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에서 해인사까지 - 팔만대장경의 운반
해인사에서 보관된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임금 때에 대장도감 ①에서 목판으로 새긴 것으로, 고려 시대에 만든것이라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며 또 팔만여 판에 이르러서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이 팔만대장경보다 앞서, 처음에 만든 대장경이란 뜻에서 ‘초조대장경’이라고 불리는 판이 황룡사 구층탑과 대구 구인사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고종 19년(1232)에 몽고 군사의 침입으로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그 뒤에 외적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민심을 모으고 부처님의 가호로 국난을 이겨내기 위하여 다시 만든 것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팔만대장경이다.
장경이란 불교에 관계되는 문헌을 통틀어 일컫는 이름으로 경(經), 율(律), 논(論), 삼장(三藏 )들을 말한다. 그 종류는 크게 산스크리트어(범어 : 梵語), 파리어로 된 장경과 한역(漢譯) 장경, 서장(西藏 ) 장경으로 나뉜다. 또 한역 및 서장 장경을 다시 번역한 몽고 장경, 만주 장경이 더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가장 완전하고 양으로나 질로나 빼어난 것이 우리의 고려대장경이다.
지금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23년(1236년)에 그 무렵 잠시 도읍지가 된 강화도와 전주, 남해에 대장도감 분사를 두어 만들기 시작하여 고종 38년(1251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16년 동안에 걸쳐 완성하였다. 다 완성된 대장경은 처음에는 강화도 선원사에 모셔 두었는데, 뒤에 조선시대 태조 7년(1398년)에 서울 지천사에 얼마동안 모셨다가 다시 해인사로 옮기게 되었다.
팔만대장경을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옮기게 된 까닭은, 고려 말엽과 조선 초엽에 끊임 없는 왜구의 노략질 때문에 강화도는 안전한 곳이 못 될뿐더러 한편 해인사가 자리잡고 있는 가야산은 신령스러운 명산인 데에다 사람이 오가기가 힘든 심산유곡이어서 대장경을 봉안하기에 알맞은 곳이라고 생각되어서였다.
대장경판을 옮기는 행렬은 길을 맑게 하느라 향로를 든 동자와 함께 스님들이 독경을 하며 길을 인도하였다. 그 뒤를 다라 소중하게 포장된 경판을 소달구지에 싣거나 지게에 지기도 하고 또 많은 사람이 머리에 이고 걸으면서 정성스럽게 운반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그러면서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고 부처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마음에 되새겼다. 이렇게 팔만대장경을 운반하는 행렬은 서울에서 가야산 해인사까지 끝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일본에는 서울에서 한강에 띄우고 대장경판을 실어 바닷길을 통해 낙동강 줄기인 지금의 고령군 개진면 개포마을로 가서 그곳에 배를 대고 해인사까지 운반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래서 개포마을의 옛이름이 ‘경을 풀었다’는 뜻에서 개경포(開經浦)였다고 한다.)
조선 태조 7년(1398년) 5월부터 시작된 이 경판의 대이동은 이듬해 정종 원년(1399년) 정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경판이 해인사에 완전히 봉안됨으로써 끝을 맺었다.
경판을 만든 재료는 거제도, 완도, 제주도 등지에서 나온 자작나무 원목이다. 그 만든 과정을 보면 사뭇 까다롭고 손이 많이 갔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원목을 바닷물에 삼년 동안 담그어 둔다. 그것을 꺼내어 판을 짠 뒤에 다시 소금물에 삶아서 그늘진 곳에서 삼년동안 말린다. 그런 다음에야 판의 양 면에, 구양순의 해서체로, 글을 양각해 넣고, 다시 벌레먹는 것을 막기 위하여 옻칠로 마무리 손질을 한다.
이렇듯 세심하게 정성을 기울인 까닭에, 칠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까지도 팔만대장경은 습기에 상하거나 좀먹거나 뒤틀리는 일이 없이 온전한 제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경판은 모두 팔만일천삼백사십 판(81,340 판)인데 양 면에 글이 새겨져 있으니 모두 십육만이천육백팔십 판(162,680 판)인 셈이다. 그리고 한 면에 새겨진 글자 수만 해도 줄잡아 오천이백삼십팔(5,238) 글자에 이른다. 경판 한 장의 무게는 대개 3.5㎏이며, 길이가 67㎝, 너비가 23㎝, 두께가 3㎝이다. 네 모서리가 뒤틀리지 않도록 각목으로 마구리를 달고 그 이음새는 구리로 장식하였다.
이 팔만대장경은 부수로는 일천오백십육 부(1,516부)이며 그것을 책으로 엮으면 육천팔백십오 권(6,815권)이니, 하루에 한권씩 읽는다 치더라도 다 보려면 십팔년이 넘게 걸리니, 그 방대한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팔만대장경은 온 나라가 몽고 군사에게 짓밟히고 도읍은 난을 피하여 강화도로 옮겨간 상태에서 만들었다는 점이 참 특기할 만하다. 원고를 수지하고 사본을 정리하면서 교정하고 조판하고 또 판목을 다듬고 경을 쓰고 글자를 새겨넣는, 이 크나 큰 일이 피난살이 십육년동안에 이루어졌음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겠다.
그 뿐만 아니라 대장경을 새기는 이 불사에는, 조정의 대신들과 온 백성이 한 마음으로 뭉친 힘을 바탕으로 하여, 수백 명의 명필과 수천 명의 조각사가 동원되었으리라 상상하면 감개가 깊은데, 더욱이 경판의 글이 틀린 자나 빠뜨린 자가 없이 바르게 쓰이고 마치 한 사람이 다 쓴 듯이 필체가 한결같으니 더욱 놀랍다.
팔만대장경은 명실공히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귀중한 법보(法寶)이다. 지금까지 세계에 남아있는 삼십여 가지의 대장경판 가운데 고려대장경만큼 체제가 광범위하고 부수가 완벽하며 교정이 또한 엄밀한 것은 그 보기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근대에 와서 만든 일본의 신수대장경은 그리하여 우리의 고려대장경을 모본(母本)으로 하여 편집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모든 이웃들에게 진리의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런 점에 비추어, 가장 풍부한 불전(佛典)의 원판을 소장하고 있는 해인사는 한국의 법보(法寶)사찰로서 온 세계 불교도의 성지가 될 것이다.
용어설명)
① 대장도감(大藏都監) : 고려시대에 대장경판을 새기기 위해 만든 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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