하는 것에 불과한 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통을 이야기 할 때에는 그 전통이 본질에 부합하는 전통인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에 관하여 말할 때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하고, 일상적인 일 속에서도 그렇게 하던 것들이 정말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것인지, 혹시라도 집단적 이기주의의 산물은 아닌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평화목 교회 교우 여러분,
사실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할 문제는 “진리를 힘으로 강요”하는데서 비롯되는 것들입니다. 170km나 되는 먼 길을 찾아온 소위 “가장 경건하고, 가장 박식한” 사람들이, 먼저 예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 기울여 경청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예수를 찾아오지 말았어야 합니다. 진실과 진리는 억지로가 아니라 저절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하지는 않았지만, 오늘 본문 뒤이어서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참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내 속에 감추어진 더러움이 있는데, 나의 것은 분별하지 못하고 남의 것만 보고 사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하시는 귀한 말씀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주님의 가르침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