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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KBS1TV 인순이의 토크드라마 <그대가 꽃>에 출연한 고 구봉서. 아래 화면에서 흑백사진은 구봉서의 젊은 시절. 사진=KBS 방송화면 |
원로 코미디언 막둥이 구봉서가 27일 오전 노환으로 향년 90세 일기로 타계했다. 그와 함께 1세대 코미디 ‘트로이카’인 바보 배삼룡, 살살이 서영춘도 앞서 세상을 떠나면서 척박했던 한국 코미디를 개척하고 눈물서린 웃음을 전달한 진정한 광대들의 살아있는 모습을 앞으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구봉서의 별세를 통해 <비즈한국>은 구봉서, 서영춘, 배삼룡 세 사람의 족적을 짚어 본다.
구봉서는 한국 코미디 계의 대부로 꼽힌다. 구봉서는 1926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 서울로 이사와 대동상업고등학교와 일본 동양음악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이런 그에게 ‘딴따라’의 운명은 우연스럽게 찾아왔다.
그는 해방이후 ‘태평양가극단'에 들어가 악사로 활동하면서 어느 날 연극에서 배우의 대타로 출연하게 됐는데 대사보다는 애드립 위주로 관객들을 배꼽 잡게 만든 것. 당시 연출자들로부터 “왜. 대사대로 안했느냐”며 죽도록 기합을 받았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구봉서는 자신의 길을 찾았고 <애정파도>(1956)에 출연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연예계에 뛰어들었다.
일본의 원로 코미디언 기타노 타케시처럼 구봉서는 희극과 정극에서 괄목할 족적을 남겼다. 구봉서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수학여행>(1969)에선 발군의 정극 연기로 갈채를 받았다. 구봉서의 별명은 막둥이다. 영화 <오부자>(1958)에서 영·웅·호·걸 중 막내 ‘걸’ 역할을 맡으면서 부터다.
TV 시대가 개막된 1960년대 이후 구봉서는 TV로 활동 영역을 넓히며 MBC의 코미디 프로그램인 <웃으면 복이 와요>에 고정 출연하면서 배삼룡, 서영춘, 땅딸이 이기동 등과 시청자들을 웃기고 울렸다. 그는 앞서 언급한 무려 72자에 달하는 외우기도 힘든 “김 수한무….”라는 유행어를 창출했다. 유행어 유래는 한 코미디 단막극에서 9대 독자인 아들이 태어났는데 아들을 위해 지어준 이름이다. 오래 살라는 뜻에서 장수한 이들의 이름을 다 가져다 붙이다 보니 그토록 긴 이름이 됐다.
동네 사람이 아드님 “김 수한무….”다쳤다는 소식을 전하자 내 아들 “김 수한무…” 맞아요. 아드님 “김 수한무….”이러면서 폭소를 자아낸다.
▲ 영화 <형님먼저 아우먼저>(1980)에 함께 출연한 세 사람. 왼쪽부터 구봉서, 서영춘, 배삼룡. 사진=영화 장면 |
구봉서는 호남형 외모로 트로이카 중에서 유독 여성 팬들이 많았다. 그는 CF도 많이 찍었는데 지금도 회자되는 것으로 삼양보다 늦게 라면 사업에 뛰어든 농심의 라면 광고가 있다. 구봉서와 프라이보이(뻥이 심하다해 생긴 별명) 곽규석과 함께 출연해 CM송을 부르는데 “형님먼저 드시오 농심라면. 아우먼저 들게나 농심라면. 형님먼저 아우먼저, 형님먼저 아우먼저, 그럼 제가 먼저”라는 내용인데 상당히 웃긴다.
그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그가 종교에 귀의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부인의 간곡한 전도가 있었고 이러던 중 병을 앓다가 이끌리어 부인과 함께 교회를 찾았다. 교회 목사가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으로 연명했습니다”라고 설교했다. 그때 구봉서가 벌떡 일어나 “메뚜기에 석청. 고 단백질에 로열젤리만 자셨구만”이라고 말해 교회 안을 폭소의 도가니로 만들면서 부터 쭉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구봉서의 인생은 뒤에 언급할 배삼룡이나 서영춘에 비하면 실패나 굴곡 없는 코미디언다운 행복한 것이었다. 구봉서보다 두 살 아래인 서영춘은 50대 나이로 단명했고 배삼룡은 음료 '삼룡사와·삼룡율무' 등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실패하면서 말년까지 심한 부침을 겪었기 때문이다.
배삼룡은 배창순이란 본명으로 강원도 출신이다. 배삼룡은 전성기 시절 한국의 찰리 채플린이란 영광스런 별명으로도 불렸고 한국형 바보 코미디의 창시자다. 그에게서 비롯된 바보 코미디 계보는 1980년대 초중반 이주일, 1980년대 중후반 심형래, 1990년대 초반 맹구 이창훈, 2000년대 초반 심현섭으로 이어진다.
배삼룡의 TV 진출은 <웃으면 복이와요>였다.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동갑 구봉서와 명콤비를 이뤘다. 그가 췄던 ‘비실비실’춤과 바보 코미디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하지만 배삼룡의 후반부 인생은 불우했다. 앞서 언급한 ‘삼룡사와’사업을 벌였다가 사기를 당해 악덕 기업인으로 몰렸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귀국했으나 긴 공백기로 설 자리는 축소됐다.
그는 2000년대에 들어 또 사기를 당하면서 전 재산을 탕진하게 됐고 지병인 폐렴발병으로 장기간 투병생활을 하게 됐지만 치료비도 제대로 못냈다고 한다. 2010년 향년 85세를 일기로 굴곡진 생을 마감했다.
1928년생인 서영춘은 1960~1970년대 한국 코미디계 황제였다. 그의 건강 악화를 즈음해 코미디 황제 자리는 1980년 “얼굴이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로 혜성처럼 등장한 이주일이 넘겨받았다.
서영춘은 원래 극장 간판을 그리는 화공 출신이다. 우연한 기회에 대타 출연을 하게된 것을 계기로 MBC의 개국과 더불어 <웃으면 복이와요>로 큰 인기를 끌더니 1970년대 TBC 옮겨 <고전 유모어극장>을 통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서영춘의 코미 스타일은 천재적인 애드립과 특유의 슬랩스틱 코미디로 독보적인 것이었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1세대 코미디언 중 누가 최고였느냐고 물으면 서영춘이 가장 많이 꼽힌다.
그러나 서영춘은 사적으로 음주를 자주 하는 영향으로 간 건강이 나빠져 간암 발병으로 긴 시간 병마와 싸워야 했다. 결국 간암을 이기지 못하며 1986년 5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가 애주가가 된 데에는 긴장을 풀기 위해 술을 마신 후 공연에 임했는데 버릇이 되면서 중독 수준에 이르렀다.
구봉서는 한때 주당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서영춘은 원래 술을 잘 못마셨으나 주당 시절 구봉서는 서영춘을 억지로 술집으로 이끌고 가 술윽 먹였다고 한다. 이러던 구봉서는 교회를 다니면서부터 술을 끊었다. 구봉서는 말년의 서영춘의 음주습관을 말리려 했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구봉서가 서영춘의 건강을 걱정하며 술을 끊으라고 충고하자 서영춘은 “형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라고 대들었단다. 서영춘의 사후 바로 다음 날이 구봉서의 환갑이었는데 구봉서는 서영춘에게 너무나 죄스러운 마음을 가졌다고 토로했다.
구봉서의 별세로 제 1세대 코미디언들 중 생존자는 현재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89세의 송해만 남게 됐다.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은 힘들고 어려웠던 그 시절 온 국민에게 희망을 준 웃음의 ‘장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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